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과 크레테 -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가 쓴 차모니아의 동화
발터 뫼르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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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엔젤과 크레테 Ensel und Krete

◎ 지은이 : 발터 뫼르스 Walter Moers

◎ 옮긴이 : 전은경

◎ 펴낸곳 : 들녘

◎ 2009년 8월 21일 초판2쇄, 304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헌 책방 구석에서 눈에 띈 책이다. 대놓고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을 보면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뒤틀었을지가 상당히 궁금해서 집어들었고, 뒤이어 마주한 첫 장에서 기대감은 최대치로 증폭되었다. 나는 이렇게 태연자약한 얼굴로 시치미를 뚝 떼는 걸 좋아한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읽었다고 생각했으나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을 착각한 거였다. 난 당신을 처음 봅니다. 발터!)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가 쓴 차모니아의 동화'

발터 뫼르스가 차모니아어를 번역하고 삽화를 그렸으며,

저자의 약력을 첨부했다. 압둘 나흐티갈러 교수의 『차모니아와 그 인근 지역의 기적과 존재, 현상에 관한 해설 사전』을

인용하여 각주를 붙였다.

삽화도 꽤 여러 장이 나오는데 그림 솜씨가 상당하다.


272쪽. 이 글을 쓴 작가라고 알려진 힐데군스트.

엔젤과 크레테. 52쪽.

엔젤과 크레테 폰 하헨은 페른하힝엔에서 온 오누이로 8과 4분의 1의 나이를 먹은 쌍둥이다. 이들 종족은 차모니아 남서부에 사는 작은 난쟁이로 평화를 사랑하고 온순한 특성을 가진 페른하엔이다. 2주째 큰숲에 머물고 있는데 나무 딸기를 찾으러 다니다 지겨워지자 엔젤이 '진짜 숲'에 가자고 한다. 길을 잃으면 어떡하냐는 크레테의 말에 나무딸기를 던져놓으면 된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 그러나, 나무딸기는 몽땅 나선형드릴 모양 머리를 가진 땅꼬마도깨비가 가져가버려 그들은 결국 큰숲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내 이름은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다. 아마 여러 번 들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쩌면 차모니아의 초등학교에서 내가 쓴 '핀스터베르크 구더기'를 편도선이 타버릴 정도로 외워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여러분은 내가 개발하고 '미텐메츠식 여담'이라고 이름 붙인, 완전히 새로운 문학적 서술 기교의 한복판으로 이미 들어와 있다. 이 서술방식은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기분에 따라 원하는 곳마다 주석을 달거나 교훈을 하거나 불평을 하며 끼어들 수 있게 한다.' (38쪽)

이 부분에 이르러 내가 무릎을 치며 낄낄대고 웃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이런 식으로 자칭 '힐데군스트'는 이야기를 진행하다 말고 수다 떨기를 밥먹듯 해서, 이야기 끊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내 속을 터뜨리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웃게 만들었다. 그중에 특히 이 부분!

-그러나 문학평론가들은 다르다. 이들은 대부분 뜻을 이루지 못한 작가들이다. 서랍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실패한 소설이나 거부당한 시들에 대한 복수를 성공을 거두는 동료들에게 하려고 한다. 수프에 혹시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살피느라 식사를 전혀 즐길 수 없는, 불쾌하고 까다로운 패거리다. 배설물을 삼키고 식물스컹크 분비물 냄새를 맡는 배수구의 주민이다. 그렇다. 라프탄테델 라투다, 바로 너 말이다!' (98쪽)

평소에 문학평론가들에게 느낀 불만을 이렇게 터뜨리는 작가가 너무 귀엽지 않은가. 아무튼 엔젤과 크레테는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풀과 나무, 동물들을 만나고 겁에 질려 도망가고, 풀 늪에 빠져 죽을 뻔했다.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다가 위장한 마녀의 집 (집 자체가 마녀인)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먹지만 결국 집이 삼켜지고 위액이 차오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진짜로 커다랗게 '끝'이라고 써있다.

그러나, 행복한 결말을 부여한다는 가정 아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어 이번엔 그들 앞에 구원군이 도착했다. 마녀버섯을 먹은 후 머리가 이상해진 보리스라는 알록곰이다. 숲의 모든 동물들과 대화가 가능한 보리스는 그들의 힘을 빌어 마녀를 퇴치하려 했으나 결국 집이 가라앉는다. 간신히 둘은 빠져나오고 혀가 있는 난초의 도움으로 보리스까지도 빠져나온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것으로 진짜 이야기는 끝이다. 뒤에는 작가연보보다 훨씬 자세한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반생(半生)전기'가 부록처럼 붙어있다.

