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중반, 춘천은 인구가 10만도 안 됐다. 텔레비전 있는 집도 귀하던 그 시절, 나는 여름방학만 되면 동네 애들과 소양강에 가 헤엄치다 오는 게 일과였다. 아마 시내버스란 것도 없었을 것 같은데 만일 있었다 해도 차비 걱정에 탈 엄두를 못 냈을 게다. 우리 동네에서 소양강까지는 십여 리 산길, 동네 애들과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먼 산길을 단지 '헤엄 치고 싶어서' 걸어 다녔다.

그 날도 소양강 변까지 힘겹게 걸어간 뒤 모래밭에 옷들을 벗어놓고는, 강물로 시원하게 뛰어들었다. 우리가 헤엄치는 장소는 외진 곳으로 사실, 수영금지 구역이었다. 요즘이야 경찰서장 이름으로 수영금지 구역팻말이라도 세워놓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나마 안전하게 물놀이를 하려면 당국에서 관리하는, 소양강 다리 건너 물 얕은 강변까지 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땡볕에 몸이 지쳐있는 데다가 너무 멀었다.

동행하는 어른도 없이 아이들끼리 다니는 수영금지 구역이라, 언제고 한 번은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다. 강물이 회오리처럼 빙빙 도는 데도 있고 강바닥을 준설했는지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데도 있던 그 구역.

다른 날에는, 그런 위험한 데를 조심하며 헤엄들 치다가 강변으로 잘 나왔었는데 그 날은 그렇지 못했다. ‘동연이란 아이가 헤엄치는 방향을 잘못 잡았던지 수심이 깊은 데로 휘말리듯 들어가더니 얕은 데로 나오질 못하고 얼마 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놀라 강변으로 뛰쳐나와 우왕좌왕하는데 그 때 부근에서 낚시하던 웬 아저씨가 상황을 알아채고는 바지 입은 차림으로 강물에 뛰어들더니 동연이 모습이 사라진 쪽으로 급하게 헤엄쳐갔다. 평일 낮에도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모습으로 봐, 직업도 없이 소일하던 사람 같았다. 그 시절에는 무직자가 많았다.

그 아저씨가 깊은 강물 속에서 동연이를 찾아는 냈으나 이미 움직임 하나 없이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내가 난생처음으로 주검을 목격한 순간이다.

얘네 집이 어디냐? 앞장들 서라.”

우리는 옷들을 챙겨 입고는, 축 늘어진 동연이를 두 팔로 안은 아저씨의 앞장을 섰다. 다른 날 같았으면 헤엄치느라 기진한 몸으로 걸어가느라그것도 땡볕 아래 십여 리 산길을 다시 걸어가느라 몹시 고달팠을 텐데 그 날은 그런 느낌도 잊었다. 좁아서 한 줄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산길을 우리가 앞장서고 뒤로 한 어린애 주검을 두 팔로 안은 채 묵묵히 따라오던 그 아저씨.

우리가 나이가 어려서들 무심했는데 사실 얼마나 고맙고 대단한 어른이었던가. 우리와 일면식도 없었음에도 낚싯대도 팽개친 채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한 어린애의 주검을 수습해 그 먼 땡볕 아래 십여 리 산길을 동행해 주었으니.

동연이네 집 앞에 이르렀다. 대문이 없었다. 직감이었을까, 우리가동연이 어머니!’라고 부르자 뒤란에서 나타난 그녀는 신발도 흘린 맨발로 허겁지겁 뛰어나오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의 두 팔에 안긴, 축 늘어진 동연이의 모습에 그녀는 이미 넋이 반은 나간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외동아들을 순식간에 잃고 넋이 나간 모습으로 울부짖던 동연이 어머니 모습도 선하지만…… 낯모르는 아이의 사고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강물로 뛰어들던 그 아저씨 모습 또한 선하다. 어디 그뿐인가. 아이의 주검을 두 팔로 안고서 땡볕의 십여 리 산길을 걸어와 유족에게 전하기까지.

60년대 중반의 춘천은 모든 게 미비했다.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시내버스도 보기 힘들었고, 위험한 강가에서 수영금지 구역팻말 같은 건 더욱이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남의 일이라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아저씨 같은 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절의 춘천을 생각하면 한 아이의 익사 사건이 있었음에도 왠지 그리워진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여생을 살았을 동연이 어머니께 정말 너무 늦었지만, 애도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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