오랜 친구와 단 둘이 술자리를 가진 것만 해도 감회가 남다른데, 그 친구가 건넨 ‘50년 전인, 중학교 3학년 2반 봄 소풍 때 찍은 사진한 장은 정말 특별한 감회에 젖게 했다.

친구와 헤어진 뒤 집으로 걸어오면서 이런 특별한 감회를 한 번, 부담 없이 편하게 수필로 써 보자고 생각했다. 마냥 길게 쓸 수 있을 것 같아 수필로는 매우 드문 연재 형식까지 구상을 마쳤다. 문제는 실존하는 친구라서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친구한테 문자를 보내 이러이러한 수필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려는데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하였다. 친구가 쑥스럽지만괜찮다고 답장을 보냈다.

마음 편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생각 외의 일들과 잇달아 맞닥뜨렸다. 글에 등장하는 사람마다 자기 얘기를 제대로 써 주기를 바라던 것이다. 돌아가신 지 25년이 돼 가는 아버지부터 당신의 한 많은 사연을 남김없이 써 주기 바랐다. 돌아가신 지 13년이 돼 가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남편 잘못 만나 고생 많았던 삶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대변해 주기 바랐다. 문제의 봄 소풍 날 사진 또한 그냥 있지 않았다. ‘교복 상의의 단추들을 풀어 제치고 교모는 약간 삐딱하게 쓴 자네 모습이 언뜻 불량기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민이 많았다는 사실을 표현하라고 난리쳤다. J라는 친구 또한 자네와 학창시절 때 가장 친했고 그래서 둘만의 사연이 간단치 않은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지나갈 수 있냐?’고 항변했다.

마음 편하게 붓 가는 대로 한 번 길게 써 보자는 초심과 다르게 곳곳에서 맞닥뜨리는 사연들에그 사연들을 제대로 들어줄 수 없음에 무척 힘들어졌다. 연재를 10회까지 생각했지만, 주마간산처럼 5회로 마무리 지은 게 그 때문이다.

이번의 시도가 뜻대로 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실패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우선 수필과 소설의 차이를 확연하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수필이라 해도 등장하는 인물들의 프라이버시 문제로, 마음 편하게 쓰기 어려웠다. 이 점은 신변잡기 류()의 수필이 필연적으로 직면할 문제였다.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기회가 되면 이 수필의 얘기를 소설로 바꿔 써 보려한다. 소설로 완성한 뒤 수필과 비교해 보는 것 또한 아주 좋고 귀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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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았는데 친구는 법률구조공단에 취직한 뒤 결혼한 것이다.

나는 그 날 만난 서울 여자와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헤어졌고, 4년 뒤 고향 춘천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내게 배필 인연은 먼 데 있지 않았다. 나고 자란 고향에 있었다. 친구보다 결혼이 4년 늦었기에 내 첫 아이가 친구 첫 아이보다 네 살 어리게 되었다.

친구를 다시 만난 건 1992년이다. 내가 택지 분양권을 샀는데, 뒤늦게 분쟁의 소지가 많은 문서라는 사실을 알고는 법적 조언을 들으려 친구를 만난 것이다. 친구가 조언하는 대로 그 분양권을 판 노인을 다시 만나 계약서를 보완하고서야 가까스로 안심이 되었다.

분양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웃돈 받고 팔려 했지만 이미 부동산 경기가 식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하게 됐는데 그 때 아내가 말했다.

고민할 게 뭐 있어요? 이참에 우리도 집 지읍시다.”

맞는 말이었다. 택지 분양권을 샀으니 그 택지에 집을 지으면 될 일이었다. 내 평생 처음으로 집을 짓고 살게 된 연유는 그러했다. 1996818일 내 명패가 달린 단독주택에 입주했으니, 돌이켜보면 감격스러운 일이었는데 직장 일이 너무 고된 즈음이라 감격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다.

친구 역시 그 즈음에 이웃한 동네의 택지에 집을 지었다. 이웃해 살게 되면서 가끔씩 만날 만도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각자의 직장이 달랐던 탓도 있을 게고, 내성적인 성격들이라 먼저 연락을 하지 못한 까닭도 있지 않았을까.

