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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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를 열심히 이야기 한 사람에게 다음은 무엇일까? 당연히 미래에 대해 논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과거에 대해서 말할때는 우리는 여러가지 역사적 정황을 독수리의 눈으로 꿰뚫고 이리저리 퍼즐조각을 맞추며 하나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물론 그것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다 내다본 미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서구가 지배하게 됐어. 이래서 한국이 분단되었어. 이래서 일본 제국이 망했어 등등. 이런 걸 정말 잘쓴 책이 총균쇠이고 사피엔스이며,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역사학자인 유발하라리는(사실 역사학자란 감도 별로없다. 워낙 총방위적이어서, 경력 찾아보고서야 알았다.)과거의 퍼즐에서 미래의 동향을 보고 쭉 이어지는 퍼즐을 이 책에서 맞춰냈다. 영화계엔 전작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솔직히 사피엔스보다 인상적이었다. 사피엔스도 물론 대단했지만 그게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자기만의 관점으로 잘 종합한 느낌이었다면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의 관점에 있지만 미래의 동향을 살펴 과거와 이어지는 인간의 미래를 설득력있게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더욱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전공인 역사학은 물론, 진화론, 4차산업혁명의 사물인터넷, 컴퓨터 과학, 심리학, 경제학 등등 여러 학문을 이용해 녹여냈다.

 이 책의 제목은 호모데우스인데 저자들이 워낙 인간의 특성을 하나하나 이야기할때마다 자꾸 호모에 미사여구를 붙이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는지라 썩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잘쓴 책이니 그만큼 인상적이고 재밌었다. 게다가 제목인 이 표현은 무려 책의 말미인 500페이지 가량이나 되어서 간신히 나오며 언급횟수도 5회 미만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하라리가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이 책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체험하고 알고 있는 전제가 있다. 바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진화상 생존과 번식을 위해 설계되었지 행복하자고 설계되진 않았다. 그것은 아마 생존과 번식이 성공적일때 아주 한시적으로 주어지는 보상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생존과 번식의 일시적 성공으로 행복이 오래 지속된다면 인간존재는 더나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펜사우어는 행복을 불행의 한시적 그림자로만 보았고, 불교에서는 벗어나야할 덧없는 것중 하나라 보았을지 모른다. 하여튼 하라리는 이 행복에는 두가지 기둥이 있다고 보았는데 하나는 생물학적 기둥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인 기둥이다. 생물학적인 기둥의 종점은 아마도 드래곤볼의 프리더가 그리 갈망하던 불노불사일 것이고, 심리적인 기둥의 끝은 완벽하고 지속적인 정신적 행복 일 것이다. 

 인간역사는 이러한 행복을 향한 여정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인류는 그때그때마다 자신들의 한계범위내에서 이를 나름대로 이룩하려고 노력해왔다. 수렵시대에 인간이 사용한 방법은 애니미즘이었다. 이시기 인간에게 먹이가 되고 때론 숭배와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동물들은 인간과 대화하는 존재였으며 때론 신이기도 했다.

 그랬던 인간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게 농업혁명이다. 이 농업혁명에서 인간에게 정신적 버팀목이 된 것이 바로 유신론적 종교이다. 유신론적 종교가 번성한 시점과 농업혁명간에 어느 정도의 시기적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수도 있다. 하라리는 농업과 유신론적 종교간에 농업계약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하라리는 초기 유신론적 종교를 농업사업으로 보는데 이 종교들의 초기신학이론, 신화, 전례들이 재배 식물 및 가축들과 인간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했기 때문이다. 즉, 유신론적 종교는 달라진 물적 상황에 대해 인간이 쓸만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여 정당화 한 셈이다. 

