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원의 서울연가
사석원 지음 / 샘터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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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드셨는데요?"

"아침엔 빵 먹고요, 점심엔 김치찌개 먹었는데요."

'에엥~?@@'  애써 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내 허벅지를 꼬집어서 분명 보랏빛 멍이 들었을게다.

"아니, 뭘 먹었는지가 아니고요, 뭘 드셔서 허리가 아프시다면서요?"

"아하~? 네에..."

같은 한국어를 쓰고,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요즘은 어려운 의학용어를 사용하는게 아니라 일상용어를 사용하는데도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경험할 때가 있다.

 

난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소위 서울 토박이.

부모님도 서울 분이시고, 친가 ㆍ외가 다 서울이어서 사투리가 섞일래야 섞일 새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쓰는 말이 표준어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그렇다고 하지는 못하는데 '서울 사투리'라는 것도 있다고 해서이다.

암튼 서울 사람이면서도 서울 말씨의 특징이랄까, 속성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사석원은 그걸 이렇게 정리해주는데 제법 명쾌하다.

 50년 전쯤의 한국영화를 보면 배경이 되는 풍경이나 사람들의 옷차림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고 말투도 확연히 달라 매우 생경한 느낌이 든다. 특히 여인들의 말씨가 그렇다.

  원래 서울 여인들은 수더분하기보다는 깔끔하고, 푸짐하기보다는 야무진 느낌이 풍겼다. 꼭 조여진 버선발의 사뿐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잘 씻어서 껍질을 깎아놓은 생밤알 같다고나 할까. 곱고 사근사근한 말씨에 깍듯한 예의범절을 갖춘 서울 여인들. 알뜰하면서도 부지런하고 때론 지나치게 경우가 밝아 다소 차가운 인상을 풍기기도 했던 서울 아낙네들. 그녀들의 말은 졸졸졸 물소리같이 맑고 명랑했다. 서울 여인들은 비교적 말이 많고 빨라 받아 적기가 힘들고 힘을 빼서 발음해 억양에 변화가 적어 타지인들은 구별하기 힘들다고 했다. 또한 도란거려 무슨 재미난 소설 읽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랬던 서울 여인들의 토박이 말투가 지금은 오래된 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말투는 전국 팔도가 비슷비슷해졌다. 모두 같은 고향 출신인 듯 엇비슷한 음색으로 말을 한다(260쪽)

그의 이 글을 읽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었는데,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난 목소리가 엄청 컴플렉스이다.

이젠 아들이 제법 커 그런 일은 없지만, 환자를 앞에 두고 어린 아들과 응급 상황일지도 모르는 전화 통화라도 하려고 하면, 대부분의 남자 환자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애인'이랑 통화하냐며 관심을 보인다.

내 말씨가 곱고 사근사근하다 못해, 다정다감해서 애교가 뚝뚝 떨어진단다는 거다.

이런 목소리의 컴플렉스가 내게 주도적으로 나서서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습관을 만들어주어, 그나마 일을 하는데 있어서 플러스로 작용한다고 자위하곤 했었는데...사석원의 글을 읽고보니 나만 그런게 아니고 전반적인 서울 여인들 말씨의 특징인가 보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컴플렉스'로 여길 것까지는 없었을텐데 말이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사석원이 썼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겐 의의가 있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가 40년이 넘게 몸 담고 살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는 서울을 좀 자세히 알아보자는데에도 의의가 있다.

 

사석원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최북'과 마찬가지로 손철주를 통해서였다.

그 후 사석원의 그림과 글들을 꾸준히 접했다.

그림이야 내가 좋다고 설레발을 치던 그런 풍의 그림인 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글은 조각글로만 접했던게 고작이었기에 그의 문체나 작풍에 대해서 느낄 사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 글을 이렇게 맛깔나게 쓰는 줄 미처 몰랐다.

그림이 단정하고 깔끔하지만, 다정하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그런 여운을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인데 반해,

글은 이렇게 저렇게 눙치고 엉너리 치며 수작을 부리는 품이 천연덕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요번의 것은 그림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뭐랄까, 질펀한 느낌이 드는 것이,

그의 책에 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화류계에서 '쫌' 놀아본 한량의 냄새가 풍긴다고 해야 할까, ㅋ~.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이제 옛말인가 보다.

이 책은 처음 맛집 소개로 시작하는 듯 하다가는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듯 패션감각을 자랑하는 듯 하다가, 그림이면 그림, 글이면 글, 음악이면 음악, 두루두루 출중하여 나같은 凡人의 입장에선 마냥 부러워만 하다가 날 새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낱말로 '인복'쯤을 들 수 있겠는데, 그 인복이란 건 이 밑의 글에도 나오지만 상호적인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많이 지어야 나도 복을 많이 받는 것이고, 같은 상황을 놓고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행복하다, 행복하다' 하면서 한번 더 미소 지으면 행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행복이나 불행은 쪼개진 사과처럼 확연히 나눌 수 있는 별개의 것도 아니지만, 혼자서 다니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행복한 순간, 또는 불행의 정점을 치는 순간 방심한 틈을 노린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아마도 전생에 복을 많이 지었나 봐요!" 내 인생이 남들에겐 부러울 정도로 얘깃거리가 많고 재밌게 비쳐진 것 같다.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감히 말하고 싶다. 삶이란 게 뚜렷한 경계가 있어 행복과 불행이 쪼개진 사과처럼 확연히 나누어져 다른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같은 상황이라도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불행이 될 수도 있고 추억이 될 수도 있고 회한이 될 수도 있다. 서울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겐 사랑의 도시고 누군가에겐 끔찍한 비정의 도시가 될 것이다. 그것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자의 몫이다.(9쪽, 서문 중에서)

그렇다면...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불행 대신 행복을, 회한 대신 추억을, 비정함 대신 사랑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불끈~! 

 

인복이 상호적인 것이니까 복을 많이 받으려면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는 말로 시작했는데, 이 사람의 그림 재주야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어렸을때 고흐 도록을 보고 꾸준히 모사를 했을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한다.

글도 문득문득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꾸준히 독서를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종묘'를 언급하면서 최근에 쓰인 소설인 '은교'를 언급하는 것은 단적인 예이다.

음악 또한 중학교때 클래식 연주회를 쫒아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런 모든 감성이 쌓이고 쌓여 오늘 날의 사석원이란 사람이 만들어 지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오감을 열고 열정적으로 공감하려 하는 노력, 물론 본인 나름대로는 치열했겠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충분히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삶은 제대로 즐기는 자의 것이다.

ㆍㆍㆍㆍㆍㆍ사춘기의 지적 욕구 때문인지 아니면 겉멋이 들어서인지 고전음악엔 문외한이었던 중학생의 나는 국립교향악단의 연주회를 6개월간이나 정기권을 끊어 빠짐없이 남산 국립극장에 가서 관람한 경험이 있다. 당시 지휘자는 홍연택이란 분이었고 작은 망원경을 준비해 열심히 연주와 지휘하는 모습을 관찰했었다. 그 덕인지 지금도 틈만 나면 고전음악의 향기에 푹 빠져 지내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222쪽)

('커피, 치명적 유혹'의 '홍연택 커피-블랙 앤 스위트 블랙'편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참 재밌는 분이다.)

 

암튼, 사람을 기죽게 하는 그의 내공은 음식으로 시작해, 그림, 글씨, 음악에만 국한 되지 않고 급기야 건축에까지 팔을 뻗친다.

