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한국미술사 - 주먹도끼부터 스마트폰까지
이태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진숙의 '시대를 훔친 미술'을 읽으며 시대의 정신 및 문명의 발달과 함께 호흡하며 서로를 견인해나가는 미술과 시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우리 미술 혹은 동양미술엔 이런 흐름이 없을까 궁금했다. 여러 책을 좀 보긴 했는데 그런 사조가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물론 동양과 서양의 역사 흐름은 다르며 역사를 단선적으로 보는건 위험한 시각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그런 흐름은 있다고 본다. 그러다 이 책 '이야기 미술사'를 보게 되었다. 분량은 무려 600쪽, 저자의 야심이 대단해 무려 구석기부터 현대의 한국미술을 총망라했다. 한국미술 전반을 아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직접 주요 유물의 발굴 및 견학에 참여한 저자의 식견이 빛난 책이다. 아마도 체한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소화한 것을 조금씩 써본다.


1. 토기와 도자기

 서양과 다른 동양의 미술 장르는 확실히 토기, 도자기다. 서양은 미술이 실용과 확실히 분리된 듯 하지만 동양은 그렇지 않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우리의 달항아리는 사실 관상용이 아니라 고기 따위를 담아놓던 보관용 그릇이었다. 연구에서 달항아리 중간 부분 기름층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고기따위를 보관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한국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로 시작한다. 교과서에 나온 것과는 다르게 빗살무늬 토기는 무척 큰데 50cm에 달하기도 한다. 대체 이 빗살은 왜 있는걸까 궁금증이 드는데 단순한 장식이란 견해에서, 주술적 의미, 아무표시도 없는 빈공간에 대한 불안감의 대처, 그리고 실질적 용도로 마찰방지를 위한 것이라는 것까지 다양하다. 신석기 후기로 들며 토기는 작아지고 아래는 편평해졌으며 크기도 작아지는 경향이 뚜렷해졌는데 이는 음식을 큰 그릇에 담아놓고 같이 먹던 습관에서 점차 작은 크기의 그릇에 덜어먹는 형태로의 식습관 변화를 의미한다. 신석기 시절 토기는 가까우면서도 먼 한중일이 모두 상당히 다르다. 중국의 토기는 대부분 채색토기로 화려하고 검고 붉은 채색이 많은데 이 시기 인도, 서아시아, 아프리카의 것이 유사하다. 한국의 토기는 빗살과 무채색인데 만주, 몽고, 핀란드, 우랄, 알타이의 북아시아 쪽과 유사하다. 반면 일본은 한국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조몬시대 이르러 구연 부분을 조각하는 특유의 형태로 차별성을 드러낸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빗살무늬 토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위 부분에만 점을 찍는 가벼운 띠무늬 형태 토기가 많아진다. 이 시기부터는 물레가 생겨나 세련된 둥근 형태의 토기 제작이 가능해졌다.

