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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괴 ㅣ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이규원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7월
평점 :
과거엔 책에 몰입하면 역을 지나쳐도 모를 정도였는데
요즘은 책을 보는 것에서 피곤함을 느낀다.
그러다보니 서울에서 천안까지 기차를 타는 내내 스마트폰만 보는,
내 기준에서 볼 때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진다.
지난주, 제주도에 강의를 다녀온 적이 있다.
천안에서 서울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공항에 간 뒤
11시 비행기로 제주에 가서 두시간짜리 강의를 하고
다섯시 비행기로 다시 서울에 왔다가 거기서 다시 천안으로 내려오는 스케쥴이었는데,
그날 아침에 가방에 챙겨넣은 책이 다카기 아키미쓰의 <유괴>였다.
처음 보는 작가였지만 언제부터인가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이 된 블로거베스트셀러에 있기에 다른 책 여섯권과 더불어 질러버렸는데,
그 리스트는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당일치기 제주도 (그리고 그날 아침에 사실 아침마당도 출연했다!)라는 힘든 스케줄을
난 오로지 이 책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책인데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흥미를 유발시키는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러고보면 떨어진 체력을 이겨내는 방법은 보다 더 재미있는 책을 고르는 기술인 듯하다.
이 책은 유괴를 계획한 범인이 그보다 먼저 저질러진 유괴 사건의 재판과정을 보면서
“난 저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라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그 준비한 보람이 있게 거의 완전범죄 수준의 유괴를 저지르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모델이 된 유괴사건에 대해 읽다가 깜짝 놀랐다.
“가정부에게 현금 이백만엔을 들려서 오후 2시에 역으로 가게 하라.”(23쪽)
이백만엔이면 우리 돈으로 이천만원?
아니 힘들게 유괴를 해서 겨우 이백만엔? 그럴 거면 뭐하러 유괴를 하지?
황당하기로는 모방범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재산가의 아들을 유괴해 놓고선 요구하는 돈이 ‘삼천만엔’이다.
에게게, 겨우 3억?
아니 유괴범들이 이렇게 간이 작아서야 무슨 큰일을 하겠는가?
비밀은 책을 덮고서야 풀렸다.
“이 작품은 1961년 <호세키> 3월호부터 7월호까지 5회에 걸쳐 연재되었다.”(485쪽)
지금부터 50년 전쯤 쓰여진 소설이니, 이백만엔, 삼천만엔을 요구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고보니 범인은 휴대전화를 전혀 쓰지 않았고, 온라인 송금 이런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읽을 땐 그걸 이상하게 느끼지 못했는데
연도를 알고 나니까 모든 의문이 다 풀리는데,
오래 전에 쓰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은
이 책이 얼마나 잘 쓰인 작품인지를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책에 나오는 대목 중 감동적인 대목 하나.
이 책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변호사는 주식으로 돈을 잘 버는 아내를 두고 있다.
그 변호사가 돈이 되는 민사 대신 형사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내가 이렇게 말했단다.
“경제적으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평생 형사 변호를 전문으로 해 봐.”(375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하종강 선생을 떠올렸다.
하선생이 노동운동에 투신할까 말까를 고민할 때 그 아내분이 한 말,
“나는 특수학교 선생이 될 거니까, 너 먹여살리는 것은 걱정이 없어.
네가 적성에 안맞아서 그만둔다면 모를까, 돈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
덕분에 우리나라 노동계는 큰 친구를 얻었으니, 하선생 사모님께 감사할 일이다.
이건 순전히 자랑질이지만, 난 아내한테 가끔 이렇게 말한다.
“돈 쓸 일 있으면 걱정하지 마. 내가 가루가 되도록 일해서라도 돈 벌어올게.”
그러고보면 아내도 결혼을 참 잘 했고,
그건 외모에 연연하지 않고 날 선택해 준 고마운 판단력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