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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지 키워드로 읽는 오늘의 베트남
안경환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24년 5월
평점 :
한국과 베트남은 오늘날 상당히 밀접하다. 무역규모상 한국의 제3교역국이 바로 베트남이다. 이는 중국과 미국에 이은 순위이며, 일본과의 교역을 상회한다는 뜻이다. 흑자규모도 엄청나다. 한국이 2022년 베트남과의 무역에서 얻은 흑자는 무려 342억 달러다. 또한 한국과 베트남의 국제결혼 규모는 8만쌍에 이른다. 또한 한국은 베트남 투자 1위 국가이며, 베트남의 삼성전자 공장은 베트남 수출의 17.5%를 차지한다. 이렇다 보니 베트남은 2021년 한국어를 제1외국어에 편입시키기까지 했으며 베트남 최고의 대학 호치만 대학의 어문계열 입학점수에서 한국어과의 점수가 가장 높기까지 하다.
이런 베트남은 우리와 유사점도 상당하다. 우선 분단의 경험이 같다. 그들은 통일에 성공했고, 우리는 실패했다는 점이 차이다. 또한 같은 유교문화권이다. 동남아시아는 대개 이슬람교와 불교의 영향력이 강한데 베트남은 중국과의 인접성으로 인해 유교문화권이고 예의를 중시한다. 그리고 중국과의 항쟁의 역사다. 베트남은 한국처럼 중국의 끊임없는 침공에 시달렸으며 1000년 간의 점령기간이 있었지만 끝끝내 투쟁으로 자주적으로 독립하였기에 자주성이 매우 높다.
베트남은 남북으로 1650km로 길게 뻗어있으며 남북 간 지역 감정이 있다. 북부 출신은 2차례 남부로 이동하였는데 1954년 공산정권을 피해서였고, 1975년 통일 후 남쪽을 통치하기 위해서다. 이 두부류 는 같이 이동했으나 서로 매우 달라 싫어한다. 북부출신은 국영기업과 고위직에 포진해있어 남부사람들이 시기한다. 그리고 북부는 남부가 자본주의의 때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개혁개방으로 이런 의식이 많이 희석되었다. 북부출신은 대개 근면하고 인내심이 있으며 남부출신은 개방적으로 낙천적인 편이며 서구에 쉽게 호응한다.
베트남은 모계사회의 유풍이 남아 있어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하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회, 내각, 지방당위원장에도 여성이 상당수 포진한다. 호치민시 전체근로자의 51.4%가 여성이다. 중국은 기원전 2세기부터 성과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중국의 지배를 길게 거치면서 그들의 성을 따라쓰기 시작했다. 그외 기타 소수민족은 동식물의 이름을 가진 마을에서 이름을 유래한다. 베트남에는 769개 성씨가 있는데 같이 성이 많다보니 부를때는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른다. 이름 중간에 '티'가 있으며 반드시 여성이고, '반'이 있으며자다. 베트남의 신분증에는 출신 민족이 표기된다. 이는 차별이라기 보다는 민족별 국가 지원을 다르게 하기 위함이다. 베트남은 응우옌씨가 35%, 쩐씨가 12%, 렌씨가 9%로 모두 왕족의 성씨다. 이 중 쩐씨는 응우옌왕조의 보복이 두려워 대개 응우옌씨로 성을 변경한다. 우리 고려왕조의 왕씨가 조선이 들어선 후 한자를 조금씩 바꾸어 전이나 옥씨 등으로 바꾼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베트남은 구정이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 집안의 번성을 위해 황금열매가 잔뜩 달린 금귤나무, 복숭아 나무, 매화 나무 등으로 내부를 장식한다. 섣달 그믐 자정과 새해의 첫 시간이 교차하는 시기에 복이 온다하여 귀한 손님을 모심다. 이를 쏭덧이라 하는데 가장과 띠가 맞고 건강하고 덕망이 높은 남성을 초대한다.
모든 베트남 사람들은 집에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제대상인 반터를 갖고 있다. 반터 위에 부모의 사진, 향로와 차병, 고인이 생전 즐기던 과일, 과자, 술등을 놓는다. 여기에 집안의 대소사를 보고하고 복을 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들은 별로도 사당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반터에는 조상신 외에도 숭배하고 싶은 신을 모시기도 한다.
