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어졌지만, 이곳 서재에서 처음 활동을 할때는 새벽 무렵에 깨어있을 때가 많았다.

아니, 새벽 무렵에 깨어있다 보니, 이곳 서재를 어슬렁거렸다가 인과 관계에 맞는 표현이겠다.

근데, 내가 새벽 무렵에 깨어있는 것은,

잠 없는 할머니의 불면증이랑은 좀 다른 그런것이었는데...

낮동안 육체노동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는 나로써는,

몸은 힘든데 정신은 말똥말똥 말똥을 굴리는 요사스런 것이었다.

 

다시말해, 몸의 상태로는 언제 어디서고 눈만 붙이면 쪽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지만,

정신상태로는 늘 깨어있으려고,

아니 늘 'Yes, I can.'의 상태로 스탠바이하고 있으려고 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보니, 육체와 정신 사이에 괴리가 생겼고,

가끔 눈에 헛것이 보였으며, 급기야 헛소리도 하기에 이르러,

이러다가 임성한 작가의 '왕꽃선녀님'을 영접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었다.

 

그렇게 된 근원을 나름 분석해 보자면,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어린시절 부모가 아닌, 조부모와 고모들 밑에서 자랐고,

당신들에게 아무리 귀하게 대접받으며 컸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 무의식 속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로 각인되었으며,

아빠의 나를 향한 그것은 애정이라고 하기엔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모든 것에서 평범함 - 그 이상이 아니었던 내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다시말해 그들에게마저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든,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하고 나서는 것이었고,

그러다보니, 모든 일에 오지랖을 떨며 열심히 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몸은 힘든데 정신은 말똥을 굴리는 각성 상태로까지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간혹,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는 아픔이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었지만,

난 그들을 비겁하게 비껴갔다.

내 자신이 아직 그 담굼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나와 닮아도 너무 닮은 그 친구를 향하여 서슴없이,

영혼의 찜찌름한 냄새까지도 닮았다고 할 수 있겠고,

그 친구를 거울 삼아 날 비추어 보게 되었다.

 

묘하게도 그 친구의 상처에서 내가 본 것은,

상대방의 상처의 깊이가 아니라, 내 자신의 상처의 깊이였다.

내 자신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손수 닦아낸 후에야,

옹이가 훈장처럼 담담 또는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얼마전 지인 하나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나열하면서 내게도 장점과 단점을 얘기해보라는데 딱히 생각나는게 없는거다.

예전 같았으면 '다 잘해요'라든지 의욕이 앞서서 '뭐든지 잘할 수 있어요'라고 했을텐데,

이제는 장점이 하나도 없고 단점으로만 똘똘 뭉쳤어도,

그게 난데 어쩔 것인가, 내지는 나름 찌질한 단점이 매력이라고며 쿨하게 넘어갈 수 있겠다, ㅋ~.

 

암튼,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영 세 부터 삼 세까지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그 시기에 엄마가 기르지 않은 아이는 정신병자가 될 확률이 높고 강아지도 새끼 때 어미 품에서 떼어 놓으면 사망률이 구십 퍼센트나 되죠"

라는 말에 긍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 말의 조건에 꼭 부합하는 나는, 그동안 살면서 쉽게 맘을 툭 터놓고 무장 해제를 하지 못했었다.

 

실은 이 책을 몇 년 전에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이 책 속의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책의 세진의 얘기는 또 다른 나의 얘기라고 할 정도로 나의 상처를 후벼팠고,

그리하여 감당할 수 없을만큼 아파서 잔뜩 움추러 들었던 것이었다.

"그 슬픈 얘기를 하면서 왜 웃어요?"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지며 가슴 밑바닥으로 슥 칼날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오래된 방식이았다. 나 자신이나 가족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웃으면서 되도록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스스로의 감정에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적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발뒤꿈치를 땅에 붙이고 뻗대는 마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다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아제 와 새삼스럽게 올어요? 이 나이에?"

"어리광을 부려본 적 없어요?"

"없어요."

"한번도?"

"네. 기억하는 한에서는 전혀."

"슬픈 애기를 할 때는 슬퍼해야 하잖아요."

"남 앞에서 울어본 적 없어요. 선생님은 남이잖아요."(1권, 79쪽)

 

나또한 '수도꼭지'나 '집을 팔아 벌금을 내야 하는 여자'라고 하여 '집.파.녀'라고 불리울 정도로 눈물이 헤프지만,

텔레비젼이나 책 속의 일이었지, 내 자신의 일로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얼마전 이곳에서 알게된 친구 하나가 '애착의 변화'라는 설문을 의뢰해 왔다.

다른 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부탁할 수 있는 '질문이 다소 길고 민감'한 것일 수는 있지만,

나의 이런 과거사와 가족사를 잘은 몰라도 대충이라도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케이스스터디가 좋아도 쉽게 설문조사를 의뢰할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사안은 아니었을게다.

 

어떤 종류의 귀뜸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되었다가 설문의 문항들을 보고,

'헉~'한동안 숨쉬기가 힘들었다.

내용이 다소 민감한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이미 상처 입은 사람들이라면,

그 상처를 벌리고 헤집고 들쑤셔 놓는 꼴이었다.

 

상처를 일단 벌리고 헤집고 들쑤셔 놓아야, 치유책도 생긴다는 자명한 이치가 요번에도 몹시 아팠다.

난 직업적 소명도 내세우고,

병을 오래 앓아왔던 만큼 병의 내구력도 내세워 보고,

그동안 꾸준히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 노력을 했던 만큼,

이내...상처의 치유와 봉합을 위해 이 책을 다시 펼쳐 보았고,

요번에는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이책에서 세진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나 또한 치유하고 치유받고자 하였다.

