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페이지 클래식 365 - 오늘도 설레는 하루
이채훈 지음 / 사우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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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음악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산다.

딱히 듣고 싶은 것도 없는 데다 책 읽기로 보내는 시간이 많은 탓이다.

머리가 단순해서 책 읽을 때는 조용한 환경을 지향하는 사람이라

클래식마저도 책 읽기에서는 배제되기 일쑤다.

가끔 카페에서 책을 읽을 때는 예외인데

신기하게도 그때만큼은 내 머리도 약간의 소음을 받아주니 참 다행이다.

클래식을 좋아하지만 잘 모른다.

(잘 모른다고 해서 좋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래도 아는 곡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강석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거나

텔레비전 클래식 채널을 배경음악처럼 깔아두기도 한다.

알라딘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1일 1페이지 클래식 365>를 보게 되었다.

하루에 한 곡을 어떻게 들려준다는 거지?

음악에 얽힌 이야기만 하루 한 개씩 들려준다는 건가?

긴가민가 하면서도 새로운 자극이 될 것 같아 주문했다.

'클래식 칼럼니스트. 중학교 1학년 때 누나가 듣던 LP판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듣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클래식 음악과 '운명적'으로 만났다'는 작가(이채훈) 소개부터 웃음짓게 한다.

"TV 프로듀서로 30년 일한 사람이 쓴 책답다" 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재미있는 동영상 링크를 최대한 많이 넣었습니다. 베토벤과 슈타이벨트의 피아노 대결을 재연한 영상, 여자가 교회에서 노래하면 안 되던 시절을 풍자한 영상, 디즈니 <판타지아>에 나오는 기발한 애니메이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몸동작으로 표현한 베토벤 교향곡 등 이왕이면 재미있게 보면서 즐길 만한 음악 링크를 골랐습니다. --(중략) 이 책에 실린 곡들은 '한국 사람들이 사랑하는 클래식'을 우선 골라서 한결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들어가는 말 중에서



설렌다.

서두를 거 없이 그저 딱 한 쪽씩만 보면 되니 바쁜 아침에도 제격이다.

이걸 작년 겨울에 사두었으면 정확하게 1월1일부터 따라 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제야 시작이니 조금 늦었다.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지만)

그래서 1월 28일부터 시작하고 앞 부분은 시간 나는 대로 메꿀 참이다.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간단한 소개, 그리고 아래에 있는 QR코드를 찍으면 해당 영상을 볼 수 있다.

예전 같으면 CD를 부록으로 주거나 했을 텐데. 세상 참 좋아졌네!



쌀쌀한 아침에 딱 맞는 선곡이다.

한 번, 또 한 번 듣는다.

올해는 이 책으로 하여 내 귀가 호사를 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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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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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글, 문학동네 펴냄


어릴 때 먹을 게 생기면 늘 똑같이 나눠 받고는 아까운 마음에 한 번에 먹어버리지도 못하고 각자 나름의 보관소에 넣어두곤 했다. 그러다 꺼내보면 끈적이는 사탕류들은 개미들이 이미 점령을 했거나, 과자는 눅눅한 채 곰팡이가 피어있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와 같은 짓을 했다. 한 장 한 장 줄어드는 게 아까워서, 급히 읽어버리는 게 너무 아쉬워서 읽다가 덮어두고 읽다가 덮어두고 했더니 다 읽는 데 열흘이나 걸렸다.

우리에게 백석으로 알려진, 시인 기행.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그가 시를 쓰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1957년부터 1963년을 (‘당신, 이미 죽은 사람. 그 겨울의 골짝에서 당신도 얼어붙고 당신의 노래도 얼어붙었으니까. (213쪽)’.) 병원에서 만난 중국인이 노래를 부르다가 했던 이 말처럼 그가 살았던 얼어붙은 일곱 해를, 작가는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재현해놓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246쪽) 이렇게 작가가 밝힌 것처럼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생생한 그 장면들 속에서 기행을 만나는 일은 반가웠으나 돌아오는 길은 씁쓸했다. 하여, 책장 속 깊이 잠자고 있던 그의 시집도 꺼내 읽을 수밖에.