 하라리는 유신론적 종교가 겉보기와는 달리 신뿐만이 아니라 인간도 신성시 했음을 통찰한다. 실제로 초기 유신론적 종교들은 인간에게만 다른 동물과는 차별적인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으며(기독교에서는 지배 및 관리의 지위를 부여하고, 가장 마지막 창조, 불교에서는 윤회의 하나이지만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이를 통해 인간은 사실상 창조의 정점이 되었다. 이 계약에서는 인간은 자연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신의 중재(비, 높은 생산량, 적절한 기후)가 필요해졌으면 그 대가로 인간은 제사의 형태로 신과 수확물을 공유하는 상상의 체계를 완성한다. 사람들은 어찌보면 애니미즘에서 매우 급진적인 변화형태인 농업계약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였는데 이는 농업계약이 농업사회와 그 일상을 잘 반영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상호주관적 연결망을 확대하고 강화하는데 필수적인 물질적인 기초를 제공했으며 초아기 농부들은 집단의 신화를 보전하고 대규모 협력을 조직하기 위해 인간 뇌의 데이터 처리능력에 의존했으나 이의 한계는 분명했다. 이로 인해 농업혁명 이후 수천년이 지나도 인간협력망의 확대는 미약했는데 돈과 문자의 발명으로 인간은 이 한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협력망이 점차 확대되고 발전해나가면서 과학혁명이 일어난다. 과학혁명은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라는 쌍두마차와 결합하여 인간의 힘을 더욱 극대화시키며 나아갔는데 이런 변화한 인간에게서 더 이상 유신론적 신은 필요치 않았다. 인간은 농업혁명을 통해 애니미즘 시대의 말하던 동식물을 침묵시킨데 이어 신마저 침묵시키고 1인극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던 존재였기에 근대 이후의 삶은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는 과정이었지만 존재론적으로 역시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과학혁명의 시대에 유신론적 종교의 자리를 대체한 새로운 종교가 인본주의이다. 인본주의는 인간 삶을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무지에서 계몽이라는 점진적인 내적 변화의 과정으로 보며, 삶의 최종목표는 광범위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경험을 통해 지식을 온전히 발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즉, 인간의 경험이 의미와 권위의 최종원천인것이며 이로 인해 인간 개개인은 소중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인본주의는 3가지로 곧 분리되는데,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우리나라가 믿고 있는 자유인본주의와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가고 있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그리고 나치들이 신봉한 진화론적 민주주의가 그것들이다. 

 자유인본주의는 인간 개개인이 유일무이하다고 보며 이로 인해 모든 개인이 세계를 경험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이를 위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주요 의사결정은 개개인 혹은 민의에 의한 그대표들이 하게된다. 하지만 이는 개개인의 상충되는 경험에서 나오는 충돌(부자와 빈자, 그리고 제1세계와 제3세계 시민의 경험은 너무나도 다르다)을 어떻게 해결할것인가라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이며 이들의 세력은 몇십년전만해도 북서부유럽과 북아메리카와 극동아시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세계를 석권하다 시피했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나와 내 감정에 대한 집착보다는 타인들이 어떻게 느끼고 내 행동이 그들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주 관심사이다. 때문에 개인의 자아탐구보다는 세계를 판독하는 강력한 공동기구인 당이나 노조의 창설이 중심이며 의사결정은 이들이 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진화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개인간 갈등은 분쟁의 씨앗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을 발전시켜나가는 진화의 추동력으로 본다. 때문에 인간을 평등하게 하고자하는 일련의 시대는 오히려 인간의 진화를 저해시키는 요인이 되며 우월한 인간에 의한 진화로 인간이 초인간에 이를수 있다는 것이다. 나치는 다윈의 진화론과 신에서 벗어난 니체의 초인간을 이에 활용했으며 그 결과는 끔찍했다. 하지만 하라리는 의외로 이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주목하는데 이는  하라리가 보는 앞으로의 세계가 진화한 인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현재의 승자는 자유인본주의의며 하라리는 오늘날의 세계는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등 과학혁명과 인본주의의 계약이 낳은 산물들이 지배하는 세계로 보고 있으며 이들이 가장 힘을 발휘한 20세기에 인간은 역대 어느 정권과 인물도 감히 시도도 못해본 기아와 역벽, 전쟁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내었으며 이로인한 혜택은 인본주의의 이념처럼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하라리는 21세기에 인간은 더 나아가 불멸과 정신적 행복, 신성을 향해 나아갈 것으로 보며 이로 인한 혜택은 모든 인간이 아닌 초인간에게 집중될 것으로 예상한다. 