"ㆍㆍㆍㆍㆍㆍ스콧 펙의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찾아봤어요. 혼자 나를 분석할 때는 그 사람 책이 많이 도움이 됐는데 그가 가장 최근에 낸 그 책은 귀신들림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저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학문적 성과가 단숨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만한 절박함으로 그 문제를 연구하고 발표하게 되었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었다. 객관적 실체로서 사탄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목사가 집전하는 엑소시즘 현장을 참관하고, 귀신들림의 원인과 증상, 해결책 등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그 삶도 결국 그 길로 가는군요."

  "융이 말년에 그쪽으로 갔죠? 어쨌든, 그 책에서 다시 확인한  내용은 사탄이라는 존재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우연히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오랫동안 외로웠던 사람들, 지금도 외로운 사람들에게 깃들인다는 거죠."

  "나는 그 외로움에 한가지 더 첨가하고 싶어요. 적개심. 적개심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죠. 공격성이나 방어 의식."(1권, 196쪽)

 

그런데 말이다.

이 책의 세진이 나였다면,

이 책의 세진이 치유받은 그 방식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아졌다면,

그러기만 했다면, 그게 끝이었다면, 난 이 페이퍼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거야. 심리적인 공백감, 애정에 대한 허기, 보호받고 보살핌받고 싶다는 소망 같은 거. 물건을 사면서 나는 애정의 대용품을 구하고 있었던 거지. 내가 사는 물건을 내 존재와 등가품으로 여기기도 했을거야. 그랬으니까 동종 품목 중에서는 되도록 고가의 물건을 집어들곤 했겠지."(1권, 255쪽)

 

  "그런 이들은 대체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야. 강한 의지로 목표를 향해 매진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도 성실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어. 이런 이들이 이성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구멍들을 하니씩 가지고 있는 거야. 이멜다의 구두나 재클린의 소핑 벽도 그런 예야. 목표 지향적으로, 이성적으로 사느라고 억압해둔 감정과 무의식 영역의 욕망들이 그런 식으로 이성에게 복수하는 거래."(1권, 267쪽)

왜냐하면,

어려운 심리학 용어로 도배를 하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순 외로운 사람들 천지이고,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인데,

실패하고 마음 아파하니까 말이다.

 

나는 한번도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2권, 52쪽)

나도 남편이랑 6년을 연애하다, 결혼한지 올해로 19년인가 보다.

그런데 아무리 분위기 조성되고, 감성 충만하여도...사랑한다는 말을 해본적이 없었다.

남편이 하는 '사랑해'라는 말에 '동감이야'라든지 '나두'라고 소극적인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에서도 거절당할까봐 두려웠다.

 

이 외로운 세상을 외롭지 않게 사는 방법은 어쩜 아주 간단한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선택하는데는 특별한 기준이 필요할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선택하는데는 특별한 기준 따위는 필요없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흠뻑 담금질하고, 내가 주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사랑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예전에 후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언니, 밥 사줅게 나와 하면 거절하는데, 언니 밥 사줘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온다고. 그러니까 저 사람을 불러내려면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해야 한다고. 그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넘겼던 말이 뒤늦게 목에 걸렸다.(2권, 175쪽)

다시말해,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사랑을 하는 것도 나이고,

사랑을 하지 않는 것도 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다.

물건을 취하거나 버리는 것도 나의 자유 의지이다.

하지만,

물건과 달리 사람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취하거나 버리는 것은 나의 자유 의지이지만,

거기에는 꼭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김형경의 이 책까지는 재밌게 읽었다.

근데, 근간 '남자를 위하여'는 모든 걸 다 안다...가 지나쳐 거의 우상화, 신격화 수준이다.

내가 원하는 건...

힘들때,

등짝 한번 툭~하고 두들겨 주고...

같이 술잔을 부딪히며

아무말없이 술병을 기울여주는 사람이지,

모든 걸 다 알아주는 신이 아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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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4-02 06:56   좋아요 1 | URL
상처를 들춰내고 들쑤시고 헤집어내야 그걸 치유할 수 있다는 말에 공감요. 자꾸 감추려고 할수록 상처는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저도 수도꼭지에요ㅜㅜ
그리고 그 설문ㅜㅜ 저도 참 힘들게 답했어요. 그게 참 그렇더라구요.
사랑을 선택하는~ 이 책 오래전에 읽으며 많은 공감했던 기억이나요. 다시 꺼내 읽어봐야겠어요.
오늘 하루 좋은 일 행복한 일 많은 하루되시길~~

하늘바람 2014-04-02 13:1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가슴아픈기억이 살아나더라고요 근데 아닌척하며 해버렸다는
 

남들이 다 좋다는 책이 내게는 별로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안봐도 불을 보듯 명약관화한 경우가 일본 소설이다.

일본 소설이라면 정서가 우리와 비슷해서, 보통 쉽게들 감정이입을 하곤 하나본데,

난 어쩐 일에선지 영 불편하고 마뜩잖다.

 

 

 

 

 

 

 

 

그렇다고 일본 작가라고 하여 마냥 간과할 수만은 없는게,

내가 엄청 감동 받았던 '신들의 봉우리'를 썼던 '유메 마쿠라바쿠'의 경우,

'음양사' 라는 책은 어떨까 하였는데,

그야말로 귀신과 혼령이 블루스를 추는, 나로써는 감당 불가인 기괴한 소설이었다.

 

가만보면, 일본소설에는 혼령이랄까 영혼이라고 불러야 할 그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그게 내게는 낯설고 거부감이 생기는 거다.

