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어스 -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1940년대 독일 히틀러의 나치는 정권을 합법적으로 획득했다. 이 정치적 결과의 여파는 2차 세계대전이다. 세계 규모의 전쟁으로 군인과 민간인 수천 만이 죽었다. 그리고 그 중 전쟁 당사자도 아닌 유럽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은 무려 수백 만이 학살 당했다. 우린 대개 이것을 독일인이 자행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유대인의 학살에는 상당 부분 현지인의 적극적 협력이 있었다. 책 '블랙 어스'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 같은 입체적인 분석이 담긴 책이다. 우선 히틀러에 대해 언급한다.


1. 히틀러의 세계관

 히틀러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인간은 동물의 하나로 자연의 풍요를 차지하려는 투쟁에서 차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차지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본성에 반하는 죄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겐 약자인 다른 이들의 생존을 허용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범죄다. 그는 낙원을 창조의 조화가 아니라 인류의 투쟁으로 생각했고 이는 기독교적 열명을 생물학의 리얼리즘과 결합한 것이다. 

 그는 인간 종족이 생물종과 비슷하다 생각했고, 여전히 하등종족에서 고등종족들이 진화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하등종족과 고등종족이 교배가 가능하지만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었고, 종족투쟁으로 유사종족이 짝을 이루고 다른 열등 종족은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법칙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국가나 민족도 중요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우수한 종족이 자연 투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히틀러에게 2차대전은 독일 국가의 승리라기보다는 우수한 종족이 자연법칙을 통과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그는 만약 독일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독일 민족이 약했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런 왜곡된 투쟁적 자연관을 가진 히틀러에게 유대인은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였다. 히틀러에게 인간의 원죄는 정신과 영혼의 범죄가 아니라 다른 인간 종족을 투쟁의 대상이 아닌 협력하는 동료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를 만든 것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지구와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의 목적은 자연 투쟁이 아닌 인간의 질서로 도치시키는 초자연적 관념을 생성해 냈는데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그런 일련의 것들이었다. 

 히틀러에게 윤리학 같은 것은 그 자체가 오류이며 유일한 도덕이라 할 만한 것을 자연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종족에 대해 충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비종족적인 것은 모두 유대적인 것이 되며 보편 관념은 유대인의 지배도구가 된다. 이 보편 관념은 비유대인의 정신에 침투하는데 이것은 그 종족 공동체의 정신을 약하게 만들어 유대인을 이롭게 할 뿐이었다. 

 이런 유대인의 왜곡으로 인해 강자가 약자를 굶겨 죽이는 적자생존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오히려 최적자가 희생되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때문에 유대인이 존재하는 한 독일인 같은 강자들은 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차 대전 때 독일이 패배한 것도 세상의 전체구조에서 유대인에 의해 어떤 부분이 왜곡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만약 1차대전 개전 초기 독일이 효과적으로 유대인을 제거했다면 독일은 패배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독일의 지배를 위한 투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열등한 종족을 굶겨 죽여 그들의 땅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이다. 강자로써 독일인은 다른 열등종족을 지배해야 하며 그들을 유대인에게서도 해방시켜야 한다. 즉, 해당지역을 점령하고, 그 지역의 유대인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히틀러의 정책은 식민주의이면서도 반식민주의의 모순을 띄게 된다. 

 히틀러는 과학기술도 부정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의 과도한 발전은 인간의 생존력을 지나치게 높여 적자생존이라는 투쟁의 결과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과학기술의 발전은 종족투쟁에서 종족의 우월성을 보인다는 면에서만 유효했다. 히틀러는 농학을 부정했는데 그것이 자연에 개입하여 더 많은 땅을 취하지 않고서도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하여 투쟁 논리를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과학은 한계가 분명하고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잔혹한 자연을 대면하지 못한다고 보았으며 그들을 자연이 가혹하게 작용하는 이질적인 곳으로 보내면 정글의 법칙에 굴복할 수 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히틀러에게 그곳은 시베리아 였으며 실제로 히틀러는 초기 유대인을 학살하기 보다는 그런 곳으로 보내버려서 치워버리려는 생각을 했었다.