 삼국시대에 토기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의 토기가 매우 다르다. 백제와 고구려는 토기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형태가 무른 연질의 토기를 주로 제작했다. 하지만 신라와 가야는 단단한 경질의 토기 생산이 가능했다. 이는 가야 지역의 토기를 고온에서 구워내는 기술로 가능했다. 신라 토기는 가야 토기의 기술과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했는데 6세기 무렵이면 무려 1000도 이상에서 토기를 구워내고 유약을 살짝 바르기 시작했다. 고구려인들이 주로 벽화를 통해 삶을 표현한 반면 당대 신라인은 토기에 장식한 토우나 상형토기로 그들의 삶과 문화는 나타낸듯 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토기에서 도자기의 시대가 열린다. 유약을 본격 사용하고 고온에서 경질도기와 자기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도자기는 단연 청자다. 동북아시아에서 청자의 시작은 중국인데 청자는 당시 매우 귀한 사치품이었던 옥을 대신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즉, 어떻게 하면 그릇에 옥색을 내느냐가 초점이었던 것이다. 청자와 백자는 유약과 1200-1300도의 가마에서 구워내야 생산이 가능하다. 즉, 유약과 고온기술이 초점이다. 그래서 두 기술이 발달했는데 도자기는 흙과 불, 유약에 따라 그 결과가 매우 달라진다. 청자는 유약에 철분을 섞에 초벌하면 붉은 색이 되고, 이를 다시 재벌하면 푸른빛을 띤다는 것을 알게 되며 가능해졌다. 이 유약에 철분이 적으면 푸른 빛이고 다소 많아지면 탁한 갈색을 띠는 푸른빛의 청자가 된다. 가마기술은 비탈에 짓는 비탈가마와 평지가마가 있다. 비탈가마는 고온에서 산소를 차단하는 환원법으로 청자가 주로 갈색조나 황갈색조라 만들어지며 평직마에서는 산소가 많이 투입되는 산화법으로 맑은 녹색과 청생의 푸른빛의 청자를 만들어낸다. 고려는 이 중 비탈가마 형태를 받아들였다. 고려 청자의 톡특함은 유명한 상감이다. 상감은 본래 청동기에 금, 은, 보석, 뼈등을 박아 넣은 금속공예였는데 고려는 이 상감을 도자에 넣었다. 성형한 그릇의 표면에 백토나 자토를 채워넣었는데 문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유약이 얇아지다보니 상감청자의 유색은 약간 청회색조가 되었다. 조선은 초기엔 고려의 청자를 계승해 분청자가 유행했다. 분청자는 청자에 백토를 분장한 자기를 말한다. 그러다 세종대에 이르러 명나라의 청화백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청화백자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이로써 청자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2. 불교

 한국 미술에 불교를 빼놓을 수 없다. 불화나 사찰, 탑, 불상이 모두 불교에서 비롯한 예술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스투파라는 신도들이 예배를 하던 탑이 있었다. 스투파는 인도에선 둥근 사발을 뒤집은 듯한 복발형으로 무덤과 유사한 형태였다. 하지만 중국에 스투파가 유입되어 다층탑 형식과 결합하여 3-5층의 전망형 망루와 비슷한 탑으로 변모한다. 다만 중국에선 목탑이 대세였는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화강암이 많은 한국의 자연적 특성과 결합해 석탑이 유행한다.

 처음엔 탑이 중심이었지만 불상이 유래하며 불상의 인기가 탑을 넘어서게 된다.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본 뜻 것이기에 사리가 보관된 탑보다 신앙과 관련하여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공해 신자들을 포섭하기 더 쉬웠다. 그래서 사찰도 탑 중심에서 불상을 모신 금당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불상 중 천불은 같은 모양과 크기를 지닌 천개의 불상을 의미하며 삼존불은 부처를 중심으로 미륵반가사유상과 보살상이 위치한 것이다. 7세기 전반엔 삼국에서 미륵반가사유상이 유행했는데 아무래도 전란과 나라의 멸망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이 결합한듯 하다. 반가사유상은 글자그대로 오른 다리를 왼다리에 걸치고 그 오른 무릎위에 올린 오른 팔로 턱을 괸채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의 불상이다. 중국의 반가사유상은 대개 석불이지만 한국은 금동불로 제작을 했다.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6-7세기 일본 불상과는 달리 적송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일본 불상이 대개 조립식이었던 것에 반해 반가사유상은 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때문에 일본 반가사유상은 한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삼국시대 탑과 불상의 배치인 가람배치는 지역마다 다르나 탑하나에 세개의 금당을 배치한 고구려식 1탑 3금당이 일반적이었다. 백제에는 3탑 3금당, 3탑 1금당식의 독특한 형태도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팔각형의 목탑이 많았고, 신라와 백제는 목탑과 석탑이 공존했다. 백제미륵사는 1탑 1금당으로 가운데 목탑이 있었고, 동서에 석탑이 있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다. 백제 사비시대의 정림사지 5층석탑은 목탑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한 완성형 석탑이다.1층의 탑신을 높게 설정하고 2층부터 탑신의 너비와 높이, 길이를 급격히 줄여 시선이 1층에 머물게 하였고 1:1.618의 황금비를 나타냈다. 