 

SF소설에 등장하는 science fiction이나 social fantasy적 요소를 수긍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혼령이나 영혼이 시도 때도 없이, 어떤 기준이나 경계도 없이 등장하는게,

개연성을 방해함은 물론, 억지다 싶기 때문이다.

 

오히려 '존코널리'의 '모든 죽은 것' 정도가 되면 낫다.

혼령이나 영혼의 중간자로서의, 영매가 등장하는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일본은 혼령이나 영혼을 하나의 전통이나 민간신앙 차원에서 흔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한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의 경우,

내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다.

수도꼭지 끝에 맺힌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서 울리는 것처럼, 외로워, 외로워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59쪽)

라는 표현 따위로 미루어볼때, 이사람의 감수성과 필력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하긴 내가 이 사람의 다른 것들을 평가할 깜냥은 아닌 고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사람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겠는데,

나와 코드가 안 맞을 뿐이다.

 

어차피 애도라는 것은 죽은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부고가 난 이후부터,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사람들의 편의와 마음대로 꿰어맞추고 각색하고 해석하려든다.

 

왜냐하면 애도라는 것이,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면,

"ㆍㆍㆍㆍㆍㆍ죽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551쪽)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인생의 본질이라는 허울 좋은 살아 있는 동안에 대해서, 가 아니라,

죽어서 어떤가 따위를 얘기해야 할텐데...

살아있을 때의 그(그녀)와 죽어서의 그(그녀)가 마치 별개인양 얘기하고 있다.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살아있는 나날들의 마음가짐이나 행동강령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자신과 타인의 죽음은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거야.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과 죽은 사람과 자신을 같이 생각하는 건 달라.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일이 감정을 이입해서는 안 돼.ㆍㆍㆍㆍㆍㆍ(264쪽)"

이렇게 산자의 삶 위주로 얘기하고 있다.

내가 생략해버린 저 말 줄임표 부분에는,

우리식으로 따지면 죽은자는 죽은자고, 어찌되었건 산 사람은 살아야지...하는 뉘앙스가 담기게 마련이다.

어차피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거라면 죽은자를 위한 애도보다는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얘기하는게 낫지 않을까?

지지고 볶고 싸우고 다투더라도, 그게 삶의 온기가 바탕이 되어 비롯되는 그것 말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느라 왕방울 눈물을 흘린다고 한들,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고마워할까?

눈물 흘리는 내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 아닐까?

애도의 목적이 내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 아니라,

진짜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면,

살아있는 동안 하루를 살아도 매순간순간을 가열차게 살 수 있도록,

사람의 단점보다는 작은 장점이라도 찾아내어 북돋워 주고 발휘할 수 있도록,

그러려고 애쓰느라고 흘린 작은 땀방울을 같이 나누는게 오히려 값지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니까 의미가 좀 애매모호한데,

사고사를 제외하고,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살고,

자신의 명대로 다산 다음,

자신의 죽음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혜경 외 지음, KBS 생로병사의 비밀 제작팀 엮음 /

 애플북스 / 2014년 3월

 

죽을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면,

죽은 다음에 자신이 애도받고 못받고는 차후의 문제가 될 것 같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지의 여부가 우선이 될 거 같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다양한 집단과 연령대의 국민들 총 16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단다.

이게 확률과 통계를 필요로 하는 역학조사라면, 165명이라면 대상이 좀 작은 감이 있지만,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니 충분하다고 본다.

 

이 자료를 보니, 품위 있는 죽음의 조건으로 응답자가 가장 많이 꼽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이었고,

‘주변 정리’,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음’, ‘통증으로부터의 해방’ 등이 그 뒤를 이었단다.

 

이걸 누구의 문제로 돌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 걸 외면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언제부턴가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이 인사치레가 되어버렸다.

건강함이란 몸과 마음, 심신이 균형과 조화되어야 한다.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것은, 균형과 조화가 어긋나는 것이니...건강하지 못하다는 의미이겠다.

 

그러니, 곱게 나이먹는다 내지는 나이값하고 산다는 게 제대로 된 덕담이다.

  

암튼,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다.

알지도 못하는 사돈의 팔촌, 조문을 가고 인사치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나와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거다.

태어나는건 내가 어쩌지 못했지만,
나의 죽음은 예비하는 순간 많은 것들을 내 의지대로 처리하고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게 아니라,

자신의 삶과,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죽음마저도 스스로 예비할 수 있다면 바랄 게없는 어른일게다.

동안을 부러워하지말고,

나이값하고 사는걸 부러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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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3-07 23:33   좋아요 0 | URL
나이가 넘 빨 리 들어서 그 값하기도 허걱되네요 저도 반성해요

Ralph 2014-04-03 10:15   좋아요 0 | URL
죽음을 안다는 것, 자신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매우 힘든것처럼 생각됨니다. 대부분 자신이 죽는 지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 이나 주위 사람이 안다해도 가르쳐주거나 도와주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면 누구도 가르쳐주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어차피 자신이 알아야하고, 자신이 준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인생을 사는 것과 같겠지요.
 

 

 

여자의 솜씨라고 해도 좋다 싶은 이건 울아들의 작품되시겠다.

얼마전 날 추웠던 어느날 더이상 책은 보기 싫고 할일은 없어 심심해서 만들었단다.

난생 처음 만든거라는데, '마음씨, 맵씨, 솜씨' 3씨를 자랑하는 날 닮지 않았다고 할까봐 손끝이 야무지다.

 

이게 정체성이란 말로 대치 되어도 좋을까 싶지만,

어렸을때 난 이 야무진 솜씨를 자랑하는 무언가를 직업으로 갖게 될 줄 알았었지만,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고, 아직도 그게 회한으로 남는다.

