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 엄 원 태 -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 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 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민물도요나 알락꼬리마도요는 갯벌에 미동도 없이 서 있다가, 염낭게나 두토막눈썹참갯지렁이가 구멍 밖으로 나올 때 날쌔게 잡아채 먹는다. 도요새들에겐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다만 마음의 어떤 집중이 필요하리라, 마음에도 정신적인 측면이란 게 있다면. 아마도 마음의 육체적 측면, 즉 말이 미처 되지 못한 생각은 거기도 고요와 침묵의 뒤범벅으로 붐빌 테지만.
주꾸미의 모성은 눈물겹다. 오십여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제 새끼들 곁을 지킨다. 다시 말하지만, 주꾸미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사람이 자기만의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40센티미터 정도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두었던 손을 내밀어 뻗치게 되는 그 거리를 40센티정도로 봤었던 것 같다.
상대를 향해 바짝 다가갔다가 물러나는 방법은 보슈가 이 작은 취조실에서 거의 1만 시간 가까이 경험을 쌓으며 터득한 기법이었다. 상대를 향해 다가가서, 상대가 자기만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40센티미터 남짓의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가 원하는 것을 얻은 뒤 뒤로 물러나는 것. 이건 잠재의식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경찰서 취조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부분 진술 내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진술의 뉘앙스를 해석하는 것이었다. 가끔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은 것들이 더 중요할 때도 있었다.
마이클 코넬리 '블랙에코' 중에서
마녀고양이 님의 '50cm떨어져서 함께 하기 연습'이란 페이퍼에 이런 댓글을 달았었다.
50센치미터는 넘 멀다, 공감의 교집합이 없잖아.
30센치는 안 되겠니?^^
하루종일 나를 붙잡은 생각이 있었는데,
사람과 사람은 어느 정도 이상 가까워질 수가 없다.
40센티미터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다.
그 선을 명확히 할 줄 알아야 우리는 서로에게 가까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럼, 내게 가까운 사람이란 누구일까?
내가 땅을 사도 배 아파하지 않는 사람, 아니 적어도 배 아픈 맘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같이 걱정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
나는 이 모든 것들에 우선하여, 내 영혼을 간섭하려 들지 않는 사람을 꼽고 싶다.
내 영혼이라는 것이 반짝거릴 수 있는 별이라면,
내 영혼이 반짝여 빛날 수 있도록 적당히 떨어져 적당한 밝기를 지니고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비밀은 털어놓기도 힘들지만, 지키기도 벅찬고로...
내 생각에, 가까운 사람과 평생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영원히 지켜야 할 비밀 따위는 절대로 누설하지 않는 일이다.
이런 논리로라면 비밀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게 그럴듯 하겠다,ㅋ~.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과는 그저 차나 한잔 마실 일이다.
이쯤 되면 외로움이나 고독이, 끈적거리는 애증보다 더 사치스러운 감정이 아닐까?
고상하게 '회사를 관두고'가 아니라, 회사를 때려치우고 '작은 북카페 하나' 했으면 좋겠다.
돌이켜 보면 어릴적 내 막연한 희망은 '작은 북카페'도 아니고, '헌책방'이나 '만화가게' 였지만 말이다.
엄원태의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를 읊조리고 앉았더니,
중2 되신 아드님(?)이 '갯벌에서 살아남기'라는 초딩용 만화책을 사달란다.
그렇담 난 또 가만 있을 수가 없지...'
대한민국 갯벌문화 사전'을 슬그머니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