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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평점 :
매트릭스, 사유의 샐러드 보울
우선 이 책은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모티프로 하여 유수의 철학자들이 달려든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게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그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가를 가늠케 하는 증거이지만 그 주체가 바로 철학자들이라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대 이토록 철학자들의 구미를 당긴 영화가 몇이나 되던가..
또한 이 책은 리뷰를 쓰는 것이 매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매트릭스’라는 한 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논의의 구심점으로 하여 출간한 책이라는 일관성을 가지지만, 참여한 모든 철학자들의 매트릭스를 바라보는 관점들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탁월한 철학적 분석과 그에 해당하는 사유의 결과물들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면서도 이견(異見)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하여 이를 통섭하는 리뷰를 작성하기위한 개인적인 한계를 극복할 방법과 능력이 내게는 없다는 고백을 딜레마로 남기는 출간물이다.
이 책을 가장 흥미롭게 해주는 요인은 여러 장면들에 대한 사유의 투영이기도 하지만 같은 장면에 대한 전혀 다른 각도의 접근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매트릭스에만 국한된 사유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사유를 투영시키는 프리즘의 성격과 특징들이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이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요구되는 사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하자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의 리뷰를 쓰기가 어려운 것은 다양한 학자들의 각기 다른 관점들을 통섭하는 것의 어려움에 있다. 이들의 프리즘을 하나의 리뷰에 버무려 넣는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불성설일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성격이 뚜렷하면서 특정한 것들의 모임은 도가니탕(Melting Pot)이 아니라 샐러드 보울(Salad Bowl)의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의외일 수 도 있지만, 타자의 것과 만나는 과정과 결과를 일컽는 ‘혼종’이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되었고 이에 나의 사유를 투영시키게 되었다.
혼종의 속도와 태도..
현대는 문화의 혼종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역사는 늘 그래 왔다. 혼종의 시대가 아닌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혼종’은 서로 다른 문화가 서로에게 유입, 영향을 끼치며 섞이는 것을 뜻한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혼종의 속도는 점점 증가해, 개개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첨단 통신기기가 보편화된 현대에서는 말 그대로 광속인 것이다.
감기 바이러스가 지구를 한 바퀴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교통의 발전 속도와 같았다고 한다. 감기 바이러스는 인간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인간이 도보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20여일, 즉 1년하고도 두어 달은 족히 걸린다. 물론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전혀 없는 평지여야 하고 잠도 안자고 걸어야 하는 수치이다. 반면 시속 800km로 날아가는 비행기로는 약 50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감기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를 문화의 혼종 속도로 대신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과거나 현대의 혼종은 그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마치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이 전혀 색다른 해석과 사고를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는 것 처럼, ‘혼종’ 이라는 각기 다른 것들의 만남을 대하는 태도가 왜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은 그러한 혼종의 장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타자의 견해를 수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흔히 ‘문화 충격’이라 일컽는 갈등의 과정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는 서구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다. 더욱이 현대는 ‘글로벌’이라는 용어가 언론과 매체를 장악한지 오래되지 않던가... 구한말에도 전혀 새로운 문물들이 우리나라에 상륙했고, 여전히 그 물결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근래에 와서는 ‘다문화가정’이라는 용어가 생길만큼 외래의 물결은 거침이 없다. 국내의 상황과 국외의 조건들이 만나 결합하는 혼종의 결과물이므로 이를 피해갈 방법이 없다. 이러한 혼종의 상황을 그 어떤 나라이든지, 그 어떤 개인이든지 격을 수밖에는 없다. 독자적으로 홀로 살아가지 않는 다음에야 말이다.
마치 매트릭스라는 한 편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많은 장면들을 다각도의 프리즘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다양성의 여지를 주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절대적 공식이라는 것은 몇몇 자연적인 현상을 발견하는 ‘론, 혹는 법칙’들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상대성 이론’이라든지 ‘에너지 보존의 법칙 또는 만유인력의 법칙’ 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렇게 절대적이라는 것들도 때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발견에 의하여 무너지곤 하는 경우들을 종종 목도해온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다양함을 함유하고 있을 가능성을 언제가 개방시켜 두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문화적 혼종이라는 것은 결코 피해갈 수 있는 현상들이 아니다. 문제는 그 문화적 혼성을 어떠한 자세로 수용하느냐인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흔히 '융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융해는 무사고적 수용이라는 말과 상대적인 용어일 것이다.
