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보았다 - 분노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이얼 프레스 지음, 이경식 옮김 / 흐름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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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체비치, 따라와.”(99)

아초가 쓰러져 있던 한 사람의 발을 툭툭 차며 이름을 불렀을 때, 그 당사자는 무척 황당했던 모양이다. “남자는 아초를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코바체비치가 아니고 스탄코였기 때문이다.”(99)

상황은 이랬다.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 아무래도 민족간의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주를 이루는 세르비아인은 소수민족 중 하나인 크로아티아인과 사이가 무척 나빴는데, 여기에는 악연도 있다. 2차 대전 때 크로아티아인은 나치와 협력해 70만명의 세르비아인을 몰살시켰다. 겉으로는 협력해서 한 나라를 이루고 있지만, 이들의 갈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었다.

 

방아쇠를 먼저 당긴 것은 크로아티아인이었다. 19915, 크로아티아는 투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나라의 해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세르비아인이 아니었기에 두 민족간의 내전이 시작됐다. 독립에 대한 크로아티아인의 의지는 강했지만, 장비에서 앞선 세르비아인을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이 주로 살던 부코바르라는 도시를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한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원래 부코바르에는 크로아티아인뿐 아니라 세르비아인도 살고 있었는데, 두 민족은 외모도 비슷했고 사용하는 언어도 동일했으니까. 포로들 중 크로아티아인들만 골라서 죽여야 하지만,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은 부코바르 출신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아초는 그 포로들 사이에 있다가 전에 같이 근무했던 세르비아인 간부의 눈에 띈 세르비아인이었다. 그 간부는 아초에게 포로들 중 세르비아인을 골라내라는 임무를 맡겼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초에 의해 세르비아인으로 분류가 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코바체비치, 따라와.”라는 평범한 단어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즉 아초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스탄코라는 세르비아인을 코바체비치라는 세르비아 이름으로 불러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아초는 또 다른 크로아티아인 한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가 부른 이름은 모두 세르비아식 이름이었다. 그제야 감을 잡은 사람들이 자기도 불러달라고 속삭이며 애원했다.”(100)

 

<양심을 보았다>(이얼 프레스)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아초는 이런 식으로 수많은 크로아티아인을 구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시도였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2차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인에게 부모를 잃었으니, 아초가 세르비아인만 지목했다고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초가 그런 일을 함으로써 그의 처지는 곤란해졌다. 크로아티아인은 아초가 세르비아인이라서 그를 싫어했고,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을 도운 아초를 용서할 수 없었다. 대체 아초는 왜 그랬을까? 책의 저자가 묻자 아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본능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것 같았거든요.”(124)

그렇다고 해서 아초가 평소 인권이나 사회정의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아파트를 찾아간 저자는 아파트에 책이 한 권도 없으며, 그가 대학은 물론이고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즉 사람을 구하는 본능은 그냥 타고난 것이지 책을 읽거나 교육을 받아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한 달간, 우리나라 국민들은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세월호라는 배가 거꾸로 뒤집혀 그 안에 있던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배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낡은 배를 사서 운행한 것, 객실을 무리하게 증축하고 화물을 적정량 이상으로 실은 것 정도야 우리나라의 총체적인 부패지수로 봐서 두드러지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선장과 승무원이었다. 선장과 승무원이 승객을 버려둔 채 가장 먼저 탈출한 것은 해양사고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부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안전한 객실에서 대기하라고 방송함으로써 승객들의 탈출 기회를 봉쇄하기까지 했다. 아초의 예에서 보듯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본능일진대,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지인 한분은 "지난 2주간 선장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 하기야, 책임과 의무, 거기에 본능까지 버린 선장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이럴 때일수록 <양심을 보았다>를 읽자. 세상에는 그 선장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니까. 탁월한 문장력에 탁월한 번역도 이 책의 빛나는 장점이란 것도 추가로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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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이은조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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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하늘같이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 중 저자가 열명을 돌파하고,

나도 책을 내게 된 후로는 저자에 대한 존경심이 다소 엷어졌다.

하지만 이은조 작가는 좀 다르다.

내가 글을 연습하던 알라딘 시절, 이은조 작가는 이미 일반인 수준을 벗어난,

아름다운 글들을 서재에다 쓰고 있었다.