무엇보다,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차모니아의 세계를 창조해낸 것도 그렇지만 삼각형 나무줄기, 피처럼 붉거나 맹수가죽과 같은 얼룩이 있는 나무껍질들, 산호 또는 내장처럼 보이는 나무들과 눈이 코끼리 코처럼 생긴 무당벌레, 솜 같은 안개벌레, 이빨은 나무이며 길쭉한 초록색 잎사귀 혀가 있는 직립보행이 가능한 이파리늑대, 풀 속에 사는 곰치, 입이 있고 꽃받침 두 개가 눈꺼풀처럼 올라가 눈이 되는 난초 등등은 정말 기발하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차용해 온 것은 빵 부스러기 (나무딸기), 오누이라는 것, 마녀의 집에 들어가는 정도일 뿐,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은 언제나 존경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점을 주지 못한 것은 이름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들 투성이라 술술 읽히기보다는 덜컹거리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4부작을 다 읽고 나면 그것들에 익숙해져서 이 평점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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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 파드득나물밥과 도라지꽃
구효서 지음 / 해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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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 지은이 : 구효서

◎ 펴낸곳 : 해냄

◎ 2021년 5월 25일 1판 1쇄, 225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한의원에 갔다가 내 방앗간인 알라딘에 들러 오랜만에 한국작가 코너에 가서 섰다. 휘휘 둘러보는데 낯익은 이름과 낯선 제목의 조합이 눈을 잡아끌었다. 오, 신작이네?

제목이 '요'로 끝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하여튼 순해 보일 것 같아서. 열 권 정도 쓰고 싶었다.

요요거리며 자꾸 나올 것 같아서.

계속 이어 쓸 수 있다면 요요소설이라고 해야겠다.

마침 그런 한자도 있으니까. 樂樂.

어쨌거나 특별시나 광역시 같은 튼 도시는 이야기에서

빼기로 했다. 어수선해질 것 같아서.

한갓진 곳에는 꼭 맛있는 것과 예쁜 것이 숨어 있기

마련이어서 음식과 꽃 이름을 부제로 달기로 했다.

모쪼록 요요하시길.

작가의 말 전문.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말랑말랑한 글을 쓰던 사람이었나? 기억에 가물거리는 그의 작품들. 어쨌거나 작가의 말을 읽다 저절로 기분이 좋아져서 이 책과 발터 뫼르스의 작품 『엔젤과 크레테』 두 권을 들고 내려왔는데,이 책들을 고른 건 순전히 전철 안에서 읽던 벵하민 라바투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때문이다. 이건 뭐지..하는 기분. 소설인 듯 보고서인 듯 역사기록물인 듯 영역을 잘 모르겠는 그 책 때문이다. 세상 맵고 짠 음식을 먹다보면 건강한 우유 한 잔이나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을 먹어줘야 하는 법이다.

배경은 강원도 청평, '오베르주 애비로드'라는 숙박시설이다. 유리 엄마 난주 씨가 운영하는 이곳에 '여섯 살이 될락말락한 다섯 살'인 유리와 그곳의 단골인 서령과 서령의 남편인 '아나운서 비슷한' 이륙, 미국에서 온 브루스와 그의 한국인 아내 정자가 모였다.

난주가 만들어내는 '돼지고기활활두루치기' 나 '곰취막뜯어먹은닭찜' 같은 음식을 마주 하며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 편의 동화같기도 하다. 여섯 살치고는 너무 어른스러운(자신의 경험담이라며 첫소개팅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파두를 부르기도 한다.) 유리가 조금 거슬렸는데 나중에 유리의 친 엄마를 등장시키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이해는 됐어도 너무 지나친 설정이라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한국전에 참전해 '파드득나물 밥과 조껍데기 막걸리'를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받았지만 동료의 오발로 인해 마을 사람들을 죽인 이력이 있던 브루스는 용서를 빌 기회를 갖게 되고, 서령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륙과의 이별을 잘 받아들인다. 유리는 친 엄마와 함께 포르투갈로 떠나고 난주는 서령과 함께 그곳에 남았다.

