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을 읽는 월요일
조용헌 지음, 백종하 사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매일 넉넉한 햇살을 받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백만불 짜리 두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을때는 그런 것들의 소중함을 모르다가, 제약을 받게 되어서야 우린 그런 일상이야말로 진짜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동안 조용헌의 책을 읽을때마다 드는 생각은 글에서 말맛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글을 읽는건데도 쫄깃하고 찰진 것이 강의를 듣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예전에 어디에선가 '대한민국 3대 구라'라고 해서 백기완, 황석영, 방배추(또는 황동규)를,

'대한민국 3대 교육방송'이라고 해서 이어령, 김용옥, 유홍준을, 꼽는다는 얘길 주워 들었었다.

그때 '구라'와 '교육방송'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구라'라고 불리우는 쪽은 '눈높이'를 낮추고 몸소 체화하여 자기것으로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쓰는 말로 표현하는 구어체적인사람들이라면, '교육방송'쪽은 방송에나 나올법한 학술어를 문어체적으로 구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봤었다.

그리고 그 중간의 어디쯤에 내맘대로 조용헌을 놓고 이쪽, 저쪽으로 저울질 했었다.

('구라'라고 하기엔 살짝 무겁고, '교육방송'이라고 하기엔 살짝 가벼운 것이 말이다, ㅋ~.)

 

암튼, '구라'보다는 '교육방송'쪽에서 무엇이든 하나라도 배우고 얻어가질게 있다고 생각했었던 난,

일상적인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쑥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용헌의 이 책은...글에서 말맛이 느껴지는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금상첨화였다.

 

그런 조용헌이 이 책의 곳곳에서 나의 편을 들어준다 싶을 정도로 나와 취향이 겹치고 있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고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년필로 눌러적은 글씨, ㅋ~.)

언젠가 한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난 글씨가 좋은 사람들에게 홀라당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 좋은 글씨로 쓰여진 내용이 뭔가 하는 건 아무 문제가 될게 없고, 그 글씨가 만년필로 적혀 있으면 그만이다.

그딴 걸 구별할 내공 같은게 내겐 없는고로, 좋은 글씨가 나쁜 내용을 담고 있을리는 없다고 믿는다~--;

정작 나는 만년필 촉이 종이를 긁을때마다 만들어내는 소리에 소름이 돋아 사용하지 못하면서,

종이에 반듯하게 새겨넣은 듯, 눌러 적힌 글씨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맘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편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필기구가 워낙 많다보니, 고가의 번거로운 만년필을 선뜻 얘기하기에는 좀 궁색하고 설득력이 없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학야녹재기중의學也祿在其中矣'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학문을 하면 녹봉이 자연히 따라온다'는 뜻이다. 30대 중반 이 대학 저 대학으로 기약 없는 보따리장수(시간강사)를 하러 다니던 시절에 수없이 되씹어본 문구이다. 나는 서푼짜리 보따리장수를 하기 위해서 공부했단 말인가?

  그러다가 깨친 사실이 '필야녹재기중'이다. 필筆을 받아야 밥이 나온다. 학學이 체體라고 한다면, 필은 용用이다. 체는 용을 갖춰야만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필이야말로 인류 정신의 등불을 후대에게 이어주는 성스러운 신물이자 밥이 나오는 생계의 수단이다. 어찌보면 붉은색의 핏줄보다 필이 나오는 먹줄이 더 생명이 길고, 그 영향력의 범위도 훨씬 넓다. 먹물이 피보다 진한 것이다.

  나의 만년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이런 직업적인, 그리고 정신사적인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ㆍㆍㆍㆍㆍㆍ

  조선조에 글을 썼다면 모필毛筆인 진다리붓을 애용했겠지만, 철필鐵筆의 시대로 바뀌면서 그동안 몽블랑 만년필을 써왔다. 해외여행 나갈 때마다 면세점에서 하누 자루씩 구입해놓고, 문장을 구상할 때마다 여러 개 만년필을 책상에 쭉 늘어놓는다. 느낌에 따라 이 필 저 필을 손으로 쥐어보면 생각이 잘 떠오른다. 만년필마다 촉감이 다르다. 어떤 촉감이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명품인 피나이더 만년필을 써보고 있는데 손에 쥐는 촉감도 좋고, 전체적으로 기품이 흐르는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208쪽)

 

이런 너스레로 시작하여,

자신을 당당히 직업적인 매설가로 자리매김 하는 것도 멋지다.

실은 매설가라는 직업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보다는 매설가라는 단어 자체가 멋진 것이고,

서상(書相)을 본다는 얘기나,

'부독오천권서 不读五千卷書 무입차실毋入此室'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독서 이력이 맘에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상(書相)까지는 아니어도 나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

책을 통하여 하나라도 주워듣고 배울게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읽은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을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면 묘한 동질감으로 미소짓게 됐었다.

그런데, 내가 읽은 책(=경우의 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가 읽은 책과 똑같은 책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건 최근이다, ㅋ~.