 유럽에 대한 히틀러의 세계관도 독특하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인정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독일과 피를 나눈 우수종족이고 대제국의 건설자로 이를 입증했다. 그는 세계를 구분했는데 우랄산맥까지의 유럽대륙의 건설은 영국과 미국이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으며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영미와의 아마겟돈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독일은 1차 대전 당시 영국에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히틀러는 이것이 식량을 확보하여 남에게 주지 않을 능력으로 일종의 지배력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넓은 유럽 대제국을 확보하는게 우선 과제였다. 

 유럽제국의 건설로 눈을 돌린데는 독일이 차지할만한 식민지가 없다는 현실적 문제가 관련한다. 독일은 강했으나 늦게 통일한 국가로 남은 땅은 유럽 뿐이었다. 하지만 유럽대륙은 이미 꽉 찼었는데 인종주의 관념이 그 해결책이었다. 이는 기존 유럽제국의 시각으로 이미 원주민이 있음에도 그들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었다. 독일에겐 이 대상이 동유럽인이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3국, 벨라루스인 등이다. 러시아 슬라브 족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이런 열등종족들은 국가를 건설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점령할 때 해당 국가를 철저히 파괴한다. 마치 전에 없었던 것처럼. 이들이 현재 만든 정부는 환영으로 유대인이 만든 보편관념에 의한 껍데기일 뿐이다. 러시아는 본질적으로 독일인 상층계급과 지식인이 만든 창조물이었다. 우크라이나 인은 더 우습게 보아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식민지인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 7가지 정책을 추진한다. 일당 국가, 폭력 전문 집단 생성, 정복지를 무정부 국가 상태로, 제도들의 이중 교배, 독일 유대인의 세계화, 전쟁의 재정의다. 


2. 소련

 독일은 다른 제국에서 토지를 강탈하는 재식민적 경향을 , 폴란드는 다른 제국들을 해방하여 그 식민의 이탈에 기여하는 탈식민적 경향을 띄었다면 소련은 내부식민국가를 지향했다. 스탈린은 놀랍게도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토착민에게 쓴 정책을 자국민에게 쓰고 싶어했다. 소련은 자본주의와 단절되었다. 하지만 체제 경쟁으로 더 성공해야 했기에 유일한 희망은 인적자본을 포함하여 소련 국경안의 자본을 잘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부식민화의 핵심은 농업집단화로 사유지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일부는 농업 노동자, 나머지는 도시나 수용소 노동자가 되었다. 이는 거센 저항과 대규모의 기아를 초래한다. 특히 우크라나이 지역에서는 대량기아가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하 현지인들은 소련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게 된다.

 내부에 우크라이나 인들이 상당수 있었던 폴란드는 이런 기아사태에도 불구하고 지원이나 비판을 하기는 커녕 자국의 이익을 위해 1933년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우크라이나 인들은 폴란드에 대해서도 상당한 배신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인들에게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그 체제를 부수는 것이 희망이 된다.  

 이런 우크라이나의 사정은 히틀렁게 상당한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 인들을 열등종족으로 보아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3. 폴란드

 폴란드는 1차대전의 결과 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지위는 크게 불안했다. 서로는 독일이 동으로는 소련이 있었다. 폴란드는 균형외교를 추구하며 소련과 독일 양자와 모두 불가침 조약을 맞는다. 동상이몽이었다. 이 상호간 불가침 조약에 대해 폴란드는 현상유지에 대한 양국의 약속이라 믿었고, 독일은 폴란드가 소련과의 군사행동 협력에 나섰다고 보았으며, 소련은 폴란드가 소련의 협력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소련은 1939년까지 자국내 폴란드 인들을 모두 정화해버린다. 폴란드는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이렇다할 항의조차 하지 못한다. 