끝까지 담담한 척 하던 난주가 눈물을 흘렸을 때는 나도 따라 울었지만 이야기는 딱 일본이 잘 만들어내는 따뜻한 영화와 비슷했다. 쉽게 읽히는 책이고 재미도 있고 약간의 감동도 있지만 나는 좀 더 묵직한 울림을 기대했기에 아쉬웠다.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도 달기만 한 것보다는 적당히 다른 맛이 섞여 있어야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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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수현 옮김, 해도연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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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Bewilderment

◎ 지은이 : 리처드 파워스 Richard Powers

◎ 옮긴이 : 이수현

◎ 펴낸곳 : (주)알에이치코리아

◎ 2022년 6월 17일 1판 2쇄, 399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요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인기몰이 중이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 이야기인데, 뻔한 연애 이야기나 재벌가 이야기에 질려버린 우리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왠지 현실에서 보기 힘든 순수한 어른과 '권선징악'이 실현되는 걸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드라마다.

<굿 닥터>에 이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거치면서 자폐 스펙트럼(그중 서번트 신드롬)을 가진 인물에 게 관심이 쏠린 것이 사실이다. 로빈 또한 어떤 면에서는 그런 인물로 보이기는 한다. '딱 맞춘 것처럼 유행을 잘도 알고 이 책이 내게 왔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특별하며 갓 아홉 살이 된, 이 세상과 잘 맞지 않지만, 영화는 한 번만 봐도 모든 장면을 읊을수 있고, 기억하는 내용을 끝없이 되풀이해서 말하고, 세세한 부분을 반복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책을 한 권 다 읽으면 바로 처음부터 다시 읽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자제력을 잃고 폭발했지만 그만큼 쉽게 기쁨에 사로잡히는 로빈과 아내를 잃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우주생물학자 시오가 주인공이다.

NGO활동가답게 주머니쥐를 피하려다 사고로 죽은 아내이자 엄마인 얼리사를 그리워하는 두 사람. 로빈은 학교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아빠인 시오도 로빈을 어떻게 다룰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아이는 엄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엄마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부쩍 생명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

천문학과 유년기는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어마어마한 거리를 가로지르는 항해다. 둘 다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실들을 찾으려 한다. 둘 다 엉뚱한 이론을 만들고 가능성이 무한히

증식하도록 놓아둔다. 둘 다 몇 주마다 초라해진다.

둘 다 모르기 때문에 움직인다. 둘 다 시간 때문에 혼란해진다. 둘 다 언제까지나 시작점이다.

99쪽

엄마를 꼭 닮아 동물들이, 식물들이, 곤충들이 사라지는 걸 가슴 아파하는 아이. 동물을 사랑해서 채식을 선택한 아이 로빈을 다루는 건 쉽지 않다.

결국 시오는 로빈의 사회화를 위해 약물 대신 아내의 옛 애인이었던 마틴에게 부탁해 디코디드 뉴로피드백이라는 기술을 사용하기로 한다. 타인의 감정 지문을 그대로 경험하도록 훈련하는 기술인데, 덕분에 로빈은 마틴이 간직하고 있었던 엄마 얼리사의 감정지문을 경험한다. 로빈은 그 과정을 통해 다른 아이로 거듭난다. 공감능력과 지적 능력까지 향상되고 그림 그리는 실력까지 일취월장. 다른사람과의 교류도 힘들어하지 않은 아이가 되지만 시오는 왠지 아들을 잃은 것만 같다.

놀라운 효과를 연구 성과로 발표하는 마틴. 그로 인해 로빈은 유명세까지 타게 된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다. -멕시코만 도처에 일어난 여름 홍수가 3000만 명이 마시는 식수를 오염시키고, 남부에 간염과 살모넬라균을 퍼뜨렸다. 열기가 플레인스 지역을 괴롭혔고 서부에서는 노인들이 죽어 갔다. 샌버너디노에서 화재가 났고, 나중에는 카슨시티에도 번졌다. 플레인스에 속한 주마다 무장 군인들이 시내를 순찰하며 불특정 외국인 침입자들을 찾고 있다는 X가설이라는 게 돌았다. 한편, 신종 검은 녹병 때문에 중국의 황토 고원 전역에서 밀농사가 실패했다. 7월 하순에는 댈러스에서 있었던 '트루 아메리카' 시위가 인종 폭동으로 번졌다. (221쪽)

산불이 난다고 국유림을 베어버린다는 대통령. 독재자가 따로 없다. 결국 시오의 망원경 계획도 날아가고 마틴의 연구도 중단되자 치료를 계속 받을 수 없게 된 로빈은 퇴행한다. 광우병으로 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벽에 머리를 찧으며 함께 고통을 받는 로빈.

