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세상을 바로보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 강준만인 것처럼, 나로 하여금 한국이 장애인을 엄청나게 차별하는 국가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 역시 강준만이다. 지금은 그와 견해가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긴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내 인생은 무가치한 것이었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지금도 그러하듯, 나 자신은 그걸 몰랐겠지만.

해마다 장애인의 날이면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난다. 일년에 딱 하루 실리는 그 기사로 인해 난 우리나라가 장애인에게 약속의 땅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며 살아왔다. 장애인들은 모두 어딘가에 숨어버린 탓에, 길거리를 아무리 다녀도 장애인을 볼 수 없는 그런 현실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난 <오아시스>를 보지 못했다. 극장에서도 그랬고, 케이블 TV에서 해줄 때도 문소리의 연기가 너무 리얼해 TV를 꺼버리고 말았다. 오늘 TV에 뇌성마비자들이 나왔을 때도,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들과 대면하는 게 미안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서워서, 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장애우들의 권익이 향상되어야 한다는 것이 신념으로 내면화된 지금도 그 무서움은 가시지 않았다.

지하철 역 휠체어 리프트에 누군가가 올라타면 "깊은 산속 옹달샘.."의 경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고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나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봤을 때, 내가 그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구경 났냐? 휠체어 처음 봐?" 장애인을 무슨 신기한 구경거리인 듯 보는 우리들, 그리고 그 촌스러운 음악, 내가 장애인이었으면 밖으로 나갈 용기를 냈을까 의문이다.

장애인이고 변호사를 하는 이성재 씨가 국회의원일 때가 있었다. 무슨 투표를 하러 갔을 때, 휠체어가 턱을 넘지 못하자 그대로 돌아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어도 상황은 그다지 개선된 것 같지 않고, 투표소가 2층에 마련되는 일은 없어지지 않는다. 혜화역에서 장애인 한명이 리프트에서 떨어져 죽은 뒤에야 엘리베이터가 생긴 것처럼, 누군가가 죽지 않으면 개선되는 속도는 지극히 더디다.

삼성이 루즈벨트를 내세운 장애인 광고를 한 적이 있다. 따뜻하기만 한 광고와는 달리, 삼성은 그룹 전체에 단 한사람의 장애인도 고용하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랐었다. 기준치에 미달되는 장애인을 고용하고 있으면 한명당 30만원 정도의 분담금을 매월 낸다는데, 삼성은 기꺼이 그 돈을 내고 있다. 기준치를 못채우는 건 해당부처인 보건복지부도 마찬가지라니, 누가 누굴 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은 장애인의 날이다. 그 날이 있음으로 해서 그날 하루는 장애인이 편히 지낼 수 있다. 장애인을 초청해 이벤트도 하고, 훈장도 주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머지 364일은? 장애인의 날을 제정함으로써 그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양심의 거리낌 없이 장애인을 차별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의 장애인 시설은 '격리'인 것 같다. 그나마 있을 곳을 찾기도 힘들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선다고 하면 다들 거품을 물고 반대를 한다. 일상 생활에서 장애인을 만날 수가 없으니, 어쩌다 만나는 장애인은 무섭기만 하다. 클론의 강원래야 예외겠지만 말이다. 제대로 된 장애인 정책은 '격리'보다는 '공존'이 아닐까? 장애인들이 우리와 더불어 별 불편 없이 살 수 있는 사회, 그래서 나같은 사람이 장애인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사회가 아닐까? 장애인에게 잔인하기만 한 우리 사회를 보면서, 못생기기는 했지만 장애가 없는 것에 감사할 때가 난 굉장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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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4-2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자신이 노력해서 바꿀 수 없는 걸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에 비해 실천은 아직 미비합니다. 마태우스님 글 보면서.. 또 반성을 합니다...

플라시보 2004-04-2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날이 날이니 만큼 저도 생각이 많아집니다. 저도 예전에는 길을 가다 장애를 가진 분들을 많이 보지 못해서 우리나라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나보다 했었는데 알고보니 그들이 문턱을 나서지 못하도록 세상이 생겨먹은 거더라구요. 조금 더 우리가 그들을 보는 시선이 평범해져서 더이상 장애를 지닌 아기들이 파란눈의 부모를 만나는 일도 줄어들면 좋겠습니다만. 나 부터도 아기를 입양할 생각은 있지만 장애를 가진 아기를 입양할 자신이 전혀 없으니... 깝깝합니다. 휴~

물만두 2004-04-20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태어날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선입견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도 장애인이 훨씬 많고 많아 지는 상황에서 이건 절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내 일이고 내 가족의 일이고 내 친구, 내 이웃의 일입니다. 외친다고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작은 것부터 차츰 고쳐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장애인이 살기 편한 나라에서는 누구나 살기 편하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깨달았으면 합니다...

