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이라는 말을 따로 붙여 출간되는 다양한 도서들과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교과서가 달라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믿을 수 없는 교과서


흔히들 '교과서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만큼 교과서에 대한 기성 세대들의 신뢰도가 존재한다는 뜻일 터이다. 그러나 막상 학생들 스스로에게는 결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교과서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성인들조차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 '교과서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사실상 신뢰하지 못하는 교과서에 대한 기성세대들의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추측컨대 아마도 교과서에 대한 바램과 소망이 가미된 기성세대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교과서마저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와있다. 교과서는 언제나 학생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도하는데 대부분 실패해왔다. 현재의 기성세대들이 학생이었을 때에도 말이다. 그런 까닭에 좀 더 흥미롭고 유익하며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독서를 생활화하는데 필요로 하는 그러한 교과서에 대한 바램과 소망이 내재된 용어가 바로 '교과서적'이라는 표현이라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


 

이토록 흥미로운 주제와 내용들이 시중에서 출간된 책을 접한 후에서야 눈을 돌리게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결코 아니라고 본다. 물론 시험이라는 중압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시험의 압박이라는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그 책임을 떠넘기기에는 학생들이 기성 세대가 된 후에 독서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결정적인 문제점은 수업의 내용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주제들을 흥미롭게 가르치고 학습하는 수업의 내용이 기성세대가 된 후의 독서생활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부인 할 수는 없다. 비록 시험 점수에 대한 압박감이 있었고 점수가 낮았던 과목이라도 수업시간에 또렷한 기억과 인상적인 느낌들은 성인이 된 후의 독서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직장에서 느끼는 피로와 스트레스가 생활 속의 독서를 저해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또한 그 책임을 온전하게 전가시킬 수는 대상은 아니다. 독서는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치명적인 독서량과 그 인과 관계


한국인의 독서량이 왜 이토록 저조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함께 제기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내용을 신문 및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접하곤 한다. 최근(2011년 기준)의 발표에 따르면 “직장인들의 평균독서량은 15.5권으로 2009년보다 3.7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직장인 1,000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조사 결과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표준지수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대도시의 직장인들 기준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성인 평균 독서량은 11-12 권 정도라고 한다. 중고생들의 연평균 독서량이 1-3권이다. 처참한 독서량이 아닐 수 없다. 대입 시험에 올인할 수 밖에 없는 중고생들의 처지임을 직시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책과 함께 인생을 풍요롭게 가꾸어가고 있는 멋진 알라디너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중고생 때 왕성한 독서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처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의 대학생들의 독서는 연평균 3-4권에 불과 하다. 이는 더더욱 처절한 수치이다. 가장 많은 량의 왕성한 독서량과 지적 욕구에서 솟구치는 끈임 없는 목마름을 주체할 수 없어야 하는 주체가 바로 대학생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4권이라니...믿을 수 없는 수치인 것이다.

이것이 믿기 어려운 우리 국민들의 독서현실이다.


한 마디로 독서의 부재나 다름없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복합적인 요인들의 합작품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할 주체는 바로 교과서일 것이다. 현재의 교과서는 내용만을 고려했을 때 유익한 것들일지 모른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교과서가 많은 것은 아닌 듯 하지만...) 그러나 더더욱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으면서도 대학생이나 성인이 된 이후에도 꾸준한 독서열을 보여줄 수 있는 초중고의 교과서 시스템이 절실히 요구된다. 


수학이나 외국어들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과학, 사회, 음악, 철학, 미술등은 얼마든지 학생들에게 좋은 자양분을 심어주면서 자연스러운 독서 욕구를 자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과목들이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든 못하는 학생들이든 독서로 그들을 유도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이 할 일인 것이다.


독서의 부재가 주는 사회적 문제점

독서량의 부재는 사실상 사회적인 문제점을 유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 현대는 다양성의 시대요, 개성의 시대라고 한다. 그만큼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며 또 존중받고 싶어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다양성이 하나의 트렌드와 문화의 패턴으로 자리매김하는 시대에 접어든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 또한 공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가치 부여의 문제이다. 매사는 그 가치를 판단해야하며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각 개인이 매사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 가치의 평가 여부에 따라 개인들의 행동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란 자신의 인생관에 부합하는 윤리관, 교육관, 경제관, 사관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독서의 부재는 올바르지 않은 가치부여와 판단을 이끌 수도 있다. 올바르지 않는 판단으로 인한 행동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 쉽다. ‘모럴해저드’현상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럴해저드가 사회 전반적인 영역으로 확산 될 때, 대중매체는 이를 반영할 수 밖에 없다. 대중의 가치 판단이 매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올바르지 않은 매체는 더더욱 올바르지 않은 영향을 사회에 행사하게 된다. 이는 또다시 개인들의 올바르지 않은 가치 부여와 판단,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한다. 우리의 모든 사회 영역에서 불어오는 모럴해저드를 상상해보시라. 그 골은 더욱 깊어지고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나빠지져 오지 않았는가...

 나비효과는 기후와 경제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 주기가 느리겠지만 나비효과를 이에 적용시켜도 될 것이다. 또한 ‘깨어진 유리창의 법칙’도 예외는 아니다. 한 번 빗나가기 시작하면 이를 바로잡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늦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질 우리 사회이기에 더더욱 건전하고 이성적이며 올바른 가치 부여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로 변모해야한다.