쓸쓸한 길

거적장사 하나 산 뒤 옆 비탈을 오른다

아- 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산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간다

이스라치 전이드나 머루전이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목이 서러웁다

뜨물같이 흐린 날 동풍이 설렌다

*이스라치: 앵두

백석, 「쓸쓸한 길」, 『사슴』 중에서 45쪽

새 공화국의 젊은 시인들은 기행의 시가 낡은 미학적 잔재에 빠져 부르주아적 개인 취미로 흐른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기행에게 어렵게 쓰지 말라고, 개성을 발휘하지 말라고, 문체에 공을 들이지 말라고 충고했다. (163쪽)’ 이러니 쓸 수 없었을 가슴 아픈 일곱 해의 일들 뒤에 떠오른 시다. 그리고 사랑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기행에게 각별했던 란에 관한 다음 시도.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줏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백석,「통영」전문,『사슴』58쪽에서

그는 쓸 수밖에 없었고 비록 그것이‘아침이 되어 재를 치우느라고 난로 아래쪽의 재받이통을 꺼내자 타버린 종잇조각들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손끝으로 집어 들어 살펴보니 글자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가락으로 비비니 종이는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먼지처럼 흘러내렸다. (204쪽)’ 처럼 쓰고나서 태워버리는 한이 있어도 썼을 것이다. 전해지지 않는 시들은 그렇게 재로 변해버렸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힘든 그의 삶이 시를 쓰지 못하는 아픔으로 인해 더 힘들었을 테니.

‘살던 집도 불타버리고 빼곡히 꽂혀 있던 책이며 은은하게 풍기던 커피 향내 같은 것도 모두 사라지고, 아내와 어린것들과도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그는 문자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다. 그 문자들을 쓰거나 읽을 수 있어 그는 전쟁이 끝난 뒤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구원한 그 언어와 문자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기행은 궁금했다. (190쪽)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191쪽)’

백석의 시만큼이나 아름다운, 김연수의 문장들을 만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어디선가 흰 당나귀도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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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지음, 김현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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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글, 김현우 옮김, 창비 펴냄


‘오,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 너는 고요히 누워 있구나. (343쪽)’

채석장과 공영농장, 황무지와 저수지가 둘러싸인 영국 작은 마을에서 놀러 왔던 여자아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쇼였다. 나이는 열세 살. 마지막으로 눈에 띄었을 때는 후드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검은색 진, 캔버스화 차림이었다. 키는 152센티미터, 짙은 금발의 직모를 어깨까지 기르고 있다. (13쪽)’

사람들은 수색대를 꾸리고 아이를 찾아 나선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은 1년이, 그리고 계속 세월은 흐른다. 새로운 장(章)이 시작될 때마다 긴장감이 흐르고 모든 것이 사건의 단서처럼 보인다. 특수학교 학생인 앤드루도 수상하고 학교 관리인 존스도 수상하다. 심지어는 정육점을 경영하는 마틴일까 했다가 엉덩이가 불편한 윌슨이나 어쩌나 한 번씩 등장하는 리처드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진행되는 일상에 끈을 놓지 않는 긴장감이 흐른다. 누군가 아프고, 대학교 시험을 보고, 아기가 태어나고, 연애사건으로 시끄럽다가, 마을 연극이 무대에 오르고, 바위 위에서 길 잃은 양을 데려오고, 소 젖을 짜는가 하면,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를 산책시킨다. 저수지 수위가 높아지거나 발파된 채석장 이야기가 나오거나 개가 킁킁거리고 돌아다니는 등의 작은 암시들을 홀린 듯 따라가다 보면 ‘응, 이거 별일 아니야.’ 하며 어느새 훌쩍 다음 장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러다가 슬쩍 뿌린 미끼들을 발견했다.

‘캐시는 넬슨을 찾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녀석이 낡은 운동복이나 방한 조끼처럼 보이는, 바느질 자리가 터져 보충재가 삐져나온 진청색 옷가지를 물어뜯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넬슨을 말리고는, 다시 리처드를 따라잡았다. (164쪽)’

이렇게 언뜻 여자아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가 하면, 리가 엄마에게 하는 말 중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번엔 반대로 살아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이다.

‘나는 할 수 있어. 언덕에 굴이 아주 많아, 광산이나 그런 거. 거기 숨으면 돼. 밤에만 나와 음식을 구하면서 말이야. 매번

다른 곳으로 나오면 아무도 모를 거야. 원하면 그 밑에서 몇 년이라도 살 수 있어.’(329쪽)

이야기는 사라진 여자아이보다는 그런 일이 일어난 마을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시골 마을 변천사를 보는 느낌이 강하다. 짧게 짧게 장면이 계속 바뀌어 가는 연극을 한 편 본 느낌이 들기도 한다. 13년에 걸친 이야기인지라 대를 이어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 외우기도 버겁다.

