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를 빛낸 펠릭스 멘델스존은 정말 멋지고 훌륭한 음악가였다. 사실, 작곡 외에 독일 음악사에 남긴 업적만으로도 그는 후배 인사들에게 돈수백배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칭송 받았다. 또, 음악에만 재능이 있었냐 하면 그렇지가 않았다. 문학과 미술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가 남긴 역사가 이를 반증한다. 신(神)은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재능을 한꺼번에 몰아주시곤 한다. 아... 신에게 그 어떤 재능도 부여 받지 못한 나의 슬픔이여...!! 이거 너무 불공평한거 아닌가요?


 

음악의 아버지 바흐 선생의 곡을 들어보지 못한 분들은 꽤 있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들 멘델스존 형님의 곡을 알게 모르게 들어봤다고 장담할 수 있다. 실황이나 드라마에서 신부가 입장할 때 나오는 결혼 행진곡은 바로오~~~!! 멘델스존 형님께서 쓰신 곡이지 말입니다.



멘델스존 형님은 다수의 유명한 음악가들과는 달리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큰 부자였고 은행장이었다고 한다. 멘델스존의 친형님 되시는 분도 사설 은행을 운영했다고 하니, 한마디로 제대로 금수저였다. (친형님 되시는 분도 박애정신을 가진 분이었다고 책에 써있다) 멘델스존 형님은 1809년 생으로 초기 낭만파의 인물이다. 낭만주의는 1789년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 불러온 시대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즉, 왕실, 귀족, 상류층들의 소비물로 인식되던 클래식칼 음악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중산층의 소비물로 이동했던 것이다. 베토벤이 위대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마어마한 곡을 썼다는 자체로도 위대한 음악가이지만, 베토벤은 음악 소비의 방향성을 귀족과 상류층에서 대중에게로 향하도록 물꼬의 방향을 틀어 잡았다. 대중에게 낭만 음악의 문을 열어준 장본인이 바로 악성

베토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 음악의 대중성 확보는 베토벤을 기점으로 한다. 베토벤이 위대한 것은, 들리지 않는 귀로 그토록 훌륭한 음악을 작곡해서가 아니다. 음악사를 바꾼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바흐 선생은 분명 음악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친애하고 경애하는 베토벤 선생은 이런 점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정녕 악성(樂聖)이다.


부유한 집안 덕분일까, 멘델스존 형님은 진보적 성향을 가진 낭만주의 음악가들과는 약간 다르게 보수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의 작곡은 고전주의 형식을 지켰으며 낭만주의의 향기를 입혀버렸다. 즉, 낭만주의의 향기를 풍기면서 고전주의의 맛을 가진 묘한 음악을 시전하신 것이다. 그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멘델스존 형님은 안정감을 가진 낭만주의 음악을 낳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음악은 주로 밝은 편이었다. 역사가들은 그가 "전통과 개혁 사이에 균형잡힌 해결책을 찾아냈다." (중앙일보사 音樂의 遺産 5권 p.107) 라고 쓰고 있다. 





[[[ 괴테는 어린 멘델스존을 천재라 칭했다. 그의 재능을 일찌기 알아봐준 사람 중 하나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였던 것이다. 과연 멘델스존 형님이 '한여름 밤의 꿈' 의 'Overture 서곡'을 완성한 시점은 1826년 이라고하니 형님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나머지는 그 후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했다)

17세의 멘델스존 형님께서 셰익스 피어가 쓴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읽고 영감을 얻어 곡을 썼다고 전한다. 그는 문학 소년이었고 독서는 이토록 그 파급 효과가 지대하다. 지극히 위험한 것이 독서이기도 하지만, 알고보면 대한민국 커플들의 결혼 행진곡에 독서가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




[[[ 위 왼 쪽 ㅡ 12세의 멘델스존 (칼 베가스 유채 스케치 1821년)

12세의 멘델스존은 가르침을 받던  첼터의 안내로 괴테를 방문했다. 1749년생 괴테는 멘델스존 보다 60세가 더 많았다. 당시 멘델스존은 72세의 괴테 어르신을 접견한 것이었다. 괴테는 멘델스존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괴테가 어린 소년에게 말했다. "나는 사울이고 너는 다윗이다." (음악의 유산 5권 p. 108) 


괴테 어르신은 향년 82세, 1832년에 돌아가셨다. 모자르트, 슈베르트, 슈만, 쇼팽 등이 괴테 어르신 만큼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나의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8년 후 멘델스존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의 초상화를 그려준 '대커리'라는 화가는 "내가 지금껏 보아온 중에서 가장 잘생긴 얼굴"(음악의 유산 p.107)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씀, 믿어도 되나요 대커리 선생? 


