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 고종 즉위부터 임시정부 수립까지, 개정판
김태웅.김대호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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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근대사 중 고종 즉위에서 대한 제국까지 시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 29가지를 주제로 정리한 책이다. 당시 세계는 격변하고 있었고 한국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시기로 조선의 주체적인 면이 많이 부정되고는 하지만 책은 이것은 결과론적인 설명일 뿐 우리 나름대로의 노력이 드러났음을 보여준다. 물론 충분치 못했고, 방향성에도 문제가 있으며, 얼마 되지 않는 힘도 충분히 뭉치지 못했음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주 이유다. 

 우리는 강화도 조약으로 알고 있는 것의 실제 이름은 조일수호조규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은 기존 유교질서에서는 외교 관계를 조규나 장정으로 맺었다. 조선 역시 전통적인 관계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기에 조규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향후 청과는 조청상민수륙장정을 맺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일수호조규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교과서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문제로 관세 문제가 있다. 일본은 처음엔 조선 측에 5%정도의 관세를 허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른다. 전통적으로 일본 상인과 거래하는 조선 상인의 각 포구에 세금을 물려왔었기에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관세 문제는 이후 조미수호 통상조약을 맺게 되어서야 자주권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비싼 수업료를 치뤄가며 하나하나 근대 조약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이다. 

 갑신 정변은 급진 개화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당시 20-30대로 무척 이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으로 개혁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에 의해 민씨 일가가 적극 등용되어 급진 개화파 자신들의 입지가 크게 줄었다. 또한 정부가 심각한 재정 위기로 이렇다 할 개혁을 하기 어려운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불과 삼일천하로 끝나게 된다. 실패 이유로는 이들이 지나치게 젊어서 주변에서 신의를 얻기 어려웠다는 것, 이합집산하는 것처럼 보였던 개화 반대 세력들이 정변 시 의외로 결집한 것, 의지했으나 일본인 너무나도 쉽게 물러난 것, 마지막으로 백성의 지지가 없었던 것이 꼽힌다.  

 임오군란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된다. 장정은 언급한 것처럼 청과 조선의 전통적인 규정이다. 청은 이 장정으로 5% 관세율, 치외법권, 내지 통상권을 얻는다. 내지 통상권으로 인해 조선의 상인 집단이 큰 타격을 입는다. 이전만 해도 개항장의 조석 객주는 상품중개, 숙박업, 자금대여를 했고 기존의 외국 상인은 이 객주를 통해 물건을 사들이고 판매했다. 하지만 내지 통상권으로 객주가 배제되었고 유통단계가 줄어 청으로부터의 수입품 가격이 싸져 조선 상품의 경쟁력이 크게 상실된다. 청은 일본 상인을 압도했는데 양쪽다 유럽에서 수입한 물건을 판매하면서 청은 직수입해 판매했고, 일본은 청에 유럽에서 수입한 물건을 다시 수입해 파는 형태였기에 가격 경쟁력이 더 낮았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어찌보면 망해가는 조선의 마지막 보루였다. 하지만 패배했는데 책은 그 요인으로 4가지를 꼽는다. 우선 군사전문가가 아니었던 전봉준의 전술적 패착이다. 물론 무기나 훈련도 면에서 동학군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수가 훨씬 많았고, 지리적 우위가 있었던 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다음은 남접과 북접의 노선 차이다. 양자는 서로를 적대하기 까지 했고 보다 호전적이던 남접에 비해 북접은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은 늦은 봉기다. 청일전쟁으로 일본군이 7월에 경복궁을 불법 점령했는데 농민군은 10월에서야 봉기한다. 이 3개월 간 일본군은 후방의 불안한 없이 청군에 집중해 그들을 제압하고 편안하게 조선군까지 장악 후 농민군을 상대할 수 있었다. 농민군은 좌충우돌하느라 결정적 시기를 놓쳤고 빨리 올라오지 못해 충분한 병력 규합도 이뤄지지 않았다. 

 청일전쟁은 조선을 무대로 일어난 만큼 큰 피해를 안겼다. 일본은 전쟁 중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군으로 협박하여 각종 협정을 강제로 체결해 조선 내 병참기지를 건설하고 인부와 우마, 군량을 마구잡이로 징발했다. 말을 듣지 않는 조선인은 쉽게 살해하기도 하였다. 대포는 20문, 소총은 무려 2천정을 조선군에게서 약탈한다. 일본군과 관련자 20만을 위한 물자를 조선에 강요하였고 각종 성범죄를 일으켜 성병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청군과의 평양성 전투에서는 수많은 시체와 동물사체를 방치해 이질이 발생하였다. 결국 청일전쟁으로 조선인은 무려 30만이 사망하게 되는데 이중 주 무대였던 평안도에서만 6만이 사망하게 된다.  

