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3 - 구원과 욕망의 교차로, 실크로드를 가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3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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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3권이 나왔다. 1권과 2권이 중국과 인도를 다뤘다면 이번엔 그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미술이다. 중앙아시아는 지금은 이슬람을 신봉하지만 고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이들의 고대 미술품은 거의 불교 미술이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동과 서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에 있다 보니 인도와 그리스 양쪽의 영향을 받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간다라 미술이 그것이다. 미술에는 고금을 통틀어 많은 돈이 든다. 지금은 가난한 지역이지만 실크로드가 성행하던 고대에 중앙아시아 지역은 막강한 부를 가지고 있었다. 돈이 많이 드는 불교 미술품은 그래서 가능했다. 

 중앙아시아가 흥한 것은 실크로드 때문이다. 비단 이전 로마인이 입던 토가는 리넨이나 모로 만들었는데 질감이 거칠고 무거웠고 염색기술도 없었다. 그런 옷에 가볍고 질감이 부드럽고 총천연색에 아름다운 문양까지 있는 비단을 보니 로마인이 반할 수 밖에 없다. 로마는 비단에 열광했기에 한때 로마제국 예산의 10%가 비단구매에 사용될 지경이었다. 실크로드는 길 이름은 예쁘지만 그야말로 죽음의 길이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이 사막은 가장 어려운 모래 사막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로는 곤륜산맥과 알타이산맥, 천산산맥이 버티고 있어 사막이 유일한 통과로다. 그리고 길이 이렇게 험하기에 비단은 일단 로마로 가져가기만 하면 거의 100배의 가격을 받아낼 수 있었다. 

 워낙 길이 험하고, 도적떼도 많았기에 실크로드 상인들은 적게는 백마리 많게는 천마리 가량의 낙타가 이동하는 대상을 조직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오아시스 도시들은 이들을 상대로 통행세와 숙박, 낙타의 먹이를 제공하며 큰 부를 축적했다. 

 중앙아시아에는 바미안 대불이 있는데 이 불상은 6세기 당시 이지역을 지배한 에프탈이 만든 것이다. 바이안 대불은 높이만 무려 55m다. 암벽을 파서 대불이 들어갈 감실을 조성 후, 불상 모양으로 암석을 조각한 후, 그 위에 지푸라기를 섞은 진흙을 두툼하게 붙여서 세부를 조성했다. 그 후 표면을 석회나 스투코를 발라 완성한 것이다. 이 바미안 대불은 탈레반의 파괴해서 지금은 사진으로만 그 위상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인도 불교 문화 유산에는 석굴이 많다. 석굴은 불교에서 예배 공간이다. 고대 인도는 석굴을 성스럽고 신비로운 장소로 여겼다. 지금은 관광객을 위해 석굴을 밝게 해놓는 경우도 있지만 본디 석굴은 자연 빛만 잠시 들어오는 어두운 곳이었다. 이 어둠은 우주의 근원과 같았다. 석굴의 어두움은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지고 고요와 평온을 주었다 .그래서 석굴은 불교 신앙과 수행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초기 석굴은 그냥 비어있는 공간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석굴안에 부처의 부덤인 스투파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석굴에서 스투파가 있는 곳을 차이티야라고 한다. 차이티야는 말발굽 모양으로 조성되는데 스투파를 중심으로 탑돌이를 해야했기에 이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차이티야 주변에는 승려가 기거하는 사원인 비하라가 조성되었다.

 인도에는 초기에 뭄바이 지역에 석굴이 많이 조성되었다. 뭄바이는 상인이 배를 타고 서부를 오갈 때 거치게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부가 모이게 되어 석굴 사원이 많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뭄바이 일대는 용암으로 조성된 고원인 데칸 고원이 있어 용암이 역삼각형이로 굳어져 석굴을 파기 용이한 지역이 많았다. 승려들은 뭄바이를 오가는 상인에게 숙박과 먹기리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았고 상인들은 자신들의 기원의 의미로 돈을 기부했다. 그래서 뭄바이 일대의 석굴 사원은 초기 승려가 나중엔 상인, 왕족, 귀족이 건립의 주체가 되므로 후기로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화려해진다. 

 뭄바이 인근의 칼리 제8굴은 차이티야의 규모가 매우 크다. 입구에서 스투파까지 무려 38m이며 내부의 기둥 높이도 4m로 매우 웅장하다. 사실 석굴은 기둥이 필요 없으나 석굴은 마치 목조건물을 짓는 것처럼 지었기에 기둥아니 아치및 각종 건물 장식이 있다. 원래 스투파는 부처의 사리가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석굴의 스투파는 따로 제작해서 넣는 것이 아니라 석굴 그 자체를 파면서 같이 만들었기에 복발 안에 사리를 넣을 수 없었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무려 1000년간 만들어진 석굴이다. 때문에 초기 석굴과 후기 석굴의 변천을 자세히 비교할 수 있어 가치가 높다. 아잔타 석굴은 인도의 사타바하나, 바카타카, 굽타 왕조를 거치며 조성되었다. 아잔타에는 총 5개의 차이티야가 있는데 9-10굴이 초기 양식이고, 19.26,29가 후기 양식이다. 초기와 후기는 불상의 존재유무다. 초기 불상은 금지되어 없었고 후기에는 불상이 사원에 등장한다. 불상은 처음엔 스투파에 넣는 형태로 가다가 점차 크기가 커지더니 마침내는 스투파를 밀어내고 단독으로 존재하게 된다. 결국 가장 후기 아잔타 석굴에는 불상만 있는 불당이 등장하고 차이티야와 스투파는 사라지게 된다. 