위 오른 쪽 ㅡ 부인인 세실 멘델스존 (에두아르투 마그누스의 유화, 1873년)

결혼 전에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세실 멘델스존은 "재능있는 예술가로서 지적이며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생각이 깊었다" (음악의 유산 5권 p.115) 라고 써있으며 "아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

 


멘델스존이 낭만주의 음악 환경에서 보수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다. 여유가 있는 집안인 만큼 경제적인 난관에 처한 음악가들을 위해 애써준 분이 또한 멘델스존 형님이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줄 아는 정말 멋진 분이었다. 그의 혜택을 받은 음악가들은 셀수도 없지만 로베르트 슈만과 쇼팽을 포함한다 (멘델스존보다 한 살 아래였던 슈만형과 쇼팽형은 1810년생으로 동갑이다). 두분께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찐 보수는 이런 보수이다. 기득권을 지키기위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닌, 널리 타자를, 그리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인 것이다. 



독일 음악을 한층 더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 또한 멘델스존 형님이다. 그는 바흐 선생과 헨델 선생을 현대에 인식되는 인물로 역사에 남도록 애써준 장본인이었다. 바흐와 헨델 선생을 연구하여 세상에 알린 사람이 바로 멘델스존 형님이었던 것이다. 멘델스존 형님이 아니었더라도 그 누군가는 해냈을 일이겠지만 직접 해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겠다. 멘델스존의 노력으로 바흐 선생은 서양 음악사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어느 전설적인 고전음악 큐레이터는 말했다,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가 다시 바흐로 회귀하는 것이 고전음악'이라고. 서양음악은 바흐로 시작해 바흐로 끝을 맺는다는 뜻이다. 위대한 바흐의 존재와 멘델스존 형님의 관계가 그러했다.



 

그는 독일의 가장 오래된 음악원의 설립자이자 원장이었으며 교수였다.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던 그는 라이프지히 컨서버토리(Leifzig Consrvatory)를 몸소 설립했다.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도 이 학교의 교수직을 역임하며 힘을 보탰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던가. 브람스는 이런 교육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 중 한 사람 이었다. 그 후 더 확장된 라이프치히 음악학교의 이름을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멘델스존의 풀네임은 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이다) 이 예술대학의 이름에서 멘델스존 형님께서 어떤 일을 해내셨는지 잘 알수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보수인가! 멘델스존 선생께서는 보수의 정의를 몸소 실현하며 살다간 분이다. 대한민국의 보수라고 칭하는 자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 학교는 독일의 내로라하는 연주가들은 물론 수많은 지휘자등을 배출했다. 셀수도 없는 예술가들은 멘델스존 선생의 노고와 베품의 은덕을 입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말하면 뭐하노 푸르트뱅글러, 지극히 경애하는 쿠르트 마주어, 체코의 심리학 야나첵, 도덕주의자 브르노 발터, 색체의 마법사 리카르도 샤이 등등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들이며, 멘델스존의 커다란 노고와 지대한 헌신으로부터 나온 인물들이다. 




[[[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 안단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협 2악장으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성격에 대한 험담들이 있지만 2악장을 들어보면 생각이 완전 달라진다. 감정의 절제미를 완성시킨 곡이 바로 바협 2악장이니 말이다. 포스팅한 분의 해설이 있어 업로드 해본다. ]]]



성격은 한성깔 했다고 전해지지만 누나와의 서신교환 내용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듯 하다. 어째거나 팬이 있으면 안티도 있는 법, 멘덜스존 형님은 아주 쿨한 성격을 가졌던듯 싶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어떻게 써야할지를 알았던 인물이었고, 써야할 곳에 화끈하게 쓰신 분이다. '천재'란 '하늘이 내린 사람'이란 뜻이다. 멘델스존 형님이야말로 진정한 천재였던 것이다. 하늘이 천재를 내릴 때에는 자신만의 영달을 위한 삶을 살아가라고 내리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준 그 재능을 세상에 펼쳐, 널리 널리 이익이 되게 하라는 뜻으로 내리는 인물이 천재인 것이다. 과연 멘델스존 선생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진정한 천재였다. 천재라고 다 같은 천재가 아니다. 진정한 천재는 이렇듯 따로 있는 것이다.




그는 작곡, 연구, 음악원 운영, 인재 발굴, 순회 공연등으로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음악사에 길이 빛낼 일을 하느라 너무나도 바쁘게 살았다. 그는 어느 한 순간도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혹사시켰으며,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결국 형님께서는 과로가 쌓이고 쌓여 병을 얻게 되었다. 이럴 땐 좀 쉬셔야하는데, 순회 공연 일정을 소화했다. 결국 선생께서는 영국 고연을 마치고 돌아온 후 뇌졸중으로 그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향년 38세, 1847년의 일 이었다. 아... 이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던가. 하늘은 진정한 천재를 낳고도 어찌 이리도 박정하시단 말인가.



그는 생전에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음악이 계속 존재하면서도 더이상 슬픔이나 이별이 없는 곳"이라고. 로베르트 슈만은 커다란 슬픔속에서 친 형님과도 같았던 멘델스존을 운구했다. 두 사람은 서로 든든하고 믿음직했으며 참으로 멋진 관계였던 것이다.


모자르트 향년 35세, 슈베르트 향년 31세, 슈만 향년 46세, 쇼팽 향년 39세 그리고 멘델스존 향년 38세.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할일이 너무나도 많았던 분들을 그렇게 빨리 데려가시다니! 신이시여, 이토록 귀한 분들을, 정녕 그러셔도 되는건가요? (오늘 따라 신에게 불만이 많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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