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 습격사건 - 엽기발랄 오쿠다 히데오 포복절도 야구장 견문록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동아일보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공중그네>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오쿠다 히데오는 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다. 하지만 그의 책이 갑자기 많이 번역되어 나온 탓인지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에 그만 그에게 식상하고 말았다. <야구장 습격사건>도 읽을 마음이 없었지만, 나랑 책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던 미모의 여자분이 선물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읽게 되었다. 책 표지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엽기발랄 오쿠다 히데오 포복절도 야구장 견문록’

이 책은 저자가 잡지사의 청탁을 받고 일본의 야구장을 둘러본 탐방기로, 책 어디에도 웃기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포복절도’라니. 물건을 훔치는 장면이라도 나오면 이해를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오쿠다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상술이 안티를 만드는 거다.


그래도 내가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는 이 책이 야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였다. 난 어려서부터 야구에 심취했다. 국내야구를 섭렵한 뒤부턴 스포츠신문 한 귀퉁이에 나오는 해외야구 소식을 목마른 낙타가 물을 마시듯 찾아서 읽었다. 그래서 난 최근 선수들은 물론이고 해외야구가 우리나라에 중계되기 전인 8,90년대의 야구 스타들도 대부분 안다. 피터 싱어 대신 야구 같은 것에 빠져들었던 걸 늘 후회하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면 가슴이 뿌듯하다. “너희들은 모르지? 난 모도키도 알고, 기요하라도 안다!” 스티븐 킹의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를 읽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하하, 이 무식한 번역자 좀 보게. 데릭 지터를 ‘제터’라고 써놨네? 메츠 구장이 ‘쉐이 스타디움’이지 ‘쉬 스타디움’이냐?” 이것이 평소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쏟아부은 매니아들의 자기 위안이리라.


야구장은 정말 가볼만한 곳이다. TV였다면 진작에 채널을 돌렸을 지루한 게임이라도 직접 가서 보면 재미가 철철 넘친다. 거기서 보면 평범한 땅볼이나 플라이아웃도 관중을 열광시키고, 안타라도 하나 나오면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된다. 거기서 파는 시원한 생맥주도 야구장의 묘미 중 하나고, 예전과 다르게 주위를 둘러보면 미녀 팬들도 많다. 문득 작년엔 단 한번도 야구장에 가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야구팬끼리 결혼을 하면 구장에 자주 갈 줄 알았는데, 게다가 히어로즈 구장이 바로 지척인데 어째서 안갔을까? 야구 경기가 보통 세시간이 넘게 걸리고, 왕복 4시간 동안 애들을 혼자 둔다는 게 꺼려져서였다. 그 대신 TV로 수많은 게임을 봤지만, 직접 가지 못한 게 아쉽기 그지없다. 역시 애들이 있으면 문화생활과 담을 쌓게 되는 것 같다. 참고로 <야구장 습격사건>-제목도 참 말이 안된다. 이런 게 낚시성 제목이 아닐까?-의 저자 오쿠다 히데오는 책에 나온 바에 의하면 솔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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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0-01-12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이 책 사두고 아직 안 읽었는데...우짤까 싶어지네요...;;;;

마태우스 2010-01-12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셨어요. 사셨으면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근데 이 책의 저자는 마사지를 참 많이 받더군요. 마사지 하면 우리나라 마사지가 생각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일본 마사지는 우리 마사지와 다르더군요. 몸 여기저기가 많이 뭉쳤던데, 글을 많이 쓰다보니 그런 직업병이 생겼나 싶더라고요. 글구 음식을 참 호화롭게 먹는 게 부러웠어요. 참, 이 저자는 밤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데, 그것 역시 글쓰는 직업이 갖는 직업병인 듯했어요.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 - 장진영·김영균의 사랑 이야기
김영균 지음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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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4기입니다. 다행스럽게 아직 말기는 아니네요.”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하 마지막)>이란 책을 보면

영화배우 장진영이 암 진단을 받을 때 의사가 저런 말을 했다고 한다.