 

그래서인지,

'그만큼도 읽지 않은 사람이 이 방에 들어오면 할 이야기도 없을 뿐더러, 대화도 재미가 없다는 뜻이리라. 독서를 폭넓게 하지 않으면 나누는 이야기도 진부해지기 쉽다.(61쪽)'

수나라 때 최표의 글을 이렇게 해석하는 그가,

'출퇴근이 없고, 정년이 없고, 만나기 싫은 사람은 안 만나도 되고, 승진과 인사고과 부담이 없어서 좋다(62쪽)' 등을 매설가의 장점으로 꼽은 그가,

고차의 맛을 얘기하며 '살다보면 돈 때문에 만나는 인간관계도 있다'고 하는 대목에선 왠지 서글퍼졌다.

천석군, 만석군, 명문가, 세도가 등에 관한 명확하게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하늘이 낸 부자는 3대에 걸쳐 적선을 하는 등 베풀어야 한다고 하는 그가,

이 글을 원래 기고했던 게 ㅈㅅ일보라는 사실은 더 서글펐지만, 뭐 어쩔것인가 말이다~--; 

 

그런 그를 다시 보게 된건,

다독 뿐만 아니라 여행을 많이 할 것과 사람들을 만나볼 것도 권하는 대목에서 였다.

그는 여러 직, 간접 경험을 사고의 확장으로 보았다. 

괴팍한 스타일의 사람, 어느 분야에 10년 이상 몰입한 경험이 있는 자,  장인匠人, 정신세계를 탐험한 도사 등은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접하기되지 않는 독특한 사람들이니 일상의 시선으로 봤을때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한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중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목 뒤와 어깨 그리고 등 쪽으로 나 있는 경락과 혈 자리가 막힌다고 한다. 자기 몸의 막힌 경혈을 그때그때 수시로 풀어주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의 행동이다. 몸 공부야말로 한번 해볼 만한 공부이다.(32쪽)'라고 힘주어 얘기하고 있는데,

자기 몸의 막힌 경혈을 그때그때 수시로 풀어주는 건, 도사를 꿈꾸고 쫒아 다녔으며 그래서 몸 공부야말로 한번 해볼 만한 공부라고 얘기하는 그에게나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나이 40에 이르러 하는 공부가...

머리가 굳어져 이해하고 깨우치는게 예전 같지는 않지만, 삶을 바라보는 혜안 같은 것이 느껴져 자득지미自得之味를 맛보겠던 터라, 그의 너스레와 설레발이 오랜 경험과 수련에 의한 내공에 의한 그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겠다.

 

그가 도사로 입성을 했는지, 의 여부를 헤아릴 내공이 내게는 없지만...적어도 그처럼 풍류를 즐기고 살면 도사가 부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10년 전, 고차의 맛이 뭔지도 모르는 무설지(無舌之輩였던 나에게 제주도의 석명石明 선생은 그 귀한 남인철병을 아끼지 않고 손수 우려 주었다. '비싸고 좋은 차'라는 설명도 일절 하지 않고 말이다. 인삼 향과 난향을 합쳐놓은 듯한 맛을 내는 남인의 맛은 마시는 순간 탈속 느낌을 갖게 했다. 몇 년 뒤 부산의 '아파트 다실'을 가지고 있는 마니주 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남인철병 맛을 알게 되었다. 이 양반은 손이 컸다.

  살다보면 돈 때문에 만나는 인간관계도 있지만, 순전히 차 때문에 만나는 관계도 있다. 귀한 차를 사먹을 돈은 없는 처지에 차 맛을 알면 딜레마에 빠진다. 근래에 광주 무등산의 덕운 이병학 선생 다실인 보한재保閒齋를 알게 되었다. 보한재에 들어서면 벽면에 가득 쌓아놓은 발효차 덩어리들로부터 나오는 향이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얼마 전에는 새벽 한시 반까지 차 파티를 하였다. 마지막 코스에 나온 남인철병의 맛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이빨 사이에 끼여 있는 것 같다. 바람이 바뀌는 전환기에는 차 한잔 하면서 바람을 음미하는 여유도 있어야 한다.(174쪽)

 

 여느 풍류가객과 시인묵객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달빛을 사랑하는 데...

그가 풀어내는 너스레는 '문탠'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는데, 그럴 듯 하다.

 

ㆍㆍㆍㆍㆍㆍ태양보다 달이 더 좋아진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이다.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산속 정자에 앉아, 호수에 비치는 보름달을 보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03~105쪽)

 

 ㆍㆍㆍㆍㆍㆍ동산 위에 뜨는 달도 볼 만하고, 강물에 비치는 달도 볼 만하지만, 해운대의 달맞이 고개에서 바다에 비친 보름달을 보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다.

  이 달맞이 고개에서 밤안개가 낀 날을 택해 보름달이 뜬 바다를 바라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몽환적 풍경이었다. 억만 년 전 태고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 말이다. 풍파를 헤치고 오면서 쌓인 마음의 주름이 이 해월海月을 보면서 쫙 펴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바다의 달이 주는 공덕이다.