여전히 모두들 그 아이에 대한 꿈을 꿨다. --(중략) 어스름 무렵에 황무지에서 아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부모에게 데려다주었다. 꿈속에서 여자아이의 부모는 감사하다고 짧게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중얼거렸다.(361~362쪽)

각자 바쁘게 자기 삶을 살지만 마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잊은 사람은 없다. 해결되기만을 바라며 부채를 짊어지듯 사건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이면 스물세 살이 됐을 것이다. 그녀가 너도밤나무를 오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기차역에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도롯가에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를 찾고 있었다, 모든 곳에서. 그녀가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고, 안전하게 차를 타고 떠났을 수도 있었다. 동굴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 부모들의 끔찍한 실수로 다쳤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떠나기로 선택했을 수도, 혹은 다른 선택은 없었을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알고 싶어했다.’ (295~296쪽)

아이를 잃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런 일이 일어난 마을을 들여다보는 현미경 쪽을 택했기 때문에 훨씬 읽기에 수월했다. 그러면서도 범인이 나타나기를 원하며 작은 암시에 수도 없이 매달린 것은 나 역시 마을 사람들처럼 그런 짐에서 놓여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허무함을 느끼며 책을 덮는데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죽음이 곁에 있어도, 아니 죽음이 곁에 있기 때문에 삶이 더 치열한 거야.’

사건이 해결되어 다리 뻗고 잘 수 있기를 희망하는 독자를 끝까지 긴장감으로 몰아넣는 작가를 만난 것도 처음이다. 그러면서도 작가가 일부러 함정을 판다거나 얕은 수를 쓰는 걸로 보이지 않으니 이것 또한 엄청난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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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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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작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게 좋다. 이 책 전반에 걸친 내용들이 작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루시아 벌린은 서부의 탄광촌과 칠레에서 보낸 10대 시절, 3번의 실패한 결혼, 알코올 중독, 버클리와 뉴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의 생활,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한 경험 등을 가져와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중략)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사 등의 일을 해서 네 아들을 부양하는 가운데 글을 썼으며 1994년에 콜로라도 대학교에 초청작가로 갔다가 부교수가 되어 6년 동안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중략) 말년에는 평생 시달리던 척추옆굽음증으로 허파에 천공이 생겨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았으며, 2004년 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했다. (책날개 작가 소개글 중에서)

작가는 평생 76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는데, 이 책에는 두 쪽도 안 되는 작품부터 60쪽이 넘는 작품까지 다양한 주제와 길이의 43편이 실려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엄청 횡재한 기분이 든다. 소설가 김연수는 '그동안 루시아 벌린을 몰랐다고 해도 괜찮다.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며 읽기를 권유하고 (책 띠지에 떡허니 붙어 있는 이 문장이 얼마나 가슴 설레게 만들었는지! 김연수라면 내가 믿어본다.) 내게 이 책을 추천해준 분도 있기에 즐겁게 시작했다. 그러나, 600쪽이 넘는 단편집은 정말 버겁다. 읽고 여운을 느낄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한 편 읽고 놔두고 한 편 읽고 놔두고..의 독서는 성질 급한 내게 어림도 없는 소리니 그저 다음 작품을 향하여 허겁지겁 달려들고 힘겨워하는 걸 되풀이하는 수밖에.

부재, 알콜 중독, 마약 중독, 지옥 같은 집, 지옥 같은 학교, 칠레와 멕시코, 교도소, 범죄, 불행, 스친 인연 등은 이 책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기운들이다. 이런 것들에 잠식 당하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중간중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그나마 버틸 수 있다. 예컨대, <친구>라는 작품은 여든 살과 여든아홉의 부부를 우연히 알게 된 주인공이 그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해 매번 시간이 없음에도 찾아가서 그들의 벗이 되어 주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부부가 주인공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뭉클하게 올라오는 감동이 있다. 또 하나는 <애도>. 죽은 사람들의 집을 청소해주는 주인공과 죽은 이의 물건을 서로 나눠가지면서 추억을 공유하는 유가족들의 이야기인데 담담하게 끌어가는 솜씨가 예술이다.

단편이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 어느 순간 앞서 나왔던 주인공들이 다시 일어나 그 뒷 이야기를 펼쳐보이는 경우들도 있고, 작가 자신의 이야기들이 버무려져 있는 작품들도 많아 보인다. 병원에서 간호보조사로 근무하며 일어난 일을 다룬 것 중에는 애인을 따라 미국으로 오게 된 젊은 엄마가 아기를 잃게 되는 이야기인 <내아기>가 제일 좋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대부분 작품 속 마약 중독이나 알콜 중독은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서 그런가 쉽게 동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중에도 유독 반가운 지명 하나 '지와타네호'. 영화 <쇼생크탈출>에서 앤디 듀플레인이 탈출하여 머물겠노라 했던 곳이다. 왜 이렇게 낯익을까를 한참 생각하다가 기억 저편에서 반짝 하고 떠올랐을 때 어찌나 기뻤던지.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건 아닌데 그저 지명이 너무 반가워서 영화 생각을 한참 했다.