비로그인 2004-04-20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장애인의 날이죠. 전에 한 번, 버스를 못 타 안절부절 못 하는 장애 여성의 손을 잡아 버스 타시는 걸 도와드리기까지....얼마나 망설여지고 힘겹던지요..
다 함께 사는 세상이거늘.......섣부른 도움이나 동정보단 장애우들이 우리와 함께 사는 이웃이라는 것만이라도 늘 잊지 않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코코죠 2004-04-2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내 오른쪽에 서는 친구가 있습니다. 잠을 잘 때에도 항상 오른쪽, 길을 걸을 때도 항상 내 오른쪽에 섰어요. 어느 날 문득 궁금해져 물어봤더니, 그 녀석은 왼쪽 귀만 들린다고 하더라구요. 어릴 적에 심하게 아팠던 뒤로 한쪽 귀를 못쓰게 되었다고요. 그 녀석은 그냥 항상 제 오른쪽을 지켜주는 녀석이지, 장애인인 아닙니다.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들은 그냥 대한민국 '일반인' 이지, 우주에서 뚝 떨어진 '장애인'이 아니라고...

갈대 2004-04-20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근무하는 곳이 사회복지과인지라 장애인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밖에서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의 상태가 괜찮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자꾸 보다보니 이제는 별로 신경쓰지 않게 되더군요. 잦은 만남이야말로 궁극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장애인의 날 행사가 있는데(하루 늦게 합니다) 간만에 일 좀 해야겠네요^^

다연엉가 2004-04-20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 장애인이 배려보다는 고려를 생각하라는 문구가 떠오릅니다. 알라딘에서 장애우에 대한 책을 읽고 리뷰를 올려 거금을 받았기에(????) 더욱더 그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이곳 도서관에도 얼마전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트를 설치했지만 그것도 다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오늘 들더군요.. 도서관으로 올라오는 길이 너무 오르막이더군요. 누구의 손길이 없고는 이 도서관조차 이용하기가 힘든 그들... 이젠 배려가 아닌 고려입니다... 항상 ....

다이죠-브 2004-04-20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들 많이 올려주시길 바랄게요.

진/우맘 2004-04-21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________^
 

 

 

 

 

 

'가짜대학생 알고보니 큰도둑'
메트로를 보니 대학교를 무대로 지갑 등을 훔쳐온 가짜대학생이 붙잡혔단다. 그는 3년 6개월 동안 무려 20여개 대학에서 3억원 이상의 금품을 털었다는데, 그렇다면 연수입이 7,8천만원 수준, 마음은 불편했어도 경제적으로는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을 듯 싶다. 그의 말이다. "대학 졸업 후에도 취직이 잘 안됐고 생활비가 필요해 계속 절도를 하게 됐다" 가난은 이처럼 평범한 젊은이를 도둑으로 만든다.

내가 처음으로 도둑을 만난 것은 초등학교 때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백설공주 시계를 비롯해 돈이 자꾸 없어졌는데, 범인은 알고보니 우리집에 자주 드나들던 남동생 친구였다. 그때 알았다. 도둑이 무섭게 생긴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보는 이웃일 수 있다는 것을.

고교 1학년 때, 내가 다니던 독서실에는 도둑이 창궐했다. 잠깐 화장실만 다녀오면 돈이 싸그리 없어졌다. 한번은 하도 화가 나서 동전지갑에 2천원 쯤을 넣어두고 가방 깊숙히 숨겨둔 뒤 "이것도 한번 가져가 보시지!"라는 쪽지를 같이 넣었는데, 화장실에 다녀와보니 쪽지만 있다. 주위에서 공부를 하던 모든 사람이 다 의심이 갔다. 결국 난 보따리를 싸서 다른 독서실로 옮겼다.

대학에 다닐 때, 수술장 실습을 했다. 옷을 갈아입고 라커에 넣어 두었는데, 나와보니 주머니에 있던 돈 7천원이 몽땅 없어졌다. 나는 양호한 편이고 다른 친구는 책값 몇만원을 잃어버렸고, 또다른 친구도 몇만원을... 역시나 세상은 못믿을 존재였다. 우리 학교에 놀러왔던 친구 하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찾는 동안 아파트 관리비 17만원이 든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그녀는 내게 "장난치지 말고 빨리 줘!"라고 거듭 말을 해 날 안타깝게 했다. 이것 외에 도서관 가방보관함에 있던 가방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일은 그리 드문 게 아니었다.