 히틀러는 폴란드 인을 우습게 보았음에도 2차대전 전까지 폴란드를 협력자로 삼으려 했다. 이는 1차대전의 아픔 때문이었는데 당시 독일은 서로는 프랑스 동으로는 러시아를 모두 상대해 패퇴했기 때문이다. 이런 독일의 지정학 때문에 히틀러는 폴란드를 협력자로 하여 동쪽의 안정을 도모하고 소련을 같이 상대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런 제안은 현상 유지를 위한 폴란드에겐 위험천만한 생각으로 그들은 이런 독일의 제안을 계속하여 거절한다. 폴란드에게도 독일처럼 반유대감정이 있었다. 폴란드내 유대인은 3백만으로 가장 큰 유럽 내 유대인의 터전이었다. 그만큼 자국내 유대인의 영향력도 컸고 이는 대공황 이후 더욱 강해진다. 


4. 오스트리아

 인구 5300만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1차대전으로 붕괴한다. 제국은 여러 개로 쪼개졌는데 오스트리아는 수도 빈과 독일어권 지역으로 인구 700만의 소국이었다. 제국의 가장 부유한 곳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되었다. 광대한 국내시장도 붕괴하였다. 그래서 신생 오스트리아 인은 정체성이 없었고 자신을 독일인이라 생각하였다. 

 베르사유조약은 이런 위험성을 인지하여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 금지를 명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히틀러는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싫어하면서도 통합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대공황 때 농업국인 오스트리아는 상당한 고난을 겪었지만 독일은 이를 먼저 극복하고 오스트리아 노동자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이에 오스트리아는 큰 감명을 얻는다. 

 독일은 군사적 팽창 정책으로 막대한 재정 적자에 시달린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대공황으로 인한 보수적 경제 정책으로 외환과 금 보유가 충실했다. 이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오스트리아는 동맹인 이탈리아로부터 버림을 받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도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에 슈슈니크 정권은 히틀러의 침공협박에 스스로 나라를 지킬 의사가 없다고 표명함으로써 자연스레 독일에 합병된다.  

 이후의 일은 놀랍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나치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홍위병이 되어 나치의 구호를 외치고 유대인을 폭행하고 찾아내어 거리에 무릎을 꿇리고 청소시키는 망신주기를 시킨다. 재산도 강탈하는데 이 충격으로 오스트리아 내 유대인은 수백명이 자살한다. 


5.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티아는 독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산악지대를 베르사유조약에서 요구한다. 이는 승인되었고, 그들은 다민족국으로 자유주의 헌법을 만든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국의 부유한 지역을 차지해 유럽 최고의 군수산업국이 된다. 

 히틀러는 이를 탐내 체코 침공을 선언한다. 1938년 뮌헨에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지도자들은 놀랍게도 이 침공을 승인하여 체코가 독일에 영토를 이양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체코의 유대인들은 자신의 국가가 파괴되고 재산권 상실의 공포에 빠진다. 그리고 이는 실현되어 독일은 체코 내 금융, 산업 자산의 1/3을 헐값에 탈취하다. 


6. 폴란드 합병

1938년 11월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상당부분을 병합한다. 오스트리아의 재정과 체코의 무기 여기에 900만의 주민이 제3제국에 추가되었다. 독일은 폴란드의 영토 양도를 원했고 그 대가로 소련과의 전쟁, 폴란드내 유대인 문제 해결, 우크라이나 지역 영토를 약속한다. 폴란드는 전쟁을 원치 않았기에 이를 거부했고,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에 폴란드를 끌어들이려는 지난 5년간의 노력을 뒤로 하고 침공을 결정한다.