누군가 표제작인 <청소부 매뉴얼>을 두 번 이상 읽을 것을 권하여서 나도 그렇게 했다. 다시 읽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비로소 '천천히'가 가능해졌고 그런 속도로 인해 작품이 온전히 들어왔다. 이것 말고도 볼 때마다 괜찮았던 작품들을 표시해두었으니 다음에 하나씩 골라가며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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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멧
피오나 모즐리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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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들을 만나면 일단 부러워서 마음이 쪼그라든다. 스물아홉 살에 쓴 데뷔작으로 맨부커상(명칭이 부커상으로 다시 바뀌었다는데 출판사는 알고 쓴 거겠지?)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란다. 세상에! 얼마나 잘 썼길래 데뷔작으로 그랬다는 거야, 응? 시기와 질투어린 시선으로 책을 펴니 이런 안내판이 보인다.

"엘멧은 영국 최후의 독립 켈트 왕국으로, 본래는 요크의 골짜기에 펼쳐져 있었다……17세기에 들어서도, 빙하작용으로 형성된 황무지 아래에 위치한 이 좁다란 골짜기의 바닥과 양쪽의 뱃전은 여전히 '불모지'였고 법망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의 은신처였다."

『엘멧의 잔해』, 테드 휴스

이 엘멧이 나중에는 요크셔의 웨스트 라이딩에 편입 되었고, 어린 시절을 요크에서 보낸 작가는 런던에 살던 시절, 부모님을 뵈려고 요크에 다녀오는 기차 안에서 첫 문장이 떠올랐고 ('나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일까, '우리는 여름에 그곳에 도착했다.'일까?)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단다.

이 책은 두 장면이 엇갈리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나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로 시작되는 부분은 주인공인 내가 현재 겪고 있는 일을 보여주고, '우리는 여름에 그곳에 도착했다'로 시작되는 부분은 주인공 가족이 엘멧에 도착한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이곳과 같지만 좀더 남쪽에 있는 땅에 대한, 좀더 앞선 다른 시간에 대한 추억에 젖는다. 집, 가족, 운명의 변화와 반전,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에 대한 추억에도 젖는다.' (12쪽) )보여준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막 열네 살이 된 주인공과 열다섯인 된 누나 캐시, 그리고 무둑뚝하고 거인 같은 외모에 엄청난 힘을 가진 아빠는 숲속에 집을 짓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산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사냥을 하고, 나무를 심고 채소를 길러 먹으며 이웃에 사는 비비안의 집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학교 공부를 대신하면서.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행복은 근처 대부분의 땅을 소유한 프라이스로 인해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싸움을 잘 하는 아빠로부터. '아빠에게 싸움은 고래가 튀어오르는 것과 같은 거야. 단지 더 잔혹할 뿐이지, 훨씬 더. 게다가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야. 동물과 물질의 문제가 아니야. 다른 동물이 연루되어 있어. 다른 인간이. 하지만 그래도 똑같아, 그게 너희 아빠의 욕구를 해소해줘.' (95쪽) 비비안의 이 말처럼 아빠는 폭력적인 무언가를 갈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성향으로 인해 프라이스 밑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다가 엄마를 만나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내기 시합에 참여해 돈을 벌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그 능력으로 인해 프라이스는 아빠에게 내기 시합에 참여할 것을, 그러지 않으면 집을 빼앗겠노라 한다.

아이들이 숲속 집에서 살기를 원했던 아빠는 시합에 참가하고 어렵게 이겨서 집의 소유권을 되찾게 되지만 그것도 잠시, 프라이스 아들의 죽음으로 가족에겐 또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가진 자의 횡포와 없는 자들의 안간힘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고 정의가 이기는 일은 드물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은 늘 씁쓸하다.

' 다만 살아 숨쉬는 땅을, 변화하고 요동치고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드는 땅을 사람이 종이 한 장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게, 그리고 그 사람이 그 땅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혹은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는 것도 가능하다는 게, 그 모든 것이 종이 한 장에 달렸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는 거다.' (194쪽)

그러니, 빈부격차를 없애 완전한 평등 세계로 가겠다는 공산주의에 혹했던 사람들에게 누가 잘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론상으로는 그보다 완벽한 세계가 없을 테니 말이다. 모든 것은 사람들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프라이스가 더 많은 땅을, 더 많은 돈을 탐내지 않았다면 그 가족은 셋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고, 프라이스의 아들이 캐시의 아름다움을 탐내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흡인력이 좋은 작품은 잘 읽히는 데도 한 번에 읽기가 싫다. 너무 빨리 읽어버리는 게 아쉬워서 중간에 일부러 다른 일을 한답시고 멈췄는데 그 시간에도 책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다 읽은 다음에는 매캐한 연기와 그을음이 따라다니고 그럴 수 없을 걸 알면서도 대니가 캐시를 만날 수 있기를 빌었다. 작가의 다음 책을 기다리는 것도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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