조교 때 경험한 도둑도 기억이 난다. 키도 크고 미인이었던 도둑이 실습실 실장에 의해 잡혔다. 그녀는 본과 1학년 행세를 하면서 각종 물건들을 챙겼고, 라커에 훔친 물건들을 넣어놓고, 옷도 비치해 뒀다가 갈아입는 등 1년이 넘도록 도둑질을 했다. 그녀가 잡힌 이유는 훔친 옷을 입고 실습실 근처에서 얼쩡거린 때문. 가디건을 도둑맞고 속이 상했던 실습실 실장은 그와 똑같은 가디건을 사서 입고 다녔는데, 그 가디건을 입은 그녀를 본 것. 붙잡아다 문초를 했다. 도둑은 계속 자기는 본과 1학년생이고, 다음 수업은 생리학이니 뭐니 하면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그 사건은 신문의 휴지통 란에 조그맣게 보도된 바 있다. 그녀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할까? 미모를 내세워 더 큰 도둑이 되었을까, 아니면 평범한 일상을 걷고 있을까.

꼭 거액의 금품을 훔쳐야 도둑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비가 오는 날 남이 들고온 우산을 가지고 집에 간 사람도 도둑일 수 있고, 피부과 시험을 보는데 피부과 책을 훔쳐간 학우도-그 책은 시험이 끝나고 돌아왔다고 한다-본인은 잊었겠지만 도둑일 것이다. 나 또한 도둑질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초등학교 때 전자오락에 빠져 엄마 돈 몇백원을 훔친 적이 있고, 기름 넣으라고 준 돈을 삥땅하거나, 책 사라고 준 돈을 남겨먹는 등 숱한 도둑질을 저질렀다. 앞에서 언급한 도둑이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생계형 도둑이었던 데 반해, 나의 도둑질은 순전 유흥과 향락을 위해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나쁜 짓이다.

앞으로는, 착하게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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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 2004-04-20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말씀 들으니 저도 도둑이였네요.
책산다고 돈 받아서 다른데 써버리고 그랬는데...앞으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플라시보 2004-04-2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날 저녁 삼겹살을 먹으러 갔었는데 나오고 나니 우산이 없어졌더군요. 비는 오는데 우산은 없고 어쩔줄 몰라하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우산을 하나 주셔서 그걸 쓰고 나왔습니다. 우리 일행은 창가에 앉아서 삼겹살을 먹었는데 그때 딱 하고 내가 범인이 내 우산을 쓰고 나가는걸 봤다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상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단 두두두 뛰어나가서 '저기요' 하고 부른다음 '왜 남의 우산 쓰고 가시는거죠?' 하고는 날카롭게 째려본다. 그럼 그 사람 혹은 사람들은 당황한나머지 우산을 팽겨치고 뛰어가다 마주오는 차에그만...)

비로그인 2004-04-20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친구들이랑 자취방에서 놀다가 잠들었는데, 중간에 눈을 떴는데 시커먼 그림자가!! 도둑이 들어와서 제 옆에 놓인 지갑을 훔쳐가는데, 괜히 소리쳤다가 더 큰일 당할까봐 무서워서 꼼짝도 못했답니다. T^T 잔뜩 얼어있다가, 그 도둑이 간담에 눈물 줄줄 흘렸다는. 그날따라 새 지갑에, 교통카드는 몇만원이나 충전했는데 말이죠...돈은 별로 없었는데, 지갑은 두고 가지. 흑흑..

soulkitchen 2004-04-2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저희 가게에 들러 클래식 씨디 400여 장을 몽조리 챙겨 갔다는 그 도둑이 글쎄, 포항의 레코드 가게 두 군데도 털었댑니다. 뭐하는 물건인지 그곳에서도 클래식 씨디만 챙겨 갔다네요. 나원..근데 그 중 한 곳에는 똥까지 눠놓고 나왔답니다. 물건 도둑 맞은 것만으로도 기절할 노릇인데..똥이라니!! 울 가게선 물건만 조용히 가져가줘서 고맙기까지 하더라니까요!!

비로그인 2004-04-20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물어보려고 했는데, 시상으나..똥까지 누웠다니! 그놈 똥꼬에 콱 똥침을 놔야하는데, 쩝! 저희집도 제 방에 도둑한 번 들고나서 방범창 해대고 현관문에 걸쇠 하나 더 달고 난리를 피우다..지금은 거실 창문 활짝활짝 열어놓고 잔다니깐요. 언제 또 일 한 번 터지지...

비로그인 2004-04-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요 시누가 착불로다가 한약 보낸다고 해서 비디오위에 올려놨다가 도둑놈이 다른건 다 두고 4천원만 낼름 훔쳐갔습니다. 도둑보다 시누가 더 밉다니까요. 한약값은 한약값대로 받고 착불이냐?? 말입니다. 중요한건 아직까지 한약이 안왔다는거 아닙니까!! 참고로 똥은 안쌌습디다.

