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담 & 싱어 : 매사에 공평하라 지식인마을 16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고교 윤리시간에 배우는 것이지만 서양윤리의 흐름은 크게 두갈래로 나눈다. 하나는 의무론적 윤리이며 다른 하나는 결과론적 윤리이다. 의무론적 윤리는 윤리를 의무로서 보는 것으로 저자는 책에서 칸트의 윤리학과 종교의 윤리를 예로 든다. 그리고 다른 갈래인 결과론적 윤리의 대표는 벤담과 밀 그리고 그 계승자인 싱어의 공리주의다. 저자는 윤리의 기본 전제조건으로 보편원칙이 되어야함을 말하며 의무론적 윤리설과 결과론적 윤리설을 살핀다.

 먼저 의무론적 윤리의 하나로서 우선 저자는 종교를 말한다.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윤리가 의무가 되는 것의 바로 신 때문이다. 그것이 신의 계시이지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도덕적으로 살아야하는 것의 근거가 신이되는 것이다.

 이것을 논파하기 위해 저자는 발칙하게도 그렇다면 신이 나쁜 말을 지시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묻는다. 신자들은 정의로운 신이 그렇게 나쁜 말을 할리 없다고 항변한다. 신은 도덕적이기 때문이다. 이말은 자체가 모순이되어 그렇다면 나쁜말과 좋은 말이란것 자체, 즉, 도덕과 비도덕이 애초에 신 이전에 있었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저자는 이런 이유로 종교는 도덕에서는 이제 분리되어야 할때라고 말한다. 종교가 인간이 만든 것임을 인정한다면 도덕에 우선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된다.

 다음은 칸트다. 칸트행위의 결과나 경향성을 통한 도덕을 부정한다. 결과는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 도덕성을 판단하는 것이며 경향성은 글자그대로 사람의 성향을 의미한다. 착하거나 악한 성향이 그것이다. 칸트가 이것들을 도덕의 잣대로 삼지 않은 이유는 이것들이 통제불가능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무리 도덕적 의도를 가지 행위라도 그 결과는 정반대일수 있으면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사람의 선하고 악한 성향은 타고나거나 환경적인 것으로 어찌보면 개인의 손을 많이 떠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가 강조한 것은 이성에 의한 의무감을 통한 도덕의 실현이다. 이것은 앞의 것과는 다르게 통제가 가능하여 개인의 도덕적 행위에 대해 상을주거나 벌을 주는 등의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있다. 선하고 악하고의 경향성은 기본적인 도덕적 감정으로 어찌보면 이성에 앞서 형성된 것일 수 있다. 이런 감정도덕에 대한 무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 이성에 의한 도덕적 의무의 실현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저촉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문제로 저자는 칸트에게서도 간단히 떠나간다. 

 결국 의무론적 윤리설은 글자그대로 보편원칙으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지만 역설적으로 의무가 어째서 의무가 되어야하는지에 대한 토대가 약한 셈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남은 것은 공리주의다. 벤담과 밀에의해 발생한 공리주의의 문제점은 결과에 대한 계산을 기초로 도덕성을 판단하기에 의무론적 윤리와는 다르게 어떤 보편적 원칙이 생기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론적 윤리설이라고 부르기도한다. 하지만 저자는 싱어의 실천윤리학을 통해 공리주의로서도 충분히 이러한 보편적 원칙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항변한다.

 피터싱어가 말한 보편적 원칙은 이익들에 대한 평등한 고려 원칙이다. 벤담과 밀의 시절에는 사회가 비교적 단순하여 사람들의 이익의 총합을 계산할수 있었을거란 착각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대사회처럼 복잡하게 이익관계가 얽히고 사람의 주관이 판단되는 사회에서는 질적이든 양적이든 이익의 총합 계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기에 나비효과같은 것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이건 신의 영역이 된다.  

 그래서 싱어가 제시한 이익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한 존재가 고통으로 인해 행복을 겪을 수 없게 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죽음이나 감금, 기아 등이 이런 고통에 포함되는 것이며 싱어가 말하는 이익은 이런것을 피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이익이 된다. 즉, 고통을 피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 것이며 이것으로 계산을 하는 공리주의자이기에 싱어는 부정적 공리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런 최소한의 이익추구는 보편성을 쉽게 갖출수 있다.

 최소한의 이익이외에도 싱어는 보편적 원리로 응분의 원리를 제시한다. 응분의 원리는 각자가 자신의 책임이 아닌 종교나 성, 국적, 지능, 집안등의 이유로 행복의 차등이 결정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싱어는 사실상 평등할 수 없는 기회의 평등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결과적 평등으로까지 간다. 하지만 결과적 평등을 강조한 사회주의의 비효율성을 알기에 싱어는 결과를 평등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되 그 이상적이고 강제적 실현이 오히려 사람의 자유를 억악합고 비효율성을 낳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인센티브는 허용하는 사회를 주장한다. 즉, 타고난 집안이나 지능에 의해 누군가는 의사가 되고 그렇지 않은 누군가가 청소부가 되는 것은 불공평하지만 의사가 되기 위해 거치는 지난한 과정에 대한 노력의 대가는 어느정도 인정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청소부의 의사가 보이는 20여배의 급여차는 수용할수 없으며 타고난 조건으로 의사가 되기에 유리한 사람이 충분히 노력하거나 용인할정도 수준의 급여차만 인정하자는 것이다. 다소 애매하다. 어느정도까지 가능할까? 2배 5배? 북유럽사회에서 고소득층이 상당부분을 세금으로 헌납함에도 자기 이익과 계발을 위해 매진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하기도 하겠다.

