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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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작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게 좋다. 이 책 전반에 걸친 내용들이 작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루시아 벌린은 서부의 탄광촌과 칠레에서 보낸 10대 시절, 3번의 실패한 결혼, 알코올 중독, 버클리와 뉴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의 생활,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한 경험 등을 가져와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중략)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사 등의 일을 해서 네 아들을 부양하는 가운데 글을 썼으며 1994년에 콜로라도 대학교에 초청작가로 갔다가 부교수가 되어 6년 동안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중략) 말년에는 평생 시달리던 척추옆굽음증으로 허파에 천공이 생겨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았으며, 2004년 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했다. (책날개 작가 소개글 중에서)

작가는 평생 76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는데, 이 책에는 두 쪽도 안 되는 작품부터 60쪽이 넘는 작품까지 다양한 주제와 길이의 43편이 실려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엄청 횡재한 기분이 든다. 소설가 김연수는 '그동안 루시아 벌린을 몰랐다고 해도 괜찮다.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며 읽기를 권유하고 (책 띠지에 떡허니 붙어 있는 이 문장이 얼마나 가슴 설레게 만들었는지! 김연수라면 내가 믿어본다.) 내게 이 책을 추천해준 분도 있기에 즐겁게 시작했다. 그러나, 600쪽이 넘는 단편집은 정말 버겁다. 읽고 여운을 느낄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한 편 읽고 놔두고 한 편 읽고 놔두고..의 독서는 성질 급한 내게 어림도 없는 소리니 그저 다음 작품을 향하여 허겁지겁 달려들고 힘겨워하는 걸 되풀이하는 수밖에.

부재, 알콜 중독, 마약 중독, 지옥 같은 집, 지옥 같은 학교, 칠레와 멕시코, 교도소, 범죄, 불행, 스친 인연 등은 이 책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기운들이다. 이런 것들에 잠식 당하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중간중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그나마 버틸 수 있다. 예컨대, <친구>라는 작품은 여든 살과 여든아홉의 부부를 우연히 알게 된 주인공이 그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해 매번 시간이 없음에도 찾아가서 그들의 벗이 되어 주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부부가 주인공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뭉클하게 올라오는 감동이 있다. 또 하나는 <애도>. 죽은 사람들의 집을 청소해주는 주인공과 죽은 이의 물건을 서로 나눠가지면서 추억을 공유하는 유가족들의 이야기인데 담담하게 끌어가는 솜씨가 예술이다.

단편이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 어느 순간 앞서 나왔던 주인공들이 다시 일어나 그 뒷 이야기를 펼쳐보이는 경우들도 있고, 작가 자신의 이야기들이 버무려져 있는 작품들도 많아 보인다. 병원에서 간호보조사로 근무하며 일어난 일을 다룬 것 중에는 애인을 따라 미국으로 오게 된 젊은 엄마가 아기를 잃게 되는 이야기인 <내아기>가 제일 좋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대부분 작품 속 마약 중독이나 알콜 중독은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서 그런가 쉽게 동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중에도 유독 반가운 지명 하나 '지와타네호'. 영화 <쇼생크탈출>에서 앤디 듀플레인이 탈출하여 머물겠노라 했던 곳이다. 왜 이렇게 낯익을까를 한참 생각하다가 기억 저편에서 반짝 하고 떠올랐을 때 어찌나 기뻤던지.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건 아닌데 그저 지명이 너무 반가워서 영화 생각을 한참 했다.

누군가 표제작인 <청소부 매뉴얼>을 두 번 이상 읽을 것을 권하여서 나도 그렇게 했다. 다시 읽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비로소 '천천히'가 가능해졌고 그런 속도로 인해 작품이 온전히 들어왔다. 이것 말고도 볼 때마다 괜찮았던 작품들을 표시해두었으니 다음에 하나씩 골라가며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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