샘터는 본래 서울대 도서관 자리. 그 앞으론 개천도 흘렀고 일명 미라보다리도 있었다. 샘터 사옥은 고 김수근 선생의 작품. 선생의 명성답게 명작이다. 담쟁이가 건물 전체를 덮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현재는 선생의 제자인 승효상 선생이 부분적으로 개축을 하고 있다.(119쪽)

난, 불광동 성당을 보고 자랐다. '기도하는 손'모양의 건물은 김수근이 누군지 모르던 그 어린 시절에도 충분히 나에게 영감과 은총을 주었다. 그러고 보면 좋은 작품은 명성이나 이름으로 얘기하는게 아닌거다.

그가 하려는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의도하는 바가 충분히 나에게 전해졌다고 믿고 싶다.

난 '불광동 성당'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춘천 어린이 회관'을 사랑하여 날 따뜻한 날 걷기를 즐긴다.

 

나는 사석원의 그림들을 애정해 마지 않지만,

혹자들은 그의 그림을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이라며...다시말해, 시류나 인기에 너무 편승한다고 폄하한단다.

그 혹자들을 향하여 축하카드가 됐건 땡큐카드가 됐건 마음이 담긴 카드를 보내거나 받고 감동 받아 본적이 있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마음이 담긴 카드를 보내거나 받고 느끼는 감동이야말로, 이 춥고 모진 세상을 건너갈 수 있는  따뜻한 힘과 위로라는 걸 말로 설명해서는 느끼지 못할테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의 그림에서 따뜻함과 위로를 읽고 two thumb up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그의 그림 자체가 얽매임 없이 자유로워 맘껏 상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광의 그림을 향하여 저속하다며 평가절하하는 이들로부터 그림을 변호할 수 있었던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가 제도권미술 같은데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을만큼 기초가 탄탄하고 떳떳하며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론, 인연을 바라보는 중광의 시각을 나름 해석한 그의 시선도 재미있다.

ㆍㆍㆍㆍㆍㆍ그의 그림은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웠다. 경계를 태연하게 넘나드는 경이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무아지경에서 일사천리로 그린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제도권 미술계에선 중광의 작품을 저속하다며 평가절하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는 의심이 들었다.

  중광은 2000년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제목은 '괜히 왔다 간다'였다. 그리고 2년 후 입적했다.

  '인연이 있어 괴롭고, 인연이 없어 괴롭고, 만나도 괴롭고, 헤어져도 괴로우니 인연이란 괴로움이 얽힌 그물인가?'(137쪽)

인복과 노력과 실력과 더불어 그를 남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은, 자유로운 영혼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말해, 자유로운 상상력.

며칠전에 일본에 놀러갔다온 친구가 기념품이라며 젓가락을 보내줬길래,

내가 '머리에 비녀 대용으로 꽂고 다니다가, 국수나 라멘을 만나면 후루룩, 찝짭~먹으라고?'해서 웃었었는데,

사석원은 비녀를 이렇게 멋드러지게 해석한다. 비녀를 가지고 함부로 농담을 하면 안되겠다, ㅋ~.

  비녀는 순결과 절제의 상징이랄까, '나는 임자 있는 몸이니 넘보지 말라'는 듯 육체의 문에 빗장을 지른 것이다. 단호하고 애틋한 의미다.(149쪽)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글이 상상력 만으로 쓰여지진 않았다.

기본기 또한 탄탄하며, 시어를 잘 벼리는 여느 시인이 쓴 시보다 더 아름다운 언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더불어 웅숭깊다.

생각이 넓다는 건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 같은 것으로, 멍석을 넓게 깔아 상대가 그 멍석 안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의미하며,

생각이 깊다는 건 자기 안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속 깊음을 얘기하는 거란 얘기를 들었다.

 

그의 실물을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나도 사석원처럼 나이 먹을수록 사물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웅숭깊은 눈을 닮고 싶다.

종로②

종묘

ㆍㆍㆍㆍㆍㆍ이곳은 노인들을 위한 욕망의 공간이다. 박범신이 소설 《은교》에서 말했지. "젊음이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늙음도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라고. 맞다! 노인의 욕망은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그냥 자연일 뿐이다. 종묘공원은 어쩌면 젊은이들보다도 더 뜨거운 노인들의 욕망이 몸부림치며 몸살을 앓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많지 않기에. 절망할 정도로 외롭기에.(196~197쪽)

마지막으로, 서울에 40년을 넘게 살았으면서도 서울의 지리를 몰라 누군가를 만나기라도 할라치면 길을 잃어버릴까봐 노심초사이다. 그래서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나 해외에서 온 친구들에게 서울 안내를 하기 위해 내가 외운 레파토리는 한 곳이다.

인사동. 장소가 그리운건 그곳의 사람이 그립다는 그의 논리대로라면, 난 누군가 그리울때면 여러곳을 기웃거릴 것 없다. 무조건 인사동 한곳이면 충분하겠다.

  장소가 그리운 건 그곳의 사람이 그립다는 것.ㆍㆍㆍㆍㆍㆍ

ㆍㆍㆍㆍㆍㆍ지금 바람 부는 고은초등학교 담장엔 후배들이 그린 그림들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다.ㆍㆍㆍㆍㆍㆍ학교 앞엔 벽화도 있다.《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타일로 만든 작품이다. 그래 맞다. 진실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지.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지. 지금 서대문도서관 자리는 얼룩 젖소가 풀을 뜯던 목장이었다. 여긴 우리의 영토였는데. 수풀 무성한 언덕엔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친구들은 없다. 여름이면 무악재에서 아카시아꽃 따 먹던 동무들, 그 순수한 눈망울들, 우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갑자기 몰아친 바람에 내 우산이 힘없이 젖혀졌다.(212~213쪽)

 

이제 봄이다.

태어나고 40여년을 자란 서울을, 이리저리 산책이라도 다니며 맘껏 즐겨야 겠다.

만끽하여야겠다.

MP3에 이런 음악 한곡 정도 담아서 귀에 꽂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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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3-14 04:32   좋아요 0 | URL
서울은 전국에서 재개발 아주 많이 하는 손꼽히는 곳이니
길이 늘 달라져서
길을 헤맬 때가 잦을밖에 없지 싶어요.
그래도 봄마실 즐거이 다니셔요~

mira 2013-03-14 15:37   좋아요 0 | URL
요즘 인사동은 너무 원색적이예요. 예전 인사동이 더 좋았었는데 말이죠 ㅎㅎ
 
홀림 떨림 울림 - 이영광의 시가 있는 아침 나남시선 83
이영광 엮음 / 나남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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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번 필이 꽂히면 그의 전작을 두루 섭렵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러 사람의 시나 수필을 모아 놓고 해설을 하는 모음집이나 가이드 안내서 같은 건 또 별로다.

다양한 이들의 시 67편을 책 한권에 모아 놓았으니, 각자 다양한 개성이 두드러져서 통일된 일관성 따위는 느낄 수도 없는 것이 겉도는 느낌일까 우려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이영광' 시인의 그것이었기에 혹시나 했었는데, 기대는 날 저버리지 않았다.

이영광 시인이 선별한 시를 '홀림-떨림-울림'의 과정으로 수용ㆍ 해석해 내는데, 그것이 너무 좋다.

