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림 떨림 울림 - 이영광의 시가 있는 아침 나남시선 83
이영광 엮음 / 나남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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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번 필이 꽂히면 그의 전작을 두루 섭렵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러 사람의 시나 수필을 모아 놓고 해설을 하는 모음집이나 가이드 안내서 같은 건 또 별로다.

다양한 이들의 시 67편을 책 한권에 모아 놓았으니, 각자 다양한 개성이 두드러져서 통일된 일관성 따위는 느낄 수도 없는 것이 겉도는 느낌일까 우려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이영광' 시인의 그것이었기에 혹시나 했었는데, 기대는 날 저버리지 않았다.

이영광 시인이 선별한 시를 '홀림-떨림-울림'의 과정으로 수용ㆍ 해석해 내는데, 그것이 너무 좋다.

시와 비껴 겉도는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닌 것이, 한데 어우러져 이영광표 시집이나 수필집 한권을 읽는 느낌이다.

그의 까탈스러운 시 편력을 엿보는 건데도 슬쩍 눈 흘기게 되기보다는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이 책은 그가 신문에 소개했던 시들을 한권으로 묶은 것이다.

그가 신문에 시를 소개하려고 시집들을 모아 읽으면서 느꼈다는건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시가 유난히 많이 나온단다.

큰 난리도 없고 배고픔도 덜한 이 시절이 외려 더 살기 어려운 시절인 탓은 아닌가 싶다며 눙을 친다.

그러면서, '시는 원래 살기 막막한 사람의 말이기도 하니까'라고 하는데 이 말이 왜 이리 멋진거냐, 아흑~--;

 

까탈스러운 시 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마냥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시의 자리에 사람이나 사랑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로 통용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말해, 까탈스럽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편력을 한꺼풀 들추고 봐야만, 시종일관 무심한듯 하지만 저변에 깔려있는 뚝심같은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겠다.

 

좋은 시는 우선 그저 좋다. 왜 좋은가는 그 다음이다. 좋은 시는 먼저 읽는 이에게서 생각이란 걸 빼앗아갔다가는, 천천히 되돌려주는 것 같다. 잃었던 정신을 차리고 느낌과 뜻을 골똘히 되짚어 수습하도록 만드는 그 찌릿찌릿한 수용과정을 '홀림-떨림-울림'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좋은 시가 많다고 했으나 마음껏 거두어 담지를 못했다. 어떤 것은 좋아서 겨우 좋다고 말해볼 수 있었지만, 어떤 것은 참 좋은데도 어째서 그러한지 잘 말할 수가 없어 내려놓고 말았다. 그래서 즐거운 비명과 괴로운 신음이 이 책의 겉살과 속살을 이루고 있다는 변명을, 꼭 드리고 싶다.('머리말' 중에서)

 

좋은 시는 저렇다고 하지만, 좋은 사람은 그저 좋다.

왜 좋은가 따위는 없다.

좋은 사람을 보면 그저 닮고 싶다.

번지고 스며 물들 듯이 그렇게 그렇게 닮고 싶다.

좋은 시와는 다르게, 좋은 사람을 두고선 그런 생각을 되돌려 한다는 것은 상황이 종료됐다는 얘기이다.

시를 놓고는 상황 종료가 되어도 그만이지만,

사람을 놓고는 상황 종료가 됐다는 것은 과거형이란 거고,

사람을 놓고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왠지 서글프다.

 

내가 왜 시도 아닌, 시 해석을 놓고 멋지다고 설레발을 치느냐 하면,

시가 없이 그의 해석만으로도 하나의 시나 수필 같은 것이 작품으로 내어놔도 손색이 없다. 

불가능한 것은 이렇게 어떤 영혼에게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순결한 것들은 다 아름답게 미친 것들이다.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만다.(19쪽)

사랑은 때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자기를 발설하지조차 못한다.(23쪽)

 

         호 구 糊口

                 - 권혁웅 -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호구糊口"는 아무래도 전서의 비유겠지요. 봉투에 침을 발라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호구는 또 입맞춤이기도 합니다.  통째 봉해 보내는 입술은 그리움 전부를 간절하게 대표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전령이겠지요.