아들을 위해 스모키산맥으로 함께 여행을 떠난 시오는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탑을 강에 사는 생물들을 위해 무너뜨린다. 로빈은 개울 한가운데 쌓인 돌탑마저 없애고 싶어했으나 시오는 이제 막 눈이 녹은 참이라 물이 너무 차가우니 나중에 다시 와서 없애자고 말린다. 그러나 한밤중에 일어난 로빈이 기어이 그 돌탑을 무너뜨리려고 혼자 물에 들어갔다가 죽고만다. 무기력해진 시오에게 마틴은 위험을 감수하며 로빈이 기록한 두뇌 지문에 접속하게 해준다. 마침내 아들과 아들의 안에 남아있던 아내 얼리사까지 만난 시오는 행복하다.

'땅의 표면은 부드러워서 사람이 밟으면 자국이 나기 마련이다. 마음이 여행하는 길도 그러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중에서. (150쪽) 소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인상이 이 문장과 닮았다. 로빈과 시오의 일상, 시오가 로빈에게 들려주는 다른 행성 이야기가 오가는데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구분이 어렵다. 이런 모호함은 로빈이 얼리사의 감정 지문을 따라 가는 것과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음을 여행하는 길이라는 표현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남들은 알아듣기 어려운 로빈의 말은 작은 따옴표로, 나머지 인물들의 말은 큰 따옴표로 표기를 해둔 것도 특별했다. 처음에는 로빈이 수어로 말을 하나보다, 했으나 나중엔 이것이 식물이나 동물들과 교감하듯 텔레파시로 생각을 전달한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옮긴이 이수현의 이력을 보다 내가 엄청 좋아하는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로 번역을 시작했대서 반갑고, 이 사람이 번역한 걸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캐넌의 세계』, 『멋진 징조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를 번역했대서 또 반가웠다.

'그래서 다들 멸종해 버리는 거야. 모두가 나중에 해결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124쪽) 학교에 가는 대신 집에서 멸종 동물 그림을 그리기 원하는 로빈이 반대하는 아빠에게 던진 말이다.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에 따른 이 비극을 이야기로만 읽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이 되어 닥칠 날도 멀지 않았을 것이다. 로빈의 말처럼 나중에 해결하려고 하다보면 늦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너무나 아름다운 방식으로 부족하죠.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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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하이웨이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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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링컨 하이웨이 THE LINCOLN HIGHWAY

◎ 지은이 : 에이모 토울스 Amor Towles

◎ 옮긴이 : 서창렬

◎ 펴낸곳 : 현대문학

◎ 2022년 7월 4일 초판 1쇄, 816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이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일까? 『모스크바의 신사』도 700쪽이 넘는 분량을 흥미진진하게 끌어가서 감탄했건만 이 책은 800쪽이 넘는다. 타고난 이야기꾼!! 어젯밤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12시가 넘어 잠을 자느라 (안 그랬다가는 가뜩이나 습도 높은, 기분 나쁜 여름 날씨에 잡혀 하루종일 짜증이 솟구치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게 뻔해서) 책장을 덮어야 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이야기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듯 막힘이 없다. 링컨 하이웨이.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고속도로를 달린다면 이런 기분이려나? (물론 지금 말고 1950년대 차가 별로 없을 때)



1954년 6월 12일 설라이나 소년원에서 18개월 형을 받은 에밋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좀 더 일찍 출소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농장에 빚만 잔뜩 진 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남은 건 여덟살인 동생 빌리와 그가 목수 보조일을 하며 장만한 1948년형 스튜드베이커 랜드쿠르저 한 대.

아버지를 조롱하는 말에 욱해서 날린 주먹이 친구였던 지미를 넘어지게 했고 결국 그가 운 나쁘게 콘크리트블록에 머리를 부딪혀 죽었기에, 그곳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던 에밋은 텍사스로 간 뒤 집을 헐 값에 사서 조금씩 고친 다음 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동생 빌리는 그들이 어릴 때 집을 나간 엄마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가야 한다고 고집한다. 엄마가 보내주었던 엽서 몇 장을 증거로 내밀면서 불꽃놀이를 좋아했던 엄마가 자신들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7월 4일에 그곳에 도착하면 틀림없이 엄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이곳은 샌프란시스코 링컨 공원에 있는 리전오브아너 미술관이야. 매년 7월 4일에 전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불꽃놀이가 여기서 펼쳐진단다!" (44쪽)

도서관에서 인구수를 조사해본 에밋은 텍사스보다 캘리포니아가 좀 더 큰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자 동생의 계획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에 설라이나 소년원에서 만났던 더치스와 울리가 에밋을 데려다준 원장의 차에 몰래 동승해 에밋 앞에 나타나면서 방해자로 등장한다.

