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8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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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순수의 시대 The Age of Innocence

◎ 지은이 : 이디스 워턴 Edith Wharton

◎ 옮긴이 : 손영미

◎ 펴낸곳 : 문학동네

◎ 2022년 1월 28일 초판발행, 430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이디스 워턴 - 1862년 미국 뉴욕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럽 각지에서 머물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의 서재를 드나들며 문학적 재능을 키우나 1885년 결혼 전까지 창작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1890년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환락의 집』 『이선 프롬』 『암초』 『여름』 등 다수의 소설과 역사, 미술, 건축에 대한 다양한 글을 집필했다. 1920년 출간한 『순수의 시대』로 이듬해 여성 작가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 1937년 프랑스에서 타계했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이선 프롬』이었고 그 뒤를 이어 『석류의 씨』와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지만 1920년대라서 가능한 찬사와 수상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이 되려나? 개인적으로는 『이선 프롬』이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400쪽에 이르는 분량이지만 이야기는 간단하다. 뉴욕 상류층 사교계에서 1등 신랑감으로 꼽히는 뉴런드 아처. 그에게는 메이라는 여인이 있건만 오페라를 보러 간 곳에 나타난 메이의 사촌 엘런 올레스카 백작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자신의 마음을 누르고자 서둘러 약혼을 발표하지만 그는 이미 엘런에게 푹 빠진 상태. 메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뒤에서는 가족들과 합심해 엘런을 뉴욕에서 쫓아버리고 아처를 붙잡아 앉히는 데 성공한다. 수십 년을 보낸 아처가 메이가 죽은 뒤 아들과 함께 파리에 여행을 갔을 때 엘런과 만날 기회가 생기지만 그대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는 바쁜 나날을 보냈고, 삶은 보람 있는 일들로 가득했다.

아처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처는 자기가 무엇을 놓쳤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인생의 꽃이었다. 하지만 이제 너무도 까마득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그 때문에 불평한다면 마치 복권에서 일등을 놓쳤다고 아쉬워하는 것과 비슷할 듯 했다. ---(중략) 그녀는 그가 놓친 모든 것을 모아놓은 환영이었다.

385쪽

쉰일곱이 된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 박물관에서 그림을 보며 '생각해보니 정말 무미건조한 삶이었다'(396쪽)고 회상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던 올렌스카 부인을 그대로 떠나보낸 것을 아쉬워하지만 그는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실제로 한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손에 가득 쥔 것을 놓지 않고는 다른 것을 가질 수 없는 법인데도.

메이는 청순한 외모 뒤에 숨어 모든 일을 계획했고, 아처는 세간의 이목이 두려워 엘런을 외면했다. 엘런은 비록 남들이 볼 때는 이상한 인물이었으나 자신의 자유를 위해 재산이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렸고 아처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아처의 바람대로 행동했다. 우리가 곧잘 '그때는 다들 참 순수했는데.'라고 과거를 회상하듯 아처의 회상이 바로 '순수의 시대'가 된 건 아닐까. 그속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인물은 엘렌이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인생의 꽃'을 놓쳤음을 깨닫지만 엘런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음에도 '현실의 마지막 그림자가 스러질까 두려워 그 벤치에 그대로 앉아.'(401쪽) 있다가 돌아오는 아처는 끝까지 겁쟁이며, 자신이 가진 것을 놓을 줄 모르는 욕심쟁이다. 그녀를 잊고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그에게 엘런은 환상 속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높이 띄워놓고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그런 인물. 작품이 무슨 죄가 있을까마는 주인공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 책을 좋아할 수가 없다. 아처가 엘런을 만나러 올라갔다면, 거기 올라가서 사죄의말이라도 했다면 달라졌으려나?

나는 '인생의 꽃'을 아직 놓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한 송이가 아니라 꽃 한 다발이 내 인생의 꽃이었며 그 중 몇 송이를 놓쳤다고 해도 아직 또 몇 송이쯤 남아 있다고 믿고 싶다. 기왕이면 향기 좋은 놈으로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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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위의 세 남자
제롬 K. 제롬 지음, 김이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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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보트 위의 세 남자

◎ 지은이 : 제롬 K. 제롬

◎ 옮긴이 : 김이선

◎ 펴낸곳 : 문예출판사

◎ 2012년 7월 10일 제2판 2쇄, 373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친구 사이인 조지, 해리스, 화자인 나와 몽모렌시라는 폭스테리어 한 마리는 서로의 건강에 대한 염려증이 심각한 상태라 모두를 위해 배를 타고 여행을 하기로 합의를 본다. 문제는 이 세 남자가 말도 못할 정도로 게으른 데다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데 있다. 계획을 짜다가도 샛길로, 무엇을 먹을까 의논하다가도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 짐을 싸는 것도 한 세월이다.

