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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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글, 문학동네 펴냄


어릴 때 먹을 게 생기면 늘 똑같이 나눠 받고는 아까운 마음에 한 번에 먹어버리지도 못하고 각자 나름의 보관소에 넣어두곤 했다. 그러다 꺼내보면 끈적이는 사탕류들은 개미들이 이미 점령을 했거나, 과자는 눅눅한 채 곰팡이가 피어있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와 같은 짓을 했다. 한 장 한 장 줄어드는 게 아까워서, 급히 읽어버리는 게 너무 아쉬워서 읽다가 덮어두고 읽다가 덮어두고 했더니 다 읽는 데 열흘이나 걸렸다.

우리에게 백석으로 알려진, 시인 기행.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그가 시를 쓰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1957년부터 1963년을 (‘당신, 이미 죽은 사람. 그 겨울의 골짝에서 당신도 얼어붙고 당신의 노래도 얼어붙었으니까. (213쪽)’.) 병원에서 만난 중국인이 노래를 부르다가 했던 이 말처럼 그가 살았던 얼어붙은 일곱 해를, 작가는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재현해놓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246쪽) 이렇게 작가가 밝힌 것처럼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생생한 그 장면들 속에서 기행을 만나는 일은 반가웠으나 돌아오는 길은 씁쓸했다. 하여, 책장 속 깊이 잠자고 있던 그의 시집도 꺼내 읽을 수밖에.



쓸쓸한 길

거적장사 하나 산 뒤 옆 비탈을 오른다

아- 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산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간다

이스라치 전이드나 머루전이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목이 서러웁다

뜨물같이 흐린 날 동풍이 설렌다

*이스라치: 앵두

백석, 「쓸쓸한 길」, 『사슴』 중에서 45쪽

새 공화국의 젊은 시인들은 기행의 시가 낡은 미학적 잔재에 빠져 부르주아적 개인 취미로 흐른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기행에게 어렵게 쓰지 말라고, 개성을 발휘하지 말라고, 문체에 공을 들이지 말라고 충고했다. (163쪽)’ 이러니 쓸 수 없었을 가슴 아픈 일곱 해의 일들 뒤에 떠오른 시다. 그리고 사랑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기행에게 각별했던 란에 관한 다음 시도.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줏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백석,「통영」전문,『사슴』58쪽에서

그는 쓸 수밖에 없었고 비록 그것이‘아침이 되어 재를 치우느라고 난로 아래쪽의 재받이통을 꺼내자 타버린 종잇조각들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손끝으로 집어 들어 살펴보니 글자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가락으로 비비니 종이는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먼지처럼 흘러내렸다. (204쪽)’ 처럼 쓰고나서 태워버리는 한이 있어도 썼을 것이다. 전해지지 않는 시들은 그렇게 재로 변해버렸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힘든 그의 삶이 시를 쓰지 못하는 아픔으로 인해 더 힘들었을 테니.

‘살던 집도 불타버리고 빼곡히 꽂혀 있던 책이며 은은하게 풍기던 커피 향내 같은 것도 모두 사라지고, 아내와 어린것들과도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그는 문자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다. 그 문자들을 쓰거나 읽을 수 있어 그는 전쟁이 끝난 뒤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구원한 그 언어와 문자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기행은 궁금했다. (190쪽)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191쪽)’

백석의 시만큼이나 아름다운, 김연수의 문장들을 만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어디선가 흰 당나귀도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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