저런 분은 정말 작가가 돼야 해.”

나중에 이은조 작가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도 놀라지 않은 것은

될 사람이 됐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이은조 작가님은 그보다 10년 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분야에 당선된 경력도 있다)

 

습작 수준의 글을 모아 후딱 책을 펴낸 적이 여러 번인 나와 달리

이은조 작가님은 신춘문예 이후 4년만에 <나를 생각해>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두 번째 책이 나오기까지는 그로부터 또 3년을 기다려야 했다.

첫 책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책 <수박>이 훨씬 더 좋았다.

여러 편의 소설이 묶인 소설집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긴 해도,

<수박>은 실린 작품들은 나름의 일관성을 갖고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바람은 알고 있지>에서 혜리라는 여성은 사고만 치는 가족들의 뒷수습에 치인 삶을 산다.

그런데 어쩌다 한번 가족들의 수습을 거절하면 대번에 언니는 이기적이란 문자가 온다.

배려와 희생이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둔갑하지 않았고,

단 한 번의 어쩔 수 없는 외면이 그동안의 배려와 희생을 덮어버린다는 걸 늦게 깨달았다.”

 

이 얘기가 더 크게 다가온 건 내 지인 때문이었다.

나랑 친한 여선생은 아버지가 평생 일을 한 적이 없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학교식당의 밥을 하나만 시켜서 여동생과 같이 먹는 식으로 하루 세끼를 해결했다.

여동생이 이렇게 물었단다. “언니, 우리도 나중에 돈 벌면 학교 밥을 각자 하나씩 시켜서 먹자.”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이 된 후부터 그녀는 소녀가장이 됐다.

인턴.레지던트 월급이라야 100만원이 채 안됐지만,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이 그녀의 월급이었으니, 소녀가장이 된 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전문의를 따고 난 뒤 병원에 취직해 돈을 벌면서

그녀는 자기 밑의 네 동생을 모두 시집.장가를 보냈다.

맨 마지막 동생이 시집가던 날,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더란다.

이제 다 보내고 나니 후련하다.”

그래서 그녀가 이렇게 반문했단다.

엄마, 나는?”

 

이제 다 자리를 잡은 그녀의 동생들이 언니의 희생에 보답을 했을까.

별로 그런 것 같진 않다.

오히려 그녀의 동생들은 틈나는대로 그녀가 일하는 병원에 와서 건강검진과 치료를 받았고,

자신들 뿐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다 병원에 오게 해서 언니를 힘들게 했다.

소녀가장이 힘들었던 그녀는 여기서 탈출하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나 좀 데려가 달라고 하고 싶어.”

<바람>에 나오는 혜리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따금씩 혜리는 여기서 펑,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널 때도,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혜리는 여기서 펑,을 외우곤 했다....그건 왠지 서글프면서도 통쾌했다. 병에 걸렸다,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사를 가야 한다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가족의 안부에 답하지 않아도, 궁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45)

 

소설의 재미가 기존 상식을 깨뜨리는 쾌감에 있다면,

소설집 <수박>에서 제일 충격적이었던 단편은 단연 <효녀 홀릭>이다.

좀 황당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의 구성이 너무 그럴듯해 실제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난 그래, 내가 이래서 애를 안낳는 거야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두 번째 만에 이런 멋진 소설집을 낸 이은조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시국이 어려워서 책이 잘 읽히지 않겠지만,

그래도 <수박>은 한번 읽으라고 권해 드린다.

수박씨는 그냥 뱉으면 돼. , .... 마치 가슴에서 멍울이 터져 나가는 것처럼.”이란 대사처럼,

지금 우리를 휘감고 있는 멍울 같은 수박이 조금은 작아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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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5-0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어느 서재에서 처음 봤고, 신문에서 신간 안내로 봤고, 이번에 세 번째로 봅니다.
내용이 궁금해집니다.
잘 지내셨나요?

마태우스 2014-05-01 16:16   좋아요 0 | URL
아앗 페키님 안녕하셨어요. 지난 한달만 얘기하자면, 어떻게 잘 지낼 수가 있었겠어요.. 마음이 많이 아파서 글도 안쓴 채 멍하니 보냈죠.ㅠㅠ 아직도 선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근거라도 찾고 싶었는데, 그놈이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비연 2014-05-02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박씨는 그냥 뱉으면 돼. 툭, 툭.... 마치 가슴에서 멍울이 터져 나가는 것처럼...
아. 마음에 와닿는 문구에요. 요즘처럼 심란할 때 읽으면 좋을 듯 싶네요...

