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3
최성환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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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하면 떠오르는 것은 일제 시대의 수탈, 그리고 목포는 항구, 목포의 눈물 같은 노래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흔적이고 요즘은 관광으로 더 유명한 느낌이다. 최근 목포는 관광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데 연예인 박나래의 고향이고 쫀드기로 주목 받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2019년 개통한 해상케이블카가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동생이 목포 인근 무안에 살고 있어 이 해상케이블 카를 여러 번 타보았는데 목포를 갈 때마다 반드시 타게 된다. 우선 가성비가 좋다. 가격은 보통 케이블카와 비슷하면서도 길이가 엄청 길어 왕복 40분을 타게 된다. 한 번은 케이블카에서 존 적도 있다. 말이 되는가? 케이블카에서 존다는 게, 끝내주는 풍경도 좋다. 목포에서 유달산 정상을 거쳐 고하도를 향하는데 목포 전체 시내의 풍경과 산의 경치, 해상의 경치를 모두 볼 수 있다. 고하도에서 내리면 바다의 데크와 고하도를 돌 수 있는데 이 것도 제법 괜찮다. 그래서 여길 다 돌고 오면 돌아오는 케이블카에서는 졸 수도 있는 것이다.

 목포는 최근 도시 같지만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 영산강 물길과 전남 내륙의 통로이고, 해상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고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 호남과 경상 남부로 통하는 조운로이다보니 왜구의 침입이 끝이지 않아 조선시대에는 수군진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순신은 명량에서 승전한 후 고하도에 진을 친다. 여기서 106일가까이 머무르며 수군을 재건한다. 이순신은 여기에 머무르며 고하도에 성을 쌓기도 했으며 이후 그의 5세손이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봉상이 이충무공비를 고하도에 건립한다. 이 기념비는 일제가 훼손했다가 1947년 복원된다. 

 목포는 예항이라 불릴 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미술의 허건과 문학의 박화성과 차범석, 무용의 최정자, 문학가 김우진, 최하림, 황현산, 김지하, 김현, 가수 이난영과 남진이다. 그래서인지 인구 24만에도 불구하고 시립예술단체가 6개나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통령 김대중이 있다. 그의 고향은 신안군 하의도이지만 정치적 고향이 목포다. 그래서 목포 삼학도에는 그의 노벨평화상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목포는 쌀과 면화를 일본으로 옮기는 곳이다보니 경제 특수를 누린다. 일본인이 밀집한 선창가는 각종상업시설, 회사, 공장이 밀집했고, 은행과 백화점, 극장등이 일찍이 생겨난다. 해방후에도 전남 1도시를 유지했는데 보해양조, 남양어망, 행남자기, 조선내화, 호남제분등의 향토기업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기업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고 1990년대 후반 신도심의 개발로 경제축이 목포역에서 하당권으로 이동하며 경제가 빠르게 쇠퇴했다. 최근 해상케이블카의 조성과 신안군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하는 천사대교의 개통, 국토부의 뉴딜사업, 목포의 근대역사문화공간사업으로 인해 다시 부흥하고 있다. 

 목포의 김우진은 문학가로 유명하지만 가수 윤심덕과의 투신자살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18세 일본 구마모토 농업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그의 졸업논문을 영친왕이 하사금을 줄 정도로 유망했으나 본인은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와세다 대학 예과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졸업한다. 그는 최초의 근대극작가이자 최초의 신극운동가였다. 가수 윤심덕은 평양출신으로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한 한국 최초의 성악가이자 소프라노 가수다. 김우진은 이미 결혼한 몸으로 아내와 자녀가 있었으며 문학을 하고 싶었으나 사업을 이어받길 원하는 아버지와 갈등하고 있었다. 윤심덕은 신여성이었지만 전통적 여성상을 강요하는 사회분위기에 갈등하고 있었다. 둘의 사랑은 이런 갈등을 감당하지 못한 이유로 보인다. 

 목포는 축제가 많다. 유달산 꽃 축제, 세계마당페스티벌, 목포항구축제 등이다. 목포항구축제의 모티브는 파시다. 파시는 말 그대로 해상에서 물고기를 거래하는 것으로 과거 흑산도의 조기 파시, 임자도 민어 파시, 하의도 봉도 꽃게 파시가 유명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목포 항구축제는 파시 길놀이, 선상파시 경매, 전통한선체험, 노젓기 대회 등이 있다. 

