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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이은조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평점 :
저자를 하늘같이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 중 ‘저자’가 열명을 돌파하고,
나도 책을 내게 된 후로는 저자에 대한 존경심이 다소 엷어졌다.
하지만 이은조 작가는 좀 다르다.
내가 글을 연습하던 알라딘 시절, 이은조 작가는 이미 일반인 수준을 벗어난,
아름다운 글들을 서재에다 쓰고 있었다.
“저런 분은 정말 작가가 돼야 해.”
나중에 이은조 작가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도 놀라지 않은 것은
될 사람이 됐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이은조 작가님은 그보다 10년 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분야에 당선된 경력도 있다)
습작 수준의 글을 모아 후딱 책을 펴낸 적이 여러 번인 나와 달리
이은조 작가님은 신춘문예 이후 4년만에 <나를 생각해>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두 번째 책이 나오기까지는 그로부터 또 3년을 기다려야 했다.
첫 책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책 <수박>이 훨씬 더 좋았다.
여러 편의 소설이 묶인 소설집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긴 해도,
<수박>은 실린 작품들은 나름의 일관성을 갖고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바람은 알고 있지>에서 혜리라는 여성은 사고만 치는 가족들의 뒷수습에 치인 삶을 산다.
그런데 어쩌다 한번 가족들의 수습을 거절하면 대번에 ‘언니는 이기적’이란 문자가 온다.
“배려와 희생이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둔갑하지 않았고,
단 한 번의 어쩔 수 없는 외면이 그동안의 배려와 희생을 덮어버린다는 걸 늦게 깨달았다.”
이 얘기가 더 크게 다가온 건 내 지인 때문이었다.
나랑 친한 여선생은 아버지가 평생 일을 한 적이 없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학교식당의 밥을 하나만 시켜서 여동생과 같이 먹는 식으로 하루 세끼를 해결했다.
여동생이 이렇게 물었단다. “언니, 우리도 나중에 돈 벌면 학교 밥을 각자 하나씩 시켜서 먹자.”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이 된 후부터 그녀는 소녀가장이 됐다.
인턴.레지던트 월급이라야 100만원이 채 안됐지만,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이 그녀의 월급이었으니, 소녀가장이 된 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전문의를 따고 난 뒤 병원에 취직해 돈을 벌면서
그녀는 자기 밑의 네 동생을 모두 시집.장가를 보냈다.
맨 마지막 동생이 시집가던 날,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더란다.
“이제 다 보내고 나니 후련하다.”
그래서 그녀가 이렇게 반문했단다.
“엄마, 나는?”
이제 다 자리를 잡은 그녀의 동생들이 언니의 희생에 보답을 했을까.
별로 그런 것 같진 않다.
오히려 그녀의 동생들은 틈나는대로 그녀가 일하는 병원에 와서 건강검진과 치료를 받았고,
자신들 뿐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다 병원에 오게 해서 언니를 힘들게 했다.
소녀가장이 힘들었던 그녀는 여기서 탈출하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나 좀 데려가 달라고 하고 싶어.”
<바람>에 나오는 혜리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따금씩 혜리는 여기서 펑,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널 때도,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혜리는 여기서 펑,을 외우곤 했다....그건 왠지 서글프면서도 통쾌했다. 병에 걸렸다,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사를 가야 한다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가족의 안부에 답하지 않아도, 궁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45쪽)
소설의 재미가 기존 상식을 깨뜨리는 쾌감에 있다면,
소설집 <수박>에서 제일 충격적이었던 단편은 단연 <효녀 홀릭>이다.
좀 황당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의 구성이 너무 그럴듯해 실제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난 “그래, 내가 이래서 애를 안낳는 거야”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두 번째 만에 이런 멋진 소설집을 낸 이은조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시국이 어려워서 책이 잘 읽히지 않겠지만,
그래도 <수박>은 한번 읽으라고 권해 드린다.
“수박씨는 그냥 뱉으면 돼. 툭, 툭.... 마치 가슴에서 멍울이 터져 나가는 것처럼.”이란 대사처럼,
지금 우리를 휘감고 있는 멍울 같은 수박이 조금은 작아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