마태우스 2014-05-04 00:28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문구가 무지 많았어요. 생각지도 못한 주제들이었구요.

2014-05-04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4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5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5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6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6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7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개념의료 - 왜 병원에만 가면 화가 날까
박재영 지음 / 청년의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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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 미국에서 돌아온 박재영 청년의사 편집주간이 책을 하나 보내왔다.

<개념의료>라는 제목의 책 속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공들여 쓴 저의 새 책을 마태우스 서민교수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립니다.“

책은 꽤 두꺼웠고, 그땐 내가 좀 바빴을 때라 책을 읽을 짬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 올해 2, 신학기 때 학생들과 토론할 만한 의학관련 책을 찾던 중

다음과 같은 리뷰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xxx의 탁월한 책 선택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책 하나로 본과 1학년 내내 배운 예방의학 시간 동안 배운 내용보다 훨씬 알기 쉽게, 심지어 더 자세하게 의료 체계 및 현실에 대해 개념을 쌓았다. 교수님께 심지어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을 정도이다ㅡㅡ"

이럴 수가. 그가 권해드리고 싶다는 책은 내가 작년에 받은 <개념의료>였다.

더구나 이 리뷰를 쓴 분은 의료계에 대해 약간의 피해의식이 있을 한의학업계 분이었으니,

이 책이 얼마나 균형잡힌 시각으로 한국의료의 현실을 기술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이번 학기 학생들에게 읽힐 책 중 하나에 이 책을 포함시키려고

서둘러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시금 이럴 수가.

이 책은, 훌륭해도 지나치게 훌륭했다.

몇 권의 저서를 펴냈고, 매주 청년의사에 사설을 썼으니 문장력이 탁월하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세밀한 자료조사와 그에 근거한 객관적인 진단은 읽는 중간중간 !’ 소리를 지르게 만들었다.

기초의학 전공자라 막연하게만 알았던 한국의료의 현실과 문제점을 이 책보다 더 잘 말해주는 책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저자랑 알고 지내는 것의 장점을 살려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때 주신 책 읽고 있는데 정말 훌륭한 책이더군요. 감동입니다.”

그가 답을 했다.

미국 연수 기간 동안 시간이 좀 있어서, 정말 정성들여 썼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시금 책의 속지를 폈다.

 

 

공들여 쓴이란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이 정도 되는 책을 썼다면 공들여 썼다고 거 자랑해도 전혀 흉은 아니겠다 싶었다.

그리고 이 정도 되는 책을 읽으라고 추천할 수 있다는 건

쉽게 갖지 못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의사 여러분, 개념의료를 읽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색해 봅시다.

일반인 여러분, 하나도 어렵지 않으니 한번 읽어보세요. 의사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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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3-22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실 '과잉진단'을 읽으면서 실망하고 있어요. '개념의료'에서 위로를 받기를 기대합니다.

마태우스 2014-03-24 02:08   좋아요 0 | URL
이책은 최고입니다. 실망하실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2014-04-03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조기후 2019-09-0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분 강의듣고 책 주문하려고 들어왔는데, 마침 마태우스님의 추천글이 ^^ 괜히 반가워 (엄청 뒤늦게) 댓글 남겨봅니다.

제가 드라마작가 공부를 하고 있는지라, 아직 의학드라마는 꿈도 못꾸지만 의사가 나올 때 성격이나 대사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더 현실적으로 쓰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간 거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을 얻고 왔고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의학드라마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네요.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의학드라마 꼭 써보고 싶어요. 동기부여가 많이 된 강의였는데, 이 책도 그럴 것 같네요. ^^

마태우스 2019-09-04 10:02   좋아요 0 | URL
건조기후님 안녕하세요 의학드라마가 울나라는 정말 많이 부족하죠. 그건 그만큼 님에게 기회일 수도 있잖아요. 힘 내시고 꼭 좋은 의학드라마 쓰시기 바랍니다!
 
꽃신 파랑새 사과문고 64
김소연 지음, 김동성 그림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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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동화책을 보내줬다.

