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과학을 읽다 - 누구나 과학을 통찰하는 법
정인경 지음 / 여문책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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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과학책을 좀 좋아해서 취미인지 책무인지 사놓고선 그냥 쌓아놓고는 한다. 과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분야보다 읽는데 정신적 에너지가 확실히 더 드는 편이어서 그런 것 같다. 이 책도 그래서인지 조금 쌓여있었다. 전자책으로 샀기에 이 표현은 부적절하지만 달리 다른 표현도 모르겠다. 과학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다 읽고보니 마치 '사피엔스'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인간의 진리를 위한 정신발전사를 쭉 훑어본 정신세계의 인류사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런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책은  생각보다 가볍게 잡았는데 무척이나 무거웠고 영혼이 생각보다 좀 더 흔들렸던 책이었다.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역사, 철학, 우주, 인간, 마음이 그것들이며 관련된 유명저자와 그 책들, 그 의견을 토대로 인간의 정신발전사를 서술해나간다. 저자가 워낙 유명인들의 견해를 자신의 언어로 소화해서 표현하는 듯 해, 인용인지 저자의 의견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어쨌든. 책을 보면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뇌의 탄생이라 말할 수 있다. 조금 자세히 말하면 마음의 탄생이며 조금 더 기원을 올라가면 동물의 탄생이다. 왜냐하면 동물은 항상 방향과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얻은 에너지를 갈취하고, 다른 동물을 잡아먹거나 피하기 위함인데, 때문에 책에서는 이런 동물의 움직임을 위해서 탄생한 대표적인 감각기관인 눈의 진화를 동물의 광합성이라고 하기도 한다. 참 재밌는 표현이다.

 동물의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운동성과 지향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외부세계의 변화를 예측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신경계가 필요하고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 중심부에는 뇌가 자리한다. 따라서 우리의 뇌와 그 작용인 마음은 목적지향적인 형태가 된다. 외부세계에 대한 생존을 위한 예측과 반응을 하는 곳이니, 외부를 뇌에서 재현하면서 모든 것에 목적과 의미를 두게 되며 이는 인간이 모든 사실에 가치를 부여하는 형태로 자리잡게 된다. 실제로 책에서는 뇌과학의 결과 인간에게 사실에 해당하는 부분을 관장하는 영역과 가치를 관장하는 영역은 같은 걸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동물은 감각장에 구속되어 있으며 인간은 의미장에 구속되어 있다는 말이 책에 나온다. 인간은 결국 한순간도 의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목적지향적인 뇌는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고 의미를 가지고 주변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즉, 계속해서 사실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는 사고를 담고 있고 사고를 만들고 제한하는 우리의 언어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우리말에는 없지만 영어권과 유럽의 언어에는 사실에 해당하는 명사를 지칭할때 관사가 항상 붙는데 영어에는 특정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관사가 그리고 유럽 언어에는 성을 지칭하는 관사가 항상 자리한다. 이런 것들은 사실에 가치를 부여한 형태라 생각한다.

 책의 앞으로 돌아가면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상징적인 형상을 지닌 물체를 보면 다른 것을 떠올리는 능력인 상징추론, 자의식과 마음읽기, 언어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이는 인간만의 특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런 능력을 자신의 생존을 위한 고통의 해결과 목적지향적이기에 삶의 가치와 목적을 찾기 위해 사용하게 된다.

 그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종교의 발명을 통한 초자연적인 존재인 신을 그려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해결책은 철학의 탄생이다. 철학을 통해 인간은 세계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라른 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간다. 그래서 초기 철학은 이데아나 기하하등을 동원하여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그 너머의 원리에서 답을 찾아나가는 형이상학적 형태를 갖게 된다.

 하지만 뉴턴이 과학을 통해 숫자와 기호 도형등을 이용하여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를 찾아내자 이 같은 형태의 답변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과거 절대적 신과 형이상학에 의존하던 진리를 인간이 발견하게 된것이다. 이에 철학에는 인간이 인식의 주체로 올라서며 기존의 존재론에 이해 인식론이 추가된다. 인간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이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 감각, 사고에 의존하므로 그것을 다루는 분야가 생겨난 것이다.