 지속적인 과학혁명의 결과 인간은 더욱 많은 것을 알아내었으며 이로 인해 손잡았던 종교였던 인본주의에 생각치 못한 치명적 결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자유인본주의에는 몇가지 전제가 있는데 인간이 단일한 자아로 구성되어 있고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에서는 인간을 분리할수 없는 존재(그래서 정치와 경제, 군사의 최소단위)로 보며 진정한 나는 자유롭다고 본다(그래서 선거권이 주어지고 범죄에 책임을 물음) 그리고 그러므로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에 대해 내가 가장 잘안다(그래서 합리적 판단과 합리적 소비를 한다고 생각)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최근 생명과학의 성과는 이를 주요 전제를 모두 뒷받침하지 않는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이에 따라 인간은 알고리즘으로 집합으로 판단되며 결국 분리할 수 있다라는 것이며 이로 인해 단일한 자아가 부정된다. 그리고 인간을 구성하는 알고리즘 자체가 자유롭지 않고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 및 무작위적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되므로 결국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이 둘로 인해 인간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알고리즘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과학에서는 인간의 자아를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로 나누고 있으며 자유의지는 없는 것으로 본다. 자기공명영상장치를 활용한 연구에서는 인간은 이미 무언가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마음을 갖기전에 이미 모든것을 결정한 뇌부위가 활성화된다. 즉 내가 짜장면과 짬뽕중 고민을 하다 무엇을 먹기로 결정하고 주문하기도 얼마전에 자기공명장치만 있다면 그 점원은 이미 나의 의도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내가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자유의지는 사실상 허상이며 의식의 흐름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지속된 과학혁명은 더 이상 자유인본주의와 같은 배를 타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런 가까운 미래에 하라리는 새로운 파트너 종교로 기술인본주의와 데이터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실 데이터교보다는 아직 호모사피엔스인 우리에게는 기술인본주의가 더 희망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기술인본주의에 의해 탄생하는 새로운 인간이 인간 행복의 두 기둥인 생물학적 문제와 심리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한 존재인 호모데우스인 것이다. 

 기술 인본주의는 여전히 자유인본주의의 끈을 붙든다. 아직 인간을 창조의 정점으로 보며 전통적 인본주의의 여러 가치를고수한다. 호모사피엔스가 한계에 도달한 것은 인정하나 그때문에 우리가 그 한계를 돌파한 호모데우스를 만들자는 것이다. 하지만 하라리는 사실상 호모데우스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앞으로의 데이터 위주의 새로운 시스템은 개개인의 독자적 마음이 시스템의 속도를 떨어뜨린다고 보고 호모데우스가 될 인간의 마음기능을 오히려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자율주행차를 도입하는데 있어 개개인의 운전에 대한 재미를 강조하는 마음, 의학 발전을 위해 인간 데이터를 무제한 수집하는데 있어 개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 등등은 시스템의 속도를 상당히 떨어뜨릴수 밖에 없다. 때문에 하라리는 미래 인간이 성능이 다소 향상된 지금의 침팬지 위치에서 시스템에 매몰된 특대형 개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기술인본주의에는 하나의 문제가 더 잠복하고 있는데 인본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문제는 현대과학의 성과로 인간의 자신의 의지를 정확히 모른다는 점이다. 데이터교와 기술인본주의는 빅데이터와 딥러닝등으로 나를 관찰하고 나의 알고리즘을 나보다 정확히 파악하여 나의 정확한 의지를 제어하고 재설계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이 의지가 과연 나의 의지인것인가라는 철학적 문제, 그리고 의지 자체가 또 하나의 맞춤 제품이되어 결국 인간 스스로가 무엇을 하게 되는지 모르는 존재가 되는 문제가 있다. 결국 호모데우스는 어렵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에 대한 희망을 품긴 하지만 결국 데이터교의 방향으로 갈것으로 보는 듯하다. 데이터교는 컴퓨터 과학과 생물학에 뿌리는 두는데 우주는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현상이나 실체들이 모두 데이터로 구성되고 그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얼마나 기여하는지에 따라 결정한다.