 목포는 민어와 삼합, 세박낙지, 꽃게무침, 갈치조림, 우렁간국, 병어회, 아구탕, 준치무침이 유명하다. 민어는 백성민으로 그 만큼 흔했단 뜻이지만 지금은 귀하고 비싸다. 영문명이 croaker인 만큼 민어는 물속에서 부욱부욱하는 소리를 내기에 과거 속이 빈 나무를 물에 넣고 소리를 들어 잡았다. 민어느 성질이 급해 육지에서 금방 죽기에 활어회보다는 선어 상태로 먹는다. 민어의 뱃살과 부레는 백미이고 7-8월 산란을 위해 북상해 임자도 인근에서 많이 잡힌다. 

 홍어의 홍을 넓은 홍자다. 바다 깊이 서식해 잡기가 어려우며 흑산 홍어가 으뜸이다. 하지만 최근 국산이 적어 대부분 수입산이 거래된다. 흑산도에서는 원산지로 홍어를 싱싱한 회로 먹는다. 그러나 육지로 이송하며 4-7일이 소요된다. 그 사이 홍어가 발효되는데 이게 삭힌 홍어의 유래로 보인다. 홍어와 막걸리는 궁합이 좋아 둘을 같이 즐기는 것을 홍탁이라 한다. 홍어는 물컹거리며 식감이 좋은 홍어코와 아가미가 일품이다. 

 세발낙지는 발이 가늘어서 세발낙지다. 좀 더 크게 갯벌에서 집히는 것이 뻘낙지로 주낙으로 잡은 것보다 인기가 좋다. 낙지는 작은 것을 나무 젓가락에 돌돌 말아 먹으나 큰 것은 산채로 잘라 탕탕이라 한다. 최근 소고기 육회와 낙지 탕탕이를 합친 것을 육회탕탕이라 하며 인기가 좋다. 

 목포 먹갈치는 품종이 다른 것이 아니다. 갈치는 은색이지만 그물에서 서로 부딪히면 상처를 입어 다친 부분이 회색빛으로 변한다. 그래서 다소 까맣게 되어 먹갈치라 하는 것이다..

 목포의 시내에도 먹거리가 있다. 중깐이라는 것이 있는데 목포의 중화루 간짜장을 준말이다. 곱게 다진 야채와 돼지고기를 춘장에 강한 화력으로 볶은 다음 가늘게 뽑은 면으로 만든다. 쏙굴레는 쏙을 빚어 만든 찹쌀떡 경단에 콩고물을 묻히고 묽은 조청에 굴려 먹는 간식이다. 코롬방 제과점은 목포 역 인근의 제과점으로 전국 5대 빵집이다. 

  목포 앞바다에는 삼학도가 있다. 전설이 있는데 유달산에서 수련을 하던 한 청년을 세 처녀가 사모하게 된다. 청년은 수련을 이유로 처녀들을 돌려보내는데 그들이 배를 타고 떠나가자 청년은 자신도 그녀들을 사모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맘을 전하고자 배로 활을 날렸는데 그만 배에 구멍이 뚫려 세 처녀가 죽고 만다. 그녀들은 학으로 변하여 솟아올랐고 지금의 삼학도 자리에 내려앉자 섬으로 변했다는 전설이다. 삼학도는 개항 이후 불법적으로 일본인이 팔리게 된다. 그리고 해방 후 매립되어 섬으로의 기능을 잃는다. 여러 산업시설이 조성되었고 심지어 사창가도 생겨난다. 최근엔 섬사이로 물길을 조성하여 어느 정도 섬의 풍광을 되찾았다. 

  목포의 고하도에는 감화원이 있었다. 일제는 1923년 조선감화령을 내리는데 8-18세 미만으로 불량행위를 하거나 할 우려가 있는 자이면서 친권이 없는 자를 수용대상으로 했다. 우려가 있는자에 친권이 없는자이나 마구잡이로 들여보내기 딱 좋았다. 총독부가 1938년 감화원을 고하도 용머리 해안가에 신축했다. 일제는 친권이 없는 저능아를 수용했다. 환경은 혹독했다. 강제노역과 굶주림을 참지 못해 2년간 도망가다 10명이 익사했다. 도망치다  잡히면 잔혹한 폭행이 이어졌다. 이런 감화원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1954년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140명 지적장애아동을 수용했고 정신감정결과 이들 중 60명이 정상이었다고 한다. 마구잡이로 넣었다는 이야기다. 이 감화원은 대도 조세형이 여기 출신이기도 하며 1967년에야 문을 닫는 흑역사를 가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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