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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김건우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017년 3월
평점 :
지난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하지만 당시 현정부는 야당과의 분쟁을 피하고 정치적 개혁과제의 원만한 수행을 위하여 건국 100주년 기념을 대대적으로 하지 않고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이는 헌법에 대한민국의 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국내에 상당함을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이를 반대했던 세력은 현 한국사회의 우익세력인데 상당히 아이러니 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파가 아닌 반공, 기독교, 민족주의 특징을 지닌 전형적인 우익세력이 중심인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현 한국의 우익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굳이 1919년이 아닌 1948년으로 잡고 싶은 것은 1948년의 정부세력이 전통적인 관점의 우파세력이라기 보다는 냉전질서에 기초해 당시 한국에 강한 세력을 행사하던 친미, 친일에 기초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며 이들이 현 한국 우익의 조상격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 한국 우익세력은 우익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중심에 자국 민족주의가 최우선이 아닌 친미 친일에 기초한 외교관계나 그들에 대한 의존이 더 우선시 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과거 이런 의존이 그들 집단의 생존과 권력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책 '대한 민국의 설계자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후, 남한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진정한 보수우익들에 대해 살핀 책이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반공, 기독교, 반일, 민족주의에 기초한 당시의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지만, 해방 후엔 미국과 연합한 친일 세력 중심의 이승만 정권, 그리고 이후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의 주류세력에 편입되지 못함으로써 한국 우익의 적장자들이 되지 못했다. 이는 한국사회의 안타까운 대목으로 아직도 진정한 민족주의의 실현의 어려움과(과거 독재정권과 지금의 보수는 민족주의를 매우 강조하지만 이는 독재 및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 다수의 시민을 경제적으로 희생시켜 상위층이 주로 이득을 향유하는 불공평한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왔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른 나라에 비해 우측으로 지나치게 편향되는 불균형성을 야기하였다.
책이 주목하는 초기 우익들은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근거하는 우익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대개 지주나 상공인 출신이었다. 분단과 함께 진영재편이 이뤄지면서 탄압을 받은 이들은 일찌기 공산주의의 좋지 못한 점을 경험하고 한국전 이전에 이미 반공정신을 투철하게 갖게 된다. 이들은 일제 시기 평양을 근거로 하는 도산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 중 여러가지 이유로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이들이 이후 건국의 주체로써 떠오르게 된다. 평안도에 기독교가 광범위하기 퍼져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조선시대 내내 차별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중국과 연결되어 있어 조선후기 실학이 꽃피던 시절부터 외부세계의 문명이 들어오는 입구로 작용하였다. 이로 인해 서북은 일찍이 상공업이 발달했고 ,개화 계몽기에는 기독교가 빠르게 수용되었다. 기독교를 통한 서북의 개화는 사립학교의 대거 설립으로 이어졌는데 일제 말 각종 사립학교의 70% 이지역에 집중하였다. 서북인들은 과거 조선과는 다른 새로운 국가를 꿈꾸었고 이것이 이들이 발빠르게 개화한 주 이유였다.
책은 이런 인사들로 정치쪽에서는 장준하, 김준엽, 서영훈,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을 꼽는다. 그리고 종교인으로는 김수환, 지학순을 문인으로는 조지훈, 김수영을 언론인이나 학계에선 천관우, 이기백을 종교사상가로는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을 꼽는다. 이들은 일제말 제국의 학문을 접할수 있었던 매우 소수 엘리트로 1917-1923년 정도에 출생하여 학병으로 강제징집되는 나이대의 인물이었다. 어렸기에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친일을 할만한 기회가 없었고 이로 인해 깨끗하고 주체적인 건국세력으로 물망에 오르는게 가능했다.
장준하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탈출 후 대한광복군에 들어갔다. 박정희와 대립하며 자신의 광복군 출신임을 자랑했던 그였지만 당시엔 광복군의 현실에 적잖이 실망하였다. 광복군은 말로만 군대였지 훈련 및 시설이 매우 열악하여 제대로된 군사훈련을 커녕 도수제련이 고작인데다고 미약한 세력임애도 3개의 지대가 서로 파벌싸움을 하고 있었다. 장준하는 반공정신을 가진 인물로 이 중 김원봉이 이끄는 제1지대에 대해서 상당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장준하는 백범 김구계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이범석 계로 실제 그는 이범석이 해방 후 귀국하여 조선민족 청년단을 조직하자 여기에 합류한다. 장준하는 반공정신이 강했기에 통일정부를 구상한 김구와는 다르게 남한의 단독 정부수립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런 장준하의 생각은 박정희의 독재와 1960년대 중반부터 함석한과 한국신학대학 계열 인사들과 교류하며 바뀌게 된다. 1972년 7.4남북 공동선언 때에 이르면 장준하는 중도통일 노선을 표명하고 한국사회의 모든 적폐와 문제점은 분단에서 기원함을 주장하고 이로인해 남북 통일을 민족 최대의 지상과제로 주장할 정도로 바뀌게 된다.