베트남의 건국신화는 기원전 3천년 전으로 고조선보다 길다. 베트남 최초의 왕은 농경의 신의 4대 후손은 록뚝이다. 그리고 최초의 국가는 식꾸이국을 다스린 낀즈엉브엉이다. 씩구이국은 북으로는 중국의 장강, 남으로는 베트남 중부, 서로는 쓰촨성, 동으로는 해안에 닿은 광대한 국가였다. 낀즈엉브엉은 동해 용왕의 딸 턴롱을 부인을 삼아 숭람을 낳았다. 숭람은 2대왕 락롱꿘은 낳았다. 그는 지방을 순시하다 락쓰엉동굴에 이르러 산신의 딸 어우꺼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녀는 무려 3년 3월을 임신하고 100개의 알을 낳는다. 3일 후 알이 부화하여 아들 100명이 나왔는데 하루만에 장성한다. 그는 아들에게 각 지역을 맡긴다. 다만 서열과 이름이 문제였는데 하늘에 기도하니 하늘이 이를 정해주었다. 락롱꿘은 50명의 아들과 강과 바다로 향했고 나머지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산과 숲은 방어했다. 3대왕은 홍구엉 브엉으로 그는 국호를 반랑이라 하고 18대까지 왕위가 이어진다. 18명의 왕을 모두 홍브엉이라 한다.
베트남은 오랜 침략을 자주적으로 막아낸 역사로 인해 한국과는 다르게 사대의 역사가 전혀 없고 중국의 대등한 견제의식을 지닌다. 그래서 중국의 상품과 기술에 대해 품질이 낮다고 폄하하기도 하고 중국 관광객의 불손한 태도에 잘 분개한다. 베트남은 황제를 칭했기에 6조가 아닌 6부제이며 북거 남진 제를 택했다. 이는 북으로 중국에 항거하고 남으로는 진출한다는 뜻이다. 베트남은 송나라 2회, 몽골3회, 명1회, 청1회의 침공을 받았고 한나라에 멸망하여 1049년간 지배를 받았다.
몽골은 남송을 정벌 한 후에 베트남에 6사를 요구한다. 이는 입조, 납질, 납공, 역참설치, 호구조사, 조군이다. 당시 베트남의 쩐왕조는 이중 일부는 들어주고 대개 거부한다. 이에 몽골은 침입한다. 하지만 남송 망명자의 협력과 기병대에 불리한 열대 숲으로 인해 패퇴한다. 3차 침략 때는 쿠빌라이가 탕롱을 함락하나 무더위와 보급로의 차단으로 퇴각하고 쿠빌라이가 죽어서야 침략이 끝난다. 쿠빌라이는 베트남 침략의지가 매우 강하여 이를 일본 원정보다 우선할 정도였다.
베트남어를 보면 영어와 비슷해보인다. 이는 그들이 라틴 문자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천주교 사제들이 전도를 목적으로 베트남어를 배우고 자신들의 문자로 이를 기록하였는데 1651년 알렉산드르 드 오르 주교가 베트남-포르투갈-라틴어 사전을 출간한다. 이 사전은 단어, 성조, 품사분류까지 한 최초의 베트남 문법 책으로 현재 베트남문자의 기원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식미책으로 모든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라틴문자 베트남어 사용만을 강요한다. 그렇다보니 기존에 사용하던 한자와 한자를 변형하여 만든 쯔놈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현재 베트남 문 모음 12 자음 17자로 총 29자다.
베트남어는 단음절로 음절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다. 시제에 따른 동사변화는 없으며 앞에 붙은 조동사가 시제를 결정한다. 6개의 성조가 있다.
베트남은 교육열이 강하다. 문맹률이 프랑스의 우민 정책으로 90%에 달했으나 지금은 97%의 국민이 문자를 해독한다. 예절교육을 중시하며, 학부모의 교육열과 학생의 향학렬이 높고, 교사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매우 높다. 그래서 교사들은 급여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긍지가 높다. 학생도 교사를 많이 희망하며 11월 20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해 기념한다.
학제는 5-4-3-4 제이며 대학은 4년제, 전문대 3년제, 사범대 5년제, 의대가 6년제이다. 9월에 신학기를 시작하며 초등 입학 때 입학시험을 치뤄 10점만점에 7점에상이며 A등급반에 편성된다. 반이 한번 정해지면 변경이 불가하기에 사교육이 판을 친다. 베트남은 이처럼 초중고가 모두 우열반 편성을 한다. 그리고 졸업시험이 있어 초등은 5점이상이야 졸업을 한다. 대입경쟁률도 치열하여 5:1수준의 경쟁률을 보이고 있으며 국공립대학교들이 예산부족으로 시설이 낙후하였고, 학비도 비싼 편이다.