"정말 좋은 책인데, 책 좀 팔리게 도와주세요"란다.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이랬다.

"흥, 난 냉정한 사람이라고. 게다가 동화라니! 난 천만이 든 겨울왕국도 재미없게 본 사람이야!"


총 세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꽃신>을 읽고 깜짝 놀랐다.

어른인 내가 읽어도 너무 재밌다는 게 놀라자빠진 첫째 이유고,

두번째 이유는 동화책이 애들이 읽기엔 너무 안좋은 내용들이 나오는 것 같아서였다.

예컨대 첫번째 소설인 <꽃신>은 기묘사화에 엮인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그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죄가 없는 사람도 잡아다가 귀양을 보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멀쩡한 사람이 조작된 증거에 따라 간첩이 되는 게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런 비밀을 애들이 알게 하는 게 좋은 것일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게

어린이물을 만드는 사람들의 사명이었다.

악당은 언제나 망하고, 착하게 살면 언제나 성공한다는 만화나 책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이 책은 내가 읽던 그런 책과는 차원이 완전히 달랐고,

그래서그런지 매 순간 흥미진진한 상황이 전개된다.

두번째 소설에 나오는 덕님이는 보통 어린이 소설에 나오는 공주와 달리

아주 못생겼다!


다 읽고 나서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온갖 음모로 가득찬 곳이라는 걸 어릴 적부터 알려주는 게 좋은 것일까?

그게 맞는 거 같다.

나만 해도 정의가 승리하기는커녕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어렵게 살고,

나쁜 놈들이 승승장구하는 현실을 보면서 어찌나 혼란스러웠던지.

그것보다는 솔직하게 이 세상에 대해 얘기해주는 것이 아이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아 보인다.

이 책을 가리켜 보수 분들은 "동심을 더럽히는 종북.좌파적인 책"이라고 비난하겠지만,

현실을 알려 주고, 그 현실 속에서 꿋꿋하게,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게 좋다고 알려주는 게

구름잡는 정의 타령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본다.

어른도 감동시키는 완성도 높은 동화책은 좀 많이 팔려야 하는데,라면서 맨 앞장을 보니까

이렇게 쓰여 있다.

2008년 6월 1쇄 발행, 2013년 7월 19쇄.

아, 그랬다. 이 책은 그래도 제법 많이 팔렸다.

정의가 이긴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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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4-03-02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린이 독서교실 교재로 활용한 적이 있는데, 부럽고 부러웠어요. 작가가. 잘써서^^*
어른들이 생각하는 동화적 이데올로기에서 이제는 자유로울 때가 되었다고 봐요.
각종 정보에 노출된 아해들도 더이상 동화다운 상상력에만 머물러 있지 않잖아요.
아참, 김동성 님의 그림도 무척 좋지요. 19쇄를 찍은 건 김동성 작가 님의 그림 덕도 톡톡히 봤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반가운 동화를 마태님 지인님 덕에 상기하게 되어서 고맙습니다. 굿나잇 하시어요^^*

마태우스 2014-03-03 02:30   좋아요 0 | URL
앗 님은 이 책 아시는군요. 아내가 사실 동화책 삽화 그리는 분인데, 김동성님이 유명한 분이라고 하더군요. 저런 그림은 정말 잘 그린 거라고요... 님도 굿나잇하세요

paviana 2014-03-03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천만이 본 걸 안 봤어요. 공주님 시러서 ㅋㅋ

마태우스 2014-03-03 02:30   좋아요 0 | URL
왕자님만 좋아하는 파비님..>!

곰곰생각하는발 2014-03-03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화치고는 내용이 너무 어둡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권정생 님이 이런 말을 하셨죠.
현실이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다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입니다.

마태우스 2014-03-03 14:05   좋아요 0 | URL
와앗 곰발님, 친히 왕림해 주시고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제가 아이를 기르지 않는 입장이라 경험도 없구요, 막상 제 아이가 있다면 어떨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사실을 말해주는 게 맞군요.

마립간 2014-03-03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온갖 음모로 가득찬 곳이라는 걸 어릴 적부터 알려주는 게 좋은 것일까? 그게 맞는 거 같다. ; 저는 그것이 맞는 지 모르겠지만,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고 아이에게 알려 줍니다.