 

어제 아침 불현 듯이러다가는 친구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살다가 이 세상을 뜰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친구가 반가운 목소리로 나를 맞았다. 풍물시장의 한 식당에서 오후 5시 반에 만나 저녁 겸 술 한 잔 하자는 약속이 됐다.

겨울이라 오후 5시를 넘자 금세 어둑해졌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나는 그 식당 부근에 서서 친구를 기다렸다. 혼자 식당에 앉아 있는 것처럼 사람이 궁상맞아 보이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30분이 되자 어둠 속에서 친구가 나타났다. 마치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나타나듯 말이다.

그 새 머리도 세어 있는 친구.

풍물시장은 공지천 가에 조성돼 있다. 1961년경 하꼬방 많던 공지천 가에서 아버지 곁에서 조우했던 어린애들이…… 주위에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이제는 그 옛날의 공지천 풍경을 찾아보기 힘든 풍물시장의 한 식당에 머리들이 허옇게 센 모습들로 마주앉았다. 술잔을 권하며 밀린 사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친구나 나나,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세상을 떴다.

얘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문득 자기 스마트 폰의 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춘천중학교 3학년 2반 봄 소풍 때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간단치 않은 감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언뜻 평화롭게 보이는 내 모습이지만 실상은 심적 갈등이 많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소설 쓰기를 전공으로 하지만 이 사진에 관한 얘기만은 마음 편하게,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수필로 쓰고 싶어졌다.

오늘 새벽, 컴퓨터를 켜 한글 화면을 띄운 뒤 글을 시작했다.

어제 오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왜 오랜이란 수식이 필요한지 이유부터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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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나는 춘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한 번도 같은 반에 있어 본 적이 없이 3년을 보내고 강원대학을 갔다.

강원대학에서는 과가 달랐다. 친구와 내가 학창시절 같은 반에서 공부한 것은 춘천중학교 시절밖에 없는 것이다. 강원대학을 다닐 때 나는 학업에 관심이 없었다. 문학회 회원들과 문학 얘기로 소일하기 일쑤였다. 정작 글 쓰는 일보다 문학 얘기로 세월을 보낸 것 같아, 후회막급이다. 저렴한 막걸리 집이 문학회 모임의 주된 장소였다.

전 날 마신 술이 덜 깬 채 캠퍼스를 다닐 때가 잦았다. 나는 그랬지만 친구는 도서관에서 지내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사범대로 이름이 바뀌는데 교육학부를 다니는 나와 다르게 친구는 법경학부였다. 70년대 초반의 강원대학 캠퍼스는 열악하기 그지없어서 하나뿐인 도서관이라는 게 몇 십 평밖에 안 될 단층 건물이 고작이었다. 그곳에서 늘 공부에 매진하는 학우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친구였다.

캠퍼스가 넓지 않아 친구와 나는 더러 마주치곤 했다. 도서관에서 밤샘 공부를 하는지 친구의 두 눈은 충혈돼 있을 때가 많았다. 우리는 말은 하지 않아도 소리 없이 웃으며 지나가곤 했다.

그 즈음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어머니가 며칠 만에 본 내게 친구와 친구 아버지를 거론하며 말했다.

얼마나 생활력이 좋은 부자(父子)인지, 글쎄, 속초에서 생선을 여러 상자 떼다가 중앙시장에서 팔고 있지 않더냐! 창피하게 생각지도 않고 시장 한복판에서 그러다니 정말 대단한 아버지와 아들이다. 그런데 우리 집은, 네 아버지는 먹고사는 일에는 관심 없고 체면만 차리니……내가 속이 탄다 타!”

 

이 얘기를 어제 친구한테 하자, 친구가 반쯤은 오해하셨다면서 해명해 주었다.

우리 아버지와 친한 분이 속초에 살고 계셔서 선물로 생선을 여러 상자 보내주신 거야. 요즈음은 동해바다 생선들이 씨가 말랐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 우리 식구가 그 많은 생선들을 다 먹을 수 없으니, 버릴 수도 없고 해서 아버지를 따라 중앙시장에 가서 팔아버리려 했던 거지. 결과를 말한다면, 한 상자도 못 팔았단다. 하하하.”