불확실성의 시대가 낳은 심리적 안드로이드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들 한다. 왜 현대는 불확실한 시대가 된 것일까. 우리 인문학의 부재에서 오는 안드로이드를 스스로 키워왔기 때문은 아닐까. 심리적 안드로이드의 출현은 자아의 상실을 의미한다. 사회의 자아가 불확실해질 때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자아도 불안해진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염려하는 바도 바로 이런 점일 것이다. 아시모프가 보여주는 물리적 안드로이드는 차라리 나은 편이다. 자신과 안드로이드라는 타자를 구별하기만 하면 될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정신적 안드로이드가 출현할 때 문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심리적 안드로이드의 출현은 인간의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아와 또 다른 자아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 불분명한 경계에서 인간이 서성일 때 인간성은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어있다. 인문학의 부재로 인한 가치의 판단이 명료하지 않은 탓이다.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과 그 사회적 힘


위의 이야기는 결론적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으로 귀결된다. 과학과 첨단 기술이 발전할 수록 인문학은 그만큼 더 중요해진다. 어느 한쪽의 무게가 커질수록 그와 상대적인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욱 비중있는 인문학을 얹어 놓아야 한다. 물리적인 가치의 발달과 징신적인 가치의 발달이 불균형을 이룰 때 오는 결과는 끔찍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사회는 더욱 위험해지고 서로를 경계하게 된다. 외면적인 사회의 모습이 내면적인 사회의 모습과 다르게 된다. 가치의 윤리가 무너진 탓이다.

 가치의 판단과 윤리, 사회적 정의등은 바로 인문학적 소양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독서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이다. 독서를 통하여 고뇌하고 사고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 독서를 통한 성장은 대부분 바람직하다. 독서는 독자의 안목을 높여줄 것이다. 독서의 힘은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할 때 그 위력을 발휘하여 스스로 작동하록 되어 있다. 法 이전에 도적이 있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 이전에 도덕과 倫理가 앞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올바른 사관과 윤리관의 정립은 인문학이 주는 결과물이다.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과거를 돌이켜보고 이를 미래에 투영시키게 된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이치와 같다. 우리는 그 중간 역할을 하는 현재라는 끈이다. 그 끈이 바르고 건강해야만 아래로 흐르는 물도 역시 건강하게 된다. 인문학은 인간의 정신이다. 올바른 인문학은 건전한 사회를 이루는 정신의 근간인 것이다. 즉,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인 것이다.

 

 

 

서로 어려울 때 화합하고 도우며 함께 걱정해주는 사회는 건강하다. 인문학은 사회적 힘으로 바르게 작동해야 할 사회의 세포가 되어야한다. 사회의 구조는 인문학이라는 올바른 윤할류라는 도우미 세포를 필요로 한다. 사회라는 구조적 장치가 돌아갈 때,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곳에 스며들어야한다. 독서를 통한 인문학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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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02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왜 이런 글에 추천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추천 많이 받아 알라딘 메인에도 뜨고 그래야 하는데.ㅠㅠ
그런데 차트랑공님 교육 관련 일을 하시나봐요.^^

차트랑 2012-02-0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스텔라님,
추천을 벌써 세방이나 받았고요
메인 화면에 뜨는 것은 과분한 일인지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추천을 한방 먹여주신 분이 스텔라님이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방문해주시고 추천도 날려주시고..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아 참,
저는 교육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요 ㅠ.ㅠ

이진 2012-02-0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이런글이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정말 좋은글인데 말이어요.
교육관련 일이라, 저도 그쪽을 꿈꾸고 있는데 말이지요 ㅎㅎ

stella.K 2012-02-02 18:15   좋아요 0 | URL
엇, 이진이 수의학 생각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누구지...? 누구 그랬는데.ㅠ

차트랑 2012-02-02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구구...
소이진님과 스텔라님...
두분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저 얼굴이 확~ 달아오릅니다요..
주목받으려고 쓴 글 아니구요.
위의 책 중 몇 권을 읽었기에 쓴 소감문입니다요.

그런데 그리 칭찬해주시면 허명이 나게되구요
허명이 나면 안됩니다요
소문난 찬치에 먹을 거 없다는 말씀 들어보셨잖아요 ㅠ.ㅠ

재는재로 2012-02-0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꾹 ~ 왜 도덕인가는 저도 읽었지만 다른책은 한권도 읽은게 없네요 옛날부터 인성교육이라는 말만 하는데 실제 학교에서는 윤리나 도덕수업보다 영어,수학시간표가 더많잖아요 일주일에 한시간있나 수업이 요즘은 도덕불감증 시대 지키는 사람이 바보취급당하는

차트랑 2012-02-0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는재로님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재는재로님께서 지적해주신대로 도덕불감증...
이거 심각하다 느끼는 바입니다.
윤리, 도덕수업 늘립시다요~~^^
(저 윤리나 도덕과목은 아닙니다요~)

낭만인생 2012-03-12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도 역시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적 필요이자 삶의 본질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