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점을 배우다
강은주 지음 / 이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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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사 책은 언제 보아도 흥미롭다. 미술 사조의 변화에 따른 흐름으로 서술하기도 하고, 사회적 변화를 따르거나 또는 선도하는 예술의 흐름에 주목하기도 하고, 혹은 단순히 시대 순으로 연대기적으로 가기도 하며, 관심 있는 예술가에 따라 서술하기도 한다. 이는 모두 미술사를 바라보는 전문가의 관점에 따름이다. 책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은 독특하게도 여성의 관점에서 미술사를 바라봤다. 이는 개인적으로 처음 접하는 시도인데 책을 읽기 전부터 과연 미술사로 다룰 만큼 여성 예술가가 많았을까라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물론 책은 이런 관념부터 비판한다. 미술 사조를 충분히 잘 따르고 대표할 만한 여성 예술가도 적잖이 있으며 이들은 그간 주류 미술계로부터 실력과는 무관하게 주목받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미국의 미술 사학자 린다 노클린은 1971년 처음으로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 라는 에세이로 이 문제를 처음 거론했다. 그는 미술사 책들이 계보 서술적 방식을 취하면서 주류 화가만을 설명하고 나머지, 특히 여성 미술가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여성을 미술계에서 지웠다고 지적한다. 여성이 미술사 계보에서 제외된 건 이런 편견 외에도 시대적 한계도 있는데 소위 주류에 들기 위해서는 중요 미술 학교 졸업이나 작품 거래, 미술관 전시 등 과거 남성에게만 주어졌던 권리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성 미술가에게 불리했던 또 하나의 조건은 미술계가 천장화나 조각상 처럼 상당한 육체적 노동과 정신 노동이 동원된 대작에만 주요 위치를 부여하고 장식이나 수공예 등 여성이 강하고 주로 천착했던 분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와 같은 양식은 육체적 힘이 강한 남성이 더 유리하고 애초에 이런 대작의 의뢰는 남성주류 예술가에게만 의뢰되었으며, 이런 작품의 제작을 위해 필요한 기술 역시 남성에게만 전수되었다. 

 책은 이런 구조적 요인 이외에도 각 시대 예술 작품에 반영된 젠더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첫 번째는 누드화다. 서양 예술에서 누드는 빌렌드로프의 비너스를 시초로 본다. 하지만 서양 예술에서 누드는 그리스 로마 시대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여성에 집중한다. 이는 여성을 성적으로 탐닉하고 대상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대부분으로 그래서 작품의 누드 여성들은 대부분 전면보다는 등을 보이는 수동적 자세가 많으며, 신체 역시 미적으로 이상화하기 위해 목이나 허리가 과도하기 길어지는 등 왜곡된 모습을 보인다. 그리스 로마시대엔 남성 누드화가 많았는데 이는 당대에 여성보다는 젊고 아름다운 남성의 모습을 성적으로 탐닉하는 것이 대세였고 그 외엔 영웅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런 누드화에 변화를 보인 것은 마네의 올랭피아다. 여기서 여성의 누드는 당당히 전면을 향하고 있고 관객을 응시한다. 마네는 실제 활동하는 매춘부를 그렸는데 그렇기에 이를 바라보는 남성관람객들은 더욱 불편했을 것이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몸도 실제적이고 피부 역시 핏기가 없고 얼록이 있는등 이상화한 기존 누드와는 매우 차별적이다. 구스타프 쿠르베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세상의 기원이란 작품에서 여성의 체모가 그대로 드러난 생식기를 그렸다. 그는 하층민의 현실을 그대로 그려내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는데 그런 양식이 여기에도 반영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젠틸레스키란 여성 화가가 등장한다. 그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대부분의 남성은 물론 여성화가들도 자신의 자화상을 매우 전형적으로 미화해 그린 것과는 정반대의 시도를 했다. 당시의 자화상은 남성의 경우 정면의 모습에서 몸을 옆으로 틀어 위풍당당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여성의 자화상도 비슷했으며 화가 자신이 높은 지위가 아님에도 마치 귀족여성처럼 그리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은 소매를 걷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관람객을 의식하지 않고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다. 