 

 

책을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대충 골라 읽는 타입이기 때문에,

보통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영국 남자와 중국 여자의 러브 라인을 그린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을 읽은 다음엔,

영국 조각가 남자가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런던 디자인 산책'을 읽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독서는 말 그대로 내 기분 내키는 대로이기 때문에, 선택을 할때 신중하지도 않지만,

읽다가 별로이면 집어던지면 그만이었다.

 

근데, 근래에 읽은 책 두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것이,

끝까지 읽느라 인내심을 발휘하는 수고를 하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게,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게 일반적인 검증을 거친작품인 것은 맞지만,

다른 사람이 큰 감동을 느낀 책이라고 해서,

나도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것이다.

 

 

 

 

 

 

 

우선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같은 경우,

'밀란 쿤데라'라는 이름 만으로도 결의를 다지기 충분한데,

강신주의 감정수업, '자긍심'편에서 언급되어 읽어봐야 겠다 싶었었다.

강신주는 '자긍심'을 일컬어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이라고 한다.

 

솔직히  '정체성'의 개념조차 모호했던 난,

책을 읽고나니까 선명해지는게 아니라 더 모르겠었고,

그리하여 네이버를 찾아보니,
'어린이가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차별화되고 사회에서 취득하는 과정을 발전시키게 되는 '자아'의 의미를 말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래도 애매모호해서,

강신주가 언급한 자긍심이란 단어와 연결시켜 생각해보았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본인만의 고유한 개성을 얘기하는듯 한데,

그중 지속되어 자신의 것으로 습관화 돼고,

긍정적이어서 본인이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겠다.

'자긍심','자아존중감' 정도가 되면 뜻이 선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이렇게 무덤덤한걸,

처음 너무 어려웠거나 내 취향이 아니어서라고 생각했다.

'정체성'은 신프로이트주의 이론가인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언급한거라고 하는데,

프로이트 이론도 모르는 내게 신프로이트주의라니 머리에 쥐가 날 수밖에~--;

 

근데 곰곰 생각해 보니, 이 책이 별로였던 이유는 샹탈이라는 여자 때문이었다.

자신이 늙어 간다는 사실에 서글퍼하던 샹탈이라는 여자가, 어느 날 연하의 애인 장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 이상 날 쳐다보지 않아.'라고 하소연 하게 되고,

애인 장마르크는 그런 샹탈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시라노'라는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다는 내용인데,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때마다 놀라움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녀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점이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라고 한다.

 

어린 아들이 죽은 후 또다시 임신을 하라고 부추기는 시누이와 거기에 동조하는  남편에게 회의를 느껴 이혼하고,

일 잘하고 돈 잘버는 캐리어우먼이 된다.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와 같이 사는데, 잘은 모르지만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는 변변치 못한것 같다. 

 

나이가 먹고 늙어가는 걸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을 가지고 서글퍼할 수는 있다.

평생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하여 남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내가 샹탈이 별로인건 이런 것들 때문이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라면,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이고 실천의 방법이지,

장마르크에게 그렇게 표현한 순간 또 다른 애인이 가능하다는 허용이 되어버리는게 아닌가 말이다.

같은 의미에서 '시라노'라는 익명에게서 받은 편지를 감추는 그 마음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들을 '정체성'으로 제한시켜 버린 작가도 별로가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또 한권, '올리버 키터리지'가 그렇다.

 

인간의 감정은 얼마나 세밀한가.

감정이 느끼는 파동은 얼마나 섬세할 수 있나?

인간과 인간이 내는 파동이 물결처럼 어우러져,

서로 간섭 현상을 일으키는 점이지대도 있겠지만,

어떤 파동에도 휩쓸리지 않는 소외지대도 있는 법.

 

이 책은 'ㄱ'님의 리뷰의 이 구절이 너무 좋아 외우다가, 내 편견이 잊혀질때쯤 되어 집어 들었다.

이 책 같은 경우는,

꽃이 피어 붉기는 잠깐이고 줄기에 이파리를 매단 채 견뎌내는 시간이 더 오래임을 조용히 얘기한다.

우리의 불편하고 추레한 현실 한쪽 자락을 건드려 감성을 자극하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인지는 모르겠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조각조각 단편의 삶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것은,

삶은 매순간 우리가 계획하거나 맘 먹은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거나 늙었거나, 나이를 먹었거나 덜 먹었거나, 에 관계없이,

우리가 매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거기 나오는 '샹탈'과 '장 마르크'로 돌아가,

내가 별로라고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이유는,

그들의 도덕성을 비난해서도 아니고,

사랑이 영원할거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순간에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순간조차도 서로를 비껴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현세의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라는 책이 궁금하다.

이 책엔 '해지기전 한걸만 더 걷다보면' 류의 글이 가득할 것 같다.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
 이현세 지음 / 토네이도 /

 2014년 2월

 

다시 처음의 만두 빚는 울아들로 돌아가서,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고 그것을 발휘하며 살 수 있으면 행복하겠지만,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것을 선택한다고 하여 삶도 2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를 할땐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서,

놀땐 노는데서,

만두를 빚을땐 만두를 이쁘게 빚는데서, 울아들은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샹탈은 그순간 뭇 남자들이 아닌 장 마르크가 쳐다봐주지 않는다면 서글퍼하면 그만인 것이고,

장 마르크 또한 샹탈을 여러번 다른 여자와 혼동한 과거를 놓고 그럴게 아니라,

그순간 샹탈을 헤아릴 수 없다면 그때 놀라면 된다.

