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219/pimg_745144177974707.png)
여자의 솜씨라고 해도 좋다 싶은 이건 울아들의 작품되시겠다.
얼마전 날 추웠던 어느날 더이상 책은 보기 싫고 할일은 없어 심심해서 만들었단다.
난생 처음 만든거라는데, '마음씨, 맵씨, 솜씨' 3씨를 자랑하는 날 닮지 않았다고 할까봐 손끝이 야무지다.
이게 정체성이란 말로 대치 되어도 좋을까 싶지만,
어렸을때 난 이 야무진 솜씨를 자랑하는 무언가를 직업으로 갖게 될 줄 알았었지만,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고, 아직도 그게 회한으로 남는다.
책을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대충 골라 읽는 타입이기 때문에,
보통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영국 남자와 중국 여자의 러브 라인을 그린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을 읽은 다음엔,
영국 조각가 남자가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런던 디자인 산책'을 읽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독서는 말 그대로 내 기분 내키는 대로이기 때문에, 선택을 할때 신중하지도 않지만,
읽다가 별로이면 집어던지면 그만이었다.
근데, 근래에 읽은 책 두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것이,
끝까지 읽느라 인내심을 발휘하는 수고를 하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게,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게 일반적인 검증을 거친작품인 것은 맞지만,
다른 사람이 큰 감동을 느낀 책이라고 해서,
나도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것이다.
우선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같은 경우,
'밀란 쿤데라'라는 이름 만으로도 결의를 다지기 충분한데,
강신주의 감정수업, '자긍심'편에서 언급되어 읽어봐야 겠다 싶었었다.
강신주는 '자긍심'을 일컬어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이라고 한다.
솔직히 '정체성'의 개념조차 모호했던 난,
책을 읽고나니까 선명해지는게 아니라 더 모르겠었고,
그리하여 네이버를 찾아보니,
'어린이가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차별화되고 사회에서 취득하는 과정을 발전시키게 되는 '자아'의 의미를 말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래도 애매모호해서,
강신주가 언급한 자긍심이란 단어와 연결시켜 생각해보았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본인만의 고유한 개성을 얘기하는듯 한데,
그중 지속되어 자신의 것으로 습관화 돼고,
긍정적이어서 본인이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겠다.
'자긍심','자아존중감' 정도가 되면 뜻이 선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이렇게 무덤덤한걸,
처음 너무 어려웠거나 내 취향이 아니어서라고 생각했다.
'정체성'은 신프로이트주의 이론가인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언급한거라고 하는데,
프로이트 이론도 모르는 내게 신프로이트주의라니 머리에 쥐가 날 수밖에~--;
근데 곰곰 생각해 보니, 이 책이 별로였던 이유는 샹탈이라는 여자 때문이었다.
자신이 늙어 간다는 사실에 서글퍼하던 샹탈이라는 여자가, 어느 날 연하의 애인 장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 이상 날 쳐다보지 않아.'라고 하소연 하게 되고,
애인 장마르크는 그런 샹탈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시라노'라는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다는 내용인데,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때마다 놀라움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녀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점이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라고 한다.
어린 아들이 죽은 후 또다시 임신을 하라고 부추기는 시누이와 거기에 동조하는 남편에게 회의를 느껴 이혼하고,
일 잘하고 돈 잘버는 캐리어우먼이 된다.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와 같이 사는데, 잘은 모르지만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는 변변치 못한것 같다.
나이가 먹고 늙어가는 걸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을 가지고 서글퍼할 수는 있다.
평생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하여 남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내가 샹탈이 별로인건 이런 것들 때문이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라면,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이고 실천의 방법이지,
장마르크에게 그렇게 표현한 순간 또 다른 애인이 가능하다는 허용이 되어버리는게 아닌가 말이다.
같은 의미에서 '시라노'라는 익명에게서 받은 편지를 감추는 그 마음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들을 '정체성'으로 제한시켜 버린 작가도 별로가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또 한권, '올리버 키터리지'가 그렇다.
인간의 감정은 얼마나 세밀한가.
감정이 느끼는 파동은 얼마나 섬세할 수 있나?
인간과 인간이 내는 파동이 물결처럼 어우러져,
서로 간섭 현상을 일으키는 점이지대도 있겠지만,
어떤 파동에도 휩쓸리지 않는 소외지대도 있는 법.
이 책은 'ㄱ'님의 리뷰의 이 구절이 너무 좋아 외우다가, 내 편견이 잊혀질때쯤 되어 집어 들었다.
이 책 같은 경우는,
꽃이 피어 붉기는 잠깐이고 줄기에 이파리를 매단 채 견뎌내는 시간이 더 오래임을 조용히 얘기한다.
우리의 불편하고 추레한 현실 한쪽 자락을 건드려 감성을 자극하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인지는 모르겠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조각조각 단편의 삶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것은,
삶은 매순간 우리가 계획하거나 맘 먹은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거나 늙었거나, 나이를 먹었거나 덜 먹었거나, 에 관계없이,
우리가 매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거기 나오는 '샹탈'과 '장 마르크'로 돌아가,
내가 별로라고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이유는,
그들의 도덕성을 비난해서도 아니고,
사랑이 영원할거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순간에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순간조차도 서로를 비껴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현세의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라는 책이 궁금하다.
이 책엔 '해지기전 한걸만 더 걷다보면' 류의 글이 가득할 것 같다.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
이현세 지음 / 토네이도 /
2014년 2월
다시 처음의 만두 빚는 울아들로 돌아가서,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고 그것을 발휘하며 살 수 있으면 행복하겠지만,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것을 선택한다고 하여 삶도 2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를 할땐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서,
놀땐 노는데서,
만두를 빚을땐 만두를 이쁘게 빚는데서, 울아들은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샹탈은 그순간 뭇 남자들이 아닌 장 마르크가 쳐다봐주지 않는다면 서글퍼하면 그만인 것이고,
장 마르크 또한 샹탈을 여러번 다른 여자와 혼동한 과거를 놓고 그럴게 아니라,
그순간 샹탈을 헤아릴 수 없다면 그때 놀라면 된다.
흔히들, 몸이 나이를 먹지 마음이 나이가 먹지를 않는다는 말을 한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게 마련이고 언제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사는 인생이라면,
밥을 꼭꼭 씹어먹듯, 내 발로 한걸음씩 내딛듯,온 몸으로 통과하며 살고 볼 일이다.
이것은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 랑은 좀 다른 의미인데,
사람이 항상 전력질주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항상 최선을 다하고 살려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겠는가?
잘하고 못하고, 의 개념이 아니라,
나를 올곧이 내어맡기는 의미라고 해야할까?
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하기 싫어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지만, 그게 다 한 대상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관계가 정리되면 또 다른 관계를 시작할 수도 있고 밍기적거릴 수도 있고 그런 것.
정체성을 난 '자긍심' 내지는 '자아존중감' 정도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었다.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거기서 최선의 자아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고,
두번째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차선의 자아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이 얘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다' 정도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그게 사람이어도 좋고 사물이어도 좋다.
사랑이 영원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그 순간에는 대상에 집중하고 볼 일이다.
그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