위암은 1기부터 4기까지 분류를 하는데

의학계에서 ‘말기’라고 하는 건 4기를 의미한다.

4기 판정이 내려지려면 간이나 대장 등 다른 장기로 암이 퍼져야 하는데,

고인의 경우 암이 림프절로 전이되긴 했지만 다른 장기로 퍼진 건 아니었다.

이상을 종합해 봤을 때 의사는 그를 3기로 진단한 게 아닌가 싶다.

이건 의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입증된다.

“희망을 가져도 됩니다. 우선 항암진료를 받으면서 수술 날짜를 잡아봅시다.”


위암 4기인 경우 대개 수술을 하지 않는다.

다른 장기에 퍼져 있는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암덩어리들이 몸 어딘가에 있는지라

수술을 하는 게 환자에게 고통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의사는 항암치료로 암의 크기를 줄이고 수술을 하자고 했으니

3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의학에서는 대개 5년 생존율을 따진다.

5년이 되도록 재발을 하지 않았다면 사실상 완치가 되었다고 보는 거다.

위암 1기 환자가 수술을 받고 5년을 살 확률은 95%를 넘고 2기도 70%를 넘지만,

3기의 생존율은 30-40%에 불과하다.

‘불과’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그 정도면 그리 낮은 건 아니다.

적어도 세 명 중 하나는 5년 이상 산다는 뜻이지 않는가?


3개월의 치료 후 암세포가 줄어들자 의사는 그에게 수술날짜를 잡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직업상 몸에 칼을 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2주간 치료하고 처방약을 먹으며 한두달만 지내면 100퍼센트 완치된다”는 말에 이끌려

멕시코로 건너간 것.

의학에는 100퍼센트라는 게 없다.

게다가 진행된 위암을 수술도 안하고 고친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되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에 솔깃해 한다.

그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현대의학이 아직 많은 한계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멕시코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곳에서는 수술을 하는 대신 그녀의 몸에 방사선을 쐈다.

죽어간 건 암세포가 아니라 정상 장기였고,

부작용으로 생긴 설사 때문에 그의 체중은 10킬로그램이나 줄었다.

결국 그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그 뒤 그가 숨을 거두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세상엔 말기암 환자를 유혹하는 수많은 대체요법이 존재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숯가루 요법으로 유방암을 완치했다.”든지

“도라지를 먹고 구강암이 나았다” “침과 뜸으로 췌장암 말기에서 살아났다.” 등등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글이 차고도 넘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환자와 가족들에게

그 글에 나온 요법들은 구원의 손길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사례들이 과연 어느 정도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난 회의적이다.

<마지막>의 사례에서 보듯 그 요법들은 치료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상태를 더 악화시키기 일쑤니 말이다.


생각해 본다. 장진영이 의사의 권유대로 수술을 했다면 어땠을까를.

2010년, 그리고 2011년에도 그는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에게 밝은 웃음을 주고 있지 않았을까?

“암 투병 연기는 이제 자신 있어요”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을 그녀의 명복을 빌며,

새해부턴 환자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대체의학에 끌리지 않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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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05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 불행하게도 곁에서 여러 사람 겪어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런 선택이 그녀를 빨리 데려간 것 같아 심히 안타깝네요.ㅜㅜ

L.SHIN 2010-01-05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답답해라... 안타깝군요.

2010-01-06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체오페르 2010-01-06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푸라기라도 잡고싶 그 심경, 상황...아아...
그런 상황은 다시 겪고 싶지 않고 없기만을 바라며 그럴수 있도록 살고자 합니다.

마립간 2010-01-06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답은 없지만 직업병이다 보니.
http://blog.aladdin.co.kr/freejani/3250047

카스피 2010-01-0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의학이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실제 기적처럼 살아난 사람들도 가끔은 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는것이 어찌보면 당연합니다.사실 이런 분들은 현대의학에서 거의 포기한 분들인데,대체 의학을 꼭 나쁘게 보기 보다는 이런 분들을 속여 한몫 잡으려는 사기꾼들이 더 문제인것 같네요.