그 즈음 친구 아버지는 교육회에서 간사로 일했고, 우리 아버지는 예총 도지부장을 했다. 친구 아버지는 교육회에서 봉급을 받았으나 우리 아버지는 사실상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자리라 오히려 집안의 재산을 축내고야 말았다. 예를 들어 1968년인가, 할아버지한테서 상속받은 작은 야산을 헐하게 팔아버린 게 그 한 예다. 그 때 마련한 돈으로 아버지가 이룬 예총 사업이 의암호 가에 있는 펜촉 모양의 김유정 문인비 건립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세월이 흘렀다. 내가 친구와 재회한 것은 1979107일이다. 장소는 공지천 가에 선 어느 2층 건물의 1층에 있는 카페였다. 나는 그 즈음 동해안의 모 고등학교 총각 교사였는데 휴일을 맞아 어떤 처녀 선생을 만나려고 춘천으로 새벽같이 버스를 타고 온 것이다. 그녀와 나는 그 해 여름방학 때 강원대학교에서 강습을 한 달 간 같이 받으며 알게 됐고강습이 끝난 뒤 한 번 만나자고 약속했었다.

 

<처녀 총각이 만나는 일만큼 기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리 아들 녀석이 스물아홉 살 나이가 되자, 바쁜 시간을 내어 같은 직장 처녀를 만나고 하더니 마침내 올 봄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아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아비처럼 딱 스물아홉 나이에 부리나케 배필을 찾아나서는 데 아비는 놀랐다. 처녀 총각이 때가 되어 자기 짝을 찾아나서는 일이야말로 자연의 섭리이면서, 국가의 미래를 담보하는 대단한 장거가 아닐까. 지난 6·70년대에 산아제한 같은 모자란 정책을 편 탓에 머지않아 우리나라가 심각한 인구절벽 사태에 직면할 거라는 뉴스가 나오는 요즈음이다.>

 

그녀는 서울의 모 중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107일 낮 12시 공지천 가의 카페약속 만남을 위해 서울 청량리에서 경춘선 기차를 타고 내려오기로 전화 통화가 전 날 되었다.

12시가 되려면 아직 30분은 남았다. 그래도 초조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창밖의 공지천을 보다가, 출입문을 보다가 하는데 그 때 새 양복 차림의 친구가 출입문에 등장하는 게 아닌가. 친구는 나를 발견하곤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와 아주 고마워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사태를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친구가 그 날 같은 건물의 2(무슨 회관의 식장이었다.)에서 결혼식을 치르기 직전에 1층 카페에 잠시 내려왔다가 나와 조우한 것이다. 친구는 청첩도 못했는데 결혼식에 내가 알아서 와 준 거라 판단하고는 내 두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오해를 빚기도 한다.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어제 친구한테 ‘1979107, 공지천 가의 카페에서 벌어진 오해37년만에 해명하였다. 그리고는 함께 허허허 웃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어이없는 오해 사건마저 이제는 그리워진 게 아닐까?

친구가 결혼식을 올린 그 날은, 춘천의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피천득씨 수필인연의 마지막 대목대로였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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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중학교 1학년 때의 특수반 담임은 수학을 가르쳤다. 1·4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 와 자리 잡은 분이라 했다. 그분에게는 엉뚱한 면모가 있었다. 학교에서 체육대회가 벌어졌는데 그분이, 학생들의 응원 모습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는 스스로 나서서 응원 지도를 한 것이다. 키도 작고 짧게 이발하고 다니며, 게다가 어려운 수학을 가르치는 분이 갑자기 무용선생이라도 된 듯 온몸으로 현란한 응원동작을 보이다니…… 학생들은 놀라며 환호했다.

그 즈음, 단체로 그 먼 석사동의 교대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다. 무슨 경기를 응원하러 간 듯싶은데 정작 경기의 내용보다 내 명찰을 풀밭에 잃어버린 기억만 생생하다. 강원도 내 제일 가는 중학교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명찰 하나도 평범치 않았다. 플라스틱으로 된 직사각형 명찰이었다. 학년 전체가 줄을 맞추느라 움직이는 중에 내 상의 가슴에 단 그 명찰이 풀밭에 떨어졌는데 색이 녹색이어서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환갑이 넘은 지금도 나는 교대 캠퍼스만 보면 1964년 어느 날 그 풀밭에서 잃은 명찰을 떠올린다. 헝겊이 아닌 플라스틱이어서 분명 그 풀밭 어딘가에 남아 있을 텐데 하는 환상을 어쩌지 못한다. 만일 기적적으로 그 명찰을 몇 십 년 만에 되찾는다면 소설 한 편이 창작될 것이다.