 남북국 시대 신라는 불교를 이용해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삼민을 통합하고자 하였고, 왕즉불의 이념아래 전국토를 불국토로 이념화했다. 이에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이 건립되었고, 석굴암을 만들었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자연 석굴이 많아 석굴 사원을 만들기 손쉬웠지만 신라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에 거대한 인공암반을 그 산꼭대기에 올려놓고 인공석굴을 조성한게 석굴암이다. 그리고 불교의 소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범종도 많이 주조한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불교는 쇠퇴해 석탑이나 조형물의 조형미가 쇠퇴한다. 몰락한 왕권을 상징하는듯 한데 불상의 얼굴도 이상적이고 근엄한 것에서 딱딱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얼굴도 우리와 유사해진다. 신라 말기 선종이 유입되었는데 이 선종은 중앙집권적인 교종과는 다르게 누구에게나 부처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지방세력의 입맛에 잘 맞았다. 때문에 이시기 지역색이 강한 불교 문화가 발달한다.

 고려가 들어서며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영향인지 고구려식 팔각형 목조탑형식을 따른 다각다층석탑이 유행한다. 13-14세기 고려말에 이르면 권문세가의 영향으로 취향이 담긴 화려하고 장식적인 불화가 많이 만들어진다. 이 불화는 적록의 보색대비를 강조한 고구려 벽화와 비슷하여 광물색의 원색조와 적록의 보색대비가 특징이다. 고려불화는 고급스럽게 비단에 적, 녹, 청색을 중심으로 흰색과 황색, 금색, 은색 물감을 사용하였다. 뒷면에도 물감을 칠하는 배채법을 사용하여 적록을 선명히 하고 변색을 막고 그림에 안정감을 주었다. 변상도는 불경의 주요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인데 14세기의 미륵하생경변상도는 옅은 선묘방식이 퇴락하고 미륵불의 이목구비가 매우 짙게 표현되어 조선초기 불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13-14세기는 원의 영향으로 진흙으로 구운 후 금박을 입힌 소조불이 나타났고, 3,5,7,9의 홀수탑에서 십이라는 숫자를 중시하는 화엄종의 영향으로 경천사지 10층석탑이 그것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불교는 탄압받지만 왕실의 후원과 민간의 신앙으로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한다. 특히, 전란후 승병의 활약으로 왕조보존에 대한 보답으로 국가가 나서 불교를 중흥하는데 인조와 숙종대에 전국의 사찰이 새로 재건될 정도였다. 전란 후 조선에서는 희생된 수많은 이들을 기리는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의식이 활발했다. 때문에 천도의식을 위해 거는 불화인 괘불이 많이 제작된다. 괘불은 무려 10m크기로 법당 밖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거행할때 거는 탱화였다. 