Tomek 2010-01-06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안타까울뿐..

다크아이즈 2010-01-06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남수 옹의 침 요법으로 호전되었다는 둥의 기사도 떴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김영균씨는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나요? 상업성과 순수성의 모호한 경계에서 회자되는 대체의학의 정체성 역시 역시 그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정립되겠지요? 갑갑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마태우스 2010-01-0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글쎄요. 암이란 건 어차피 침으로는 호전되는 게 아니어서요. 당장은 좋아지는 느낌을 줄지언정 치료에는 도움이 안되었을 겁니다 다시 읽어보려 했는데, 제가 책을 다른 분한테 빌려줘 버렸네요...
Tomek님/그죠? 35세라면 위암이란 진단을 내리기엔 너무 이른 나이어요. 그것도 조기가 아닌 3기라니, 참 속상하죠.
카스피님/님 말씀이 맞습니다. 의학계는 대체의학을 잘 모르고, 이해하려 하질 않습니다. 진짜 기적처럼 나은 분이 있더라도 "애초에 진단이 틀렸다"고 생각한답니다. 대체의학이란 것도 질병에 따라 효험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약제로 쓰는 것도 사실은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을 모방해 만든 것이니깐요. 글구 이번에 고인이 받은 치료는 방사선치료라, 대체의학이라고도 할 수 없는, 번지수를 잘못찾은 치료예요. 그나저나 현대의학은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단 생각이 들어요.
마립간님/아 네. 말씀하신 곳에 갔다가 아무 댓글 못남기고 왔답니다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
루체오페르님/사실은 저도 고인처럼 되면 치료 안받고 버틸 거예요. 암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뼈저리게 느꼈거든요.
속삭님/앗 마치 제가 독촉한 느낌이어요 뭔지 대충 알겠사와요. 글구 제가 어딜 가겠습니까. 산전수전 다 겪은 마당에요.
L Shin님/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수술을 받았다면...제가 저자였다면 기절을 시켜서라도 수술을 받게 했을 거예요..
순오기님/그러게요. 읽다가 얼마나 울었는지, 참...

2010-01-07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채굴장으로 - 제139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시공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가을이라 그런지 갑자기 불륜소설이 땡겼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채굴장으로>.

표지에 이런 구절이 쓰여 있다.

“그에게 끌린다. 남편을 사랑하는데....”


제목으로 보아 채굴장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는 모양,

바로 이거다 싶어 읽기 시작했다.

책의 소제목은 월별로 나뉘어져 있고, 3월에 시작해 이듬해 4월에 끝이 난다.

주인공은 조그만 섬에서 학교 선생을 하고 있는 유부녀,

초반부에 토교서 온 남자 선생이 그 섬에 부임을 한다.

“아, 그러니까 이 둘이서 그렇게 되는군!”

혼자 좋아하며 계속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중반부를 읽을 때까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자 조금 초조해졌다.

“대체 언제쯤 일을 벌일 거냐, 응?”

주인공과 그 남자선생을 채근하며 책을 읽는데,

갑자기 둘이서 지금은 폐허가 된 극장에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 바로 이거야! 어서 일을 벌이라고!”

이 장면은 이렇게 끝난다.

“이사와(남자 선생)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엉겁결에 뒷걸음질쳤지만,

이사와는 성큼성큼 내 옆을 지나갔다...이사와는 끝내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일을 벌이기는커녕 스킨십조차 없다.  

뭔가 될듯하면 남자가 저벅저벅 가버리는 이런 장면, 이 책에서 자주 나온다. 

이 대목에서 난 이렇게 한탄했다.

“곧 연말이다. 이렇게 진도를 못나가서 어떻게 하냐?”


이듬해 1월을 읽을 때쯤, 난 이 책에서 뭔가를 기대하는 게 바보같은 짓이란 걸 깨달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렸는데도 계속 책장을 넘긴 건 뉴톤이 말한 관성의 법칙 때문이었다.