 

2학년이 되면서 친구와 나는 각기 다른 반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일 년 뒤 다시 같은 반이 되었는데 그 반이 ‘3학년 2이다. 영어를 가르치는 여선생이 담임이었다.

친구가 어제 말했다.

지금도 3학년 2반 때 담임선생님을 가끔씩 뵈어.”

? 여태 살아계시단 말이야?”

그럼. 그런데 아주 많이 늙으셨어. 우리 아버님이 1·4 후퇴 때 피난 오셨는데 그 고향 분들의 모임이 있거든.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내가 그 모임을 나가는데 거기서 담임선생님을 뵙지. 내외가 함께 나오시는데 두 분 다 6·25 때 피난 온 분들인 거야. 나를 보면 아직도 기억하고 반가와 하신다니까.”

그것도 참!”

내가 감탄한 것은 두 가지 의미일 게다.‘이 좁은 춘천에 625동란 때 피난 와 사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중학교 3학년 2반 담임선생이 여태 제자(친구)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다. ‘이제는 많이 늙어 할머니가 되었다니!’하는 인생 무상함에 대한 탄식도 섞였을 게다.

1966년도 춘천중학교 3학년 2반은, 당시 그 수()가 극히 드문 여선생이 담임한 반이자, 특수반이었다.

 

<1학년 때에 이어 3학년 때도 특수반이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니까 이 수필을 읽는 이들한테 어떤 저항감을 줄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친구와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상대를 잊지 않고 어떤 유대감을 유지해온 상황을 설명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수필을 읽는 분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특수반이라 해도 학생들을 일학년 때처럼 성적 순으로 앉힌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학급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다만 여선생이라 그랬을까, 학생들이 괜히 말을 잘 듣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 해 봄 소풍날이었다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한 그 날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친구가 스마트폰에 담아온 것이다. 썩기 시작하는 고목 위에 셋이 서서 제 각기 포즈를 취했는데 친구만 단정한 교복 차림일 뿐 나와 또 다른 한 친구는 교복 상의 단추들을 풀어 제친 차림이다.

20171, 풍물시장의 어느 식당에 앉아서 60년 전 어느 봄날의 앳된 우리 모습을 목격하다니, 순간 갖가지 감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진 속의 나는 태평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광풍노도로 비유되는 격한 사춘기를 맞은 데다가, 하루하루가 어려운 가정환경 탓이었다. 아버지의 실직이 장기화되면서 집안의 분위기는 매우 어두웠었다. 그렇다. 내가 이 무렵부터 학교 공부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되면서 잡념이 많아졌는데 가정환경까지 열악하니, 자연히 공부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거다.

그런 심적 상황을 내재했으면서도 사진기 앞에서는 봄 소풍을 온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

결국 이 사진을 소재로 글 쓰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수필을 쓰게 된 까닭이다.

 

문득 그 소풍 날 있었던, 어떤 일이 선하게 떠올랐다J라는 친구가 벌인 사건이다. 요즈음과 달리 그 때는 사진기가 아주 귀했다. J가 사진기를 갖고 와 학급 사진을 찍겠다고 담임선생한테 말했다. 담임선생을 가운데 앉히고 반 학생들이 어렵게 기념사진포즈를 잡았다. 50명 되는 인원이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딴 데 가 있는 반 아이를 찾아오고 앞의 키 큰 놈은 좀 앉아 있어!’ 소리치고, 여 담임은 옷맵시를 다시 한 번 살피고…… 그렇게 공을 들인 후 J가 마침내 사진을 찍었다.

J는 나와 아주 친했다. 나중에 J가 나한테만 비밀을 털어놓았다.

필름도 없이 사진 찍었어. 장난 한 번 친 거지.”

J의 무모한 장난 또한 담임이 여선생이라 그랬을 것이다. 당시 3학년 2반 학생들 중에는 괜히 여 담임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골탕을 먹였으면 하는 애들이 있었다. 사춘기가 그 원인이라 나는 판단한다.