마태우스 2004-04-20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키님/똥가지 눴다니, 그는 제가 아는 가장 나쁜 도둑입니다. 논문을 몇줄 써서 기분이 좋던 판에, 갑자기 화가 나려고 하는군요.
복돌님/님의 방에 도둑이 들었다니, 큰일날 뻔했네요.
앤티크님/연약하신 님의 자취방에 도둑이 들었다니, 정말 정말 큰일날 뻔했네요!! 나쁜 놈 같으니!!!! <--흥분지수 10점 만점에 9.8
폭스바겐님/으음...시누 분하고 원만히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집안일은 집안에서. 하핫.

마태우스 2004-04-20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너님/저도 뭐 말만 그렇지요. 한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 전 계속 그렇게 살거에요!
플라시보님/그가 서울로 튀었을 수도 있으니, 다니면서 유심히 보겠습니다. 우산의 인상착의는 그때 봤으니까...
 

 

 

 

 

 

1) 빨래
-난 빨래를 한번도 해보지 않고 살았다. 처음으로 빨래를 한 것이 군대에 갔을 때 양말을 빨았을 때다. 어떻게 빠는줄 몰라 옆의 애가 하는 걸 따라했다. 아주 대충 빨고 난 뒤 내무반에 있는 빨래줄에 걸었더니, 당연한 얘기지만 물이 주르르 떨어진다. 그의 말이다.
그: 너 이거 안짰냐?
나: 짜야...되니?
어이없어 하는 그, "너 무슨 왕자였니?"

-아버님 간병 때문에 어머님이 병원에서 숙식을 하셨을 때, 난 다시금 빨래를 해야 했다. 세탁기를 쓸 줄 몰라서 잠시 고민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스타트'만 누르면 된단다. 그래서...어렵지 않게 빨래를 했다. 문제는 다림질이었다. 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너무 귀찮았다. 고민하고 있는데, 내 처지를 불쌍히 여긴 어머님이 파출부 아주머니를 구해 주셨다. 그 뒤부터 난 한번도 빨래를 한 적이 없다. 양말 두짝을 한데 합쳐서 빨래통에 던져주고, 옷을 뒤집어 벗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한다는 느낌.

2) 밥
-평생 밥을 잘 얻어먹었지만, 어머님이 병원에 가셨을 때는 할수없이 내가 밥을 해야 했다. 밥은 물만 잘 맞추면 별 문제가 없다. 초등학교 실과 시간에 쌀의 1.2배만큼 물을 넣는다는 게 기억이 나, 대충 부었더니 밥이 아주 잘 된다. 문제는 반찬. 아는 여자애한테 전화를 해서 김치찌개 만드는 법을 배웠다. 돼지고기를 사다가 썰고, 볶고, 김치를 넣고...이렇게 했더니 너무 맛있어서 기절할 뻔했다. 맨날 찌개만 먹기 뭐해서 슈퍼에 갔더니, 나같은 놈을 위해 일회용 음식이 엄청나게 많은거다. 3분카레, 된장국, 쏘세지...잔뜩 사가지고 집에 왔는데, 어머님 요청으로 온 파출부 아주머니가 일주에 한번씩 반찬을 해주신 뒤부터는 손에 물 안묻히고 살았다. 물론 지금은 어머님이 아주 잘 차려 주시며, 도시락까지 싸주셔서 잘 먹고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라면을 잘 끓인다. 어머님이 안계실 때마다 난 라면을 끓여서 찬밥을 말아먹는다. 그런데 플라시보님이 올려주신 김치볶음밥 매뉴얼을 보니 예상외로 쉽다. 다음에는 라면 대신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내가 좋아하는 햄을 잔뜩 넣어서.

3) 청소
-내가 가장 하기 싫은 것은 이불 개는 거다. 어려서부터 그랬고, 지금도 난 이불을 그래도 펴놓고 나간 뒤 잘 때 쏙 들어가서 잔다. 도대체 이불을 개야 할 필요가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청소는 더더욱 싫다. 빗자루로 쓰는 거나, 걸레질하는 거, 둘다 싫어한다. 내가 원래 더러운 환경에서 잘 버티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깨끗하기 그지없는데 왜 청소를 하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매달 1일날은 청소하는 날이었다. 그때 동원되어 청소를 하는 게 얼마나 싫었는지 모른다. 교실 청소가 하기 싫어 반장, 혹은 부반장이 되고 싶었지만, 한번도 되지 못했다.

