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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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10년의 무게가 예전 같진 않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고 고작 80년 정도를 사는 한국인에게 10년은 무척 긴 시간이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10년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10년만에 다시 학교를 가게 되었을 때다. 내가 초중고를 다닐때와 별반 다를게 없는 것들을 그대로 배우고 있는 것에 상당히 놀란 적이 있었다. 많은 것이 짧은 시간안에 바뀌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있던 것이다. 그리고 엄기호를 유명하게 만든 이 책도 나온지 거의 10년이 되었다. 간혹 나오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미니홈피 같은 용어만 제외한다면 책에서 세월을 거의 느낄수 없었다. 그만큼 책에서 저자가 문제 삼는 부분에 대한 개선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많은 문제는 대부분 자본에서 기인한다. 

 책은 대학, 정치, 사랑, 학교, 돈을 주제로 학생들과 함께 한 강의에서 그들의 글을 주제별로 실고 저자가 거기에 썰을 푸는 형식이다. 시작은 요즘 기성세대들의 현 세대에 대한 부정이다. 사실 현세대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이미 10년전 책이니 말이다. 하여튼 지금도 그러한데 기성세대는 우파같은 경우는 현세대를 의지와 노력이 부족하다고 폄하하고, 좌파는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자각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각 세대가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하에 형성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산업화세대라 할수 있는 보수우파는 배고프고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굳은 일을 해가며 가난해서 탈출하며 부를 쌓았고, 군사독재를 경험한 좌파는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상황에서도 독재를 타파하고 민주화를 이뤄낸 경험이 있다. 하지만 현세대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국민소득 1만불 이상인상태에서 자라났으며 민주화도 태어나면서 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면 신자유주의의 본격화로 부모세대부터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꾸준히 겪어왔고, 빠른 세태변화로 뭐하나 안정적이고 보장된 것이 없는 상태로 성장했다. 때문에 그들에겐 불안함으로 개인이 우선시되고, 생존이 우선시되며 정치적 과제보단 자신의 경험과 재미가 우선한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그들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현세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기성세대의 비판은 자신들만의 성장방식을 잣대로 들이댄 것으로 옳지 못한 일이 된다. 때문에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단순한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 대한 조건에 대한 지식과 그들의 감수성과 나의 감수성 사이의 거리에 대한 성찰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교육에 대한 비판도 무척 뼈아프고 지금도 유효하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성장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교육은 가장 성장에 관심이 없다. 이는 한국의 학교가 성장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 아니라 대학을 가기 위한 도구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보니 한국의 학교는 우정은 사라지고 폭력만 난무하는 정글과 같은 공간이 되었는데 한국사회는 이점도 애써 눈을 감는다. 많은 기성세대들이 학교공간에서의 폭력과 경쟁을 잊고 애써 추억만을 기억하려 하는데 사실 동갑이고 같은 반에 일년여를 함께 있었다고 하여 모두를 친구라고 칭하는 것도 우습다. 입시를 위해 경쟁하고 서로간의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같이 있었다고 모두 친구였을까? 그냥 같은 반에 있었던 사람을 사회적으로 친구라고 부른다고 보는게 맞는듯하다. 거기에 학교는 인간이 매우 권력을 추구하는 동물이기에 자연스레 매우 권력적 공간이다. 그리고 그 권력은 공부를 잘 하는 사람과 주먹이 강한 사람이 차지한다. 그리고 서로 무척이나 대비되는 양 집단은 권력의 속성을 서로 잘 안다는 특성때문인지 서로를 인정하고 침범하지 않는다. 어디 일진이 일등 건드리는것을 보았는가? 심지어 보호도 한다. 그리고 공부만 잘하는 일등도 일진의 폭력과 비윤리성에 무관심한건 마찬가지다. 이처럼 조선시대 동반과 서반의 연합은 지금도 통한다.

 가족에 대한 분석도 재밌다. 저자는 한국의 가족이 위기에 빠진 이유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노동을 하지 않고 그저 쉬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가족에 노동이라니 뭔가 이상해보이지만 저자는 가족이야말로 누군가의 화를 참아내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생각해주는 감정노동이 가장 필요한 곳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감정노동은 노동중 가장 많은 정신에너지를 요하는 것이다. 한국가정의 문제는 다른 모든 구성원이 가족의 유지를 위해 그 감정노동을 엄마에게만 기대하고 요구하고 그를 착취했다는 것이다. 흔히 가족의 문제를 소통의 부재에서 찾는다. 하지만 저자는 소통도 만사형통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정에서의 소통이란 것 자체가 마치 학교에서 권력지향적이고 그리 선하지 않은 개인들을 친구라는 용어로 미화및 이상화한 것처럼 화목하고 착하며 이상적인 가족구성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가정의 구성원은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의 어설픈 소통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거나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뭘까. 저자는 질문의 공유와 공감능력의 향상을 해결방법으로 꼽는다. 질문의 공유와 관련해서는 들릴 권리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흔히 말할 권리를 중요시하지만 말할 권리는 결국 누군가 듣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즉, 말할 권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들어줄 의무를 가진 누군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한국사회의 문제로는 서로 다른 답변만 주장한다는 것인데 그것보다는 같은 질문을 공유하는 것을 권한다. 질문을 공유하면 서로간의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더 많은 다양한 답을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감은 인간을 어쩌면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공감하지 않는 인간은 서로를 분류하고 서열화한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전쟁과 살상이 가능했던 것은 서로를 공감하지 않을 만한 대상으로 분류하고 서열화 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인의 공감능력은 자본에 의해 수동적이고 철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던 한국인은 그가 가진 사회적 자본이나 진짜 자본으로 그를 분류하고 위계화한후 대한다. 책에는 10년전 고대생이면서 학교를 포기한 이의 글이 나오는데 저자가 함께 공부한 '원세대'(연세대 원주캠퍼스)학생들은 그것을 보면서 사회의 충격적이고 경탄하는 시선과는 다르게 조소와 조롱, 자괴감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 고대생의 학벌포기선언이 이슈화되었던 것 자체가 학벌이란 강력한 사회적 자본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며 그것을 갖지 못한 자신들의 같은 선언 따윈 전혀 주목받지 못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공감능력의 회복은 중요하며 우리에겐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는 공감하는 생활의 언어가 필요하다는게 저자의 생각이었다.

 미니홈피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로, 대통령은 이명박에서 문재인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10년은 많은 것을 바꾸었지만 그럼에도 책을 보며 시대가 많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문제의 근간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그런게 바뀌어야 좀더 사람사는 사회와 개혁이란 것이 이루어진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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