장준하가 한국사회에 기여한 큰 공로는 사상계의 출간이다. 사상계는 1950-60년대 대한민국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지식인 잡지로 1952년 4월 장준하와 서영훈이 '사상'을 출간하며 시작되었다. 사상의 발간에는 미국 공보원이 후원할 정도였는데 서북세력을 경계하던 이기붕과 박마리아에 의해 견제받아 폐간된다. 하지만 장준하의 은사 백낙준이 사상에 이은 사상계를 출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백낙준은 한국사회에 뿌리 깊은 족적을 남겼는데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교육 목표인 홍익인간의 이념이 그의 작품이다. 홍익인간은 민족을 넘어선 세계주의적, 보편주의적 가치관을 표방하는 것이다. 그는 도마다 1개의 국립대학을 설치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실현시키기도 했다.
사상계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전성기엔 발행부수가 1만부에 달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말기까지 주요 인사가 서북출신에 편중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사상계의 편집 방향은 다섯 갈래로 민족의 통일, 민주사상,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창조, 민족적 자존심이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총체적 근대화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들은 국가이념의 모델로 서구자유주의를 설정하였으며 이는 이들 지식인들이 미국식 자유주의에 다소 경도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상계는 박정희 군사정부와 날을 세우게 되었고 군사정부는 세무사찰과 반품작전으로 이들을 압박하였다. 결정적 타격은 주로 대학교수였던 편집위원들을 압박하여 이들을 이탈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한국사회에서 교수들의 역할이 변하던 흐름과 맞물리기도 한다. 1960년대 이전의 대학교수들은 실천적 지식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정부가 급여이외에도 연구비를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연구자로써 그리고 정부정책을 옹호하고 따르는 집단으로 변모하게 된다.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는 이런 실천지식인들에게 처음엔 환영받았다. 1960년대의 우익 지식인들은 이승만 정부를 구태세력으로 보았다. 그럴만도 한것이 그 중심세력이 청산되지 못한 친일세력에 국가를 잘못 경영하여 후배들에게 망국에서 자라나는 아픔을 선사한 망국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의 우익 지식인들은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이 근대화를 열망하는 자신들과 결합하여 민족 근대화를 이뤄야한다고 생각했다. 무력을 가진 고려말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결합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때문에 당시 그들은 5.16을 무려 4.19의 연장선으로 바라보았다.
사상계의 경우에서 언급했던 해방후 1950년대의 우익 지식인들은 근대화를 서구의 것을 따라가야하는 것으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망국의 아픔과 설움이라는 시대상황 속에 가질 수 밖에 없는 배경이었다. 하지만 이후 1960년대에는 근대화를 민족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변화가 생겨난다. 근대화의 맹아를 무조건 서구에서 찾기보다는 우리 본연에도 그러한 것이 있음을 바라보게 된것이다. 역사시간에 흔히 배우는 조선 후기 실학에서 자주적 근대화의 요소를 학습하게 되는 것은 이시기에 이뤄진 성과다.
한국우익 중에서는 무교회주의자들도 깊은 족적을 남겼다. 이들의 사상적 근원은 일제시대 일본학자 우치무라 간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 창조자로 천황에 대한 교육 칙어 불경사건과 러일전쟁 반대로 일본사회에서 찍힐대로 찍힌 인물이었다. 훗날 한국의 잡지 성서조선의 김교신, 양인성, 함석헌, 류석동, 정상훈, 송두용등이 그의 제자였다.
성서조선은 한국 기독교 정신주의의 가장 비타협적 지점에 위치한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하면서도 자신의 삶 전체를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 제도권 기독교와는 갈등관계였는데 그럴만한 것이 이들은 신앙공동체 자체를 교회로 파악하여 성직 제도나 예배당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류달영은 5.16군사정부에서 국민재건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덴마크 모델에 기초한 국민교육, 농수로 제작과 농지개간을 하는 향토개발, 주택과 식생활과 환경을 개선하는 생활혁신, 도농자매결연, 결식아동급식등의 사회협동을 주장했다. 그는 가정의례준칙을 수립하고 각종 의식을 간소화했다. 무척 길던 결혼 예식을 지금수준으로 30분정도로 줄인 것은 그가 한 일이다. 그의 이런 사상은 훗날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의 모델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달영은 국가주의자들과 사상적으로 부딪혀 정권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는 마을금고라는 이름의 신용조합을 만들어냈고 평생교육이라는 개념도 최초로 사용한다.