더치스, 울리, 빌리, 에밋, 그리고 빌리를 돌봐주었던 에밋의 친구 샐리, 빌리가 인생의 지침서처럼 생각해서 소중히 들고 다니는 책 <애버커스 애버네이스 교수의 영웅, 모험가 및 다른 용감한 여행자 개요서>의 저자 애버커스, 무임승차한 화물열차에서 만난 율리시스와 빌리의 돈을 갈취하려던 가짜 목사인 존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더치스와 샐리는 1인칭으로 서술되지만 나머지는 3인칭이라는 것인데, 작가의 말을 빌리면 더치스와 샐리는 '자아가 강하고 자기 목소리가 뚜렷한 사람'이라서 그렇단다. 열흘 동안 벌어진 일들을 그리면서 이야기는 거꾸로 10부터 시작해서 1로 끝난다.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만화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누군가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게 늘 그렇듯 이들도 순탄치 않다.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등장인물들의 개인사가 펼쳐지면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러나기에 그들을 성가시게 했던 더치스도 울리도 미워할 수가 없다.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현실에 없을 것 같은 캐릭터인 꼬마 빌리. 쉽게 사람들을 믿고,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으며, 따스함을 나눠주는 인물인 동시에 지도도 잘 보고 계산에도 밝다. 에밋의 불끈하는 성격을 누를 줄 아는 것도 빌리고, 금고의 비밀번호를 단 여섯 번만에 알아내는 것도 빌리다. 이 사랑스러운 역을 누구한테 줄 수 있으려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제일 먼저 달려갈 테다!)

그렇게 카운트다운이 1로 끝난 6월 21일에야 비로소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두 형제. 딱 중간 지점인 네브래스카에 있는 에밋의 집에서 출발하면 금방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으련만, 더치스와 울리가 등장하는 바람에 하이웨이의 시작점인 뉴욕 근처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작가는 결국 두 사람이 뉴욕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링컨 하이웨이 전 구간을 통과하도록 만들었다. 한 걸음씩 차분하게 내딛었을 때에야 마지막 발걸음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듯.

마지막 순간에 '남은 것은 침묵뿐'(햄릿의 마지막 말)인 사람도 생기지만 에밋과 빌리는 7월 4일이 되기 전 캘리포니아에 도착해 엄마를 만나 함께 불꽃놀이를 즐기길 바란다. 그리고 이제 막 쓰기 시작한 빌리의 모험담도 노트를 꽉 채우게 되기를. 그리고 지금 쓰고 있다던 작가의 신작을 하루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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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itecture of Happiness
알랭 드 보통 지음 / Hamish Hamilton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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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행복의 건축 The Architecture of Happiness

◎ 지은이 :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 옮긴이 : 정영목

◎ 펴낸곳 : 이레

◎ 2007년 5월 30일 초판 5쇄, 302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건축이라는 딱딱한 낱말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그것이 구체화되어 눈 앞에 나타났을 때는 호기심이 반짝인다. 저런 건물을 지은 이는 누구일까? 저기는 뭘 하는 곳일까? 저런 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지? 저런 기발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등등.

이 책은 요런 얕은 수준의 호기심을 넘어선다. '건축'에 관한 기록이자 보고서이며 명상록이다. 철학자답게 명쾌한 문장들이 많아 딱딱하게 굳은 내 뇌를 자꾸만 두드린 탓에, 읽으면서 어찌나 밑줄을 많이 그었는지 그것만 따로 기록했다가 너무 길어서 3분의 2는 지웠다.