4) 간병
-아버님은 3년간 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그 기간 동안 어머님은 병원에서 숙식을 하시면서 그 힘든 간병을 해내셨다. 한번은 어머님이 허리가 너무 아프셔서, 내가 밤을 새운 적이 있다. 난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한 채 아버님의 시중을 들었다. 어머님이 이렇게 힘든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그 뒤로도 내가 아버님 병실에서 잔 적은 거의 없다. 작년에 검사 때문에 잠깐 입원했을 때, 아들이 어머님을 가라고 한 뒤 간병을 하는 걸 봤다. 부끄러웠다.
-아프다고 하시는 아버님의 다리를 몇시간째 주무르는 와중에, 어머님이 깜빡 졸다가 침대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때 아버님이 "그렇게 졸 거면 주무르질 말던가!"라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 아버님을 미워했다.
-석고로 온몸을 감싼 아버님, 답답하셨는지 몸부림을 치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엄마와 간호사 둘이서 올리기가 너무 힘들어 인턴을 불렀다. 자다 일어난 인턴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걸 왜 날 시켜! 수위나 부르지..." 그때 의사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때가 참 힘든 시기였구나, 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내 삶은 왜이리 괴로운 걸까, 김일성은 뭐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만 넘기면, 대개의 일들은 추억 속에서 미화되어, "그때 안죽기 잘했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삶이란, 그러면서 사는 거다. 그걸 알아서 그런지, 지금의 삶은 너무 즐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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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4-1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곱게 자란 왕자님이셨네요....^^
양말을 짜지도 않고 빨랫줄에......^^

다이죠-브 2004-04-1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그게 말이죠. 이불속에 진드기랑 세균이 얼마나 많은데요? 기생충학 전공한 것 맞나요? 좀 안어울리는 말씀을 하시네요. 걔네들 현미경으로 한번 들여다 보세요. 특히 님이 덮으시는 이불속은 장난이 아니겠군요.--; 갑자기 몸이 근질근질.읔... 저는 그래서 햇볕나지 않는 날이 싫잖아요. 이불을 햇볕에 널리고 몽둥이로 좀 두들겨 패줘야지 걔네들이 죽거든요. 그럼^^

다연엉가 2004-04-1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비로그인 2004-04-19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나라에 잘 있는 김일성은 왜??

비로그인 2004-04-1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자로 자라신게 맞군요!! 살기위해서 간단한 것들은 마스터하게 되던데~ ^^ 저두 예전엔 이불개는게 귀찮아서 침대를 선호했죠. 청소는 닦는것 보단 쓰는게 더 좋구요. 전 부모님 간병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 효자효녀란 생각을 합니다. 엄마 아프셨을때, 제가 병원분위기를 못견뎌해서...생각날때마다 정말 죄송하죠...

이파리 2004-04-19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왕자!'지요. 제 남동생도 전혀~ 예외가 아니랍니다.
마태우스님... 장가가려면, 분발하셔야 겠어요.(물론 제 남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할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몇 번 자 봤는데... 2인실이었어두 불편하더군요. 잘 모르는 사람과 같은 방에 있다는 것이. 침대는 또 얼마나 배기는지...(저도 약간... 아니 많이 공주병을 앓고 있는지라...) 간병을 하면서, '난 아프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우앴든... 마태우스님... 장가가려면 분발! 또 분발하세요. 김치볶음밥 가지고는 안됩니닷!

LAYLA 2004-04-19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 시기만 지나고 나면 다 추억으로 남게 되는거...^^
많이 아프고 슬프고 괴로웠어도 지금이 즐거우면 장땡이죠 ㅎ

메시지 2004-04-20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일성은 뭐하나 라는 구절에 동감합니다. 전 시험전날 빌었던 소원이 있었습니다. 학교에 불나는 것. 시험지 도둑맞는 것. 등등...

마태우스 2004-04-20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바겐님/그러니까 김일성이 쳐들어왔음 좋겠다는 거죠...
메시지님/호호호. 진짜 쳐들어왔으면 큰일날 뻔 했지요...
프롬님/왕자가 저 말고 또 있었다니!! 저 그냥 분발 안하고 이렇게 살면 안될까요?^^

플라시보 2004-04-20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자 적어보겠습니다.
1)빨래 : 대학교 다닐때 집을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세탁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할때까지 손빨래를 하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빨래는 자신있습니다. (이불빼고)
2)밥 : 역시 대학때 나와 살면서 부터 지금까지 줄곧 해 먹고 있습니다. 잘 하진 못하지만 굶어죽지 않고 잘 살아가는 것으로 봐서 그리 못하지도 않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뭣보다 요리하는게 재밌습니다. 만들어다가 넘들 먹이는 것도 좋아하구요. 밖에서 식사하자고 하면 아주 친한 친구일 경우 집에 불러다 해먹입니다. 대부분은 만족하더군요. (그냥 정식. 스파게티. 돈까스. 떡볶이와 만두. 김치필라프. 냉면. 쫄면. 수제비등을 주로 해줍니다.)
3)청소 : 역시 대학이후 줄곳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직업이 3개였을때 너무 바빠서 당시 학생이던 여동생이 이틀이나 삼일에 한번씩 들러 청소를 해 줬었습니만 (돈 주는 조건으로^^) 요즘은 그냥 제가 합니다.(한가해서리..) 욕실청소만 빼면 청소하는거 별로 안싫어합니다.
4) 간병 : 아직 한번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집안에서 아직 입원한 사람이 없어서요.