일본 책 특유의 구조, 그러니까 양장본에 페이지수가 얼마 안되고

글자도 큰 이 책을 난 500페이지짜리 책보다 더 힘들게 읽어야 했고,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난 뒤 난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며 만세를 불렀다.

어떻게 그 둘이서 스킨십을 한 게 남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준 게 전부냐?

남편이 시시때때로 집을 비우는데 말이다!

표지의 그 구절은 나처럼 불륜소설을 땡겨하는 놈을 낚기 위한 것일 뿐,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 작업을 하기 위한 지침서가 아닌 것처럼

<채굴장> 역시 채굴장에서 일어나는 불륜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나오키상을 받은 건,  

자기들만 낚이는 게 억울했던 심사위원들의 심술 때문이 아닐까? 

나오키상이 가장 잘 낚은 책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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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11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불륜소설의 압권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진짜입니다.
물론 불혹이 지난 사람들만 읽을 것!
확실한 대리만족~~~~ 이런 불륜을 꿈꾸는 것조차도 행복하지요.^^

무해한모리군 2009-11-11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쩝쩝.. 네.. 제가 요즘 광고랑 완전히 다른 영화 몇 편에 낚였더니 남의 일 같지 않은것이.. 감정이입이 막되는데요 ㅎㅎㅎ

다락방 2009-11-12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아침부터 완전 대박 웃었어요. 음, 작가가 더 진행하는게 무서워서 그랬을까요? 와- 완전 맥빠지겠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핫 근데 왜 저는 이 리뷰를 읽고 나니 이 책을 한번 보고 싶어질까요?하하하하하하

마태우스 2009-11-25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님한테 웃음을 드릴 수 있어서 대박 행복했습니다. 글구 책은 절대 보심 안됩니다. 저 믿죠?^^
휘모리님/한번 낚인 분들은 피해자에 대해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기 마련이지요. 감사합니다 꾸벅.
순오기님/불혹이 지나긴 했지만 철이 아직 안든 사람도 메디슨카운티를 읽어두 되는지요???
 
신으로부터의 한마디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강원도로 워크샵을 다녀왔다.

내게 있어서 장거리여행은 오가는 동안 책을 원없이 읽을 수 있는 기회,

절반쯤 읽은 <검은 꽃>과 더불어 최근 선물받은 <신으로부터의 한마디>(이하 신)를 집어들었다.


해야 할 숙제가 있어 점심메뉴로 예정된 생선회를 마다하고 아침 일찍 귀가해야 했는데,

요즘 일이 밀려 잠을 거의 못잔데다 전날 세게 달렸던 탓에 무지하게 피곤했다.

난 곧 곯아떨어졌지만, 이십분도 못되어 잠이 깨고 말았다.

차 안이 너무 더웠기 때문.

안그래도 반팔 차림이라 더 벗을 게 없었기에

난 가방에서 대형부채를 꺼내들고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기사 아저씨한테 갔다.

“아저씨, 혹시 난방 트셨어요?”

아저씨의 대답, “네.”

기절할 뻔했다.

이 날씨에 난방이라니, 이게 무슨 만행인가?

전날 학교 버스로 갈 때는 에어콘을 틀어주던데,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해도 난방을 트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이십명 가까이 탄 다른 승객들은 왜 아무런 항의도 안하는지

다들 기사 아저씨처럼 극심하게 추위를 타기라도 한단 말인지?


난방이 꺼져 더위는 가셨지만, 난 다시 잠들지 못했다.

남아서 싸온 오징어를 씹으며 <신>을 펴들었는데,

피곤했던 내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한번도 졸지 않을 만큼의 재미를 그 책은 선사해 줬다.

일본의 젊은이가 회사에 들어가 겪는 얘기로,

어쩜 그렇게 우리 사회랑 똑같은지,를 생각하며 읽을 수 있었다.

