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주 화요일날 선을 보게 되었다. 결혼할 생각이 하나도 없으면서 선을 보는 건, 순전히 벤지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벤지가 소변을 아주 빈번하게 보는데, 옛날처럼 화장실에 싸는 게 아니라 자기도 귀찮은지 아무데나 싼다. 예전엔 자기가 자는 방에다는 안싸더니, 이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난 틈만 있으면 벤지가 저질러놓은 잔해들을 엄마 몰래 닦곤 하지만, 그게 워낙 광범위하게 저질러지는지라 들키는 경우가 많다. 벤지의 표적이 된 장소들은 까맣게 썩어들어가니, 모를 수는 없다. 참다못한 엄마는 벤지를 골방에 가까운 곳에다 격리시킬 생각을 하셨고, 최근 들어 대대적인 압력을 가하고 있는 중이다. 엄마의 말씀, "나도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다!"
그때마다 난 "벤지가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고 변호를 하지만, 그렇게 버틴 기간이 1년을 넘어서고, 또 벤지가 여전히 건강하자 어머님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난 선을 본다. 벤지를 탄압하지 않는 조건으로. 선이라면 그래도 결혼할 의사가 쥐꼬리만큼이라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여자에게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상황이 이런데.
여자의 나이는 무려 36세란다. 공부를 하다가 늦었다고 하는데, 맨날 20대랑만 놀던 나는 "나이가 너무 많잖아!"라는 딴지를 부렸고 (난 더 많으면서!) 외모가 "귀엽다"는 중매장이의 말에는 "그건 안생겼단 얘기잖아!"라고 트집을 잡았다. 나도 못생겼으면서 말이다. 선을 보게 된 동기도 그렇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한번만 만나고 말 공산이 크니, 다음주 화요일의 만남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
난 선이라고 할만한, 그러니까 양가 부모님이 나오시고 어쩌고 하는 걸 딱 한번 봤다. 11년 전 서울의 모 호텔에서. 양가 부모님들이 모여 식사를 했는데, 어찌나 재미없고 지루하던지. 더욱이 우리 아버님은 내 수준낮은 유머를 끔찍이 싫어하셔, 헛소리를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 터였다. 내 상대였던 여자는 제법 마음에 들었지만, 그때의 난 너무 젊었고, 그만큼 내 주제를 몰랐었기에 애프터 같은 걸 신청하지 않았었다. 그 뒤부터 난 언제나 여자가 주변에 있었던 터라 선을 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선을 보지 않아서 그런지 선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감각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건 고기에다 소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러 가는 거지만, 프랑스에 유학까지 갔다는 그 여자가 그런 걸 좋아할 리는 없다. 그렇다고 카페에 앉아 스테이크를 먹고, 사이다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장면을 상상해보니 나가기가 싫어진다.
어머님은 실망하시겠지만, 난 이미 결혼을 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간 만들어 놓은 조직-술마시는 친구들을 말한다-이 너무 커져버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다는 소리다. 조직 관리를 위해 조직원들을 일주에 서너번씩 만나 술을 마시는데 어떻게 가정 생활이 영위되겠는가. 그렇다고 오랜 기간 시간과 돈을 투자해 이룩해 놓은 조직을 없앨 수는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 또한 이런 생활에 중독이 되어버려 다른 누군가와 같이 사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거다. 가정 생활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거의 100%에 달하는데, 내가 왜 억압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겠는가? 나뿐 아니라 나만을 믿고 있는 수많은 조직원들 생각도 해야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머님께 죄송하고, 내 자식을 볼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사시는 할머니에게도 송구스럽다만 인생은 내가 행복하자고 사는 것, 화요일 저녁에 김정은의 미모에 정준하의 유머를 갖춘 여자가 나온다 할지라도 마음이 흔들릴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