 히틀러는 1939년 8월 20일 소련과 리벤트로프-밀로로프 협정을 맺는다. 핀란드, 발트3국, 폴란드를 소련과 독일이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폴란드는 서부는 독일로 동부는 소련으로 쪼개지게 된다. 히틀러는 서부 폴란드에서 인텔리를 몰살한다. 그리고 1941년 유대인은 게토에 수용한다. 히틀러는 이들을 프랑스를 격파한 후 그들의 식민지인 마다가스카르로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쉽게 격파했으나 해상을 장악한 영국에 의해 대규모 해상운송이 불가능했다. 이에 선회하여 소련을 침공해 유대인을 보내버릴 장소로 시베리아를 선정한다. 

 동부 폴란드에서는 소련에 의해 거의 30만 폴란드 시민이 굴라크로 추방되었다. 소련의 입장에선 폴란드 장교단이 위협이었다. 그들은 나라의 군사, 교육, 정신적 토대였다. 그래서 모두 제거한다. 폴란드 남자가 사살되면 그 가족은 추방되거나 착취되었다. 소련은 민족차별을 범죄로 규정한 나라로 공식적으로 반유대주의는 범죄였다. 하지만 소련의 반자본주의적 행태가 유대인을 괴롭힌다. 소련은 폴란드 통화를 폐지시켜 유대인의 재산을 소멸시켰고, 이로써 채무도 같이 소멸되어 주요 채권자인 유대인에 큰 손실을 안겼다.  


7. 홀로코스트

 독일이 동유럽을 병합하고 침공하며 히틀러가 사전에 국내에 조직했던 특수임무단이 위력을 발하게 된다. 이들은 1941년 독일 군경과 함께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수많은 민족주의자와 협력하게 된다. 이 집단들은 6개월간 같이 집단 학살 기술을 개발한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대량학살을 억압당한 민족들이 추정상의 지배자인 유대인에 터뜨린 정의로운 분노로 포장했다. 하지만 동유럽 현지에서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히틀러의 생각과는 다르게 종족적 동기가 아니라 정치적 동기였고 극히 일부에게만 향했다. 

 이에 당황한 히틀러는 과거 소련에 점령당했다 독일에 점령당한 이 이중점령지에서 소련에 점령된 경험을 이웃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꾸려 한다. 현지인들 역시 소련 점령하에서 협력한 경험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존과 죄를 씻기 위해 독일에 협력한다. 마치 조선에서 친일파가 미국에 빠르게 부역한 것과 마찬가지다. 

 독일은 유대볼셰비즘에 입각해 공산주의는 결국 유대인의 작품이고 유대인을 공산주의자로 정의하면서 사실상 소련 부역자들을 대개 용서한다. 그 결과 독일과 현지인의 합작으로 대량학살이 가능해지게 된다. 

 폴란드에서는 지역에 따라 학살의 양상이 크게 달랐다. 폴란드 북동부는 유대인 학살이 적었던 반면 남동부에서는 학살이 많았다. 남동부에는 우크라이나 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이들은 국가설립을 위해 나치에 기대하는 것이 많았기에 협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현지인들은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을 죽임으로써 정치적 사면을 받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재산도 하나의 목적이었다. 유대인이 사라짐으로써 그 재산의 강탈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동유럽을 점령하면서 기존 국가를 파괴하고, 지식 계층과 군을 몰살한다. 그리고 이런 강압적 분위기에서 상당수 현지인들이 소련에 협력하게 되었으며 재산상의 손실도 컸다. 때문에 후에 독일이 점령한 이런 이중 점령지에서는 소련의 재산 몰수와  나치의 반유대주의의 결합으로 비 유대인이 유대인을 죽일만한 물질적 유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물론 점령이 주민의 상당수는 나치의 기대와 다르게 분별없는 반 유대주의자라 종족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어디나 소련에 적극 협력한 경찰이나 의용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수만에 이르렀다. 