  문탠 로드는 바다의 달을 보면서 걸어갈 수 있는 바닷가 언덕길이다. 신경을 많이 써야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은 밤에 이 길을 한번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바다를 끼고 걸으면 바다에서 오는 수水 기운이 머리의 열을 내려준다. 어떻게 머리의 열을 내리느냐가 중년의 관건이다. 내륙의 산길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112~113쪽)

바다를 끼고 걷는 길, 산길, 호수를 끼고 걷는 길 들의 제각각 처방도 멋지고 말이다.

  제주의 올레길은 대부분 바닷가를 끼고 길이 나 있다. 약초도 해풍을 맞아야 약이 된다. 염기가 함유된 해풍을 온몸에 맞을 수 있는 올레길은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바닷바람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작용이 탁월하다. 특히 화가 뭉쳐서 울화병 기운이 있으면 올레길이 좋다.

  지리산은 산길이라서 포근하게 품어주는 기운이 있다. '인자요산'이라 하듯이 산의 기운은 사람을 어질게 만든다. 기운이 충만해야 화를 안 내고 어질어진다. 기운이 모자라면 화를 자주 낸다. 산은 사람의 고갈된 원기를 보충해주는 작용을 한다.

  충북에 있는 괴산호의 둘레를 도는 산막이길은 약 4킬로미터 거리이다. 호수의 물은 바닷물과는 다르다. 소금기가 없는 호수의 물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도 섬세하게 다듬어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 세계에서 받은 깊은 상처는 인간의 말(언어) 가지고는 치유가 어렵다. 어떤 말을 들어도 회복이 안 된다. 언어도단의 치유 방법이 필요하다. 그때는 대자연의 품에 안겨 있어야 하는데, 그 대자연은 청산리 벽계수이다. 청산리 벽계수에 들어가 푸른 산을 보고, 녹색 빛깔의 맑고 투명한 계곡물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씻어내야 한다. 결국에는 청산과 벽수가 인간을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구라'가 되었든지 '교육방송'이 되었든지,

너스레가 되었든지 설레발이 되었든지, 간에...

이런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고 내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 것은 그들은 몸소 경험하고 체화하여 이미 일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몸소 체화하여 자기것으로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적용을 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책에만 나오는 그것들은 글자 이상의 의미도, 이하의 의미도 없는 것이다.

본인이 몸소 경험하고 체화한 것을 글로 썼기 때문에 내게 감동을 주고 울림을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사도 달인도 자연 앞에서는 작기만 하고 속수무책인가 보다.

아래 문장이 왜 그리 마음에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봄이라서인지, 아니면 내 닉의 '양철'을 포함하고 있어선지 모르겠다, ㅋ~.

 

  대낮에 듣는 빗소리와 저녁에 듣는 빗소리의 느낌도 시시각각 다르다. 새벽에 듣는 빗소리는 대자연 속에 고요하게 누워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순수한 자연의 소리가 양철이라고 하는 인위의 금속에 부딪히면서 내는 그 소리는 사람의 혼백을 정화해주는 작용을 한다. '놀아보지도 못하고 어느새 가버린' 중년의 허탈감을 달래주는 우주의 거대한 기타 소리라고나 할까.

  봄비와 양철지붕은 자연과 문명의 오묘한 궁합이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은 조물주가 봄을 색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양철지붕으로 떨어지는 봄비 소리는 삶의 때를 벗기도록 해주는 하늘의 선물이자 천상의 음악이다. 옛 선비들은 초가삼간에 살았기 때문에 이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묘한 빗소리를 몰랐을 테지만, 21세기에 사는 나는 이 양철지붕 삼칸 집에서 봄비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랜다.(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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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3-02-27 19:42   좋아요 0 | URL
저도 조선생처럼 '筆也祿在其中' 론자입니다. 생업의 도구는 제일 좋은 물건으로..
문제는 제 생업의 도구가 이것 저것이라 지름신이 늘 저와 함께하신다는 것. ㅎ
만년필은 저도 좋은 놈으로 몇 개 가지고 있죠. 호사취미지만 때때로 그 만년필로 제법 큰 계약서에 서명할 때도 있으니
'필야녹재기중'의 실현이라고도...ㅋ

아무개 2013-02-28 08:43   좋아요 0 | URL
저는 뭐랄까 주말 오후 제 고양이들과 뒹굴거리거나 아이들 쓰담쓰담 하다가 가끔씩 울컥~하곤해요.
왠지 묘하게 슬픈데 행복한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았음 좋겠다....그런 생각이 들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하고.
아마 그럴때가 제가 느끼는 일상의 소중한 때가 아닐까 싶네요.

전 개인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것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양철'지붕에 톡톡~떨어지는 빗방울소리 듣는것은 좋아라해요^^

하늘바람 2013-02-28 10:32   좋아요 0 | URL
글씨가 안좋아 카드한장 못보내는 일인이 얼굴 빨개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