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멧
피오나 모즐리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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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들을 만나면 일단 부러워서 마음이 쪼그라든다. 스물아홉 살에 쓴 데뷔작으로 맨부커상(명칭이 부커상으로 다시 바뀌었다는데 출판사는 알고 쓴 거겠지?)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란다. 세상에! 얼마나 잘 썼길래 데뷔작으로 그랬다는 거야, 응? 시기와 질투어린 시선으로 책을 펴니 이런 안내판이 보인다.

"엘멧은 영국 최후의 독립 켈트 왕국으로, 본래는 요크의 골짜기에 펼쳐져 있었다……17세기에 들어서도, 빙하작용으로 형성된 황무지 아래에 위치한 이 좁다란 골짜기의 바닥과 양쪽의 뱃전은 여전히 '불모지'였고 법망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의 은신처였다."

『엘멧의 잔해』, 테드 휴스

이 엘멧이 나중에는 요크셔의 웨스트 라이딩에 편입 되었고, 어린 시절을 요크에서 보낸 작가는 런던에 살던 시절, 부모님을 뵈려고 요크에 다녀오는 기차 안에서 첫 문장이 떠올랐고 ('나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일까, '우리는 여름에 그곳에 도착했다.'일까?)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단다.

이 책은 두 장면이 엇갈리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나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로 시작되는 부분은 주인공인 내가 현재 겪고 있는 일을 보여주고, '우리는 여름에 그곳에 도착했다'로 시작되는 부분은 주인공 가족이 엘멧에 도착한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이곳과 같지만 좀더 남쪽에 있는 땅에 대한, 좀더 앞선 다른 시간에 대한 추억에 젖는다. 집, 가족, 운명의 변화와 반전,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에 대한 추억에도 젖는다.' (12쪽) )보여준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막 열네 살이 된 주인공과 열다섯인 된 누나 캐시, 그리고 무둑뚝하고 거인 같은 외모에 엄청난 힘을 가진 아빠는 숲속에 집을 짓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산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사냥을 하고, 나무를 심고 채소를 길러 먹으며 이웃에 사는 비비안의 집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학교 공부를 대신하면서.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행복은 근처 대부분의 땅을 소유한 프라이스로 인해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싸움을 잘 하는 아빠로부터. '아빠에게 싸움은 고래가 튀어오르는 것과 같은 거야. 단지 더 잔혹할 뿐이지, 훨씬 더. 게다가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야. 동물과 물질의 문제가 아니야. 다른 동물이 연루되어 있어. 다른 인간이. 하지만 그래도 똑같아, 그게 너희 아빠의 욕구를 해소해줘.' (95쪽) 비비안의 이 말처럼 아빠는 폭력적인 무언가를 갈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성향으로 인해 프라이스 밑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다가 엄마를 만나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내기 시합에 참여해 돈을 벌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그 능력으로 인해 프라이스는 아빠에게 내기 시합에 참여할 것을, 그러지 않으면 집을 빼앗겠노라 한다.

아이들이 숲속 집에서 살기를 원했던 아빠는 시합에 참가하고 어렵게 이겨서 집의 소유권을 되찾게 되지만 그것도 잠시, 프라이스 아들의 죽음으로 가족에겐 또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가진 자의 횡포와 없는 자들의 안간힘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고 정의가 이기는 일은 드물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은 늘 씁쓸하다.

' 다만 살아 숨쉬는 땅을, 변화하고 요동치고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드는 땅을 사람이 종이 한 장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게, 그리고 그 사람이 그 땅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혹은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는 것도 가능하다는 게, 그 모든 것이 종이 한 장에 달렸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는 거다.' (194쪽)

그러니, 빈부격차를 없애 완전한 평등 세계로 가겠다는 공산주의에 혹했던 사람들에게 누가 잘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론상으로는 그보다 완벽한 세계가 없을 테니 말이다. 모든 것은 사람들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프라이스가 더 많은 땅을, 더 많은 돈을 탐내지 않았다면 그 가족은 셋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고, 프라이스의 아들이 캐시의 아름다움을 탐내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흡인력이 좋은 작품은 잘 읽히는 데도 한 번에 읽기가 싫다. 너무 빨리 읽어버리는 게 아쉬워서 중간에 일부러 다른 일을 한답시고 멈췄는데 그 시간에도 책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다 읽은 다음에는 매캐한 연기와 그을음이 따라다니고 그럴 수 없을 걸 알면서도 대니가 캐시를 만날 수 있기를 빌었다. 작가의 다음 책을 기다리는 것도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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