  호구는 원래 간신히 먹고 산다는 뜻이니,  이 시는 결국 사랑의 가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홀몸으로만 불탈때 사랑은 조바심치다 목숨을 잇기 어려운 극빈에 떨어지지요. 그러니 마음은 마음에게 전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 아래"는 정말 추신에 불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목매단 사람의 버둥대는 사지처럼 이 절박한 사랑의 몸체는 입술에 특명을 준 채 물러나 있거나 가라앉아 있을 뿐입니다. 몸 전체가 아니라 입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이치지요. 추신은 그러니까, 연서의 본문이자 입술의 배후조종자이며 사랑의 무의식이라 해야겠군요. 무의식은 원래 추신을 닮았습니다. 짧은 석 줄, 결코 짧지 않군요.(43쪽)

개인적으로 처음보는 시였지만, 시와 시 해석 모두 다 넋을 놓았었다.

조바심에 달뜬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본 기억,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배달한다는 건 어쩜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일지도 모르겠다.

할말이 너무 많지만, 채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목이 매어 눈물을 꼴깍 눌러 삼킬 뿐이다.

마음을 마음에게 전할 수 있는 길은,

할말이 너무 많을 땐 그저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가 제격인 셈이다.

 

옛날의 행운 -김성윤 군의 회상   

                    - 정현종(1939~ ) -


젊은 시절에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걱정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어요.

친구들도 그렇고

선생님들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있었어요.

그걸 내놓고

먹으라고

먹으라고 했어요.

참 행운이었어요.


 

정말 저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없는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도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날을 무탈하진 않았어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던 거다. 이 시는 그 무언가를 "마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의 젊음은 모질게 노력해 갖추어도 한발 내디딜 곳이 마땅찮고, 우리 모두는 무엇이 죽이러 오는지 모르면서도 공포에 질린 짐승처럼 쫒기며 살고 있지 않은가. 안 보이는데도 한 잔 술처럼, 두툼한 파전처럼 나누어 먹을 수 있던 것. 먹다보면 또 어떻게든 힘내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던,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이 보이지 않는다.

  늘 제멋대로인 체제를 문제 삼지 않고 친구와 동료들과 겨루기 바쁜 우리가 저 "마음"이라는 것에 다시 도달할 수 있을까.

'마음'은 '젊음' 또는 '희망'의 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수조 앞에서

             - 송경동(1967~ ) -


아이 성화에 못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강한 생각과 끓는 감정을 품고도 버티어내는 담담한 말은 더 강한 말이다. 이 시의 말들은 화장을 벗겨낸 우리 삶의 민낯이 킬링필드라는 난감한 진실을, 그걸 그저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의지를 담고도 흐트러짐이 없다.

  싸움을 사랑과 평화라 굳게 믿는 그는 감옥을 나와 또 '현장'에 있다. 목발을 짚고 걷는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들려올 때, 나는 내가 성한 다리로 절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과격하지 않다. 과격한 건 저 투명한 "관계"다. 저것은 관계가 아니다.

또 '송경동'의 저 시를 보면 '싸움'과 '사랑'과 '평화'는 모두 같은 근원의 말들인가 싶기도 하다.

 

또는, '시는 원래 살기 막막한 사람의 말'이기도 하다니까 모든 시는 하나의 근원으로 통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중독'이 다른 말로는 '경배'이고 다른 말로는 영광'이고 또다른 말로는 '홀릭'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막막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쉬운 방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것일 테니까 시를 읽으면서 살면 되는 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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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3-06 06:54   좋아요 1 | URL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 담은 시는
이웃들한테도 좋은 이야기 들려주는구나 싶어요

2013-03-0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8 0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