 청은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자신들의 중화질서 최후의 보루인 조선을 사실상 상실하게 된다. 시모노셰키 조약으로 요동반도와, 타이완, 펑후열도를 상실하고 전쟁배상금을 무려 은 2억냥을 물게 된다. 이는 당시 청의 3년치 재정으로 청은 배상금을 내기 위해 유럽 국가에 차관을 빌려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된다. 여기에 청은 약체로 취급되어 유럽열강들의 마구잡이 침략에 더욱 시달리게 된다. 반면 일본은 서구 열강의 재평가를 받게 되며 사실상 열강의 반열에 올라선다. 또한 청에 조계를 설치하게 되어 청이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을 확보하게 되고 적자가 흑자로 전환된다. 그리고 청에게서 받은 배상금으로 제철소를 설립하고 배상금의 84%를 군비확장에 이용해 또 다른 침략을 준비하게 된다. 

 갑오개혁은 4시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894년 7월에서 -12월로 군국기무처가 중심이 되었다. 당시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간섭이 적어 조선의 자율성이 컸다. 2기는 12월에서 1895년 7월로 일본이 승리하고 농민군 마저 진압해 박영효를 내세워 내정에 개입했다. 일본인 고문관이 간섭을 했고 홍범14조가 반포된다. 3기는 1895년 7월에서 8월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 간섭으로 일본의 조선 보호국 시도가 실패한다. 박영효는 역모로 몰렸고 조선의 자율성이 다시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4기는 을미사변기로 1895년 8월에서 96년 2월까지다. 을미개혁 시기로 태양력, 단발력, 종두법이 시행되며 이로 인해 반일, 반정부 투쟁이 강화된다. 

 갑오개혁으로 조선은 사실상 근대사회로 편입된다. 군주권을 제한하고, 의정부와 내각의 결정권을 높였다. 8아문과 이를 관리하는 대신이 생겨난다. 탁지아문은 중구난방이었던 조선의 조세를 체계화하고 관리했다. 신분제도와 과거제가 폐지되었고, 학무아문으로 교육을 강화한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신변에 큰 위기를 느끼고 아관파천한다. 첫 시대는 병사를 일으켜 크게 움직이는 바람에 실패했으므로 2차 시도는 엄비를 통해 소규모로 실시해 성공한다. 고종은 엄비를 궁으로 불러들였고 당시 궁녀들인 수시로 궁과 바깥을 드나들었기에 엄비가 궁에서 나가는 가마 두 개를 이용해 세자와 함께 탈출한다. 아관파천으로 갑오정부 대신들은 몰락한다. 이후 박정양, 이완용, 이범진 등 러시아는 미국을 중시하는 관리를 등용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한다. 하지만 아관파천으로 여러 이권을 상실한다. 러시아는 삼림채벌권을 획득해간다. 아관파천 신 내각은 반일 왕권강화 세력이었다. 과거 의정부 시스템을 부활시키고 일본인 고문관과 교관을 파면하고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을 초청한다. 아관파천 이후 열강은 이전보다 적극적인 직접 투자를 통한 이권 약탈을 시도한다. 광산채굴권이나 삼림벌채권, 철도 부설권 등이다. 이에 대규모 사업에 필요한 필요한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투입된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3개의 의정서를 체결한다. 1차는 러시아가 유리해서 조선내에서 일본 상인과 균형을 맞추는 합의가 이뤄진다. 2차에선 일본과 러시아의 이익이 균형을 이루고 