시와 비껴 겉도는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닌 것이, 한데 어우러져 이영광표 시집이나 수필집 한권을 읽는 느낌이다.

그의 까탈스러운 시 편력을 엿보는 건데도 슬쩍 눈 흘기게 되기보다는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이 책은 그가 신문에 소개했던 시들을 한권으로 묶은 것이다.

그가 신문에 시를 소개하려고 시집들을 모아 읽으면서 느꼈다는건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시가 유난히 많이 나온단다.

큰 난리도 없고 배고픔도 덜한 이 시절이 외려 더 살기 어려운 시절인 탓은 아닌가 싶다며 눙을 친다.

그러면서, '시는 원래 살기 막막한 사람의 말이기도 하니까'라고 하는데 이 말이 왜 이리 멋진거냐, 아흑~--;

 

까탈스러운 시 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마냥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시의 자리에 사람이나 사랑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로 통용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말해, 까탈스럽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편력을 한꺼풀 들추고 봐야만, 시종일관 무심한듯 하지만 저변에 깔려있는 뚝심같은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겠다.

 

좋은 시는 우선 그저 좋다. 왜 좋은가는 그 다음이다. 좋은 시는 먼저 읽는 이에게서 생각이란 걸 빼앗아갔다가는, 천천히 되돌려주는 것 같다. 잃었던 정신을 차리고 느낌과 뜻을 골똘히 되짚어 수습하도록 만드는 그 찌릿찌릿한 수용과정을 '홀림-떨림-울림'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좋은 시가 많다고 했으나 마음껏 거두어 담지를 못했다. 어떤 것은 좋아서 겨우 좋다고 말해볼 수 있었지만, 어떤 것은 참 좋은데도 어째서 그러한지 잘 말할 수가 없어 내려놓고 말았다. 그래서 즐거운 비명과 괴로운 신음이 이 책의 겉살과 속살을 이루고 있다는 변명을, 꼭 드리고 싶다.('머리말' 중에서)

 

좋은 시는 저렇다고 하지만, 좋은 사람은 그저 좋다.

왜 좋은가 따위는 없다.

좋은 사람을 보면 그저 닮고 싶다.

번지고 스며 물들 듯이 그렇게 그렇게 닮고 싶다.

좋은 시와는 다르게, 좋은 사람을 두고선 그런 생각을 되돌려 한다는 것은 상황이 종료됐다는 얘기이다.

시를 놓고는 상황 종료가 되어도 그만이지만,

사람을 놓고는 상황 종료가 됐다는 것은 과거형이란 거고,

사람을 놓고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왠지 서글프다.

 

내가 왜 시도 아닌, 시 해석을 놓고 멋지다고 설레발을 치느냐 하면,

시가 없이 그의 해석만으로도 하나의 시나 수필 같은 것이 작품으로 내어놔도 손색이 없다. 

불가능한 것은 이렇게 어떤 영혼에게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순결한 것들은 다 아름답게 미친 것들이다.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만다.(19쪽)

사랑은 때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자기를 발설하지조차 못한다.(23쪽)

 

         호 구 糊口

                 - 권혁웅 -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호구糊口"는 아무래도 전서의 비유겠지요. 봉투에 침을 발라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호구는 또 입맞춤이기도 합니다.  통째 봉해 보내는 입술은 그리움 전부를 간절하게 대표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전령이겠지요.

  호구는 원래 간신히 먹고 산다는 뜻이니,  이 시는 결국 사랑의 가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홀몸으로만 불탈때 사랑은 조바심치다 목숨을 잇기 어려운 극빈에 떨어지지요. 그러니 마음은 마음에게 전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 아래"는 정말 추신에 불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목매단 사람의 버둥대는 사지처럼 이 절박한 사랑의 몸체는 입술에 특명을 준 채 물러나 있거나 가라앉아 있을 뿐입니다. 몸 전체가 아니라 입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이치지요. 추신은 그러니까, 연서의 본문이자 입술의 배후조종자이며 사랑의 무의식이라 해야겠군요. 무의식은 원래 추신을 닮았습니다. 짧은 석 줄, 결코 짧지 않군요.(43쪽)

개인적으로 처음보는 시였지만, 시와 시 해석 모두 다 넋을 놓았었다.

조바심에 달뜬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본 기억,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배달한다는 건 어쩜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일지도 모르겠다.

할말이 너무 많지만, 채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목이 매어 눈물을 꼴깍 눌러 삼킬 뿐이다.

마음을 마음에게 전할 수 있는 길은,

할말이 너무 많을 땐 그저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가 제격인 셈이다.

 

옛날의 행운 -김성윤 군의 회상   

                    - 정현종(1939~ ) -


젊은 시절에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걱정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어요.

친구들도 그렇고

선생님들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있었어요.

그걸 내놓고

먹으라고

먹으라고 했어요.

참 행운이었어요.


 

정말 저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없는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도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날을 무탈하진 않았어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던 거다. 이 시는 그 무언가를 "마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의 젊음은 모질게 노력해 갖추어도 한발 내디딜 곳이 마땅찮고, 우리 모두는 무엇이 죽이러 오는지 모르면서도 공포에 질린 짐승처럼 쫒기며 살고 있지 않은가. 안 보이는데도 한 잔 술처럼, 두툼한 파전처럼 나누어 먹을 수 있던 것. 먹다보면 또 어떻게든 힘내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던,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이 보이지 않는다.

  늘 제멋대로인 체제를 문제 삼지 않고 친구와 동료들과 겨루기 바쁜 우리가 저 "마음"이라는 것에 다시 도달할 수 있을까.

'마음'은 '젊음' 또는 '희망'의 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수조 앞에서

             - 송경동(1967~ ) -


아이 성화에 못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강한 생각과 끓는 감정을 품고도 버티어내는 담담한 말은 더 강한 말이다. 이 시의 말들은 화장을 벗겨낸 우리 삶의 민낯이 킬링필드라는 난감한 진실을, 그걸 그저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의지를 담고도 흐트러짐이 없다.

  싸움을 사랑과 평화라 굳게 믿는 그는 감옥을 나와 또 '현장'에 있다. 목발을 짚고 걷는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들려올 때, 나는 내가 성한 다리로 절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과격하지 않다. 과격한 건 저 투명한 "관계"다. 저것은 관계가 아니다.

또 '송경동'의 저 시를 보면 '싸움'과 '사랑'과 '평화'는 모두 같은 근원의 말들인가 싶기도 하다.

 

또는, '시는 원래 살기 막막한 사람의 말'이기도 하다니까 모든 시는 하나의 근원으로 통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중독'이 다른 말로는 '경배'이고 다른 말로는 영광'이고 또다른 말로는 '홀릭'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막막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쉬운 방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것일 테니까 시를 읽으면서 살면 되는 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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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3-06 06:54   좋아요 1 | URL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 담은 시는
이웃들한테도 좋은 이야기 들려주는구나 싶어요

2013-03-0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8 0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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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함민복에게 기꺼히, 감히 실천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솔직히 그가 시에 쓴대로 실천을 하고 사는지 어떤지는 보지 않고, 접하지 않았으니 모르지만,

이런 시들을 쓸 수 있는 시인라면 실천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겠다는 걸 그의 삶을 보거나 접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겠으니 말이다.

 
함민복이 누구냐 하면 '긍정적인 밥'이란 시에서,

 

한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집 한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집이 국밥 한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했던 사람이다.