 이런 이중점령지에서는 이 같은 요인으로 인해 유대인의 사망률이 무려 97%로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놀랍게도 이는 소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소련의 영토를 상당히 많이 점령하는데 이들은 상당히 나치에 협력적이었다. 이들은 공산정책으로 재산을 빼앗기고 기아를 겪었으며 소수 민족의 경우는 몰살당하기도 하였다. 소련의 정책은 내부간의 고발 문화를 권장하였는데 이런 상태에서 소련시민에게 나치에 대한 협력은 소련정책 협력이라는 범죄에 대한 손쉬운 세탁이었다. 그리고 소련시민들은 나중에 소련 세력이 회복하자 바로 다시 판을 바꾸게 되고 대조국 전쟁으로 자신들이 유대인 이웃을 학살한 행위를 덮어버리게 된다. 1941년말까지 나치가 소련 시민의 협조를 받아 소련 점령지에서 학살한 유대인의 수는 100만에 가깝다.

 독일의 수용소는 처음엔 학살장소가 아니었다. 아우슈비츠 정문의 문구처럼 이 장소는 강제 노역의 장소였다. 독일에게 사로잡힌 유대인의 운명은 독일의 사정에 따라 달랐는데 노동력이 절실할 때면 잠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노동력보다 식량이 절실할 때면 살해되었다. 아우슈비츠는 악명이 높지만 사실 대부분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장소는 트레블린카, 베우제츠, 소비부르, 헤움노다. 

 혹자들은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전쟁 중 학살을 몰랐다고 하지만 당시 학살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는 불가능하다. 독일 내에서 학살이 처음부터 정해졌던게 아닌 만큼 수차례의 정책적 토론이 있었고, 전장과 수용소에서 학살에 참여한 이들의 편지가 가정으로 송부되었다. 심지어 일부 가족은 수용소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독일은 거의 전체적으로 학살에 대한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이를 인지했다.

 독일의 학살은 3가지 방식으로 변화하였는데 처음엔 구덩이 위에서 사살하였고, 나중엔 기차칸에 가두고 내연 기관의 배기가스를 투입하여 질식시켰고, 마지막은 가스실이었다. 가스실에서 사용한 시안화수소는 원래 폴란드인 수감자 수용소 훈증에 사용했던 것이다. 나중엔 소련 포로 살해에 그리고 유대인 살해로 이어졌다. 

 유대인의 학살엔 국가파괴도 관련한다. 나치의 점령지중 국가가 파괴된 곳에서 학살은 쉽게 자행되었다. 반유대주의가 있었을 지언정 국가가 존속한 곳에서는 그 시민을 보호하는 기관과 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덴마크와 에스토니아는 모두 나치에 점령당했는데 에스토니아는 사전에 소련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었고 덴마크는 나치에만 점령당해 그렇지 않았다. 나치는 덴마크 국가 파괴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덴마크는 주권을 유지하며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일부 유대인은 동유럽에서 노동력 부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동부유럽은 2차 대전 당시 농업지대로 기계화는 없었고, 인력과 축력에 의한 노동집약적 농업이었다. 대공황의 강타로 시장에서 분리되어 자급자족적 농업이었다. 독일은 소련 침공 때 운송수단으로 수백만 마리의 말을 사용했으며 동유럽에서도 말을 마구 잡이로 징발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독일 내 노동력이 부족하자 처음엔 고용의 형태로 나중엔 징발과 강제의 형태로 동유럽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수백만의 동유럽 사람들이 독일로 끌려가게 되었으음로 동유럽의 농가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경험하게 된다. 때문에 나치를 피해 돌아다니는 유대인 아이들은 노동력의 수단으로 구원의 손길을 얻기도 한다. 