마태우스 2004-04-2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저는 검은비님께 감사를... 그 옷이 번개에서 저를 빛나게 해줬답니다.
책읽는나무님, 앤티크님/제가 왕자인 걸 아셨으니, 앞으로 잘 하시길!!!^^
플라시보님/모든 분야에서 님이 우월하시군요. 특히 청소를 안싫어하신다니, 여기서 우리가 갈라지는군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에게 빚을 졌지만, 그중 가장 신세를 진 건 내 몸이다. 기관별로 한번 살펴본다.

1) 소화기계: 가장 신세를 많이 진 기관이다. 난 무지하게 많이 먹어대며, 그만큼을 밖으로 배출한다. 나의 왕성한 소화력에는 다들 놀라곤 하는데, 변비환자의 고통을 아는 나로서는 아직까지 변비에 걸려본 적이 없다는 것을 고마워해야 할 듯 싶다. 더더욱 고마워해야 할 것은 그렇게 술을 먹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탈이 나본 적이 없다는 것. 소화기의 일부인 간에 지방이 좀 끼긴 했지만, 내 소화기는 거의 매일같이 쏟아지는 알콜을 열심히 분해, 흡수, 배출해 줬다. 내가 지금까지 버티는 일등 공신이다. A+.

2) 호흡기계: 이렇다할 호흡기 질병을 앓은 적이 없으니, 기본은 했다. 하지만 고2 때부터 시작된 알레르기성 비염은 나로 하여금 많은 골치를 썩게 만들었다. 환자는 매우 괴롭고, 그러면서도 완치가 불가능한 무서운 질병, 알레르기성 비염. 이게 한창 심하던 80년대 후반엔 다시 떠올리고싶지 않을 정도로 시달렸었다. 그 덕분에 내 코는 호흡기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오직 미적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며 (미적 기능이란 코가 이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코가 없었으면 아무도 나랑 놀아주지 않았을 거란 소리다) 치과에서 스켈링을 할 때처럼 코로 숨을 쉬어야 하는 상황을 힘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비염 때문에 나의 코고는 소리는 상상을 초월해, 작년 말 잠깐 입원을 했을 때 환자들을 꼴딱 밤을 새우게 만들었다. B-

3) 중추신경계: 이런 말을 하면 믿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내 머리는 매우 나쁜 편이다. 아이큐도 낮고, 학교 다닐 때 같은 것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공부해야 겨우 남들 수준을 따라갈 정도였다. 이해력이 영 떨어져 모든 것을 통째로 암기했다. 수학도 그랬고, 영어도 그랬다. 하도 그랬더니 나중에는 수학 문제를 보면 저절로 답이 보일 정도가 되었었는데, 대입 시험을 볼 때 수학에서 궤도를 벗어난 문제가 많이 나와 완전히 망쳤다. 우리 과에 들어온 애들 중 나만큼 수학을 못본 사람은 한명도 없을 정도. 암기를 잘 했으니 머리가 그렇게까지 나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길눈이 어두운 것, 사람들 얼굴을 기억 못하는 것 등을 보면 확실히 평균 이하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그래도 쟤 xx대 나왔데"이니, 대학이라도 잘 못갔으면 큰일날 뻔했다. B-
* 내가 어설프게나마 유머를 구사하는 걸 보고 머리가 좋다고 생각할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나만큼 노력했는데 지금처럼 밖에 못웃긴다는 것이야말로 머리가 나쁘다는 증거다. 웃긴 애들이 하는 말을 받아적고, 단무지에 비듬을 털어먹을 정도로 난 웃기기 위해서라면 뭔 짓이든 했었다.