 

시를 feel 충만하여, 그리하여 말랑말랑해져서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하는 걸 느낄 요량으로 읽는 나같은 사람한테는,

저 시를 모르고 읽을라치면,

요번 시집의 시들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딱딱하기도 한 것이 읽기가 좀 버거울 만도 한데,

'긍정적인 밥'을 쓴 '함민복'이라는 걸 알고 읽게 되면, 시가 아름답고 서러워 눈물이 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와 신념대로 실천하는 그런 삶이야말로,

소박하고 곤궁할지라도, 그래서 서러워 눈물나도록 아름답다.

 

마음을 다잡아 먹고 읽어나갔는데,

그런 나를 초반부터 무장해제시킨 시가 바로 이 시였다.

당신은 담배를 피워 물어 영혼에 뜸을 뜨고 계신거였다지만,

이 시 한편으로 충분히 시인은 내 머릿속에 제대로 각인되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살며 풀어놓았던 말

연기라

거두어들이는가

입가 쪼글쪼글한

주름의 힘으로

눈 지그시 감고

영혼에 뜸을 뜨고 있는

노파에게

거기는 금연구역이라고

살면서 내뱉었던 말들이 아니라, 살며 풀어놓았던 말이라고 하니...왠지 구전 이야기의 느낌이다.

풀어놓을때는 술술 잘만 풀리던 그것들이,

연기의 형상을 하고도 거두어 들일 때는 그토록 힘이 든 것인가 보다.

입가 쪼글쪼글 주름이 생기도록 힘껏 빨아 들인 후,

영혼에 바람을 넣어 뜸에 고루 불을 당긴다.

풀어놓을 때 칼날이 되기도 하고 흉기가 되기도 했던 말들이,

거두어 들일 때는 연기의 형상을 하여 부질없어진다고 해도,

눈을 지그시 감고 시간과 온도를 가늠해서

제대로 달구어 은근한 불로 밥에 뜸을 뭉근히 들이듯이 뜸을 떠야 한다.

말조심을 해야 하는 곳은 장소 불문이지만,

눈 지그시 감고 추억에 잠겨 있는 노파에게선 비껴가기로 하자.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고

뜨겁게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이 시는 시집의 제목과 같은 표제시이다.

그리고 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듯 하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로 실천하며 살고 싶어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서럽고 눈물 나지만,

그 눈물을 초승달처럼 생긴 눈꺼풀로 자르고,

그렇게 그렇게 다시 시작해 보는 거다.

달이 차고 이울듯이, 삶 또한 영원한 도돌이다.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
당신을 읽어 나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

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

                              ('양팔저울'부분)

 

 

얼마전이었다.

무슨 말을 하다가 친구가 '나는 잘 해준 것도 없는데...'하는데 참 서러웠었는데 내색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나를, 내 자신을 보태기도 하고 덜어내기도 하고...그러면서 관계는 형성되는게 아닐까?

쌍둥이처럼 나를 닮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닮은 친구...

친구의 모습에서 나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친구에게 더하는게 나에게 더하는 것이고,

친구에게서 덜어내는 것이 내 자신을 에이는 듯 깎아내는 것인데...

친구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말로 해 무엇할까?

친구를 향한 집중은,

바로 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그것인데,

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대화가 부족했나보다.

아니면, 내가 내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나?

 

빨래집게

 

옷을 집고 있지 않을 때

제 몸을 넌다

 

몸뚱이가 되어 허공을 입고

허공을 걷던 옷가지들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입아귀 근력이 떨어진

 

입 다무는 일이 일생인

빨래집게를 물고 있는 허공

 

물 수 없는

시간을 깨물다

 

철사 근육이 삭아 끊어지면

툭, 그 한마디 내지루고

 

훑어지고 말

온몸이 입인

 

대운하 망상

 

물이 법(法)이었는데

법이 물이라 하네

 

물을 보고 삶을 배워왔거늘

티끌 중생이 물을 가르치려 하네

 

흐르는 물의 힘을 빌리는 것과

물을 가둬 실용화하는 것은 사뭇 다르네

 

무용(無用)의 용(用)을 모르고

괴물강산 만든다 하니

 

물소리 어찌 들을 건가

새봄의 피 흐려지겠네

 

개인적으로 '빨래집게''대운하망상' 같은 시도 좋았지만, 좀 어려웠다.

누구, 내게 조곤 조곤 해석해 주는 사람 어디 없을까,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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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02-28 16:27   좋아요 1 | URL
갑자기 시 좋아하던 20살로 절 데려다 주셨더랬어요
그랬군요 눈꺼풀은 눈물을 잘라냈군요, 늘 그렇듯
눈에 힘 꼭 주다가 눈꺼풀로 싹둑.

프레이야 2013-03-01 10:50   좋아요 1 | URL
함 시인은 참 선하고 순한 사람이라고 느껴져요.
산문집 '미안한 마음'을 읽었는데 거기 글들에서도 그런게 느껴지구요.
이 시집, 요즘 평들이 좋으네요. 멋진 하루 보내세요^^

다크아이즈 2013-03-01 18:16   좋아요 1 | URL
나무꾼님 전 빨빠래집게,대운하망상 다 이해되어요. 어쩜 좋아요 ㅋ
제가 원래 독해력이 많이 딸리는데 언제나 제 멋대로 해석하니 이런 현상이. ㅠ
용서하세요.^^*
 
동양학을 읽는 월요일
조용헌 지음, 백종하 사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매일 넉넉한 햇살을 받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백만불 짜리 두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을때는 그런 것들의 소중함을 모르다가, 제약을 받게 되어서야 우린 그런 일상이야말로 진짜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동안 조용헌의 책을 읽을때마다 드는 생각은 글에서 말맛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글을 읽는건데도 쫄깃하고 찰진 것이 강의를 듣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예전에 어디에선가 '대한민국 3대 구라'라고 해서 백기완, 황석영, 방배추(또는 황동규)를,

'대한민국 3대 교육방송'이라고 해서 이어령, 김용옥, 유홍준을, 꼽는다는 얘길 주워 들었었다.

그때 '구라'와 '교육방송'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구라'라고 불리우는 쪽은 '눈높이'를 낮추고 몸소 체화하여 자기것으로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쓰는 말로 표현하는 구어체적인사람들이라면, '교육방송'쪽은 방송에나 나올법한 학술어를 문어체적으로 구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봤었다.

그리고 그 중간의 어디쯤에 내맘대로 조용헌을 놓고 이쪽, 저쪽으로 저울질 했었다.

('구라'라고 하기엔 살짝 무겁고, '교육방송'이라고 하기엔 살짝 가벼운 것이 말이다, ㅋ~.)

 

암튼, '구라'보다는 '교육방송'쪽에서 무엇이든 하나라도 배우고 얻어가질게 있다고 생각했었던 난,

일상적인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쑥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용헌의 이 책은...글에서 말맛이 느껴지는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금상첨화였다.

 

그런 조용헌이 이 책의 곳곳에서 나의 편을 들어준다 싶을 정도로 나와 취향이 겹치고 있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고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년필로 눌러적은 글씨, ㅋ~.)

언젠가 한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난 글씨가 좋은 사람들에게 홀라당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 좋은 글씨로 쓰여진 내용이 뭔가 하는 건 아무 문제가 될게 없고, 그 글씨가 만년필로 적혀 있으면 그만이다.