파이는 맨 아래에 놓고, 무거운 것들을 그 위에 다 놓아 뭉그러뜨렸다. 그들은 사발팔방에 소금을 흘렸다. 그리고 버터 문제만 해도 그렇다! 2펜스 1실링짜리 버터를 가지고 남자 둘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니, 내 평생 다시는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조지가 자신의 슬리퍼에서 버터를 꺼낸 후, 둘은 그것을 주전자에 넣으려고 했다. 버터는 잘 들어가지 않았는데 문제는 들어간 것은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은 결국 버터를 도려내야 했고 그것을 의자에 놓아두었는데, 해리스가 그 위에 앉았고 버터가 그에게 달라붙는 바람에, 그걸 찾아 온 방안을 돌아다녀야 했다.

61쪽

대체로 이런 식이다. 여행하는 내내 이런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태로 2주간 배를 타고 여행을 한다면 평생 다시 안 볼 것만 같은 불안감이 배를 폭발시킬 것처럼 빵빵하게 차오르지만 그들은 용케도 잘 버틴다. 특유의 낙천성 (그들이 게으름이라고 부르는)이 그들을 살리고 있는가보다.

템스 강은커녕 영국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고 배라면 멀미 때문에 질색을 하는 터라 이 여행을 머릿속으로 그린다는 것부터가 상상불가. 그러나 노를 제대로 젓지도 못하고 방향 구분도 못해서 다른 배와 부딪치는 일이 다반사인 이 배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한다고 상상하면 이것보다 낭만적인 일도 없다. 곁들여 그들이 닿는 곳에 얽힌 역사적인 인물들의 이야기와 지금 막 그들이 당면한 일에 대한 또다른 겪은 이야기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지루하긴! 웃겨서 배가 아플 정도구만!)

책이 출간되었던 당시에는 J. 일행이 선택한 코스를 따라

여행하는 보트 여행객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여, 실제로 템스강이 유명해지는 데 대단한 몫을 했다고 한다. 텔레비전 쇼,

연극, 영화, 뮤지컬 등으로 오랜 세월 리메이크되었다는 사실이 그 인기를 반증하고 있고, 2005년에는 BBC에서 세 명의 배우와 함께 이 작품 속의 루트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370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만약 내가 영국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정말 이걸 따라 해볼 것도 같다. 물론 이 책을 쓴 1889년보다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겠지만 '아, 여기가 몽모렌시가 주전자와 싸우다 토라진 곳이구만.' 이러면서 반가울 것 같지 않은가.


 




지저분한 옷을 입고 제대로 된 음식도 못 먹고, 잠도 잘 자지 못하는 그들의 여행이 드디어 끝나고나니 내가 왜 허기지고 술 생각이 나던지! 냉동실에 있던 새우 한 팩을 꺼내 통마늘을 넣고 버터로 뜨끈하게 지진 다음, 스리랏차와 꿀, 후추를 약간 뿌리는 것으로 요리를 마감하고 와인 한 잔을 따랐다. 에라, 모르겠다. 한 잔은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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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비 부인과 니임의 쥐들 - 1972 뉴베리 상 수상작 상상놀이터 14
로버트 C. 오브라이언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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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프리스비 부인과 니임의 쥐들

◎ 지은이 : 로버트 오브라이언

◎ 옮긴이 : 최지현

◎ 펴낸곳 : 보물창고

◎ 2021년 6월 30일 개정초판1쇄, 278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로버트 오브라이언

1922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로버트 레슬리 콘리이다. 이스트먼 음대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며 한때는 음악가가 되려고 했으나, 그 대신 1941년부터 197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스위크> <패쓰파인더>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의 작가 겸 편집자로 일했다. 1971년 발표한 대표작 『프리스비 부인과 니임의 쥐들』은 '뉴베리 대상'과 '루이스 캐롤 쉘프 상'을 동시에 수상했고,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또한 폭발적인 반응으로 100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40여 년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으며 '동물 판타지'의 고전이 되었다.


