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이글, 저 잘났다는 글이어요. 너무 고깝게 생각지 마시고 읽어 주세요.

친구 하나의 말이다.

“퇴원할 때 잘봐줘서 고맙다고 촌지를 줬거든. 근데 그 2년 후배인 레지던트가 한번도 거절 안하고 덥석 받더라고. 솔직히 난 거절할 줄 알았거든”

촌지를 진심으로 좋아서 주는 사람은 내가 알기에 없다. 촌지 받은 걸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은-있을 수는 있지만-지극히 드물다. 그 자리에서 안받겠다고 한 사람도 나중에 화장실에 가서 액수를 세며 즐거워한다.


난 돈에 대해 결벽증 비슷한 게 있다. 남에게 괜한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건 어릴 적부터의 생활신조였다. 그래서 난 나보다 돈을 훨씬 많이 버는, 예컨대 내가 조교 때 “내가 오늘 번 돈이 니 월급보다 많을걸”이라고 말하는 친구에게도 아까운 마음 없이 술과 고기를 살 수 있었다. 월급에 관계없이 니가 1차를 사면 내가 2차를 사는, 그런 게 친구라는 생각을 한다. 친구 관계도 그러니 별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내가 다른 사람의 성패를 결정할 위치에 있을 때는 결벽증이 도진다.


오늘, 모교에서 논문심사를 했다. 심사 마지막 날이니 하드커버에 도장만 찍는, 지극히 의례적인 자리였다. 점수를 매기는 동안 학위생이 잠깐 나가 있었는데, 학위생의 지도교수가 이런 말을 한다.

“이거 말야, 심사비가 너무 짜. 한 5만원인가밖에 안될걸?”

다른 분이 맞장구를 치자 아까 그분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그래서 내가 학위생에게 최소한은 해야된다고 해서 이거 받아냈어”


그건 백화점 상품권이었다. 액수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10만원, 어쩌면 20만원이겠지. 사람들은 “이거 받아도 되나?”라고 다소 멋쩍어하면서 봉투를 하나씩 챙겨 넣었다. 나도 조용히 봉투를 주머니에 넣었다. 학위생도 병원에 취직해 있는 의사니, 그 정도 선물을 한다고 생계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닐 터였다. 그렇긴해도 난 그 봉투가 무슨 더러운 물건인 양 느껴졌다. 액수는 많지 않을지언정 심사위원들에게는 소정의 심사료가 지급된다. 심사료가 적다면 그건 교수가 해야 할 일 중에는 논문심사도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논문을 통과시키지 않을 수 있는 심사위원에 비해, 학위생은 약자다. 그러니 지도교수가 은근히 지시한 성의표시를 거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는 비싼 등록금에 좀더 비싼 실험비, 그리고 교실에서 요구한 각종 잡비 등을 내느라 허리가 휘었을 거다. 그것도 부족해 오늘 점심 때 일인당 몇만원이 넘는 비싼 점심을 예약해 놓고 있었다. 거기에 상품권까지 내야 한다는 건 좀 부당하지 않을까? 더 결정적으로 그는 내 일년 후배였고, 난 그에게 부끄러운 선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선생님들이 가신 후, 난 그에게 봉투를 다시 돌려줬다. 그는 아니라고, 받으라고 했다. 난 다시 돌려줬다. 그는 거절했다. 4번이나. 한번 더 거절하면 그냥 받아야지 했는데^^ 그가 “알겠습니다”라며 봉투를 받는거다. 솔직히 조금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 오늘 밤 엄마한테 가서 “엄마, 어디서 얻은 건데, 뭐 사세요”라고 폼도 잡을 수 있었고, 엄마는 필경 “우리 아들이 최고”라며 좋아하시겠지. 하지만 봉투를 돌려준 후의 상쾌함은 그런 아쉬움의 몇곱절이 되었다. 후배는 어땠을까. 그의 말이다.

“선배님이 이러시는 걸 보니 저도 기분이 굉장히 좋네요”

촌지의 거절은 거절한 사람이나 거절당한 사람 모두 즐거운 일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저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도 이런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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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4-12-16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멋지십니다. ^^

marine 2004-12-16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그 후배분도 기분 무척 좋았을 거예요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나네요 아빠가 심장판막증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하신 교수님이 엄마 친구의 남편이었어요 그런데도 엄마는 촌지를 주셨더라구요 어렸을 때는 좀 이해가 안 갔는데 사회 나와 보니까 촌지 주고 받는 관행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요

깍두기 2004-12-16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짝짝짝!