그 시절 내가 J와 어울리면서, 수업이 끝난 뒤 둘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벌인 못된 짓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로 작품으로 써 남길 것이다.

J하고는 친하게 어울렸으면서 정작 친구와는 소풍 날 함께 사진 한 장 찍은 것 이외에는 어울린 기억이 없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환갑 넘어서도 잊지 않고 안부를 전하고 시간을 내어 풍물시장 한 식당에서 술잔을 나누었다니 어찌된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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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반을 맡았다는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담임선생은 월말고사라든가 중간고사 등의 성적이 나오는 대로 석차 순으로 우리를 앉힘으로써 치열한 성적 경쟁을 유도했다. 그러니 우리 반 교실에 들어서면 누가 일등이고 누가 꼴찌인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잔인한 구조였다. 춘천 지역만 아니라 도내 각 지역의 초등학교에서 1,2등을 다투던 아이들인데 특수반이라는 초() 경쟁학급에 편성됨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비정상적인 학급 편성 또한 당시의 시대상과 연관이 돼 있었다. 1964년은 5·16이 난 지 3년밖에 안 되는 해로써 군사문화가 사회 곳곳에 자리 잡던 때였기 때문이다.

친구와 같은 특수반이었음에도 그리 친하게 지낸 기억이 없는 까닭은 그 때문이 아닐까? 친구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쉬는 시간 10분에도 시험공부를 했던 것 같다. 종이에 암기해야 할 국사 내용들을 깨알같이 적어 수시로 들여다보며 나름대로 월말고사나 중간고사를 대비했던 기억이다. 그 반의 구성원들은, 요즈음에 유행하는 말을 인용해서 표현한다면. 흙수저와 금수저가 반반씩 있었던 듯싶다. 아버지가 의사라든가 회사 사장이라든가 하는 잘사는 애들과, 아버지가 실직 상태인 못사는 집 애들이 반반쯤 되지 않았을까?

그 친구와 나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 즈음 우리 아버지들은 주로 다방에서 소일하다가 귀가하는 생활 모습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요즈음이야 다방이 사양업종이 돼 찾아보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시내 곳곳에 다방이 있었다. 다방마다 실업가가 아닌 실업자들이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었다. 물론 나는 어린 나이라서 다방이란 데를 출입할 자격이 못 됐지만, 어쩌다가 아버지를 급히 찾을 일이 생기면 그 다방이란 데를 찾아가야 했으므로 그런 풍경이 눈에 선한 것이다. 그 시절 춘천의 유명한 다방이 예맥이었다. 중앙로 로터리 부근에 있었는데 아마 80년대 들어와 사라진 듯싶다.

 

나는 부속국민학교를, 친구는 이웃한 봉의국민학교를 다녔다. 두 학교는 작은 야산을 가운데 두고 이웃해 있었지만 사이는 좋지 못했다. 부속국민학교는 잘사는 집 애들이 다니는데 봉의국민학교는 그렇지 못한 애들이 다닌다는 게 그 원인이었던 것 같다. 가끔씩 그 야산을 전장 터로 삼아 돌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부속국민학교에 입학할 때는 꽤 잘사는 집 아들이었지만 2학년 때부터는 집안이 망하면서 못사는 집 아들이 돼 있었다. 부속국민학교 어린이라면 하얀 방울이 달린 모자에 교복까지 입어야 했다. 나는 그런 모자와 교복 차림으로 등하교를 하고는 있었지만 아침에 멀건 죽 한 그릇밖에 못 먹은 탓에 늘 어지러웠다. 겉만 잘사는 집 아이처럼 보였을 뿐 실상은 배고파 쓰러지기 일 보 전의, 딱한 어린이였던 거다.

그래도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 금수저가 다닌다는 부속국민학교 어린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던 듯싶다.

더운 여름 어느 날 나를 데리고 공지천의 한 하꼬방 앞으로 갔을 때 분명 친구 아버지한테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

우리 아들은 부속국민학교를 다니는데 자네 아들은 어느 국민학교를 다니나?”

봉의국민학교를 다니지.”

아버지들 간에 그런 대화가 있지 않고서야, 몇 년 뒤 춘천중학교 같은 반에서 그 친구를 본 순간 쟤는 봉의국민학교 출신이지하는 인지가 내게 이뤄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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