예상은 되었지만 주인공이 일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도박영화에서 로얄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나올 때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줬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주인공이 6개월 전에 헤어진 여자에게 계속 집착한다는 것.

떠나고 나서야 “그(그녀)만한 사람이 없구나”고 탄식해 봤자

별 소용이 없다는 소신 때문이다.

내가 너무 냉정한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란 변하지 않는 동물이고, 그렇게 다시 만나봤자 헤어질 때의 문제가 고스란히 반복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내가 지금 곁에 있는 미녀에게 잘하려고 하는 건

“떠난 버스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놓치기에 너무도 아까운,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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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0-13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란 변하지 않는 동물이고, 그렇게 다시 만나봤자 헤어질 때의 문제가 고스란히 반복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라는게 저의 신념이기도 합니다 ㅎㅎ

다락방 2009-10-1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다보니 문득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신으로부터의 선물이 되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신으로부터의 선물은 아무나 받는게 아닌 것 같아요, 마태우스님. 그러니 꽉 안고 놓지 마세요!

마태우스 2009-10-14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다락방님, 님은 무조건 신으로부터의 선물이지요!!!!! 미모에 지성까지 겸비하셨잖아요!!
휘모리님/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글고보면 이 작가는 저보다 인생 경험이 좀 덜한 듯 싶네요. 헤어진 연인을 믿다니...
 
읽은 척 매뉴얼 - 명작을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한
김용석 지음 / 홍익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대한민국에도 이미 수십년 전부터 마술적 사실주의를 극대화한 구비문학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좃도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백년의 고독>의 읽은 척 중)”

이 대목에서 난 소리를 내서 웃고 말았다.

한참 웃다가 주위를 보니 사람들이 날 보고 있기에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칸으로 옮겼다.

그러다 다음 대목을 만났다.

“조만간 전지현은 나와 결혼을 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으로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필자야 <시크릿>은 진짜 위대한 책이라고 인정하면 그만이지만,

전지현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미 한번 웃어서 그런지 봇물 터지듯 웃음이 나왔다.

난 지하철을 내려 의자 앉아 정신을 추슬렀다.


<읽은 척 매뉴얼>(이하 매뉴얼)은 이런 책이다.

코드만 좀 맞으면 읽는 내내 정신없이 웃을 수 있고,

코드가 맞지 않아도 세계 명작들의 엑기스를 건질 수 있는 그런 책.

누군가가 “고전이란 다들 읽은 것 같으면서도 정작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책이다”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저자는 <매뉴얼>을 통해 우리가 귀가 따갑게 들어온 명작들의 핵심을 친절하게 짚어준다.

여기 나오는 책들 중 몇권을 읽은 바 있고,

그래서 “개츠비가 왜 위대한지 모르겠어요”란 한심한 리뷰를 쓰기도 했는데,

<매뉴얼>을 읽고 나니 머리가 확 뚫리는 기분이다.

워낙 정리를 잘해 주는지라 정말이지 <매뉴얼>만 읽으면

어디 가서 읽은 척을 해도 탄로나지 않을 것 같다.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이 책이 빛나는 대목은 저자의 탁월한 비유였다.

책 곳곳에 다이아몬드처럼 박혀 있는 이 비유들을 읽으며

인간의 비유력에는 한계가 없는 게 아닌가,는 탄식을 하게 됐다.

<백년의 고독>이 “문어발적 플롯이 얽혀 있”다는 걸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 동안 토끼가 낮잠을 자자

거북이가 몰래 토끼 간을 꺼내 용왕님께 가져갔다더라 식“이라 표현하는 저자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올해 5월에 나온 책인데 이제 2쇄에 머물고 있다는 건

저자가 몸담고 있는 딴지일보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이란 모름지기 진지해야 한다는 교조적 생각을 많이들 하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건데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여느 진지한 책들보다 훨씬 더 크다.

좋은 책들을 많이 만난 2009년이지만, 

올해의 마지막 날 잠자리에 들 때 

이 책을 읽은 게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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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 2009-10-1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재밌네요. ~척이라니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