하얀마녀 2004-12-16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부패한 사회에서 촌지를 거절하는 것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라고 보기에 마태우스님이 더욱 대단하신겁니다. 잘나신거 맞아요. ^^

마태우스 2004-12-16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빨간여우님이 속삭이는 댓글로 내게 프로포즈했다...이를 어쩌나. 내겐 26세 미녀가 있는 것을...

깍두기님/부끄...^^

나나님/그게 현실이긴 해도, 고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클님/아이 부끄러워요. 너무 자랑이 심했다는 생각이...

마태우스 2004-12-16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님/아이 마녀님까지 왜이러세요? 언제 우리 지청구나 마셔요^^

모과양 2004-12-16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이 최고 멋져요 *^^*

nemuko 2004-12-16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께 논문심사땜에 교수님들께 90만원을 드리고 왔습니다. 아예 금액을 정해주더군요. 비싼 등록금에 더 비싼 실험비에 식사까지 대접했구요. 흐흐.... 왜 울 학교엔 마태우스님 같은 교수님은 안 계신걸까요...

oldhand 2004-12-16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천하는 양심입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죠. 마태님에게 경의를...

로드무비 2004-12-1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교수 사회 해부하는 책이 하나 나왔으면 좋겠어요.

조교를 종 부리듯이 하는 것부터......

아유, 생각만 해도......

아무튼 마태우스님은 너무 멋지십니다.

어머니께 드리고 좋아하실 모습 보는 걸 포기하시다니!^^


sooninara 2004-12-1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방학전에 재진이 담임선생님에게 상품권을 드리자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말고 몇명이 모아서..10만원은 너무 작다고 20만원 하자는데..그나마 우리학교는 단위가 적은편이라...학기초에 안주고 학기말에 드리니 뇌물이 아닐거라고 우리끼리 웃습니다..

안줄수도 없고 오며가며 정이라고 하기엔 부담스럽고..촌지가 문제지요.^^


비연 2004-12-1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stella.K 2004-12-1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하셨네요. 역시...!^^

하이드 2004-12-16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 얘기지만, 병원에서 의사선생님한테 드리는 촌지요. 수술 받고 드리기에 망정이지( 어떤게 관례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은 수술이 잘 안 되면 안 받고, 잘 되면 받고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수술 전에 주는 촌지는 참 거시기 하더라구요. 가뜩이나 병원비에 휘어지는 환자 가족들에게 가족의 생명을 담보로 한 수술에 대한 잘 부탁한다는 촌지는 안 줄 수 없더군요. 알아서 토해내야 하는데, 안 주고 있으니, 수술 한 번 하는데 의사들도 참 많아서, 그 의사들 다 챙겨준 돈도 수술비에 포함되는거라고 생각해버려야겠지요. 줄 형편이 되는 저희야 뭐 좀 깝깝한거 빼고 그렇다 치고, 병원비 내기도 빠듯한 중환자들이나 형편 어려운 사람들에겐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 될는지요. 그리고, 돈 안 주면, 수술할 때 신경 덜 쓸겁니까??

호랑녀 2004-12-16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아마 1, 20만원짜리가 아니었을 걸요? 제가 듣기론 박사학위도 심하고, 게다가 의과대학은 더 심하다고 하더군요. 뭐 돈 많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것만 문젠가요? 학위... 돈으로 사는 경우도 많던 걸요? 전부는 아니지만, 절반은 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의학박사님들 말이죠.

겨울 2004-12-1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 따뜻한 미담이네요. 마태우스님, 2005년에도 쭈욱~ 계속 뵙기를 소망합니다^^.