3. 조선시대 회화

 동아시아에서 산수는 만물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 잘 부합했다. 산수는 이로인해 수신의 의미를 갖고 상징적 의미가 커지면서 산수화를 그리는 일이나 가까이에 두고 감상하는 문화가 유학자들사이에서 보편적 문화로 자리한다. 산수화는 중국에서 시작해 조선도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중국의 기법은 크게 북종화와 남종화로 나뉜다. 북종화는 부벽준 기법으로 붓을 옆으로 눕혀 도끼처럼 찍는 방식으로 깎아지른 절벽이나 거친 절벽의 표현에 적합하다. 남종화는 피마준과 미점 기법으로 피마준은 갈필로 그려 산과 언덕의 주름을 표현하고, 미점은 붓을 옆으로 눕혀 툭툭 찍는 기법으로 안개를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조선 초기 산수화는 북종화의 영향을 받았다. 대가인 안견은 몽유도원도에서 북송대 거장 곽희의 산수기법은 운두준법을 사용하여 능선과 주름은 마치 구름같이 표현하였다. 후원자인 안평대군과 안견의 일파는 15-16세기 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양식인 남송화 기법이 유행한다. 기법에 이어 흐름도 크게 변하는데 17세기 중반 진경산수화가 시작되고 18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통념과는 달리 진경산수화는 사실 실경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과거 관념적인 중국의 이상화된 풍경을 그린 것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제 풍경을 그리되 자신의 인상과 주관에 따라 과장과 변형, 여러 시점을 이용해 그린 것이다. 즉, 현실경치에서 성리학적 이상을 구축한 것인데 이는 당시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등장해 새로운 유교문명국을 조선에서 찾고자하는 소중화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진경산수화는 정선이 유명하다. 그의 3대 명화는 박연폭도, 금강전도, 인왕제색도인데 모두 실경을 바탕으로 그의 이상적 바램이 구상된 그림이다. 금강전도는 토산과 암벽산으로 구성되었고, 양자는 마치 태극모양처럼 표현된다. 봉우리에 눈을 부각하기 위해 주변 배경을 암청색으로 처리한 것도 돋보인다. 정선이후  강세황과 심사정등로 대표되는 신조류가 등장한다. 정선은 조선의 명승을 통해 이상을 꿈꾼 마음의 그림을 그렸고 이는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 노론 세력의 정신세계를 대표한다. 반면 강세황의 제자인 김홍도식 사실화법은 박지원, 정약용등의 실사구시학파의 입장과 유사하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산수화와 초상화 일색이던 그림판에 풍속화가 등장한다. 조선후기 상업이 발달하며 서민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결과인데 애정소설이 유행하고, 흥과 신명의 감정을 드러내는 당나라 시풍이 완연했으며 음악도 기존의 느리고 절제된 음률이 빨라지고 변화폭도 커졌다. 그림에도 이게 반영된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이런 흐름의 초기 주자로 평범한 서민들의 노동을 화폭에 담는 혁신적 변화를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에는 풍속화가 도화서 화원의 정식 시험과목으로 독립되기에 이르렀으며 김홍도는 단원풍속도첩에 무동, 씨름도, 서당등 25개의 화폭을 남겼다. 조선 후가 풍속화는 여성도 대상을 많이 부각되었는데 김홍도의 제자 신윤복은 남여 애정지사를 담은 노골적 성적 이미지를 그림에 담아 당대 신분사회를 질타했다. 이는 유교적 질서가 무너지고 예교와 풍속이 느려진 사회상을 반영한다. 19세기에는 관찰을 통한 사실 위주의 그림이 유행하여 당대 화가들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좋아하는 대상을 개성적인 스타일로 그려냈다. 반면 김정희 풍의 문인화도 사대부가 무너지는 시기임에도 아이러니 하고 강조되어 갔다.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미술의 많은 변천과 양상을 담아냈다. 기대하고 예상했던 서양과 같은 고대인문주의에서 중세 종교 인문주의 낭만주의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이르는 시대적 흐름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흐름이라면 왕조의 흥망에 따라 초기 불교든 유교든 조금더 이상적인 흐름에서 후기에 이르러 사회적 법도와 왕조가 흔들리며 지방세력이나 백성의 요구에 맞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형국이다. 이런게 불교나 유교라는 그릇을 차용하여 반복되어 표현되는 느낌이다. 동아시아사가 발전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동아시아 수력기반 농경왕조가 다소간의 발전은 해나가지만 생산 및 분배체제가 초기엔 잘 잡혀있다가 이것이 무너지며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는 설의 흐름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여튼 책은 상당한 한국 미술품을 책에 담아냈고, 정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국 미술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고 싶다면 볼필요가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