 그외에도 결혼이나 결혼의 전망, 성적 욕구 등은 유대인에게 또 다른 생존의 기회가 되었다. 그 외에도 일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유대인을 구조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대인을 집안에 들이는 것은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였고, 반면 고발하면 부족한 식량상황에서 설탕과 소금, 보드카등을 얻을 수 있었으며 근심걱정이 사라지게 되었다. 때문에 보호보다는 밀고가 보다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8. 미래의 홀로코스트

 히틀러는 생활 공간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량학살로써 지구를 회복하겠다는 계획과 독일인 가족에게 더 나은 삶을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이처럼 생활 수준이 삶과 혼동되면 부유한 사회가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더 가난한 사람을 공격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인류는 이런 위기를 겪고 한다. 녹색 혁명이후 전 세계 식량은 안정되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2010년 농산물 가격이 치솟자 중동에서는 항의 시위와 혁명, 민족 정화가 자행되었다. 때문에 장래의 식량 부족은 국가의 엘리트로 하여금 히틀러처럼 정치와 과학간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지 선택하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산업화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로 기후 위기를 겪고 있다. 현재 1.5도가 상승한 상태가 이대로라면 금세기 안에 4도의 상승도 예측된다. 이런 기후 위기로 전례없는 폭풍이나 가뭄에 발생하는데 이는 기본적인 자원의 안전에 대한 예상을 뒤흔들게 되고 사람들은 이에 히틀러식의 정책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기후 위기는 세계적 문제이므로 세계적 해법을 요구하나, 일부 지역에서는 그 세계적인 적을 규정하는 것이 한 가지 확실한 해법이 된다.

 아프리카는 지금도 경작 가능한 토지와 식수가 부족하다. 하지만 허약한 소유권과 부패한 정권, 그리고 전 세계 미개간 토지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 아시아 식량 안보의 핵심 계획이 되어 버렸다. 현재 중국은 일인당 경작지 공급이 세계 평균의 40%에 불과하고 이 마저도 연간 100헥타르씩 감소하고 있다. 중국은 식량 자급이 불가능한데 과거 중국 공산당은 대규모 기아와 경제적 풍유를 모두 가져온 바 있어 식량안보에 무척 민감하다. 그래서 중국은 아프리카를 자국의 식량 안보의 해결책으로 생각한다. 

 식수도 마찬가지다 80억 인구중 10억은 생존에 필요한 하루 1.9리터의 물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10억은 위생에 필요한 하루 19리터의 물을 확보하지 못한다. 중국의 일인당 물소비는 아직 세계 평균의 1/3에 불과하다. 중국인 다수가 의존하는 물은 빙하가 녹은 물이며 중국의 민물 절반과 지하수 상당수가 이미 오염으로 사용이 어렵다. 향후 온난화로 인한 물부족으로 중국을 물이 풍부한 시베리아로 향할 가능성이 있다. 

 중동에서는 국가가 약하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있다. 이들은 오랜 기간 미국인과 영국인, 유럽인을 전 지구의 적으로 규정해왔다. 이들의 이런 반세계적 사고는 전 지구적인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에 용이하다. 중동에서 기후 위기 및 경제위기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위기가 발생하면 유대인은 손쉬운 희생양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런 위기의 해결책으로 의외로 국가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홀로코스트는 국가가 파괴된 곳에서 자행되었다. 이런 저런 불만이 있어도 국가는 권리의 인정과 보증, 보호 역할을 하기에 이런 현상을 지역에서 방어한다. 또한 복지국가도 중시한다. 성공적 복지국가는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한 국가내 극우주의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낙후되는 불평등이 심한 경우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기술의 꾸준한 투자도 방법이다. 히틀러는 과학을 부정했지만 현대의 과학기술은 기후 위기 시대에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물부족은 해양담수화 기술의 발전으로 해결이 가능할 수 있으며 식량문제도 수직 농업이나 배양육 등의 문제로 해결이 가능할 수 있다. 저자는 연대와 우리의 과거로부터의 학습도 강조한다. 현재의 우리는 생각보다 히틀러로부터 멀리 나가지 못했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우리가 연대하지 않고 특정 세력을 전 지구의 희생양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히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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