그딴 걸 구별할 내공 같은게 내겐 없는고로, 좋은 글씨가 나쁜 내용을 담고 있을리는 없다고 믿는다~--;

정작 나는 만년필 촉이 종이를 긁을때마다 만들어내는 소리에 소름이 돋아 사용하지 못하면서,

종이에 반듯하게 새겨넣은 듯, 눌러 적힌 글씨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맘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편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필기구가 워낙 많다보니, 고가의 번거로운 만년필을 선뜻 얘기하기에는 좀 궁색하고 설득력이 없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학야녹재기중의學也祿在其中矣'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학문을 하면 녹봉이 자연히 따라온다'는 뜻이다. 30대 중반 이 대학 저 대학으로 기약 없는 보따리장수(시간강사)를 하러 다니던 시절에 수없이 되씹어본 문구이다. 나는 서푼짜리 보따리장수를 하기 위해서 공부했단 말인가?

  그러다가 깨친 사실이 '필야녹재기중'이다. 필筆을 받아야 밥이 나온다. 학學이 체體라고 한다면, 필은 용用이다. 체는 용을 갖춰야만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필이야말로 인류 정신의 등불을 후대에게 이어주는 성스러운 신물이자 밥이 나오는 생계의 수단이다. 어찌보면 붉은색의 핏줄보다 필이 나오는 먹줄이 더 생명이 길고, 그 영향력의 범위도 훨씬 넓다. 먹물이 피보다 진한 것이다.

  나의 만년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이런 직업적인, 그리고 정신사적인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ㆍㆍㆍㆍㆍㆍ

  조선조에 글을 썼다면 모필毛筆인 진다리붓을 애용했겠지만, 철필鐵筆의 시대로 바뀌면서 그동안 몽블랑 만년필을 써왔다. 해외여행 나갈 때마다 면세점에서 하누 자루씩 구입해놓고, 문장을 구상할 때마다 여러 개 만년필을 책상에 쭉 늘어놓는다. 느낌에 따라 이 필 저 필을 손으로 쥐어보면 생각이 잘 떠오른다. 만년필마다 촉감이 다르다. 어떤 촉감이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명품인 피나이더 만년필을 써보고 있는데 손에 쥐는 촉감도 좋고, 전체적으로 기품이 흐르는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208쪽)

 

이런 너스레로 시작하여,

자신을 당당히 직업적인 매설가로 자리매김 하는 것도 멋지다.

실은 매설가라는 직업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보다는 매설가라는 단어 자체가 멋진 것이고,

서상(書相)을 본다는 얘기나,

'부독오천권서 不读五千卷書 무입차실毋入此室'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독서 이력이 맘에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상(書相)까지는 아니어도 나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

책을 통하여 하나라도 주워듣고 배울게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읽은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을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면 묘한 동질감으로 미소짓게 됐었다.

그런데, 내가 읽은 책(=경우의 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가 읽은 책과 똑같은 책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건 최근이다, ㅋ~.

 

그래서인지,

'그만큼도 읽지 않은 사람이 이 방에 들어오면 할 이야기도 없을 뿐더러, 대화도 재미가 없다는 뜻이리라. 독서를 폭넓게 하지 않으면 나누는 이야기도 진부해지기 쉽다.(61쪽)'

수나라 때 최표의 글을 이렇게 해석하는 그가,

'출퇴근이 없고, 정년이 없고, 만나기 싫은 사람은 안 만나도 되고, 승진과 인사고과 부담이 없어서 좋다(62쪽)' 등을 매설가의 장점으로 꼽은 그가,

고차의 맛을 얘기하며 '살다보면 돈 때문에 만나는 인간관계도 있다'고 하는 대목에선 왠지 서글퍼졌다.

천석군, 만석군, 명문가, 세도가 등에 관한 명확하게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하늘이 낸 부자는 3대에 걸쳐 적선을 하는 등 베풀어야 한다고 하는 그가,

이 글을 원래 기고했던 게 ㅈㅅ일보라는 사실은 더 서글펐지만, 뭐 어쩔것인가 말이다~--; 

 

그런 그를 다시 보게 된건,

다독 뿐만 아니라 여행을 많이 할 것과 사람들을 만나볼 것도 권하는 대목에서 였다.

그는 여러 직, 간접 경험을 사고의 확장으로 보았다. 

괴팍한 스타일의 사람, 어느 분야에 10년 이상 몰입한 경험이 있는 자,  장인匠人, 정신세계를 탐험한 도사 등은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접하기되지 않는 독특한 사람들이니 일상의 시선으로 봤을때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한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중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목 뒤와 어깨 그리고 등 쪽으로 나 있는 경락과 혈 자리가 막힌다고 한다. 자기 몸의 막힌 경혈을 그때그때 수시로 풀어주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의 행동이다. 몸 공부야말로 한번 해볼 만한 공부이다.(32쪽)'라고 힘주어 얘기하고 있는데,

자기 몸의 막힌 경혈을 그때그때 수시로 풀어주는 건, 도사를 꿈꾸고 쫒아 다녔으며 그래서 몸 공부야말로 한번 해볼 만한 공부라고 얘기하는 그에게나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나이 40에 이르러 하는 공부가...

머리가 굳어져 이해하고 깨우치는게 예전 같지는 않지만, 삶을 바라보는 혜안 같은 것이 느껴져 자득지미自得之味를 맛보겠던 터라, 그의 너스레와 설레발이 오랜 경험과 수련에 의한 내공에 의한 그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겠다.

 

그가 도사로 입성을 했는지, 의 여부를 헤아릴 내공이 내게는 없지만...적어도 그처럼 풍류를 즐기고 살면 도사가 부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10년 전, 고차의 맛이 뭔지도 모르는 무설지(無舌之輩였던 나에게 제주도의 석명石明 선생은 그 귀한 남인철병을 아끼지 않고 손수 우려 주었다. '비싸고 좋은 차'라는 설명도 일절 하지 않고 말이다. 인삼 향과 난향을 합쳐놓은 듯한 맛을 내는 남인의 맛은 마시는 순간 탈속 느낌을 갖게 했다. 몇 년 뒤 부산의 '아파트 다실'을 가지고 있는 마니주 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남인철병 맛을 알게 되었다. 이 양반은 손이 컸다.

  살다보면 돈 때문에 만나는 인간관계도 있지만, 순전히 차 때문에 만나는 관계도 있다. 귀한 차를 사먹을 돈은 없는 처지에 차 맛을 알면 딜레마에 빠진다. 근래에 광주 무등산의 덕운 이병학 선생 다실인 보한재保閒齋를 알게 되었다. 보한재에 들어서면 벽면에 가득 쌓아놓은 발효차 덩어리들로부터 나오는 향이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얼마 전에는 새벽 한시 반까지 차 파티를 하였다. 마지막 코스에 나온 남인철병의 맛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이빨 사이에 끼여 있는 것 같다. 바람이 바뀌는 전환기에는 차 한잔 하면서 바람을 음미하는 여유도 있어야 한다.(174쪽)

 

 여느 풍류가객과 시인묵객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달빛을 사랑하는 데...

그가 풀어내는 너스레는 '문탠'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는데, 그럴 듯 하다.

 

ㆍㆍㆍㆍㆍㆍ태양보다 달이 더 좋아진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이다.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산속 정자에 앉아, 호수에 비치는 보름달을 보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03~105쪽)

 

 ㆍㆍㆍㆍㆍㆍ동산 위에 뜨는 달도 볼 만하고, 강물에 비치는 달도 볼 만하지만, 해운대의 달맞이 고개에서 바다에 비친 보름달을 보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다.

