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영등포역에 가는데 글씨학원 광고가 붙은 게 보인다. 글씨는 인격이라는 걸 비롯해서 다음과 같은 구호들을 외치며 명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졸필 악필 물러가라!” “몇십년 쓴 악필, 딱 10일이면 싹 바뀝니다.”
그걸 보면서 잠시 추억에 잠겼다.
내게서 편지나 우편물을 받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난 글씨를 무지 못쓴다. 나만큼 못쓰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만큼. 학생 때 내 숙제를 베끼려던 애가 “됐다.”며 노트를 그냥 돌려주곤 했을 정도.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우리 담임이 수업 시간에 “이것도 글씨냐”며 내 노트를 박박 찢어버려, 모멸감에 떤 적도 있었다. 보통은 마음먹고 쓰면 잘 쓰던데, 난 마음을 굳게 먹어도 잘 안됐다.
그렇게 글씨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던 나, 대학 1학년 때 글씨를 고쳐 보고자 우리 과에서 가장 글씨를 잘 쓴다고 생각한 여학생을 찾아갔다.
“가나다라...하 를 세로로 써줘.”
한자를 연습할 때 하는 것처럼 난 그녀의 글씨를 베끼는 연습을 틈나는대로 했다. 제법 흉내는 냈지만, 빨리 써야 할 때가 오니까 다시 원래 글씨로 돌아가 버렸다. 악필에 익숙해진 내 손은 내 의도와 다르게 원래의 글씨를 버리지 않았던 것. 습관이란 게 이렇듯 무섭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아직 글씨를 써본 경험이 없는 왼손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깜찍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왼손으로 연습을 했다. 놀라웠던 건, 왼손 역시 교본에서 익힌대로 멋진 글씨를 쓰는 대신 오른손 글씨를 그대로 닮아갔다. 내 실험은 보름도 안되어 끝이 났다. 나름의 시간이 있던 시절이니만큼, 그 시절에 글씨학원 광고를 봤다면 아마 다녔지 않았을까?
다행히 몇 년 후 컴퓨터가 나왔고, 나같은 악필한테도 광명의 길이 열렸다. 한가지 신기했던 것은 그렇게 글씨를 못 썼음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통해 여러 여자를 감동시킬 수 있었다는 거~~
* 내 책에다 말싸인을 하고 나서 멘트를 써줄 때, 못쓰는 내 글씨가 유독 원망스럽다. 말그림은 멋진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