 이에 대해 칸트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이성 사용을 엄격히 하는 순수이성비판을 제시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사고를 반영하는 언어의 사용을 엄격히 하는 논리철학 논고를 제시한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과학은 더 나아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시공간을 상대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버렸고, 다윈은 인간의 모든 이성과 감각, 사고, 경험의 근간을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유물론에 고착시켜 버렸다. 즉, 존재론과 가치론 인식론에 대한 해답이 인간 외의 것들에서 떠돌다 과학의 이름하에 그 답을 인간 내부의 생물학적 기원에서 찾기 시작하게 된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은 도덕성에 대해 말한다. 책은 동물에게도 감정과 기억, 지능이 있음을 말하며 인간만의 특질로 사회성과 도덕을 제시한다. 인간은 과거 초원에서 여럿이 무리지어 살아가며 서로 의존하고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느끼고 배려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그 과정에서 기쁨, 슬픔, 즐거움, 괴로움 같은 감정이 진화하였고, 이러한 감정이 무엇에 좋고 나쁜지를 느끼는 가치판단을 하게 되었다. 즉, 이러한 사회성이 공감능력의 발달과 더불어 도덕성의 기초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인간의 도덕은 교육과 종교 같은 문화적 요소들에 의해 더욱 진보되어가고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인간의 도덕은 과거 자신과 가족에서 동료로, 다른 인종으로, 사회의 약자들로, 그리고 다른 생물에게로까지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책은 오히려 고리타분하게 도덕적 절대주의를 주장한다. 도덕이 객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같은 형태의 생물학적 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또한 도덕의 기준은 과거 그 기원처럼 매우 단순하다.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면 도덕적인 것이고 욕구를 해치면 그른 것이다.

 개인적 생각에 도덕성의 그 기원을 맞게 찾았지만 상당히 단순하다는 생각이다. 사회가 확장되고 복잡해짐에 따라 욕구의 충족은 상당히 복잡하고 다변화 했기 때문이다. 충돌하는 경우도 많으며 개인과 사회, 집단등 욕구의 수준역시 다층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처럼 욕구자체도 상당히 다층화되어 있다. 물론 가장 강력한 욕구는 가장 본능적인 욕구이겠지만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무엇이 결국 욕구를 충족하는 것인지에 대답은 결국 요원해지고, 문화적 밈과 상당히 관련하므로 결국 생물학적 인간의 몸 밖에서 대답을 찾아 헤메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또한 도덕성의 기원이 결국 인간존재의 생존과 관련한 욕구의 충족에 기원을 두는 만큼 공감과 문화적 발달에 기원한 공감대상의 확대, 즉 도덕의 대상확대도 그 한계가 뚜렷하다. 책에는 인간의 도덕이란 결국 자신과 일체감을 느끼는 사람에 국한된다고 한다. 나치와 일제에 충성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그리 나쁜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피해자들에게 일체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도덕성은 이 일체감이 다른 생물체에게 까지 도달한 상태지만 결국 배부름의 도덕이란 생각이다. 지금의 풍족함과 평화가 깨어져 일체감을 느낄 수있는 집단이 줄어드는 상황에 도달한다면 결국 도덕성의 범위는 매우 본능적인 수준으로 회귀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 책의 저자인 이처럼 인문학과 과학을 융합하고 통섭하고자 하는 여러 책을 쓴 것 같다. 이 사람의 책을 더욱 보고 싶은 생각이며 책에서 인용된 저자들과 책 역시 매우 관심이 가는 좋은 계기가 된 책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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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소년 2017-04-08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인간의 도덕이란 결국 자신과 일체감을 느끼는 사람에 국환된다고 한다. 나치와 일제에 충성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그리 나쁜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피해자들에게 일체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악한 사람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학교에서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때리는 아이도 강한 아이들(일진)끼리는 좋은 아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 아이에게는 힘이 약한 아이는 일체감이 없는 것이겠지요.

돼지, 닭, 소를 먹지만 강아지를 먹지 않는 저 또한 일체감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상위포식자인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완벽하게 결백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인지.. 채식주의자, 비폭력주의자(육체적 폭력 반대)여야 결백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채식주의자 또한 식물이라는 살아있는 생명을 빼앗는 것이고.. 비폭력주의자 또한 결국 다른 방식의 폭력을 사용하겠지요..

닷슈님의 글은 항상 깨달음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닷슈 2017-04-08 18:12   좋아요 1 | URL
저도 동물인이상 최상위포식자인이상 그리고 지구라는 한계가 있는이상 인간도덕은 유일하고 대단하긴하나근원적한계있다고 봅니다 환경운동역시 나의 목줄을죄니 시작한감이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