4) 비뇨생식기
어릴 적, 화장실에 적응을 잘 못해서 소변을 참는 게 생활화되었다. 그래서 난 몇시간이고 거뜬히 소변을 참는다. 나중에 알고보니 소변 참는 건 결코 자랑이 아니며, 심각한 질병을 초래할 수 있는 해로운 짓이었다. 그래도 뭐, 별 탈 없이 지금까지 견뎌 줬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비뇨 쪽은 그렇지만, 생식 쪽은....하핫. 뭐 그다지 경험이... 참고로 남들은 날보고 "그동안 참았으니 걸리는 사람은 죽음이겠다"고 한다는... C+

5) 피부
건선이라는 질병이 있다. 주변에 걸린 사람이 몇 있는데, 무지하게 안되어 보인다. 내 매제는 아토피라, 계절만 바뀌면 이마가 뻘겋게 된다. 역시 동정심을 유발한다. 작년에 만난 환자 한명은 모기에 물리면 살이 썩어들어가는 희한한 질환에 걸려 있었다(바이러스 감염으로 면역체계가 이상하게 되었다는 설이...). 백옥같은 피부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별 이상 없이 버텨 주어 고맙다. B+

평군을 내니까 4.3 만점에 3.06, 3점을 넘었으니 그런대로 우수한 몸이다. 지금까지 너무 몸을 혹사했으니, 이제부터는 좀 쉬게 해줘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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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1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첫 코멘트는 자제하려고 했건만, 너무 웃깁니다요~ >ㅂ< 비뇨생식기 파트에선 발그레...*^^* 그런데 평점, 너무 엄살 피우신거 아녜요~ 더 나올것도 같은데. ^^ 네, 앞으론 좀 쉬어가며 더 열심히 관리해주세요~~

▶◀소굼 2004-04-1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제 몸뚱아리에 점수를 주자니 미안해집니다; 태생이 그런 것도 있지만 관리자 측면에서도-_-;;스스로 너무 깎아 먹었어요-. -

마태우스 2004-04-1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모를 안집어 넣었군요. "아니 이렇게 생길수가"라는 평을 듣는 제 얼굴을 넣었으면 2점대로 떨어질 뻔....
앤티크님/제가 좀 박하게 줬나요? 사실 소화기는 5학점 짜린데...
salt님/아, 네.....

*^^*에너 2004-04-1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ㅋㅋ

플라시보 2004-04-2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추신경계는 저와 아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십니다. 다만 저는 아무것도 통째로 외우지 않았고 따라서 수학 문제를 보면 답이 절로 보일지경이 되어 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즉 님과 저는 비슷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님은 노력을 좀 하셨고 전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지요. 흐흐.길눈 어두운거 사람 잘 못알아보는 것도 똑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나니 님이 친근하게 여겨집니다. (동병상련이라고...)

마태우스 2004-04-20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그 소문은 저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조직적으로 퍼뜨린 음모입니다!!!!
에너님/감동하신 듯...맞나요?
플라시보님/호호호, 저도 비슷한 분을 뵈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범죄의 재구성> 포스터를 봤을 때, 영화를 보고픈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자카르타> 비슷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영화의 질을 담보해줄 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박신양이 있긴 하지만, 그는 벌써 몇 번의 실패로 내 신임을 잃은 터, 이문식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조연에 불과했다. 염정아? 그사람 영화 중 내가 감명깊게 본 게 뭐가 있더라?

하지만 딴지일보에서 영화평을 쓰는 사람으로부터 "졸라 재밌다"는 말을 들은 뒤, 상황은 급변했다. 그 영화는 꼭 봐야하는 영화가 되었고,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쓴 영화평도 의도적으로 피했다. 보고난 결론이다. "안봤으면 큰일날 뻔했다!"

영화의 분위기는 완전히 <오션스 일레븐>이었다. <오션스..>에서처럼 범행의 준비가 치밀하고 계획이 천재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면 꽤 잘만든 범죄영화 아닌가? 결말도 나름대로 상큼했던 것 같다. 물론 박신양보다는 브래드 피트가 더 멋지고, 김선생보다는 조지 클루니가 더 느끼하다. 이것도..사대주의의 일종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화는 차량 추격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차 여러대가 작살이 난다. 그걸 보면서 느낀 점, "와, 우리 영화도 저런 게 가능하구나..." 옛날에 <투캅스>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때 그랜져 한 대가 부숴졌는데, 그걸 위해 중고 그랜져를 샀다는-아닌가? 영화 관계자 차를 빌렸던가?-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헐리우드에서는 쓸데없이 차를 부수는데... 하면서 말이다. 정말 한국영화 많이 좋아졌다. 옛날에야 한편에 십억 들이면 고액이었지만, 요즘은 백억짜리 영화도 나오지 않는가? 100억이면 천만불에 가까우니, 웬만한 헐리웃 영화의 5분의 1까지 육박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판에 종사해본 사람은 그 마당이 복마전이고, 수익의 분배가 매우 비상식적이라고 하지만, 외형적으로만 그렇단 얘기다.

인상적이었던 이문식의 대사.
"카프카를 알아? 그게 부조리야. 내가 제비랑 친해요. 그런데 집은 몰라!"
부끄럽지만 아직 카프카를 읽지 않았다. 어렵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는데, 그걸 깨려고 몇 달 전에 샀다 (짝짝짝!). 그런데...역시 아직 읽지 않았다. 내공을 좀 쌓고 읽자는 생각 때문에. 지금 밀린 거 두 개만 읽으면 곧바로 읽어야겠다. 카프카가 부조리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고. 책 안읽으면 영화 보기도 이렇듯 힘들다.