이찬감은 1958년 충남 홍성 홍동면에서 지금도 매우 유명한 풀무학교와 풀무공동체를 설립한 사람이다. 풀무공동체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세계관 가치관 방법론을 집약한 곳으로 녹슨 쇠붙이를 녹이고 정련해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다는 뜻으로 '풀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우치무라 간조의 위대한 범인과 함석헌의 씨알 개념을 사용하여 위대한 평민을 교훈으로 삼았다. 풀무공동체에서 학교는 하나의 마을이자 생활의 공동체로 이는 지금 한국 혁신 교육의 마을교육공동체와 이론적 실천적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유명한 유기농 역시 이 집단에서 시작되었다.
함석헌은 우치무라보다 류영모에게 영향을 받았다. 류영모는 노자를 예수만큼 중시했는데 그는 참된 삶이란 신앙적인 진리 정신과 서민적인 근로정신이 일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함석헌의 씨알도 류영모에게 온 것으로 씨는 생명, ㅇ은 하늘, ㅏ는 극소이자 소우주인 자아, ㄹ은 활동양태다. 즉. 씨알은 우주의 생명의 내려와 인간의 얼이 된 존재다.
한국천주교는 개신교보다 그 역사가 오래됨에도 사회적 영향력이 미비했다. 이는 개별 교회가 각자 따로 노는 개신교에 비해 천주교가 로마바티칸을 중심으로 강한 통일성과 방침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즉, 지역성을 갖기 어려웠던 셈인데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로마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현대세계에 발맞춰 변화를 선택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된다. 이 회의에서 기존 성직자 중심을 평신도 중심으로 이동시키고 미사에서 라틴어 외에 모국어도 사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김수환과 지학순은 사회 참여로 이해하였다.
김수환은 독일 요제프 회프너에게 기독교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런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다. 김수환은 1968년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이 되었으며 1972년 미사생중계때 정부의 국가호위 특별 조치법을 대놓고 비판함으로써 정부의 눈밖에 나게 된다. 하지만 추기경이라는 막강한 위치덕에 군사정권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는데 그 덕에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일종의 피난처 역할을 하게 된다. 김수환은 1972년 남북이 야합한 공동성명에 대해서도 남북의 정권을 연장하고자 하는 적대적 공존 수단으로 파악하여 비판하였다. 김수환은 자연법을 근거로 유신을 비판하였는데 자연법은 신적 정치에 기초해 모든 실정법 위에 존재하는 원리로 국가의 법이 이에 비치되면 그것은 악법이자 무효가 되는 것이었다. 김수환은 반공주의자로 민주화 운동 인사였음에도 공산주의에 대해 경계하는 발언을 하였다.
지학순은 카톨릭이 평신도 위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1966년 원주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는데 이것이 지금도 존재하는 한살림의 전신이다. 그는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수용하였으며 1974년엔 최초로 유신헌법에 대항해 최초의 양심선언을 한다. 양심선언은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그로부터 2개월후 지금도 존재하는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된다.
천관우는 1954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58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자 편집국장, 196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활약할 만큼 젊어서부터 언론인으로 성공했다. 그는 자유언론의 전통을 세웠는데 언론 자율과 자유 수호를 매우 중시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정권에 대한 날을 세우다 밀려났는데 이는 당시 일련의 흐름과 관계한다. 1950년대만 해도 언론에서는 언론을 만들어내는 기자나 편집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언론이 대형 기업화하면서 경영진이나 소유주가 편집인보다 우위에 서기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정권은 언론의 통제를 기존 기자통제에서 경영진을 통제하는 형태로 구조변경을 시도한다. 이런 언론 권력의 변화흐름에서 천관우는 힘을 잃는다.
천관우는 뛰어난 언론인이기도 했지만 우수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학부 졸업논문이 실학의 개념과 발전과정을 최초로 이론화한 것인데 이는 세계사적 근대화의 맹아가 조선말 외래 유입에서 온 것이 아닌 자생적으로 생겼음을 주장하는 최초의 패러다임 변화였다. 언급한 것처럼 1960대는 학계에서 자생적 발전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이른 당시 한일 협정이라는 사회적 반감과도 관련한다.
책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사상적 흔적과 업적을 남긴 다양한 전통 우파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들은 현재 우파의 적장자가 되지 못해 크게 잊혀진 존재로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들에 대한 배경과 업적에 대해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이들이 성공하여 현재 우파의 사상적 직계 조상으로 자리매김했다면 지금의 한국사회가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해보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