아영엄마 2004-12-1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멋진 남자~~ 아니, 멋진 교수님? 아니면 멋진 재벌? 그도 아니면... 바른 생활 사나이! -아, 오늘은 영 댓글 작문 실력이 안 나옵니다. 양해해주셔요.(__)

starrysky 2004-12-17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알라딘에 돌아와서 읽은 마태우스님의 첫 글이 이렇게 따뜻하고 멋진 글이라니 너무 좋아요!! >_<

저 스타리예요!! 기억하시나요? ^^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알라딘의 중추이신 마태님께서 건재하게 알라딘을 잘 지켜주신 듯해 기뻐요. 앞으로는 저를 잊지 않으시도록 자주자주 찾아뵐게요~ ^^

작은위로 2004-12-1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 다른 말은 있을수가 없어요. 멋있어요. 밖엔요...ㅎㅎ

가을산 2004-12-17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의 멋진 행동에 박수를~~! ^^ 짝짝짝!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병원에서 의사에게 촌지 주는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거 이상하네요..... 저는 수련의때 촌지라고는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새벽 3시에 소변 빼주고 구겨진 2만원 받아본 적은 있어요... --a )



촌지를 주던, 안주던 수술이나 진료에 차이를 두는 의사는 없습니다.

오히려 회진이나 드레싱 해주러 오는 의사에게 음료수 한 캔이나 따뜻한 격려, 상냥한 인사라도 해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단, 저~ 유명한 s대학병원만은 아직 은근히 촌지를 압박하는 분위기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다는 소문이 들리기는 하지만요...

아주 안좋은 전통이라 생각합니다.

BRINY 2004-12-1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위생에게 [성의]를 요구하는 건 의대만 그런가요? 아니면 박사학위만 그런가요?음...전 일본에서 논문심사비도 따로 안내고, 자비로 논문 인쇄도 안하고, 편하게 석사학위 땄는데...내년에 국내 학위 받을 일이 걱정되네요. 논문도 수십부 찍어서 돌려야한다고 하고, 논문발표 후 회식비도 내야한다고 해서요...

마태우스 2004-12-1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아마 의대만의 일은 아니겠지요? 전 의대밖에 모르지만, 의대가 좀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가을산님/음, 그렇군요. s대학 병원만 그런 거군요! 제가 조교 때, 임상하는 친구들은 촌지 얘기를 꽤 많이 했던 같아요....지금은 조금 나아졌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작은위로님/님의 말씀이 큰 격려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스타리님/안그래도 오매불망 기다렸답니다. 이따가 인사드릴께요. 그리고... 헤헤 님이 오실 때쯤 한건 해서 좋네요^^

아영엄마님/멋진 엄마께서 왜 그러세요 부끄럽게...

우울과몽상님/아유 제가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데 이렇게 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이라고 뭐가 특별히 달라지겠습니까 호호

호랑녀님/학위 말이죠, 거기에는 총체적인 난맥상이라 할만해요. 임상 하는 분들에게 박사를 요구하는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스 하이드님/안주면 불안한 게 촌지지요. 그리고 의사 중에는 촌지를 받으면 신경을 더 써주는 사람이 분명히 있지요. 그런 사람이 있으면 기억에 오래 남고, 의사가 다 그런 줄 알지요. 하지만 뭐, 대개는 퇴원할 때 촌지를 주니까....

스텔라님/부끄럽습니다.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비연님/제가 잘났다고 하는 글에 이렇게 격려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수니나라님/뇌물은 아닐지라도, 관행화되면 부담은 갈 것 같아요. 강남에 사는 우리 누나의 경우를 보면 촌지가 만만치 않은 듯...

로드무비님/헤헤헤 칭찬 받았다.... 언제 저를 주인공으로 로드무비나 하나 찍어 주세요!

올드핸드님/아, 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한 일이 아주 큰 일처럼 느껴지는걸요^^

nemuko님/90만원이라... 교수님들은 그거 없어도 잘 사실 수 있는데.... 글구 저 그리 좋은 교수 아닙니다..

모과양님/같은 의료인끼리 띄워주기 없기!!!!^^

maverick 2004-12-1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칭찬받으셔야 하는건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여럿이 같이 받는 분위기에서 묻어갈 수 있는데 조용히 튀지 않게 혼자 거절하셨다는거... 원래 죄책감은 군중심리속에 묻히잖아요. 공범이 있으면 느끼지도 행동하지도 못할텐데... (일어서서) 짝짝짝! ^^

코마개 2004-12-2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서재 뒤적이다가 이 글도 보게 되었는데 갑자기 대학원에서의 일들이 생각이 나며 혈압이 확 오르는 느낌입니다. 교수에 관한 안좋은 추억이 많아서....그 상품권 받으셨으면 오래 못사셨을 겁니다. 학생이 무지 저주하면서 샀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