3차에서는 러시아가 일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이는 당시 러시아가 만주의 뤼순과 다렌을 조차하여 만주에서의 이권을 강화했기에 일본을 달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결국 궁으로 돌아온다. 경복궁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기도 했고 방어가 어려웠기에 고민 끝에 경운궁으로 환궁을 결정한다. 훈련 받은 친위대 80명을 배치했고 수리 공사 후 환궁하게 된다. 돌아온 고종은 칭제건원한다. 고민이 있었으나 수많은 관료들이 찬성한다. 칭제건원을 국제사회가 인정하느냐가 문제였는데 공사가 반대의견을 냈던 러시아가 의외로 가장 먼저 이를 인정하고 축하전문을 보냈다. 일본도 조문하여 이를 인정한다. 당시 극심했던 조선 내 반일감정을 누그러트리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되니 조선과 큰 이해가 없던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도 제국 선포를 인정하게 된다. 가장 불만을 가진 건 청이었다. 청의 일부 사람들은 이를 청일전쟁의 패배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 내에 청의 상인이 상당히 많이 진출해있었기에 이들의 보호를 위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창간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주역 중 하나로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0년이 지나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의사자격으로 귀국해 신문을 창간한다. 서재필은 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다. 대한제국의 선포와 이에 따른 각계각층의 호응이 이어졌고 고종은 공사비의 20%를 지원한다. 독립신문은 순한글로 발행한 근대신문이었다. 신문은 무려 3천부나 발행되었는데 당시 신문 1부를 거의 200명 정도가 돌려보거나 공공장소에서 낭독을 통해 같이 읽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영향력이었다. 하지만 독립신문은 근대화를 이끌었으나 서구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전통을 지나치게 냉소하고 혐오하며 멸시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민중 역시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았고 의병은 심지어 도적으로 취급했다. 때문에 독립신문은 역사적 평가와는 달리 위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한 셈이다. 독립신문은 의회 설립을 추진한다.그들은 정부 25인 독립협회 선출 25인으로 구성된 중추원을 제안했으며 민의를 반영하는 하원에는 관심이 없었다. 

 간도는 아쉬움의 땅이다. 청은 자신들의 발원지인 이 지역을 신성시해 봉금정책을 폈다. 하지만 청이 약해지며 19세기에 봉금정책이 느슨해지자 조선 농민 다수가 세도정치를 피해 두만강 너머로 이주한다. 영국과 러시아의 위협으로 청은 1881년 봉금을 해제하고 자국민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킨다. 이로 인해 청인과 조선인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청일 전쟁 후, 청의 세력이 조선에서 약해지자 조선은 간도문제를 다시 거론한다. 그리고 1897-98년 조사를 하여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닌 쑹화강의 지류하고 확신한다. 1900년 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자 산둥성에서 수천명의 피난민이 발생하여 간도로 이주한다. 대한 제국은 이에 1901년 함경북도 국경에 경무서와 본서를 설치하고 200명 규모의 경찰을 파견해 자국민을 보호한다.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간도 시찰원으로 파견해 조사를 한다. 1903년 2만 7천여호에 10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간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청이 파견한 관리가 세금을 강요하고 변발에 호복까지 요구해 피해가 많았다. 이범윤은 청의 관리를 포박하고 납세의 의무가 없음을 선언한다.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북변간도 관리사로 임명했으며 현명한 이범윤은 정식 군대를 동원할 시 국제 문제의 발생을 우려해 사병을 조직해 조선인을 보호한다. 하지만 러일 전쟁 후 일본 통감부는 간도를 대한제국령으로 승인하려다 구미 열강을 의식해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에 일방적으로 양도한다. 대신 만주에서의 이권을 확보하게 된다. 

 러일전쟁은 일본 함대가 인천과 뤼순을 동시 기습 선제공격하며 발발한다. 일본은 뤼순을 핵심 목표로 삼았는데 해안 포대로 러시아군이 이곳을 요새화하자 점령이 불가능했다. 이에 대규모 육군을 동원한다. 하지만 방어가 강해 무려 3만이 사망하자 인근 고지를 점령하여 러시아 군의 동태를 파악해 극동함대를 제압하고 뤼순을 점령한다. 러시아의 사상자는 3만이었으나 일본군은 무려 6만이 사망한 승리 아닌 승리였다. 뤼순의 점령은 양국의 운명을 갈랐는데 일본의 승리를 점친 열강이 일본의 국채를 사들여 일본은 전비 확보가 유리해졌고 러시아는 국제적 위상이 추락하고 내부분열에 휩싸인다. 

 뤼순 전투 이후 양국은 만주 평텐에서 격돌한다. 러시아군 31만에 일본군 25만의 대전투에서 러시아는 9만 일본은 7만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일본은 여기서도 승리해 승기를 잡았으나 대규모 병력 손실로 더 이상의 전투여력이 남지 않았다. 반면 당시 인구대국 러시아는 본토에 충분한 병력이 남아있었다. 여기에 일본은 재정난도 심각했다. 하지만 1905년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며 전쟁수행이 어려워진다. 러시아의 발트함대는 220일간 지구의 3/4를 돌아 동해에 당도한다. 발트함대는 영국이 일본을 도왔기에 수에즈를 이용할 수 없었고 인도, 싱가폴, 말레이시아에 정박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패배했고 포츠머스 회담이 열린다. 