 

흔히들, 몸이 나이를 먹지 마음이 나이가 먹지를 않는다는 말을 한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게 마련이고 언제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사는 인생이라면,

밥을 꼭꼭 씹어먹듯, 내 발로 한걸음씩 내딛듯,온 몸으로 통과하며 살고 볼 일이다.

이것은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 랑은 좀 다른 의미인데,

사람이 항상 전력질주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항상 최선을 다하고 살려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겠는가?

잘하고 못하고, 의 개념이 아니라,

나를 올곧이 내어맡기는 의미라고 해야할까?

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하기 싫어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지만, 그게 다 한 대상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관계가 정리되면 또 다른 관계를 시작할 수도 있고 밍기적거릴 수도 있고 그런 것.

 

정체성을 난 '자긍심' 내지는 '자아존중감' 정도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었다.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거기서 최선의 자아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고,

두번째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차선의 자아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이 얘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다' 정도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그게 사람이어도 좋고 사물이어도 좋다.

사랑이 영원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그 순간에는 대상에 집중하고 볼 일이다.

그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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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2-20 10:46   좋아요 0 | URL
아드님이 빚은 만두 정말 이쁘네요. 맛나보여요.
감동은 다른 사람과 똑같이 느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여러 사람이 좋다고해도 내겐 읽기 어렵고 별 감동없는 것들도 많더라구요.
정체성에 관한 고민은 어릴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는 것이라 아마도 죽을때까지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알케 2014-02-21 08:43   좋아요 0 | URL
아이고 딸래미를 키우시는군요ㅎㅎ 맵시하고는..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사다놓긴 했는데 저는 어째 시들합니다 ,

하늘바람 2014-02-22 07:45   좋아요 0 | URL
만두 만두 정말 아드님솜씨여요? 것도 첨 만든?와 정말 감탄에 입이 쩍 벌어지네요.
 

연말 연시를 고뿔 속에서 헤롱거리며 보낸다.

연말의 그것은 그나마 약하게 지나가 책은 들춰볼 수 있었으나,

지금 나를 통과하여 가고 있는 이 녀석은,

기침에 몸살을 동반해서 책을 들추는 것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싫다.

 

'한살 더 먹는다' 생각했을때는 그닥 감흥없는, 그리 유쾌할 일도, 불쾌할 일도 아니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나이 먹는것마저 이렇게 몸으로 통과해가며 깨닫는 건가 싶으니 씁쓸하기는 하다~--;

 

기실, 내가 요번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건,

해마다 맞아오던 예방접종을 (무슨 배짱으로 건너뛰었는지 모르겠다~--;) 건너 뛰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이 많은 직업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감기나 독감에 노출된 환자들과의 접촉도 많아,

감염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건 늘 있는 일이고,

그걸 알면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데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종로 한복판에서 동서남북 오가는 찬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도 아니고,

겨울 막다른 골목길에서 만나게 되는 군고구마 장사도 아니지만서도,

그들이 보면, '형님'하고 팔굽혀 고개를 숙이고 갈 정도로 둘둘 싸매고 다니는 데,

어디로 그 녀석들이 침범했는지 모르겠다.

 

거의 엇비슷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어도,

나만 유독 길고 오래 강력하게,

마침내 기필코,

초토화시키는 걸 보면,

면역력이 약해서일테고,

그렇다면 운동을 통해서 면역력을 강하게 해주어얄 밖에~--;

운동은 고사하고 하루 몇분이라도 걸어볼 요량으로,

팟캐스트로 다운받아 듣던 강신주는 다 들어주시고,

그 다음으로 건드린게 '이박사 이작가의 이이제이'라는 방송이었다.

 

근데 이 방송은 욕이 난무하는데,

그게 우아한 나의 기본정서와는 좀 맞지 않는것 같아서,

접으려고 하다가...

(이게 어디까지나 킬링 타임용으로 듣는 건데,

 이 사람들이 욕하는 걸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게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으면 들을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말이다.)

이들의 방송이 다 그렇지만,

'조봉암 특집 2부'같은 경우, 베스트 반열에  올라있는거라,

그리 많은 사람들이 들은 것은,

그들이 대세여서,

시대에 편승한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뭔가가 있을거라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봉암 특집의 2부가 끝나갈 무렵,

그들은 우리가 그 프로그램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석기 사건도 그렇고,

통합진보당 사건도 그렇고,

그렇게 연일 방송에서 때릴 정도의 대단한 이슈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이 '특.검.'에서 끝나야지, '헌.재.'까지 끌고갈 사건이 아니라는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란다.

막말로 이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창당을 하면 그만이란다.

 

하지만, 이들을 극좌로, 빨갱이로 만들어버림으로 인하여,

그들과 대척점에 섰던 사람들은 공ㆍ사 구별없이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국정원 댓글사건'과 관련하여 좌천을 당한 윤석열 검사의 경우, 그를 야당편이라거나 좌편향으로 봐야할 이유가 없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경찰청 정보국장을 구속했던,

노무현 정부에선 안희정, 강금원 같은 노 최측근을 구속한, 인물이다.

 

위정자 입장에선,

국민들이 자기들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좋을게 없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국민들이 자기네들끼리 편가르고 싸우다가 지쳐가길 원하고 있단다.

 

지금부터 하는 얘긴,

같은 얘기의 연장선 상으로 봐도 좋고, 전혀 다른 얘기로 봐도 좋다.

 

요즘 여러 주역 책을 짬뽕하여 읽는데,

읽으면서 느끼는건,

이 모두가 耳懸鈴鼻懸鈴이라는 거다.