 피터 싱어는 자신의 윤리의 적용대상을 동물로까지 확대한다. 사실 인간 역사에서 윤리의 대상은 점차  확장되어 왔다. 처음엔 자신, 가족, 타인과 사회, 민족과 국가, 지구인 전체로 말이다. 싱어는 여기에 동물이 들어가지 않을 이유는 없으며 동물역시 최소이익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함을 역설한다. 흔히 인간이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들어 동물이 도덕의 대상이 될수 없음을 역설하지만 싱어가 보기엔 그 차이가 애매한 부분이 있으며 동물 역시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최소이익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동물이 도덕적용이 될수 있다는입장중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싱어는 지능이나 언어 등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사실 애매한 부분이 있으며 사람의 나이나 장애 및 신체적 특징 여부에 따라 오히려 동물보다 지능이 낮거나 언어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있을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싱어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보다는 도덕 적용의 대상으로 인격체의 개념을 말한다. 인격체는 사람이든 다른 동물이든 고통과 쾌락을 분명하게 느끼며 과거와 현재에 대한 개념이 있고 이것이 현재로 이어지는 어느 정도의 자의식을 갖춘 존재를 말한다. 

 흔히 공리주의는 상대론적 윤리설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에서 보편적 원칙을 세우고자 한 피터싱어의 시도는 흥미로웠다. 물론 완전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싱어가 말한 것을 수용하더라도 결국 어느 것이 인격체고 아니냐의 구분은 역시 분명히 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완전해야 할  도덕이 이렇게 완벽하지 못한 이유는 인간의 도덕성이 결국 근원적으로 진화상 협력이 주는 적응도상의 이점에서 생겨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것이 인간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더욱 확장되어나갔고, 이렇게 되는데는 도킨스가 말하는 밈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찌보면 오늘날처럼 범위가 크게 확장된 인간의 도덕성은 오랜 협력이 준 적응도상의 이점이 진화에 반영된 결과가 설계를 넘어서 적용된 결과라고 볼수 있다. 

 하지만 이런 도덕범위의 확장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풍요가 뒷받침되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먹기 살기에 충분한 식물식량이 제공되기에 동물을 도덕적 범위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처럼 먹고살기가 어렵다면 이런 주장이 과연 오늘날처럼 설득력이 있을까? 그것은 인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진화상의 호혜성원칙은 초기엔 관대하되 배신시에는 응징하는 것이다. 이는 무한한 관용은 없으며 물질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 상황이 악화될수 있는 근본적 원인이다. 또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선관용 배신후 응징 다시 선관용의 전략이 가장 높은 점수를 얻어 진화의 원칙으로 자리잡았음을 주장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협력적 상황이 더 큰 이득을 주는 제로섬 상황이 아닐때만 가능하다. 극도의 결핍으로 인해 협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황이라면 어찌하겠는가

 실제로 자연계에서는 수많은 생물이 서로의 이득을 위해 공존하면서도 상대가 틈을 보이거나 면역계통에 문제가 생길경우 호전적으로 돌변하는 사례를 무수히 보여준다. 

 또한 다른 동물에게는 인간과 같은 도덕적 원칙이 없다는 것도 문제이다. 여성이나 유색인종, 사회적 하층계층에게로 도덕적 범위가 기본적으로 확장될수 있는 것은 그들이 결국 다른 계층처럼 도덕원칙을 갖고 적용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도덕원칙을 동물에게 적용한다하더라도 동물이 서로간에 그것을 적용할수 없고, 사람에게도 그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다른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저자 역시 이런 문제때문에 결국 동물의 실상을 그렇게 파헤쳤으메도 채식의 길로 들어서지 못했다. 또한 동물의 권리를 비교적 많이 보장해나가는 서구사회에서도 동물이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하는 경우 처리하는 방식은 그 동물을 죽이는 것이다. 제발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도덕은 기본적으로 언제든지 배신에 의해 무너질 우려가 있으며, 이기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고 풍요와 힘에의해 그 범위가 확장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토대가 매우 빈약한 셈이다. 인류의 도덕이 계속 확장되고 꽃을을 피우기 위해서는 풍요와 번영이 필수적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킨스의 말처럼 어느정도 유전자를 벗어날수 있는 존재이다. 실제로 남이 배신을하더라도 내가 굶어죽을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동물을 먹지 않거나 타인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적지 않게 존재한다. 거기에서 도덕의 토대가 단단해질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2-28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7-12-28 00:27   좋아요 1 | URL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도덕은 정말 어려우면서도 자꾸생각하게되는것같습니다

2017-12-30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7-12-30 14:14   좋아요 1 | URL
연말 잘보내시고 새해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