역시 이문식이 했던 인상적인 대사.
"'마'가 들어가는 말 중 좋은 말이 없어요. 마리화나, 대마, 경마, 임마!"
'마태우스'도 그런 보기에 들어갈 수 있겠다. 하지만 '마냐'는 아니다^^ '마립간'도 아니다.

영화를 볼 때 주의할 점. 너무 생각을 하지 말라! 난 너무 영악한 나머지 중간쯤에 이미 진실을 알아 버렸다. 그러니 반전이 있어도 심드렁할 수밖에. 이건 순전 온갖 음모로 점철된 우리 정치사 때문, 정치의 불안정이 스릴러 영화를 재미없게 만든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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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4-1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배우 '이문식'씨가 꼭 마태우스님 사촌같은 느낌이 옵니다. 작은눈에 서민적인 분위기가 비슷~ 그분과 족보관계가 어찌 되시는지요?^^

갈대 2004-04-18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8촌 안쪽일 것 같습니다..ㅋㅋ

마냐 2004-04-19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아~ 저, 쫌 전에 이 영화 보고 들어왔걸랑요...뭐, 국산영화 편견 가진게 아니라고 강변하고 싶지만...암튼, 한국영화에서 흔치 않게 탄탄한 시나리오. 음화홧. 정말 신나게 봤어요. 이 정도면 정말 꽤 잘 만든 '범죄의 재구성!' 저두...리뷰 올리려 했으나, 낼 출근 생각해서 천천히 하려고 하는중...마태우스님 감상 보니, 넘 반가와서..ㅋㅋㅋ

sooninara 2004-04-19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그젯밤인가?)에 그냥 집에 가기 심심하여.(술이 알딸딸하게 ..조금 더 마셨어야지 잠이 올텐데^^) 남편을 불러내고..저는 안양 롯데 시네마로 직행했죠. 남편하고 심야 11시 40분영화를 보았습니다..그런데..남편이 주차하느라 늦어서..앞에 5분을 못봤어요..ㅠ.ㅠ..추격신이었군요...정말 상큼한 샐러드 같은 영화더군요^^ 내용은 다 알지만 볼만해요..반전이랄 비밀도..눈에 뻔하게 보이지만..시나리오도 탄탄하고..연기도 좋고..웃기기도 잘하고...참 즐거운 영화였습니다..(알콜때문인지..영화보면서 절대로 안조는 제가 중간에 5분을 깜박 졸긴했지만서두)

비로그인 2004-04-19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반전은 중간에 다 눈치채긴 하는데, 그래도 그게 영화보는데 큰 지장은 안주는 거 같아요. ^^ 근래 본 스릴러 중엔 제일 좋았어요. 특히 마지막이 너무 깔끔해서. ^^

마태우스 2004-04-19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갈대님/우리 삼촌은 왜 영화에 나와서 오해를 받게 하는걸까??
마냐님/그치요, 재미있지요? 심야영화 보시는 거 보니까 무지하게 낭만적인 삶을 사시네요
수니나라님/아니 거기서 바로 영화보러 가셨단 말이어요? 낭만점수 2점 드립니다. 그리고 그 추격신 말이죠, 후반부에 리바이벌되니 안보셔도 무방합니다.
앤티크님/반전을 저만 눈치챈 게 아니군요. 흐음... 결말이 깔끔하다는 건 다들 동의하시는군요^^

이파리 2004-04-1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타리님이랑 저 담주 수요일 보러 가기로 했어요.(가까운데 사는 관계로..) 그때까지 하겠죠???

플라시보 2004-04-20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일 이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기본 1주일에 한편은 보던 룰이 좋지 않은 몸 상황으로 인해 너무 밀렸습니다. 양동근 나오는 영화도 보고 싶었는데 그만 막을 내렸더군요. 님의 글을 읽고나니 더욱 보고싶어집니다.

다연엉가 2004-04-20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이들 샘인 프롬님과 함께 보러가자기로 약속했습니다...마태우스님 광고비 받으세요.

바지삽세 2004-04-2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나두 보고파요ㅠㅠ

이파리 2004-05-03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장을 갔습니다. 울타리님과 팔짱을 끼고...
그리고 둘이서 오붓하게 봤습니다. 그리고 가끔.. 아니 자주 웃고 떠들고, 큰 소리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둘 밖에 없었거든요.^^
그리고 둘이 팔짱을 끼고 나왔습니다. 약간 썰렁함을 느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