베트남은 남중국해를 비엔동이라 부른다. 여기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중국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고 미국도 합류하고 있다. 이곳은 세계 원유의 1/3, 천연가스의 1/2가 지나간다. 군도가 있는데 호앙사 군도와 쯔엉사 군도다. 중국은 이를 시사군도, 난사군도라 한다. 여기엔 300억톤의 원유와 450억톤의 천영가스, 풍부한 어족자원과 구아닌이 풍부하다. 2013년 필리핀이 중국의 영유권 주장을 유엔 상설중재재판소에 제소하였고 2016년 승소한다. 하지만 중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이곳은 베트남에 역사적 증거가 많다. 1904년 청나라가 제작한 황조직성지여전도에서는 양 군도가 청영토로 표기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당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영유권 수호를 위해 이 지역에 5-6개월 마다 정기적으로 함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식민지배 프랑스도 이를 이어받았다. 양군도를 통치했고, 일본에게 패퇴했다 돌아온 후 두 군도를 점령한 중화민국 군대에 철수를 요구하고 이를 관철한다. 그리고 1951년 일본과의 평화조약에 참가한 베트남 총리는 두 군도의 권리를 주장했으며 당시 국제사회엔 이에 대한 반발이 없었다. 두 군도에 대해서는 베트남과 필리핀은 적극적이지만 나머지인 브루나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소극적이다.
베트남은 5년마다 전국 선거를 한다. 4대 선거원칙을 준수하지 않기에 대리 투표도 가능해 투표율이 무려 98%이상이다. 국회의원은 500명이고 베트남 조국전선이 후보자를 추천한다. 베트남은 5무 선거를 자랑한다. 현수막이 없고, 선거운동원이 없으며, 벽보도 없고, 선거로 인한 국고낭비도 없다. 마지막으로 재보궐선거도 없다. 차점자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아무나 입후보하지 못한다. 조국전선이 철저히 검증한다. 기준은 헌법수호를 위한 애국심과 충성심, 도덕적 품성, 임무수행능력이다. 그리고 범법자, 이중국정저, 채납자, 파렴치범, 마약사범, 식민지 시기 본인 혹은 가족이 부역 행위를 조금이라도 한 경우 모두 제외한다. 이는 상당히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일당 독재의 정치체제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베트남의 대표음식은 퍼다. 소위 쌀국수다. 다섯 가지 맛인 쓴맛, 짠맛, 신맛, 단맛, 매운맛이 모두 난다고 한다. 소고기를 넣은 것이 퍼버, 닭고기를 넣은 것이 퍼가로 가장 유명하다. 여기에 어묵, 생선이 들어간 쌀국수를 소스와 같이 먹는 분짜까가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 편이다.
소고기 퍼버는 혁명이전까지 북부 하노이의 음식이었다. 그러다 점차 전국 확산한다. 다만 소는 농경의 중요수단이기에 도축이 어려워, 닭고기 퍼가 생겨나고 확산한다. 북부 퍼는 조금 짠맛이 나고 면발이 얇고 넓다. 남부 사이공의 퍼는 달고 기름지며 생야채가 있고 사리가 북부보다 가늘다.
바인미 깹은 베트남식 바게트 샌드위치다. 프랑스의 바게트 빵속에 돼지고기, 새우, 채소와 칠리소스나 느억맘을 넣는다. 베트남 바게트는 프랑스의 것과 다르게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고 구수하다. 이 샌드위치는 세계적으로 무척 유명하다.
베트남의 문화는 선물을 서로 주고 받는 문화, 평등주의와 공동체 정신, 존경의 표시로 서로의 가정집은 방문하는 문화, 좋은 일을 나누는 풍습, 외제를 선호한다. 이는 수력을 다뤄야 하는 농경문화의 공통적 특징이기도 하다. 다만 개혁 개방 이후, 각종 기업의 설립이나 승인 과정에서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문화가 부정부패로 변질되어 악영향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국산품에 대한 기술적 신뢰가 낮아 외제를 선호해 국내 기업이 좀처럼 크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