한괘에 있는 여섯효를 가지고도,

두, 세개를 아래와 연관시켜 묶느냐, 위와 연관시켜 묶느냐, 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이 되어버리고,

그리고 해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도 여럿이다.

그 중, 어떤 해석이 맞는지 틀리는지, 를 놓고도 갑론을박이다.

 

국사, 세계사에 취약한 나도 어디선가 한번쯤 들었던 얘기들도 있다.

점서로 읽겠다는 사람에겐 그 효용성을 장담할 수 없으니 안되겠고,

처세서나 인문학 책으로 읽겠다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재미있는 이야기 책이 될 수 있겠다.

 

세상을 살면서, 또는 일을 하면서...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싶다.

예를 들면 비를 만나면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린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물론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노는 것이 아니라, 조급해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린다는 뜻이 되겠다.

비를 여러번 만나본 사람은 이 비가 언젠가는 그치리라는 걸 믿고 기다리겠지만,

처음 비를 보는 사람이라면, 이 비가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지는 않을까 심리적으로 동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느긋하게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힘을 비축한 이가 맞이하는 비 갠 하늘과,

노심초사하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소비해 버린 후에 맞이하는 하늘은,

긴장도 다르겠지만,

같은 하늘을 놓고도 하늘의 빛깔도 한참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처음의 '이박사, 이작가의 이이제이'로 돌아가서,

난무하는 욕설 때문에 이 방송을 놓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요즘 읽는 '인문으로 읽는 주역'의 '比'괘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작은 것으로써 큰것을 섬기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일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따르는, 또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먼저 스스로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뜻을 굽혀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다.  상사는, "내면에서부터 따르고자 하니, 스스로 잃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자존심과 관계기 있다.(132쪽)

비'比'괘는 즐거워하고 평화로운 관계이지만, 이건 서로 평등한 관계라기보다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받드는 괘이다.

『자하전』에서는, "대지는 물을 얻어 부드러워지고, 물은 대지를 얻어 흘러가니, 이 때문에 비(比)라 했다"라고 설명한다. 물과 대지가 서로를 얻어상생하는 것처럼,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가 간의 상생 관계를 나타낸 것이 바로 비괘다.(126쪽)라고 되어 있단다.

 

자연이나 국가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즐겁고 평화로운 관계라는건,

서로 평등한 관계라기보다는 한 쪽이 다른 한쪽을 받드는, 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존경을 할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는 그런 관계가 아닐까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위정자가 위정자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건지,

국민이 머리 박고 자기편끼리 편갈라 싸우는 일은 막아 보자는 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님, 

믿을 수 있고 믿음을 주는 인물의 '부재'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건지,

헷갈린다, 끙~(,.)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점을 갖춘 사람'인 것만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적어도 그래야, 즐겁고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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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1-17 22:41   좋아요 1 | URL
오늘은 좀 나으셨나요? 가까운곳에 살면 맛난 죽이라도 싸가고 싶네요. 저도 이번에 예방접종을 건너 뛴 상태라 불안불안하긴한데,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야겠어요. 언니, 감기 얼른 낫길 빌게요. 그리고 그동안 넘 소원했지요. 그래도 가끔 들러 좋은 글 많이 읽었어요.^^ 올 해는 자주 찾아올게요.

sslmo 2014-02-04 18:31   좋아요 1 | URL
왠지 꿈섬님은 음식솜씨도 야무지실 것 같다는~^^
어디선가 퓨전 피자 사진 본것 같아요.
저 그 피자 한쪽 얻어먹으면, 앞으로 거뜬할 것 같다는...ㅋ~.
현준이, 현수 많이 컸죠?
네, 저도 자주 마실 가도록 노력할게요~^^
 

며칠전 생기부 작성을 학생에게 시켜서 적발이 된 교사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고 만감이 교차하였다.

선생님들에게 가르치는 것 외에 잡무가 많기 때문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만으로 돌려버리기엔 뭔가 부족한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생기부 내용이 수능에 반영이 되기 때문이다.

매 학년 초가 되면 이름은 다르지만 가정환경 조사서 같은걸 집에서 작성해서 가져가야 한다.

뭐 그리 기록해야 할 빈칸이 많은지,

집중을 하여 작성을 하고 나면 거사를 치룬 것마냥 온몸에 힘이 빠진다.

그중 나를 가장 애먹이는건, 아이 성격의 장점과 단점을 기록하는 칸이다.

 

사람이나 사물의 장점과 단점을 구분하는것은,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체념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가 자라나는 새싹인 것도 있지만, 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가 되려면 아주 쿨하고 객관적이 되어야 하는데,

난 아무래도 팔불출인지 아이가 그저 좋다, 사랑스럽다.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따위는 구분해 낼 수도 없을 뿐더러,

다른이들에게 단점으로 보이는 것들이 내겐 그저 좋고 사랑스러운 장점으로 보이는 걸 어쩌겠는가 말이다.

 

사람이고 사물이고 간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을 때 하는 평가라야 의미가 있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생기부 작성을 선생님이 하지 못하고 학생한데 맡기는 것에 관한 적법성을 따지기 이전에,

생기부가 수능에 반영되는것이 타당하고 객관적인지,

제대로된 기준을 가지고 적용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고,

아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부모조차도 기재하기 어려운 그런 아이성격의 장ㆍ단점을,

물론 생기부야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기겠지만,

선생님의 입장에선 이래저래 곤란할 수도 있겠다.

 

물론 선생님의 관점은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라던 장금이의 그것처럼,

아이가 그저 좋고 사랑스러운 엄마의 관점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 참에 느끼고 깨닫게 되는 분명한 것은,

진정한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라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따위의 조건을 달지 않은 '그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사나 의료인이라면 차마 쓸 수 없는,

하지만 의학계에 웬만한 애정을 갖지 않고는 쓰기 힘든 책 한 권을 보았다.