  이 달맞이 고개에서 밤안개가 낀 날을 택해 보름달이 뜬 바다를 바라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몽환적 풍경이었다. 억만 년 전 태고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 말이다. 풍파를 헤치고 오면서 쌓인 마음의 주름이 이 해월海月을 보면서 쫙 펴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바다의 달이 주는 공덕이다.

  문탠 로드는 바다의 달을 보면서 걸어갈 수 있는 바닷가 언덕길이다. 신경을 많이 써야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은 밤에 이 길을 한번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바다를 끼고 걸으면 바다에서 오는 수水 기운이 머리의 열을 내려준다. 어떻게 머리의 열을 내리느냐가 중년의 관건이다. 내륙의 산길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112~113쪽)

바다를 끼고 걷는 길, 산길, 호수를 끼고 걷는 길 들의 제각각 처방도 멋지고 말이다.

  제주의 올레길은 대부분 바닷가를 끼고 길이 나 있다. 약초도 해풍을 맞아야 약이 된다. 염기가 함유된 해풍을 온몸에 맞을 수 있는 올레길은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바닷바람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작용이 탁월하다. 특히 화가 뭉쳐서 울화병 기운이 있으면 올레길이 좋다.

  지리산은 산길이라서 포근하게 품어주는 기운이 있다. '인자요산'이라 하듯이 산의 기운은 사람을 어질게 만든다. 기운이 충만해야 화를 안 내고 어질어진다. 기운이 모자라면 화를 자주 낸다. 산은 사람의 고갈된 원기를 보충해주는 작용을 한다.

  충북에 있는 괴산호의 둘레를 도는 산막이길은 약 4킬로미터 거리이다. 호수의 물은 바닷물과는 다르다. 소금기가 없는 호수의 물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도 섬세하게 다듬어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 세계에서 받은 깊은 상처는 인간의 말(언어) 가지고는 치유가 어렵다. 어떤 말을 들어도 회복이 안 된다. 언어도단의 치유 방법이 필요하다. 그때는 대자연의 품에 안겨 있어야 하는데, 그 대자연은 청산리 벽계수이다. 청산리 벽계수에 들어가 푸른 산을 보고, 녹색 빛깔의 맑고 투명한 계곡물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씻어내야 한다. 결국에는 청산과 벽수가 인간을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구라'가 되었든지 '교육방송'이 되었든지,

너스레가 되었든지 설레발이 되었든지, 간에...

이런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고 내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 것은 그들은 몸소 경험하고 체화하여 이미 일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몸소 체화하여 자기것으로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적용을 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책에만 나오는 그것들은 글자 이상의 의미도, 이하의 의미도 없는 것이다.

본인이 몸소 경험하고 체화한 것을 글로 썼기 때문에 내게 감동을 주고 울림을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사도 달인도 자연 앞에서는 작기만 하고 속수무책인가 보다.

아래 문장이 왜 그리 마음에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봄이라서인지, 아니면 내 닉의 '양철'을 포함하고 있어선지 모르겠다, ㅋ~.

 

  대낮에 듣는 빗소리와 저녁에 듣는 빗소리의 느낌도 시시각각 다르다. 새벽에 듣는 빗소리는 대자연 속에 고요하게 누워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순수한 자연의 소리가 양철이라고 하는 인위의 금속에 부딪히면서 내는 그 소리는 사람의 혼백을 정화해주는 작용을 한다. '놀아보지도 못하고 어느새 가버린' 중년의 허탈감을 달래주는 우주의 거대한 기타 소리라고나 할까.

  봄비와 양철지붕은 자연과 문명의 오묘한 궁합이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은 조물주가 봄을 색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양철지붕으로 떨어지는 봄비 소리는 삶의 때를 벗기도록 해주는 하늘의 선물이자 천상의 음악이다. 옛 선비들은 초가삼간에 살았기 때문에 이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묘한 빗소리를 몰랐을 테지만, 21세기에 사는 나는 이 양철지붕 삼칸 집에서 봄비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랜다.(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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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3-02-27 19:42   좋아요 0 | URL
저도 조선생처럼 '筆也祿在其中' 론자입니다. 생업의 도구는 제일 좋은 물건으로..
문제는 제 생업의 도구가 이것 저것이라 지름신이 늘 저와 함께하신다는 것. ㅎ
만년필은 저도 좋은 놈으로 몇 개 가지고 있죠. 호사취미지만 때때로 그 만년필로 제법 큰 계약서에 서명할 때도 있으니
'필야녹재기중'의 실현이라고도...ㅋ

아무개 2013-02-28 08:43   좋아요 0 | URL
저는 뭐랄까 주말 오후 제 고양이들과 뒹굴거리거나 아이들 쓰담쓰담 하다가 가끔씩 울컥~하곤해요.
왠지 묘하게 슬픈데 행복한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았음 좋겠다....그런 생각이 들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하고.
아마 그럴때가 제가 느끼는 일상의 소중한 때가 아닐까 싶네요.

전 개인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것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양철'지붕에 톡톡~떨어지는 빗방울소리 듣는것은 좋아라해요^^

하늘바람 2013-02-28 10:32   좋아요 0 | URL
글씨가 안좋아 카드한장 못보내는 일인이 얼굴 빨개졌어요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충청 편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이지누 지음 / 알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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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의 문자는 '나 아我'의 고古문자란다.

 

내게 이지누는 '관독일기'가 시작이었다.

친구가 권해줘서 읽게 되었는데, 좋기는 해도 불교에 까막눈인 나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어디선가, 종교색을 찾아내기보다는 스스로 알아서 종교색을 지워가며 읽는 것도 좋은 독서법이라는 글귀를 보게 됐고, 그리하여 호기를 부리게 되었다.

1년여에 걸쳐 그의 전작들을 주르륵 따라 읽다보니 어느새 그에게 흠뻑 빠져 들게 되어, 

글이 아름다울 수 있는 까닭은 비단 유려한 문체나 어휘력 때문만은 아니다. 비록 세련된 미문이 아니고 투박하더라도 그가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따라 분명한 아취를 풍기는 것 아니겠는가.(18쪽)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기준까지 따라쟁이가 되었음은 물론, 나라면 이 사람의 글을 제일 위에 올려놓을 수 있겠다.

 

사실 이지누의 글은 개인주의적인 ego가 아닌, '나 아我'를 담고 있다.

예전에는 세상과 타인을 상대로 싸움을 했었고,

그후 한동안은 그러한 허물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와 그렇지 않은 내가 날마다 피 흘리는 다툼을 벌이곤 했었단다.

그리하여, 이제는 자기자신을 적나라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 하나를 갖게 됐다는데,

내가 보기에 그건 거울이라기 보다는 햇빛조차도 투과시키는 유리이지 싶다.

객관적이라는 것조차도 시점이 개입하는 것이니,

그마저도 개입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느낌의 투영이나 투과.

 

근데, 그게 우리가 흔히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스스로 그렇게' 된것은 아니고 '지독한 자기 내면과의 싸움의 결과'이다.

우린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동안은 그동안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와 그렇지 않은 내가 날마다 피 흘리는 다툼을 벌이곤 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만 범인凡人인 우리는 그걸 닮으려 하다가는 피 흘리는 싸움에서 살아나는게 장렬히도 아니고 어이없이 전사해 버릴 수도 있으니 명심해야겠다, 할~!