-가장 고귀한 건축이 때로는 낮잠이나 아스피린이 주는 작은 위안에도 못 미칠 수 있다. ( 18쪽)

-아름다운 건축에는 백신이나 밥 한 그릇이 주는 것과 같은 명명백백한 이점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 우선순위에서 절대 맨 앞에 서지 못할 것이다. 혹독한 노력과 희생으로 인간이 만든 세계 전체가 산마르코 광장과 견줄 만하게 설계된다 해도, 우리가 여생을 빌라 로톤다나 글라스 하우스에서 보낼 수 있다 해도, 그래도 우리는 걸핏하면 언짢은 기분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19쪽)

빌라 로톤다, 136쪽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 사진이 가득하다.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부분들, 기둥이나 천장, 창문의 위치와 재료 등에 대해 자세히 다루면서도 볼 거리가 풍부해 이해가 쉽다.

복잡성과 결합된 질서가 주는 기쁨: 총동국, 베네치아, 1340~420년. 199쪽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 저널리즘 연구소, 206쪽

-르 코르뷔지에의 말에 따르면 집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더위, 추위, 비, 도둑, 호기심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켜주는 피난처. 2. 빛과 태양을 받아들이는 그릇. 3. 조리, 일, 개인생활에 적합한 몇 개의 작은 방." (61쪽)

-어떤 장소의 전망이 우리의 전망과 부합되고 또 그것을 정당화해준다면, 우리는 그곳을 ''이라는 말로 부르곤 한다. --(중략) 집은 공항이나 도서관일 수도 있고, 정원이나 도로변 식당일 수도 있다. --(중략)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집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의미의 집도 필요하다. 우리의 약한 면을 보상하기 위해서다. (111쪽)

-우리는 우리 곁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념하려고 무덤, 묘비, 영묘를 세우듯이, 우리 자신의 중요하지만 잘 빠져나가는 면을 기억하려고 건물을 짓고 장식한다. 우리 집안의 그림과 의자들은 신석기 시대의 거대한 무덤과 같다. 다만 우리 자신의 시대, 산 자들의 요구에 맞추어 줄여놓았을 뿐이다. 우리의 집안 설비들 역시 정체성의 기념물이다. (132쪽)

-아름다움은 성스러운 것의 한 조각이며, 그것을 보면 우리가 누릴 수 없는 삶에 대한 상실감과 갈망 때문에 슬퍼진다. 아름다운 대상에 새겨진 특질은 죄로 물든 세상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신의 특질이다.

(157쪽)

-우리가 아름다운 것들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우리 인생이 여러 가지 문제로 가장 심각할 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낙담한 순간들은 건축과 예술로 통하는 입구를 활짝 열어준다. 그러한 때에 그 이상적인 특질들에 대한 굶주림이 최고조에 이르기 때문이다. (158쪽)

-구조가 질서 있게 표현된 곳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를 삼킬 수밖에 없는 예측 불가능성을 길들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알 수 없기 때문에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미래를 휘어잡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193쪽)

볕이 가장 뜨거운 한낮에 산에 올랐다가 기진맥진하여 내려오는 길, 아파트에 가려져 있던 주택단지를 만났다. 하늘을 높게 이고 엎드려 단잠을 자듯 포근하게 자리잡은 집들을 보는 순간 뜨거운 볕을 피해 주차된 자동차 아래 다리 길게 뻗고 잠을 청하는 고양이가 생각났다. 나른한 평화라는 수식어와 함께.

어딜 둘러봐도 새로 지은 아파트가 위풍당당하게, 그러나 군복을 입고 20kg 군장을 메고 행군하려는 군인들처럼 뻣뻣하기만 할 뿐 눈 둘 곳 하나 없던 그곳에서 만난 주택단지는 신선했다. 비슷하기는 해도 서로 다른 모양과 재질, 다양한 색이 어우러지고 낮은 담장으로 인해 안이 훤히 들여다보여 친근함마저 들었다. 좁은 텃밭에 자라는 푸성귀까지 한 몫을 담당하니 찰나에 만나는 천국이 이곳이 아니면 어디랴.

-어떤 건물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살아 있는 형태일 경우에 우리가 좋아할 만한 특질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건축 작품에서 찾는 것은 결국 친구에게서 찾는 것과 그리 멀지 않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대상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다른 모습인 셈이다. (93쪽)

여행지에서 만났던 많은 건물들이 떠오른다. 그저 근사하다, 멋있다를 연발하며 지나쳤지만 앞으로의 여행에서 만나게 될 많은 건축물들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위대한 건축 작품은 우리에게 고요, 힘, 평정, 우아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이런 것들은 우리가 창조자로서나 관객으로서나 보통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예술작품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현혹하고 감동시킨다. (145쪽)' 라고 했던 작가의 말이 과연 진실인지도 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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