 이 회담에서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모든 일본의 권리를 인정하게 된다. 일본은 뤼순, 다롄의 조차권과 창춘 이남 철도 부설권, 북위 50도 이하의 사할린 섬에 대한 권리를 얻는다. 여기에 동해, 오츠크해, 베링해의 러이사령 어업권도 얻어낸다. 어이없게도 조선을 사실상 넘긴 이 조약을 중재한 미국의 루스벨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조약 후 일본에서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다. 1905년 9월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시작한 폭동으로 파출소 70%가 전소하고 1000명이 사상자가 생겼다. 일본인들은 러일전쟁으로 무려 20만 이상의 사상자가 생겼고, 전비부담으로 크게 가난해졌다. 이들은 청일전쟁처럼 막대한 배상금을 기대했는데 배상금은 전혀없었고 이권만 챙겨오니 이에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러일전쟁은 어이없게도 쑨원, 호치민, 네루등 아시아의 주요 지도자들에게 식민지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 이들은 이 전쟁을 찬양했는데 제국주의 일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의병은 구한말부터 꾸준히 발생했다. 하지만 내부 문제가 많았는데 가장 심각했던 것은 신분갈드이었다. 실전에 무능한 양반이 신분을 이유로 요직을 차지했는데 이는 전투력 약화와 갈등을 불러왔다. 실제 의병장 유인석은 평민 대장 김백선을 처형했는데 다른 양반 대장이 김백선을 제때 지원하지 않아 김백선이 이에 강하게 항의하지 군기 문란으로 처형한 것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1907년 경기도 양주에서 각 도의 13도 창의대진소라는 연합부대가 결성된다. 10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지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으로 물러나자 이합집산 흩어진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뚜렷했다. 하지만 의병의 전투력은 막강했다. 스스로 무기를 개량했고 일제의 것을 탈취하고 지리적 이점과 지역의 도움을 받아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일제는 1909년 9월에서 11월까지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을 실행한다. 이 과정에서 의병 1만 7천명이 사망하고 부상만 3만 7천명이 발생한다. 일제는 의병에 협력한 정황만 보여도 민가도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약탈하였다. 의병토벌엔 한국인 헌병 보조원 4200명도 합세했다. 이들은 대한제국 시기 하급군인 출신으로 악소배들이었다. 당대 지식인들은 의병에 대한 의견도 좋지못했다. 이들은 의병은 시대착오적인 무지몽매한 이들로 취급했고 그래서 무시했다.  

 1차대전의 종전과 파리강화회의에서의 민족자결주의가 널리 알려진다. 이에 고무된 일본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600명이 몰려 2.8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 이들 중 359명이 귀국해 3.1운동의 선두가 된다. 이들은 종교계의 대표인사들과 만나 독립선언문을 준비하는데 비폭력 만세운동을 원칙으로 한다. 3.1독립선언서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하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인사였다.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다. 기독교는 일제가 사립학교 법을 통해 종교 수업을 금지시키가 반발심이 컸고, 천도교는 민족 종교로 100만 신자에 막강한 자금력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조선의 억불정책에서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해 일제의 협력적이었기에 참여가 적었으며 천주교는 안중근의 의거 후 탄압이 이어질까 두려워 프랑스 주교들이 신자들에게 단속하여 참여가 어려웠다. 유교계의 참여가 적었던 것이 의외인 부분이다. 민족대표의 구성은 아쉬운 부분이다. 자본가, 교육자, 지식인이 모두 제외되고 종교인사로만 채워졌고 사실상 국민의 대부분인 농민도 없었다. 때문에 대표성이 크게 부족했다. 이들은 민중으로 채워진 탑골공원이 아닌 요릿집에서 선언문을 발표하고 체포된다. 3.1운동은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와 이에 따른 독살설로 달아올랐다. 서울에서만 수십만이 참여했고 전국적으로는 200만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폭력으로 일관하여 서울에서의 만세 운동은 잦아들고 지방으로 퍼지게 된다. 3.1운동은 사실상 혁명의 성격이 강했고 그래서 3.1혁명으로 오랫동안 불렸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제헌헌법초안을 다듬는 과정에서 한민당 계열 의원들이 3.1운동으로 이를 격하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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