하지만, 누구가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를 믿는 아이가 행복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재미 없는 만화영화 '겨울 왕국'에서도 올라프에게 여름의 진실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정의의 track이 있고, 힘의 track이 있는데, 승리는 힘이 합니다. 패배할 수 있는 정의 track를 선택할 것이냐, 승리를 택할 것이냐는 가치관일 뿐이고요.

마태우스 2014-03-03 14:07   좋아요 0 | URL
오오..마립간님, 님의 사유의 폭은 어쩜 이렇게 깊고 넓은가요. 읽다보니 저절로 고개가 수그려 집니다. 힘이 곧 정의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애들이 힘을 기르려고 동분서주할 것 같기도 하고, 안그러면 커서 헷갈리고, 어려운 문제인 거 같네요

좋은날 2014-03-0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왕국은 재미없었어요. 노래만 기억날 뿐이지 소문난 잔치에 먹을거 없다는 말 그대로였어요.여름을 꿈꾸는 올라프가 더 기억에 남아요.

마태우스님
이젠 베란다에서 못보네요.
마태우스님 보려고 가끔이라도 봤는데..
마음의 땀을 흘리는 마태우스님 찡 했어요.

마태우스 2014-03-03 14:08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겨울왕국 잼없었는데,
베란다 끝나서 이제 제 삶을 더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제 앞에 또 뭐가 있는지 모르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응원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2014-03-03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3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4-03-0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겨울왕국을 디스하면서 책을 홍보하다니...마태님 고단수시네요...

마태우스 2014-03-03 21:44   좋아요 0 | URL
앗 들켰다...겨울왕국 디스하고 싶어 죽겠었거든요^^

2014-03-06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4-03-21 22:32   좋아요 0 | URL
책과 노니는 집도 재밌게 읽었어요. 근데 리뷰는 안썼어요 죄송...! 어차피 뭐, 베스트셀러던데요..

2014-03-06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4-03-21 22:31   좋아요 0 | URL
답이 늦어 죄송...좋으실대로 하셔도 됩니다^^

2014-05-01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4-05-01 16:16   좋아요 0 | URL
어머나 친히 답신을.... 저도 잘 하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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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책을 냈던 을유문화사에서 <가트맨의 부부 감정치유>를 줬다.

책을 받았을 때 약간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라는 생각에서였다.

방송 나가서는 맨날 아내가 제일이지요라고 하곤 하지만,

책을 받기 사흘쯤 전에 아내와 말다툼을 진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 한번 싸우고 나면 이삼일 정도 말을 안해 버리며,

화해를 위한 노력을 거의 안한다는 데 있다 (이게 제 정체입니다 ㅠㅠ)

더 놀라운 건 이게 많이 나아진 거라는 점.

자라면서 남동생, 여동생과 2-3년씩 말을 안하고 지낸 적도 허다하다.

베란다쇼에서 이 말을 했더니 다들 무섭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그렇다.

 

 

그런 면에서 <부부감정치유>는 내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이 책은 내 특기인, 삐져 가지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게 그리 좋지 않다는 얘기였다.

저자는 이런 행위를 바퀴벌레 숙소라고 칭하면서 불행한 부부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그런 거라고 한다.

즉 바퀴벌레 숙소는 비난과 경멸, 방어, 담쌓기 등이 어우러진 최악의 결과물이며,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이라고 얘기하는 저자는

바퀴벌레 숙소로 가기 전에 노력을 하라고 얘기한다.

우선, 불만을 얘기할 때 부드럽게 얘기해야지, 비아냥거려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나쁜 예: 여보, 입을 옷이 없잖아! 집구석에 있으면서 빨래도 안하고, 뭐하는 거야!

좋은 예: 여보, 오늘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서 그냥 빤스 바람으로 출근할게. 사랑해.

이 구절을 읽고 아내에게 실험을 해봤더니, 효과가 제법 좋았다.

말다툼을 할 뻔한 위기를 부드러운 말로 몇 번 넘기자 아내는 날 기특해했고,

내가 그 책 얘기를 하자 이렇게 날 격려했다.

, 그게 며칠이나 가겠어?” (난 아내의 이런 점이 좋다)

 

 

 이 책을 읽다보면 불륜의 정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잠자리만 안하면 뭔 짓을 해도 불륜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긴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성을 만나는데 그 얘기를 배우자에게 하지 않는 것도 불륜이라고 한다.