'위험한 서양의학 모호한 동양의학'이라는 제목 아래,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요법, 대체의학 사이에서 흔들리는 환자들이 모르면 위험한 동양의학의 허와 실, 그리고 통합 이야기!'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띠지로 두르고 있는 책인데,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고 있는 정보의 보물창고라는 것이,

그리하여 이 책을 읽을 독자 층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요법, 대체의학'중 어느 하나에 종사하는 의사나 의료인의 입장이라면 이 정도의 객관성도 유지하기 힘들었을테고 당연히 한쪽으로 치유친 글이 되었을 것이다.

저자 김영수는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요법, 대체의학'중 어느 하나에 종사하는 의사나 의료인은 아니지만,

경제학 박사이며 금융전문가인 동시에, 국제적인 당뇨병 치료약 생산회사를 만든 사람이었다.

 

당연 사업수완이나 경제적 측면으로는 촉이 엄청 발달하였을테고,

거기다가 의학적 지식 내지는 의료상식에 대해서 갖는 내공은,

겸손하게 의학관련 고서적을 모으는게 취미라고 하였지만, 凡人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독자층이라는 타겟을 제대로 정하지 않은게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어찌보면 그의 제약회사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한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효과일지도 모른다 싶어졌고,

그럴 경우라면 구태여 독자층이라는 타겟 따위는 의미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암튼,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요법, 대체의학'을 '제도권 현대 서양의학','제도권 동양(한)의학','비제도권 민간의학'해가며 어느 하나 신뢰할 수 없도록 낱낱이 파헤치던 그는,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안수기도로 큰병을 고친적이 있다고 고백하는데,

그게 나같은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것은 신비스러움이라는 탈을 쓴,

'성령의 힘으로~'내지는 '믿습니다'수준의 기독교 환자라고 여겨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의학, 대체의학에 대한 책을 두루 섭렵한 그가 덧붙이는 코멘트를 통해서,

수많은 의학 관련 서적 중에서 쓸데없는 책을 걸러내고 읽어야 할 책만을 엄선해준다는 것이고,

이슈가 되는 사안과 연관시켜 개념정리를 쉽게 해놓아,

경제적 측면에서 내가 노력해야할 시간을 한참 줄여준 것을 들 수 있겠다.

 

내가 그의 이런 입장을 놓고,

기독교 환자의 그것 내지는 모든 것을 사업과 연관시킨 노이즈 마케팅이 아닌가 의심들게 한 저변에는,

제도권, 비제도권 해가며 과학적 근거를 중요시하던 그도,

 'ㆍㆍㆍㆍㆍㆍ성경이 침묵하는 문제는 그 침묵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고 본다'고 하는가 하면,

'솔직히 민간의료나 대체의학 쪽에서는 기독교 교리로 해당 의료분야를 정복하는 것이 오히려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59쪽)'고 하면서

'ㆍㆍㆍㆍㆍㆍ안수와 기도, 금식과 강도 높은 종교활동이 효과가 있는 몇몇 질병에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참으로 좋은 시도' 라고 하고 있는데,

'안수와 기도, 금식과 강도 높은 종교활동' 따위가 과학적으로 어떤 근거가 있는지 알 수 없겠기 때문이다.

 

위양성(병이 없는데도 있다고 판정하는 것. 그래서 필요치 않은 의험한 치료를 하게됨)과 위음성(병이 있는데도 없다고 판정하는 것. 그래서 필요한 치료를 하지 않게 됨) 검사의 설명은 충분히 필요한 것이지만,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방을 절제했다는 언급은,

그녀가 유명인이라는 걸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보기에 충분히 선동적인 내용이다.

 

더우기 충격적이었던건,

새로 개발되는 의료 용품이 효과적이고 안전할수록 환자를 빼앗길까봐 박해하고 따돌리며(100쪽),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적당히 좋아야 받아들인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기존 제도권, 제도권 제약회사두고 치사하고 더러운 암투라는 표현을 해가며 경제적 이윤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고 있는데,

그렇게 놓고 본다면 당뇨병 치료약 생산회사를 만든 그도 거기서 크게 비껴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암튼, 난 '안수와 기도, 금식과 강도 높은 종교활동'이 과학적 근거가 없고,

그리하여 제도권 현대의학과 상반된 개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현대의학의 문제점으로 사이비 종교성을 들고 있고, 아무리 좋은 학문ㆍ지식체계라도 사이비 종교성을 띠게되면 남용과 부조리가 발생한다(109쪽)고 하고 있다.

  

 

 

 

 

 

 

 

 

 

 

 

 

 

이쯤에서, 얼마전에 들었던 벙커강의 강신주의 '다상담'마지막편이 생각났다.

당근 책도 구입해주었다.

강신주의 다상담 강의가 마지막인데, 그렇게 쫑을 하게 된 원인을 두고 강신주는 우리들이 그를 사이비교주로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교나 신은 우리가 넘어졌을때 일으켜세워주고, 자신들의 어깨도 내어주면서 기대라고 한다고 한다.

반면, 철학과 인문학은 우리가 넘어졌을때 결코 일으켜세워주지 않는단다.

홀로 일어섰을때 훌훌 털고 재정비하여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단다.

그런데 우리가 철퍼덕 넘어져서는 손내밀고 일으켜세워주길 바라고,

자꾸만 그에게 기대고 의지하려고 하니까 그는 떠난다고 하였다.