사실 타문화 혹은 타자의 이론(異論)들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융해라는 긍정적 과정을 거치게하여 새로운 우리의 것으로 창출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정적 반응은 필연적으로 흡수될 문화 혹은 이론(異論) 들과 부정적 결과물을 낳는 싸움을 하게 한다. 사람들의 모임은 언제나 이론이 제기되기 마련이듯 말이다. 이론은 타자를 곧잘 불쾌하게 만든다. 이는 타자와의 논쟁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논쟁은 매우 유익한 발전의 과정이다. 단, 사유가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조선의 경우...
덕흥대원군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역대 그 어느 임금보다도 신속하고 강력하게 바로잡은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국외의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강력한 힘을 앞세워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서구의 세력의 유입에 대응하는데 서툴렀다. 결과적으로 이를 적절하게 수용한 일본에 의해 강점되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미국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차라리 나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가정법에 불과한 것이고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실제로 조선에 총기가 들어 왔던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폴투갈의 상선은 조총을 일본에 가져가 이를 은과 바꾸었다. 그것이 1543년의 일이다. 일본은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조선에 이 조총을 예물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조총의 위력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이를 무기고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일본에서는 조총으로 무장한 다이묘들이 칼을 든 다이묘의 사무라이들을 싹 쓸어버리고 나라를 평정하면서 일본 열도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하여 뎃뽀(철포-조총을 뜻함)도 없는 놈이 덤빈다는 말로 '무뎃뽀'라는 말의 유래가 된 것이다. 제 아무리 사무라이들이 검을 잘 쓴다 한 들 뎃뽀(조총)로 무장한 다이묘들을 어떻게 감당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때 일본의 무뎃뽀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철포의 위력 앞에서 죽어갔다.
무뎃뽀의 대가를 톡톡하게 치룬 조선과 한국
철포의 위력을 알게 된 일본은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592년 일본은 조선에 병력을 투입한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임란을 맞은 조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조총 앞에서 헤아릴 수 없는 병사들이 쓰러져 갔던 것이다. 혼종에 대한 바르지 못한 판단은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조선에서는 어쩌면 폴투갈의 상선들이 일본이 아니라 조선과 먼저 거래를 텄을 사건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바로 순도 높은 은(銀)의 추출 기술이다. 당시 명나라는 은(銀) 본위제 화폐를 시행하고 있었고, 명나라 대부분의 거상들은 은을 상거래의 수단으로 했다. 당시 서구인들에게 명나라의 문물들을 가져다가 서양에 판매 할 경우 그 수입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5개의 선박 중 하나만 돌아와도 이익’이라는 말은 바로 이때 생긴 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상인들은 명나라의 결재수단인 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순도 높은 은의 추출 기술에 있었다. 명나라에서 원하는 순도 높은 은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이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추출기술을 자체 개발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명종 때의 쌍놈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순도 높은 은을 추출하는 능력을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 기술과 인력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쌍놈이 개발한 기술이라고 천대했던 것이다. 마치 조총을 무기고에 가져다 썩히듯이 말이다. 이를 눈치 챈 일본은 이들을 일본으로 정중히 모셔갔다. 그리하여 일본의 은 추출능력이 세계 최고를 자랑하게 되었으며 일본의 은은 서구인들을 매료시키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폴투갈의 상선들은 양질의 은을 생산해내는 나라, 일본으로 그 뎃뽀를 가져간 것이다.
이는 사소한 문제 같지만 사실상 일본이 조선을 침공 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어준 중요한 문제였다. 이 사건은 바로 새로운 것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의 중요한 교훈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랄 수 있다.
그 후,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자 바로 한국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휴전이 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엄청난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어왔다. 문화의 대 혼종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에 또 한 번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또 한 번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땅은 100여년 동안 서구의 물질, 사상, 학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가 되었다. 그 중 서구의 경쟁 시스템과 사고는 대한민국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친 것 중의 하나이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이에 자본주의가 함께 맞물려 갔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용어의 배후에는 사실은 강자의 피도 눈물도 없는 논리가 서려있다.
우리의 교과서는 약육강식의 논리와 적자생존의 논리를 아무런 거침이 없이 가르쳤다. 이미 너무나도 친숙해져버려 이제는 의심조차도 하지 못하게 된 이 논리는 한국 사회를 100여년간 지배해온 것이다. 특히 학교에서의 경쟁 일변도 교육시스템은 은 대한민국의 주도세력일 수 밖에 없는 인력들의 핵심 동력이로 작용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혼종의 물결을 저항 하기란 거의 불가항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혼종에 대한 당사자들의 태도가 향후 엄청남 결과를 초래 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물론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에 알맞은 적절한 판단과 준비의 신중한 작업을 요망하는 일이라 하겠다. 또한 매트릭스를 소재로 서술해간 철학자들에게서 배우는 혼종에 대한 태도 역시 이와 일맥상통하는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