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계속된 비에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져 있었으므로,
오랫만에 보는 파란 하늘에 감사해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둘 중 하나만 했어야 한다.
그렇게 계속 오락가락 할 거 였으면,파란 하늘 따위는 보여주지 말았어야 한다.
파란 하늘에 흰구름 두둥실,햇살도 잠시잠깐 내리 쬐다가는,
색깔도 채 바꾸지 못하고 쏟아 붓는 따위는 말이다.
하긴 보험회사 약관에도 보면 '천재지변'은 예외로 한다며 하늘은 슬쩍 비켜 가던데,
나도 이쯤에서 살짝 꼬리 내려 타협을 시도해야 하는건가?
난 그제부터 하늘을 향하여 궁시렁거리는 건 물론이고 삿대질도 적당히 해대고 있다.
뭐,내가 이러는 건 하늘 때문이다.
어쩌라고,
나더러 어쩌라고,
이렇게 며칠째 오락가락 하는 것인가 말이다,아흑~.
"이윤기별셋"
이라는 지인의 문자를 받기전까지는 말이다.
아니다,이런 농을 답장으로 보내기 전까지로 바꿔야겠다.
"아무리 책이 재미없어도 별 셋은 좀 심하삼.별넷이나 다섯은 되어주어야 하지 않겠음?...!"
곧 바로 전화가 왔다.
"야,니가 내게 이렇게 큰 기쁨을 줄 지 몰랐다~
그리스로마신화 쓰신 그 이윤기선생님 별세하셨다고...!"
"......"
"이제 알겠냐?"
그제서야 나는 마음 속의 큰별이 하나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쩜,내게 있어 이윤기님은 큰별 하나 이상이었다.
이분의 <대숲의 주인이 되다>를 읽고,인생의 2막를 꿈꾸어 왔었으니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분의 그리스 로마신화를 얘기하지만,
내게는 장르소설을 시작하게 해준<양들의 침묵>을 제일 앞에 놓고싶다.
기억에 남는 번역본은 <비밀의 계절>이었다.
음~,마지막으로 읽은건 <열개의 인디언 인형>이다.
하릴없이...여기저기 문자를 보내고,메일을 보내고,인사를 남기는 등 수선을 떤다.
여러종류의 대답이 돌아온다.
ㅎ님은,
"계속 회의요 사무실에도 못 들어가고 있어요"
하는 엉뚱한 대답을 보내왔고,
ㅁ은,
"...원래 골골거려여..이윤기님 별세 슬프네요.할일이 많은 분인데"
ㄱ은,
"아흑 슬프다.우린 그분 번역본 없어요."
법정스님때처럼 책으로 한몫 챙겨볼 게 없다는 뜻으로 난 해석함,ㅠ.ㅠ
ㅈ는,
"술먹고 싶음 얘기해여~"
ㅇ님만,
"이윤기 씨 나보다 겨우 두 살 더 많은데 그렇게 가시다니 정말 아깝네요. 무엇보다 그 동안 공부한 것이 너무 아까워요. 이제부터 내놓을 작품들이 하나같이 걸작들일 텐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과로할 일도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으니까 오래 오래 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도 널널하게 남아 돌아 매일 산으로 강으로 열심히 다니니까 지겨울 정도로 오래 살 것 같습니다. 하하."
하고 말랑거린다.
에피톤 프로젝트가 이런 노래도 불렀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나는 이 분의 대나무 숲이 아프다.
< 비밀의 계절>,개정판에 붙이는 말.
번역을 직업으로 삼은 지 삼십 년이 되었다.오래 번역을 해왔으니 번역서의 숫자도 당연히 꽤 된다.지금 서점에 나와 있는 번역서도 꽤 되고,세월에 파묻혀버린 번역서도 꽤 된다.세월,혹은 새 책들 홍수 속에 파묻혀버린 번역서들을 나는 애틋하게,미안하게 추억한다.나보다 나은 번역자를 만났더라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읽히는 생명체 노릇을 할 수 있을텐데,싶어서 퍽 미안하다.오래 전에 내가 낸 번역서를 다시 찍어내자는 제안을 더러 받는다.대개의 경우 나는 사양한다.지난날의 내 번역 솜씨에 대한 확신이 모자란다는 것이 첫 번째 까닭이다.확신이 모자라면 처음부터 생짜로 다시 번역하면 되겠지만,이런저런 약속에 발목을 붙잡혀 있는 나에게 이것이 현실적으로 늘 가능한 일은 아니다.이것이 두 번째 까닭이다.
'비밀의 계절‘을 다시 펴내자는 제안을 받은 것은 지난 해의 일이다.일언지하에 사양했다.지난날의 솜씨에 대한 모자라는 확신,그것을 벌충해야 할 엄청난 노동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편집자가 참 듣기 좋은 소리를 몇마디 했다.“저는 정말 감명깊게 읽은 매우 인상적인 소설이에요.재출간을 요구하는 독자들 성화도 만만치 않고요.그렇게 재출간을 사양만 하신다면 모든 책은 절판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게요?”
참 그렇다,싶었다.우리는 어떤 책이 타고난 절판의 운명에 순응하기만 해야 하는가?그 운명에 대한 심판을 독자 손에 다시 한번 붙일 수는 없는가?편집자의 꽤 일리 있는 꾐에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이소설의 무대는 미국 동부에 있는 햄든 대학교의고전학과다.고전학과 학생들답게 주인공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고전적이다.일상의 대화에 그리스어,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를 몇마디씩 섞는 것은 기본이다.번역할 당시 이 때문에 꽤 애를 먹었다.어찌어찌 음역하고 의역했지만 자신이 좀 없었다.내가 미국에서 이 책 번역하고 있을 당시 중학생이던 딸아이가 장성해서 지금 대학원에서 공교롭게도 서양고전학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덕분에 고전어 음역 및 의역을 깔끔하게 가다듬을 수 있었다.재출간을 사양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설득하느라고 편집자 오영나씨가 애를 많이 썼다.
덕분에 나는,이 경망스러운 인터넷 시대에 미국 동부 명문대학 고전학과의 분위기를 다시 숨쉬어보는 호사를 누렸다.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들 손에 이 책을 붙인다.
2007년 겨울 과천 소천재에서
이것을 복기하는 동안만 아프게 그를 애도하기로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