그걸 책의 에필로그에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ㆍㆍㆍㆍㆍㆍ저는 철학자의 역할을 생각했습니다. 철학자란 끝내 당당해야 한다는, 산처럼 일체 감정의 동요 없이 여러분 곁에 있어야 하는 의무를 다시 생각했습니다.ㆍㆍㆍㆍㆍㆍ제가 <다상담>을 마무리하는 이유는 바로 여러분 때문이라고 나무랐습니다. 여러분들이 제게 너무 기대거나 혹은 저를 소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사실 그건 일정 정도 정확한 진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아무리 여러분의 감정을 건드리려고 해도, 여러분들은 이제 그냥 그걸 제 스타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ㆍㆍㆍㆍㆍㆍ저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저는 보고 싶었던 겁니다. 저는 제가 망가져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욕을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이 다시 스스로 당당한 삶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말입니다.ㆍㆍㆍㆍㆍㆍ그런데 불행히도 어느 순간 <다상담>이 일종의 관광 명소처럼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사랑을 먹고사는 연예인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512~513쪽)

 

앞의 '현대의학의 문제점이라고 한 사이비 종교성' 내용으로 돌아가서,

'거대제약회사'나 '위약효과'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왜 강신주가 생각났느냐 하면...

종교나 신은 손내밀어 일으켜주고 기댈 수 있는 어깨는 빌려주는 대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의지가 되도록 한다.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요법, 대체의학 등, 의학이라는 허울을 쓴 것도 마찬가지이다.

쾌유나 완치가 목적이 아닌 듯 보일때도 있다.

어떤 종류의 의학이든지 간에 환자가 있어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고,

안타깝게도 의료사업이라는 것 또한, 의료이기 이전에 경영 이윤을 발생시켜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어깨를 빌려주는 것은, 일단 내가 스스로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경영이윤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똑같이 경영이윤을 내야 하는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누가 더 도덕적이고,

누가 더 소박하며 욕심이 작고는, 중요하지 않다.

누워서 뱉은 침은 제 얼굴로 떨어진다.

 

암튼 의학을 비롯한 의료사업이 됐든, 종교가 됐든 심신이 안 아프고 괴롭지 않으면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갖고 갑론을박하기보다는,

여러종류의 의학나 종교, 신 따위는'아웃 오브 안중'일 수 있도록,

옆에서 자존감을 불어넣어주고,

그리하여 스스로 자아를 찾아 갈 수 있도록 부추기는 것이 어쩜 제대로 된 도움일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지금 이 순간 마음이 시키는대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렇게 살고 볼 일이다.

 

위의 것은 강신주의 '다상담 3권'의 사인, 아래는 '감정수업'의 사인.

사인본을 갖게 되어 영광이지만,

사인본의 글씨를 가만 들여다보면서 든 생각은 글씨는 참 못쓴다는 것이다.

글씨마저 잘 썼으면 어쩔뻔 했어, 완전 폭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텐데...

천만다행이다.

'때문에'와 '불구하고'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최면'이다라는 말이 다시 한번 적용되는 순간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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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12-30 11:32   좋아요 0 | URL
으으으 오늘도 역시나.. 님 서재에 왔다가 빈 손으로 그냥 가기는 너무 어렵단 말입니다. 흑흑
그나마 다행은 강신주의 다상담 1권을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보았다는 사실!! 흐흣

양철나무꾼님 해피 뉴 이어^^~~~

sslmo 2014-01-08 16:13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헤피 해피 뉴이어~~~^^
다상담 3권은 읽을만 해요.
아쉬운대로 팟캐스트로 들어도 좋고요.
잘 지내시죠?^__________^

숲노래 2013-12-30 17:57   좋아요 0 | URL
내가 공부할 몫을 누군가 줄여 주는 일이
그렇게까지 고마울 일이 없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도움이 될 일은 없지만,
어차피 우리 삶을 스스로 제대로 느끼자면
스스로 하나하나 겪어야 해요.

냄비를 태워 본 적이 없다면
탄맛이 무언지 제대로 알 길이 없을 테고,
김치를 손수 담근 적이 없다면
고춧가루가 눈에 들어갈 적에 얼마나 쓰린지 알 길이 없어요.

설거지조차 도와주지 않으면서
남녀평등 이론만 신나게 외친다 한들,
설거지가 무엇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숱한 집안일과 밥하기를 하나도
참답게 깨닫지 못하겠지요.

몸소 겪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아요.
이것저것 걸러서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sslmo 2014-01-08 16:18   좋아요 0 | URL
전 결혼할때까지 청소, 설거지는 고사하고 속옷조차 안 빨아봤어요.
할머니랑 고모들 밑에서 자랐는데,
늘상 하시는 말씀이 제가 부잣집 맏며느리 상이어서,
시집가서 사람두고 살면 손하나 까딱 안해도 된다, 가 그 이유였습니다.

전 제가 좋아서 부잣집은 아니고 맏며느리가 됐을 뿐이고,
남편은 같은 반찬이 두번 상에 올라도 안 먹는 귀한 입이더라는~--;

암튼 그래도 둘이 죽고못살아 결혼해서 지지고볶고 살다보니,
그런대로 살게 되더군요, ㅋ~.



북극곰 2013-12-31 10:17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이미 많이 지어놓으셨으니. ^^
새해 인사 꼭 하고 싶어서, 짧은 댓글만 남깁니다.

sslmo 2014-01-08 16:20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은 반달곰은 아니시니, 동면 모드는 아니실거고~.
아무래도 경황없고 바쁘기만 했던 1학년 학부모로서의 한해가 이렇게 지나가셨네요?
어때세요?
저는 돌이켜보니 왕 대견하고 대왕 뿌듯했었는데...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