 젠틸레스키는 유딧과 하녀에서도 여성의 주도적 모습을 그린다. 기존의 유딧과 하녀는 사람의 목을 베는 장면임에도 매우 수동적이고 부자연스럽게 살해하는 장면이 많았다면 젠틸레스키의 작품은 하녀와의 공조, 그리고 적극성이 눈에 띈다. 그는 유딧과 하녀를 3부작으로 그렸는데 관람객을 의식하지 않고 살해를 위한 협력에만 집중하는 하녀와 유딧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젠틸레스키는 '수잔나와 장로들' 작품에서도 여성의 주도성을 표현한다. 수잔나와 장로들은 고대 로마의 이야기로 아름다운 수잔나의 모습을 늙은 장로들이 염탐하는 장면이다. 다른 작가들은 수잔나는 염탐당하는 위기의 수잔나를 오히려 관능적으로 그리거나 수동적으로 그린 반면 젠틸레스키는 염탐에 저항하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18세기 들어 여성화가 중에서도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당시는 로코코 시대로 귀족들은 초상화와 실내장식을 위한 정물화를 소비했다. 여기에 부를 쌓은 평민계층도 예술품의 소비자로 등장하여 후원계층이 많아졌고 시장도 커져 여성 예술가의 공간이 넓어졌다. 특히 인기가 많았던 풍속화와 정물화는 여성이 강점을 보이는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예술은 아카데미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여성은 사실상 여기에 발을 들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카데미에선 주류 미술은 역사와 신화를 다루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필수적인 인체드로잉을 가르쳤기에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힘든 여성들은 이 분야에서 활약할 수 없었다. 

 18세기엔 행복한 어머니 상이 예술에 자주 등장한다. 이는 계몽주의 사조와 여성의 사회 진출 때문이다. 전통적 귀족은 혈통계승에만 집중하여 자녀를 출생만 하고 자신들은 인생을 즐기며 쾌락에 빠져사는 경우가 많았다. 자녀는 출생과 동시에 유모에 양육하고 학령기가 되면 기숙학교에 진학하고 정략결혼으로 이어졌다. 그러기에 부모와 자녀간 애정을 없었다. 계몽주의는 이 부분을 비판하고 부모가 직접 자녀는 양육해야함을 강조했기에 행복한 어머니 상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아지자 이에 불안함을 느낀 남성들이 여전히 여성들을 가정과 육아에 붙잡기 위해 이에 편승한 것도 이에 한몫했다. 이런 예술적 흐름은 평민을 넘어서 귀족과 왕족의 그림에까지 나타났으며 심지어 아이들과 함께하는 마리앙트와네트란 그림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19세기엔 여성의 사회진출이 더욱 활발해지고 활동하는 공간도 넓어진다. 직업군도 다양해져 기존의 유모와 가정교사외에도 카페 여급이나 무희, 발레리나, 술집 종업원 등으로 확장한다. 하지만 한계가 뚜렸하였고 매춘부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여성의 사회진출을 성적 타락과연결시키는 예술적 시도가 많아졌으며 이에 타락한 여성상이 등장한다. 

 타락한 여성상의 대표적 시도는 팜므파탈이다. 팜므파탈은 관능성과 이를 바탕으로 남성을 파괴하는 파멸성을 가진다. 팜므파탈의 주요 소재는 이브와 샬로메, 유딧, 데릴라다. 이브는 남성에게서 태어나 인류에 선악과 수치심을 가져온 원죄의 상징이다. 샬로메는 헤롯왕의 의붓딸로 관능적인 춤의 대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한 인물이다. 유딧은 원래 유대민족의 영웅이지만 적장의 목을 베는 팜므파탈로 변형된다. 데릴라는 삼손을 유혹해 그를 파멸로 이끄는 인물이다. 이 같은 팜므파탈은 산업혁명으로 여성의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여성의 사회진출이 증가하고 피임률이 올라가며 전통적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이자 위협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처럼 미술 작품 속 여성의 이미지에는 시대 흐름에 따라 중시되는 사회적 가치관이 투영된다. 책에서 강조하는 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책은 산업혁명 초기까지를 다루며 후속 권을 예고한다. 아마도 현대 예술에서 여성의 약진과 여전한 한계 및 제약에 대해서 다룰 듯 하다. 다음 권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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