 하라리는 호모사피엔스 입장에서 보기엔 정말 암울한 미래를 제시해놓고도 미래는 여전히 알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피하기 어려운 다음의 3가지 발생 문제를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1. 과학은 모든 것을 아우러는 하나의 교리로 수렴하고 있고, 이 교리에 따르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생명은 데이터의 처리과정이다.

2. 지능이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다.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들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들을 더 잘알게 될 것이다.

  

궁금하다. 이렇게 되면 행복을 향한 우리의 영원한 항해가 과연 마무리될까?

아니면 유기체를 벗어서 행복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재설계될까?

하여튼 그리된다면 어쨌든 하라리처럼 인간을 더 이상 사피엔스라고 부르기엔 무리일것 같다.

상상하기가 어렵다. 유인원이 인간의 세계와 관점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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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1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7-08-01 22:26   좋아요 0 | URL
저도 이래저래 미뤘는데 막상보니 볼만했습니다

qualia 2017-08-01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판단에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다》라는 말 자체는 어불성설입니다. 왜냐면 유기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생명체를 가리키는 것인 반면에 알고리즘은 그런 생명체의 생물학적·물리적 속성과는 원칙적으로 무관한 독립적인 것으로서 어떤 특정 작용이나 행동의 절차를 기술해놓은 일종의 법칙의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유기체는 물리적 실체인 반면 알고리즘은 추상적인 기능적 절차나 프로그램 체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해서 유기체와 알고리즘을 동일 범주 차원에서 비교하거나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저런 식으로 말했다면 그는 개념 착종 오류에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데이터”라는 개념 사용도 상당히 자의적이고 철학적으로 엄밀하지 못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제 생각엔 “정보(information)”라는 개념을 유발 하라리가 자기식으로 “데이터”로 각색한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유발 하라리의 데이터 개념과 데이터교 얘기는 그닥 새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 1911-2008)의 ‘It from Bit’이라는 정보이론적 우주론과 세스 로이드(Seth Lloyd, 1960-)의 양자 컴퓨터 우주론, 데이비드 차머스(David John Chalmers, 1966-)의 정보이론적 의식 이론 등등에 기본적인 생각의 끈이 연결돼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정보를 우주의 기본적 요소로 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데이터교 얘기도 결국은 정보를 (우주의) 기본 요소로 전제하고 끌어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해서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는 몇몇 측면에서 데자뷔 현상을 느끼게 합니다.

닷슈 2017-08-02 00:06   좋아요 0 | URL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많은 공부가 되는군요.
유기체도 알고리즘이다라는 말에는 저도 완전동의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비롯한 유기체의 행동이나 의식을 알고리즘으로 어느정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이 프로그램 순서대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으며 그것은 알고리즘에 의한게 아니고 뭔가 다른거다라고 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인간에겐 뭔가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믿고 싶은 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것들이 사실 알고리즘인데 그게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는 편입니다. 알고리즘은 순차적이지만 상당히 복잡해 질수 있어 복잡한 행동도 알고리즘으로 표현한다면 어느정도 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라리가 워낙 광범위하게 여러 학문을 갖다 자신의 논리에 붙이다보니 여러 개념들을 좀 불명확하게 쓴다는 느낌은 저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피엔스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하라리가 새롭운 것을 창안한다기 보다는 기존의 것을 자신의 논리로 잘 종합한다는 느낌을 받는 편이고 그것도 그것대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