 

'이지누'를 권해준 친구가 얼마전에 이런 얘기도 함께 해주었다.

독수리는 가장 오래 사는 새로 알려져 70년까지 살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독수리의 평균수명은 40년.

70년을 살기위해서는 40에 이르렀을때 신중하고도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나이쯤 되면 발톱이 안으로 굽어진 채로 굳어지고 휘어진 부리는 가슴쪽으로 구부러지기 때문에 먹이를 잡기 어려워지고, 날개는 약해지고 무거워지며 깃털들은 두꺼워져 나는 것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큰 짐이 되기 때문이다.

이 40에 독수리는 '더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절벽끝에 둥지를 튼다.

자신의 휘어진 발톱을 부리로 하나씩 뽑아내고, 낡은 날개의 깃털을 뽑아내며, 제 부리를 바위에 찍어 없애며, 새로운 발톱과 깃털과 부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150여일을 보낸다.

이렇게 5개월을 잘 견뎌낸 독수리는 새로운 삶을 얻어 30년을 더 날 수 있단다.

 

이 친구는 지금 나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의미가 다르고 새롭기 때문에,

나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의 그간의 고통 따위는 'out of 안중'이고,

발톱과 깃털과 부리를 갈고 새로 날아오르는 느낌이라는 얘기도 함께 해 주었다.

ㆍㆍㆍㆍㆍㆍ몸은 잔뜩 웅크렸을지언정 마음만은 환하게 열렸기 때문이다. 얼굴로 들이닥치는 눈에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ㆍㆍㆍㆍㆍㆍ살면서 어느 순간, 누군가가 내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수차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서로 아무런 말을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물끄러미 그를 만나고 나면 그의 존재보다 나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제 버릇이 되어버렸다.

  오늘 또한 마찬가지다. 탑이 없었다면, 곧 부처님이 없었다면 내가 눈보라 모진 절터를 이렇듯 헤매고 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에게 급한 것은 부처님이 아니었다. 설사 내가 그에게 급하다고 해도 그는 언제나 시간을 요구했다.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여여如如하게 있지만 그에게로 가는 동안 나는 언제나 뒤뚱거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뒤뚱거리다가 세상에 미혹되어 사람에게 흔들리기 일쑤였고, 너덧 차례 그렇게 흔들리고 나면 떨어져나가는 것은 불거진 욕심만이 아니었다. 그것과 함께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것들은 뭐라 형용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아픔이었다. 그러나 나만 아프고 마는 것에서 그치면 천만다행이었다. 문득 나 지신을 바라보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까닭 모를 분을 이기지 못해 나도 모르는 어느새 내가 피폐한 가해자가 되어 있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렇듯 혹독한 날씨 속에서 부처를 만나고 싶었다. 그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앞세워 모진 눈보라 속을 걸으며 참회하고 나를 일깨우고 싶었던 것이다.(24~26쪽)

내가 그랬었다.

항상 외롭다, 외롭다...노래를 부르고 다녔지만,

정작 누군가 다가와서 손 내밀면 그 손을 마주 잡아 주기보다는 짐짓 뒤로 물러나 버리곤 하였다.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야 할 것 같고,

경계는 밟거나 넘어서면 안되는 줄 알고,

누군가 내 앞에서 든든히 비바람을 가리워주는 존재는 말할 수 없는 신들이나 부모님이 고작이었고,

책이 유일한 위안이고 친구였다.

근데 내가 외롭다, 외롭다...하는 동안 이 세상 어느 누군가는 내가 뿜어내는 쌩한 바람과 마주해야 했을 것이고,

손을 마주잡지 못한 이는 내게서 시린 거절을 읽었을지도 모르고,

내 손끝으로 떨어내는 동작에서 냉정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가해자'라고 하여 일말의 책임도 없다는 말은 비겁하다.

  거기에 더해 그는 앞에서도 말한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한다. "저 사람이 마시는 것이 나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는 없으니, 어찌 스스로 노력하여 마시고 먹지 않겠는가"라고 말이다.

ㆍㆍㆍㆍㆍㆍ부처를 찾아가는 길, 그 길은 누구도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길이 아니던가.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고독을 두려워한다면 한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는 길, 그 길에서 내가 구하려는 것은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이다. 전체라는 것은 부분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부분의 집합이 곧 전체이며, 전체는 부분을 평등하게 아우르는 것일 뿐 그 어느 것이 다른 것에 대해 우선하며 상하를 나누는 수직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 속에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분별을 넘어 선 전체, 그곳은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인식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선禪의 깊숙한 곳일 테니까 말이다.(38쪽)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부러웠던 부분은 목은 이색과 환암 스님의 우정을 얘기한 부분이었다.

이 부분이 이토록 부럽고 멋있게 보인 것은, 글을 빚어낸 이지누의 내공이 한몫한다.

일단 이지누 본인이 '나 아我'에 집중을 해서 자신을 낮추고 비워낼 수 있었기에 가능했었을테고,

이지누 본인도 경주언저리에 사는 삼십 년 지기 그런 친구가 있다고 <관독일기>에서 밝히고 있었느니 말이다.

 

근데, 이쯤에서 한가지 궁금한게 생겼다.

남녀간의 우정은 색안경을 끼고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차치하고라도,

남자들의 우정을 일컫는 사자성어는 많은데,

여자들의 우정을 일컫는 사자성어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자들의 우정은 없는 것일까?

  시의 제목을 <환암을 받들어 생각하다>라고 짓는 것은 물론 환암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에도 진정 기뻐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겸양의 모습이리라.ㆍㆍㆍㆍㆍㆍ그런 절간이 청룡사에서 놀다가 목은을 찾아와 환암이 보낸 편지 한 통을 전해주었다. 이에 목은이 기쁜 마음으로 시를 지었으니 제목이 <절간 윤 공이 청룡사에서 노닐다가 돌아와서는 항아리에 순채를 담아 건네주면서 환암의 서신을 또 전해주었다. 이에 너무도 기쁜 나머지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이며,

ㆍㆍㆍㆍㆍㆍ

  목은이 환암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뿐 아니다. 서로가 의당 그랬을 것이지만 서로에게 불쑥 찾아가 곤혹스럽게 하는 일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항상 서로가 서로를 기다리며 서로의 수행에 몰두하며 조심하는 모습은 차라리 아름답다고 할 정도다.

ㆍㆍㆍㆍㆍㆍ
 이렇듯 목은이 환암에게 보내거나 그를 생각하며 쓴 시들은 대개 진한 그리움이 묻어 있으며, 한 줄 문장들이 모두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주눅이 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근신일 뿐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이야말로 佛과 儒를 가리지 않는 큰 사람의 모습을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96~299쪽)

 

 그때 깨달았다. 사랑이 깊으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그 무엇을 한들 그가 드러나기보다 나 스스로가 드러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일 뿐 결코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이 글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환암스님과 목은의 우정은 마음속에 침잠해 있는 것일 뿐 결코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목은은 환암의 겉모습에 대해 한 줄도 쓰지 않으면서 오히려 화상 찬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목은이 환암을 생각하거나 환암이 목은을 생각하는 마음이 발효되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자연스러운 글쓰기였던 셈이다.(315쪽)

나는 내공이 부족해서, 이지누처럼 스스로를 맑게 비추는 거울일수는 없고,

나 자신을 보는 듯 닮은 친구를 갖게 된 것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그 친구를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서로를 거울 삼아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거라 믿기에 더 고맙다.