 불상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부처의 외형에 대한 합의와 규칙이 생겨난다. 부처의 모습을 본딴 불상의 제작은 초기엔 금기였는데 그 기간이 오래되다보니 아무도 부처의 실제 모습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규칙은 32상 80종호로 32가지 외형과 80가지 세부특징이다. 불상은 1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시작된다. 32상 80종호는 사실 모두 구현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크게 3가지가 나타났다. 정수리가 우뚝 솟은 육계, 진리의 빛은 광배, 눈썹 사이의 흰털인 백호다. 여기에 동북아 불상에는 머리카락이 말린 나발, 세 줄의 목주름인 삼배가 추가된다. 삼배는 번뇌와 업, 고통을 의미한다. 

 간다라의 불상은 그리스의 곱슬머리, 복장의 영향을 받았다. 아무래도 불상을 만드는데 표본이 없다보니 그리스의 석상이 많은 참고가 된듯 하다. 간다라에서는 스투파를 봉헌용으로 작게 만드는 일이 흔했다. 봉헌스투파나 간다라의 탁트이바리 스투파는 모두 복발이 작아지고 기단이 넓고 높아진다. 그리고 이 기단에 불상을 비롯한 여려 조각을 넣었다. 

 마투라는 인도의 교통의 요지다. 갠지스강 지류인 야무나강에 접해 바다에서 내륙 진입이 용이하고 콜카타와 뉴델리를 잇는 도로와 철도가 지난다. 간다라는 동서의 영향을 받았지만 마투라는 인도내의 영향이 모인 곳이다. 그래서 간다라 불상과 다르게 마투라 불상은 동양인의 모습에 가깝다. 코가 낮고 동글 넓적하다. 또한 몸도 더 통통하며 표정도 심각한 간다라에 비해 웃는 모습이다. 

 불교엔 부처 이외에도 보살이 있다. 보살은 부처는 아니지만 속세에 머무르며 깨달음을 구하는 존재다. 처음에 보살은 부처가 된 석가모니와 아직 아니었던 싯다르타를 구분하기 위한 용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부처를 총칭하는 말이 되었다. 보살이 주목받은 것은 부처가 되는 것의 어려움 때문이다. 부처는 이미 속세를 떠났기에 잡을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보살은 현존하는 사람들로 신자들의 마음과 장신구, 금전등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을 만들 수 없던 불상을 대신해 보살을 먼저 상으로 만들고 보시했다. 

 그리고 미륵보살이 등장한다. 석가가 열반을 들어 현실에서 사라지자 사람들은 다시 부처가 나타나기를 희망했고 그 희망을 담은 것이 미륵 보살이다. 불교에는 석가를 포함에 부처가 된 과거 7불이 있는데 미륵보살은 부처가 될 거란 수기를 받은 자로 사실상 이들과 동급인 8불급으로 미래불이다. 미륵보살 조각은 그래서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아직 속세에 머무르는 자기에 값비싼 장신구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고, 수행을 계속하며 여기저기를 다녀야 하기에 손엔 물병을 들고 있는 것이다.

 2세기 경 간다라와 마투라에는 새로운 신앙이 등장하는데 구원이 핵심신앙으로 등장한다. 개인의 수행을 통한 해탈을 강조하는 불교에 누군가에 의한 구원은 원래 없는 개념이다. 아미타 신앙과 미륵 신앙이 그것이다. 아미타는 부처중 하나로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해줄 아미타불이 있는 세계로 내려가는게 아미타 신앙이다. 아미타불은 서방 정토에 머무른다. 나무아미타물은 바로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아미타 신앙으로 불교의 중심은 개인의 수행에서 대중의 구원으로 바뀐다. 이는 당시 인도의 상황과 관련하는데 불교는 초기 인기가 있었지만 개인의 수행은 현실에서 너무 고되고 어려웠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부상한다. 사람들은 쉬운 힌두교에 이끌렸기에 아미타 신앙이 대응하는 성격으로 생겨난 것이다. 

 5세기경 간다라는 지역을 사수할 마땅한 왕조가 없었다. 전란이 잦아지자 조각을 빚는 장인들이 피란해 아잔타나 사르나트로 이주한다. 이 두 지역은 거리가 상당함에도 불상도상이 비슷해진다. 그래서 5세기 인도 전역의 불상이 유사해진다. 인도풍이던 마투라 불상도 간다라 영향을 받아 통견이란 옷이 생기고 얼굴표정이 근엄해진다. 