괜한 오해를 살까바 얘기를 하지 않는 거라지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그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는 분명히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가 비키(이성친구)에 대해서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124)

오옷, 불륜의 기준이 이렇게 엄격하다니!

좀 너무한 게 아닌가 하다가, 저자의 말에 수긍을 하게 됐다.

모든 균열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고,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면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게

돌이킬 수 없는 파탄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여러 모로 필요한 책인 것 같아 아내한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내가 다 읽고나면 여보도 한번 읽어봐. 큰 도움이 돼.”

아내는 말씀하셨다.

너만 잘하면 돼!” (, 난 이런 박력있는 아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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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좋아 2014-02-2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혼에 이 책을 만났다는 게 참 고맙게 느껴져요. 아무래도 말을 더 곱게 혹은 웃을 수 있게 농담을 섞어서 하게 되더라고요. 잘못했을 땐 반성도 잘하고요. ^^ (쓰다 보니 남편이 더 고맙게 느껴야 할 일 같군요. ㅎ)

마태우스 2014-02-25 23:29   좋아요 0 | URL
부부 중 한명만 읽어도 고마운 책이죠. 저같은 놈이 덜 삐지게 됐으니 말입니다^^

가넷 2014-02-2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보, 오늘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서 그냥 빤스 바람으로 출근할게. 사랑해... 라고 해도 저 같으면 왠지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들릴 것 같긴도 한데요...-_-;;;;

여튼 전 아직 총각이기도 하고 결혼할 것 같지도 않아서 미래에도 읽어볼 것 같지는 않네요.ㅋㅋ

마태우스 2014-02-25 23:28   좋아요 0 | URL
만약은 모르는 거구, 미래는 미리 준비하는 게 좋답니다. 글구 빤스바람 드립, 귀엽지 않나요? 비아냥 아닌데...ㅠㅠ

감은빛 2014-02-25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싸우면 말을 안 하는 편인데, 이 책을 읽으면 과연 달라질까요? ^^

마태우스 2014-02-25 23:28   좋아요 0 | URL
으왓...사실 감은빛님 처음 뵜을 때, 저랑 같은 과구나,라는 걸 한눈에 알았답니다 삐지지 말고 건강하게 삽시다!

다크아이즈 2014-02-2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걸핏하면 삐져서 묵언수행을 취미 삼는 남편에게 선물해야 겠어요. ㅋ
남편을 위한 선물이라면 또 삐질 수도 있으니 제가 읽으려고 샀는데
묵히기 아까워 권한다고 넌지시 건네보겠습니다. ^^*

마태우스 2014-02-25 23:28   좋아요 0 | URL
아이고 느와르님 부군께서도 그러시군요. 남자들이 의외로 속이 좁아요.^^ 속 넓은 느와르님이 참으셔야죠.... 전 책 읽었으니 노력하려고요^^

딸기 2014-02-2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올만이어요 ㅎㅎ

마태우스 2014-02-26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딸기님 반갑습다 ㅅㅅ

무스탕 2014-02-26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로 많은 남자들이 삐지면 말을 안하는군요. 전 우리집에만 있는 개성인줄 알았는데..;;
말 안하는게 무슨 큰 무기 내지는 권력인줄 아는건지..;;
마태님. 모든 문제는 대화로 푸는게 가장 현명하다는걸 또 한번 알았습니다 ^^

글구, 오늘 네이트 메인에서 마태님 이름 발견하고 눈이 +_+ 요래 되서 기사 읽었어요.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를 타 방송을 듣는지라 마태님 목소리를 직접 듣지는 못하고
기사를 읽으면서 마태님 목소리로 상상하며 읽었어요. ㅎㅎㅎ

마태우스 2014-03-03 02:29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부군께서도 그러시군요. 남자가 맘이 더 좁다니깐요. 글구 기생충 나온 덕분에 매스컴을 좀 탔습니다^^

페크pek0501 2014-02-26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재밌고 유익한 글...
그런데 님이... 아, 삐지기 왕이시구나... ㅋㅋ

마태우스 2014-03-03 02:28   좋아요 0 | URL
네 그니까 저한테 잘하셔야 안삐진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