배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고, 친구 또한 마찬가지란다.

친구가 많으면 '나 아我'를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니, 몇 명으로 족하단다.

아직 내공이 부족해 개인주의적인 ego와 '나 아我'를 구분해 내지 못하지만, 나 또한 그렇게 되고 싶다.

 

분위기를 바꾸어,

내가 종교에 까막눈이어서 종교색을 지워가며 읽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이 글을 쓴 이지누의 내공이 출중하다 보니 감명받는 구절이 있었다.

그 부분은 다름 아닌,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인데...

이제껏 노자를 편저자를 바꾸어 가며 수십번 읽은 내가 보기에도 멋지고 근사한 해석이다.

좀 길지만 두고 두고 음미하고 싶어,옮겨본다.

시간이 있으면 두고두고 필사하며 외고 싶은 문장이고 작가이다.

 

그러니 판전이라는 글씨를 쓸 무렵 완당은 불가에 귀의한 불자였다. 그런데 그가 쓴 글씨를 두고 현세의 선비들이 교졸巧拙의 미학을 논한다. 위에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교졸은 <노자>에서 말하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다. 그런데 이 졸拙이 문제다. 졸은 교巧를 이루거나 이미 넘어선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그것이 동양미학 일반이다. 그렇게 내로라하는 미학자들이 판전 글씨를 두고 앞다퉈 교졸을 말하고 또 그 글씨체를 무구동진체無垢童眞體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교졸로 설명될 수 잇는 글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종교적 입장, 곧 유교나 도교의 입장이 아니라 불교적 시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판전 글씨는 한 인간이 베풀어놓은 연화장세계이자 지극한 인간의 마음으로 이러낸 화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ㆍㆍㆍㆍㆍㆍ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완당은 그 어떤 때보다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판전이라는 글씨를 쓰지 않앗을까. 그 무렵의 완당은 이미 경계를 넘어선 곳에 있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아 깨달음을 이룬 많은 스님들  중 천진무구하지 않은 스님들이 있던가. 경계를 넘어선 스님 모두 어린 동자승과 같은 천진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모습은 화엄을 이룬 모습들이었다. 완당이라고 달랐을까. 그의 필법은 한 순간도 게을리하지 않고 평생 갈고 닦은 것이 아닌가. 곧 깨달음을 이룬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글씨로 정각을 이룬 경지에서 구족계를 받고 마지막 붓을 들어 획을 그었으니 그 글씨의 완성이 곧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판전이라는 글씨를 통해 문자반야文字般若를 이루었다. 그 순간 그가 다다른 곳은 말로써 다할 수 없는 화엄, 그 환희로운 곳이었지 않을까. 그는 글씨를 쓰면서 글자, 그 속을 본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글씨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것은 편액의 겉모습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그 글씨를 논하려면 그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 편액 너머를 봐야 한다. 보라, 그 작은 편액의 무변광대한 넓이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말이다. 그것을 어찌 글과 말로 다할 수 있단 말인가. (346~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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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2-17 23:32   좋아요 0 | URL
70년을 살기위해서는 40에 이르렀을때 신중하고도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 저 이 말이 콕 와서 박혔어요.

숲노래 2013-02-18 06:27   좋아요 0 | URL
사자성어는 '남자 권력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은 중국말이니, 여기에 '가시내 사이 우정'을 가리키는 낱말은 안 생길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사자성어, 곧 한문을 쓰던 사내들은 가시내를 몽땅 '집안일'에 붙들어 매었으니, 가시내들이 집밖으로 나돌며 이웃하고 우정을 나누기란 어려웠겠지요.

그래도 굳이 '네 글자'를 바라신다면, 한겨레는 '이웃사랑'이라는 말을 썼어요. 이웃사랑은, 집 바깥을 떠돌던 사내 아닌, 집안에서 집안일을 하던 가시내들이 이웃집을 아끼고 돌보는 따스한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니, 이런 말로 조금은 생각을 가다듬을 수도 있으리라 느껴요.

그리고, 사자성어 아닌 한국말은 예부터 '남녀 가르기'가 없어요. 길동무, 소꿉동무, 어깨동무, 놀이동무, 씨동무, 해동무, 별동무, 달동무...... 이런 낱말들은 모두 '서로 나누는 깊은 마음'을 나타내요. 또, 네 글자짜리 한국말을 살펴보면 '너나들이' 같은 낱말이 있어요. <사자성어 한국말로 번역하기>라는 책에도 썼는데, 한국사람 누구나 스스로 조금만 생각을 기울이면, 스스로 아름다운 말과 슬기로운 글과 맑은 마음과 고운 사랑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2013-02-18 0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2-18 06:47   좋아요 0 | URL
손을 맡잡지 못한 이는 내게서 시린 거절을 읽었을지도 모르고,
내 손끝으로 떨어내는 동작에서 냉정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가해자'라고 하여 일말의 책임도 없다는 말은 비겁하다.

- 어쩜, 이런 구절들은 저도 쓰고 싶은 얘기지만 떠오르지 않는데, 역시 내공 깊은 양철님^^*

하늘바람 2013-02-18 10:00   좋아요 0 | URL
이지누
저도 님따라 읽어봐야겠어요
님따라 공부할 책들이 서점을 만들겠어요
읽다보면 참 제가 님을 많이 닮은 듯한데
왜케 게으른지는~
서로 아무말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그런 벗과 함께 나무 그림자 비추는 연못이나 강가에 한참 아주 한참 앉아 있다 오고 싶네요

2013-02-18 15:34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말씀대로 양철님 권하는 책마다 다 읽고 싶네요.^^ 독수리 이야기 정말 인상적이에요! / 옛사람들 우정은 진짜 깊어서 부럽더군요. 전에 읽은 <삶을 바꾼 만남>에서도 느꼈지만..

글샘 2013-02-18 17:11   좋아요 0 | URL
판전 글씨는 한 인간이 베풀어놓은 연화장세계이자 지극한 인간의 마음으로 이러낸 화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네요...
글씨를 글씨로만 봐서, 대교약졸이라며, 졸스럽다고 비웃거나 주관적으로 평가할 게 아니라,
그 세상을 살았던 사람 눈으로 물끄러미 들어다봐야 보이는 경지가 있을 수 있겠네요.

그 글을 부처님의 경지로 보는 눈과, 아무리 봐도 졸한데... 대교가 쓴 글자니 뭐라고 흉보지도 못하는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다르겠죠.^^
이지누의 글은... 서정적이면서도 생각이 깊은 구절이 참 많더군요. ^^ 잘 읽고 갑니다~

알케 2013-02-20 19:11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 나무꾼님...종종 들러 포스트 잘 읽고 있습니다.
저야 애옥살림에 속진잡사에 휘둘려가며 여전히 황망하게 살고 있습니다. ㅎ

저도 근래 이지누를 소개 받아 그의 폐사지 답사 연작 세 권을 내처 읽었습니다.
이 양반 '서권기 문자향 書卷氣 文字香'이 대단하더군요.
근래 읽은 책들 중에서 글맛으로는 으뜸. 게다가 본업인 사진도 좋고...
So unfair..ㅎㅎ

2013-02-21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