 인도는 그림 재료가 부족해 유구한 역사에도 회화가 다른 나라보다 늦다. 인도의 그림은 원래 입체적이었으나 이슬람의 영향 이후 평평해진다. 그림은 벽면에 그리는 경우 진흙과 소똥, 짚을 반죽해 반죽이 완성되면 돌벽에 반죽을 바르고 표면을 정리했다. 여기에 밑그림을 그리고 회반죽을 그 위에 바른 후, 그것이 마르기전 물감으로 채색하여 완성했다. 

 서역에 있는 도시 호탄은 실크로드의 서역 남로에 위치한 곳이다. 호탄은 부유한 곳이었으나 4세기 경부터 타클라마칸 서남부가 더 건조해지며 쇠퇴한다. 하지만 인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상대적으로 다른 도시보다 오래 세력을 유지한다. 간다라 불상은 부처의 양어깨에 빛이 불꽃처럼 나오게 묘사했고, 육계의 한 가운데 사리를 넣을 구멍이 있는게 특징이다. 이걸 호탄의 불상도 계승한다. 호탄은 도시 양편으로 백옥강과 흑옥강이 흐르는데 이 강은 곤륜산맥에서 발원하여 옥이 발견된다. 호탄은 강한 부를 바탕으로 라왁사원을 건립한다. 라확사원은 현재 사막에 의해 파괴되어 형체만 남았으나 원래 스투파의 높이만 34미터에 가로 42미터 세로 48미터의 내벽과 더 큰 외벽에 둘러싸인 큰 곳이었다. 라왁사원의 불상은 옷 주름이 와이자인게 특징이다. 간다라는 처진 유자고, 마투라는 그냥 유자이나 라왁의 불상은 몸통부분의 옷은 유자 다리 부분은 일자로 합쳐서 와이자형태였다. 이는 동북아에 수백년간 영향을 미친다. 

 호탄은 사천왕의 근원이기도 하다. 원래 사천왕은 인도의 토속신이나 불교에 수용돼어 동서남북 사방의 수호신이 된다. 초기 인도의 사천왕은 그래서 터번을 쓰거나 일반인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호탄은 사천원의 우두머리 다문천에 주목한다. 호탄은 주변에 침략세력이 많았기에 그를 강한 수호신으로 그려낸다. 마치 강한 무장 같은 이미지로 탈바꿈하는데 이것이 동북아에 이어진다. 

 쿠챠는 호탄과 다르게 서역 북로에 위치한다. 서역북로는 호탄과 다르게 굴을 파기가 용이해 석굴이 발달한다. 서역 석굴의 60% 여기에 위치한다. 3-9세기 쿠챠에는 키질 석굴사원이 조성된다. 쿠챠는 인물도 유명한에 왕자였던 쿠마라지바는 간다라에 유학했다가 중국으로 끌려간다. 여기서도 오래 체류하고 승려였음에도 자식을 낳게 된다. 중국은 그에게 경전을 번역했는데 쿠마라지바는 산스크리트어와 한문에 모두 능통했기에 경전을 번역해 중국의 불교 발전에 크기 기여한다. 

 키질 석굴사원에는 스투파가 없다. 대신 중앙주, 즉 기둥이 하나 있다. 이 기둥을 중심으로 탑돌이를 했다. 멀리 떨어진 중국의 운강 석굴도 이것의 영향으로 스투파 대신 중심주가 있다. 키질석굴사원의 절반은 아치형 천장인데 절반은 모줄임 천장이다. 모줄임은 모서리를 위로 갈수록 좁게 하여 천장을 막는 건축 공법이다. 유목민의 공법으로 추정되는데 놀랍게도 삼국에서 고구려도 모줄임 천장이 있다. 바로 쌍영총이다. 삼국중 고구려만 썼는데 쿠챠의 영향을 고구려가 받았다기 보다는 양자 모두 자주 접하는 유목민의 영향을 받은 듯 하다. 

 키질 석굴사원엔 많은 그림이 있는데 대부분 인물의 눈 부분이 파괴되어 있다. 이는 이슬람의 영향이다. 이슬람은 사악한 눈을 바라보면 불행해진다 믿는 경향이 있는데 불교사원의 그림의 눈을 이런 이유로 파괴한 것이다.

 놀랍게도 무려 1500점의 서역 작품이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국주의를 운영한 한국에 이렇게 많은 서역 그림조각이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로 인해서다.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는 일본 정토진 종의 후계자로 부유한 절의 계승자로 아버지가 백작이었다. 그는 27세에 실크로드를 방문해 마구잡이로 벽 그림을 훼손하여 조선으로 들여왔는데 부유한 그도 재정난에 빠져 수집품중 상당수를 판매하였고, 이를 매수한 자가 이를 조선총독부에 기부한다. 오타니 고즈이 콜렉션은 전후 급박한 상황에서 일부는 일본으로 일부는 조선에 남게 된다. 한국이 본의 아니게 약탈 미술품을 대거 소장하게 된 경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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