봄이 되어 피츠기븐 씨가 밭을 갈기 전에 겨우내 머물고 있던 곳에서 이주를 해야 하는 프리스비 부인과 아이들. 설상가상 티모시가 아프다. 프리스비 부인은 약을 얻어 오는 길에 까마귀 한 마리를 구해주었고 그로부터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올빼미를 찾아가라는 조언을 듣는다. 올빼미는 죽은 남편 조나단 이름을 듣더니 장미 덤불 아래 사는 시궁쥐들을 찾아가라고 한다.

시궁쥐들 역시 남편 조나단의 이름을 들은 후 그녀를 도와주기로 한다. 우두머리인 니코데무스는 남편 조나단과 함께 '니임'이라는 연구소에 붙잡혀 있었고 그곳에서 다양한 실험을 당하는 동안 인지능력이 향상된 것은 물론 체격도 커지고, 늙지 않게 되었다는 것, 탈출할 때 조나단의 도움이 컸다는 것 등을 알게 된다. 글을 읽게 된 그들은 탈출 후 더이상 훔치지 않는 삶을 꿈꾸게 되었으며 직접 밭을 가꿔 자급자족하기 위해 소른계곡으로의 이주를 계획 중이란다. 우여곡절 끝에 프리스비 부인과 아이들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지고, 니임의 쥐들 역시 그들이 가고자 했던 소른 계곡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전기를 끌어다 쓰는 것은 물론이고 수도 시설까지 갖춰놓은 니임의 쥐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만든 장치는 바로 장난감 수선공의 트럭에서 발견한 작은 도구들이다. 그렇게 쥐들의 문명을 만들던 그들에게 생활이 편리해지다보니 아무리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쥐들에게 닥친 문제지만 우리의 지금 생활과 너무나 흡사하다. 심지어 50년 전 이야기인데도.

기계의 도움을 받아 생활이 편리해지면 여유시간을 누릴 줄 알았지만 막상 시간이 남아도니 여유를 즐기는 게 아니라 또다른 기계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줄 모르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텔레비전을 하루종일 보는가 하면 게임하느라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다. 가족끼리 대화하는 시간도 없고 천천히 걷는 일도 정해두지 않으면 안 하는 날이 많다. 이러니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재난이 닥쳐 모든 것이 파괴되고 소수의 사람들만 살아남는다는 설정이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도 니임의 쥐들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영주사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사과 판매처 가기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돌담 아래 핀 작은 꽃이 너무 앙증맞고 예뻐서 가까이 들여다보려고 다가갔다. 그냥 볼 땐 예쁜데 사진으로 담으려니 왠지 보이는 것만큼의 감흥이 없어서 지울까 어쩔까 궁리하고 있을 때 내 눈 앞에 작은 생물 하나가 등장했다. 순간 다람쥐로 착각했을 정도로 털이 반지르한 귀여운 얼굴. 잠깐 눈이 마주친 뒤 도망가고 말았지만 쥐가 분명했다. 지저분하고 흉악한 모습이 아닌, 갈색 털에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그 아이는 들쥐같았는데 이 책이 나온 게 벌써 50년 전이니 소른 계곡에서 멀리 영주까지 이주한 '니임의 쥐들'후손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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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네리코 3번가 야옹 관장님 코후지 이야기 - 작은 서양관 속 열두 개의 이야기 주머니 바둑이 폭풍읽기 시리즈 2
야마모토 카즈코 지음, 이시카와 에리코 그림, 전정옥 옮김 / 바둑이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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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토네리코 3번가 야옹관장님 코후지 이야기

- 작은 서양관 속 열두 개의 이야기 주머니

◎ 지은이 : 야마모토 카즈코 글, 이시카와 에리코 그림

◎ 옮긴이 : 전정옥

◎ 펴낸곳 : 바둑이 하우스

◎ 2021년 6월 30일 초판 1쇄, 167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열두 달에 걸쳐 세시풍속을 소개하는 책으로는 꽤 신선한 기획이다. 보통은 지식을 주기 위한 의도로 만들기에 사진과 자료 위주의 따분함이 일반적인 형태지만, 이것은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의 풍속을 소개하는 것이라 조금 아쉽기는 해도 다른 나라의 독특한 생활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다.


이렇게 4월에서 시작해 다시 4월로 끝을 맺는데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체는 고양이 코후지이며, 그를 이야기 가운데 갖다 앉힌 것은 '고양이 문양 견본'을 찾아 세계여행을 떠나며 자신이 살던 서양관을 돌보게 만든 할머니 후지. 후지 할머니는 코후지에게 1년동안 서양관에 살면서 집세로 매달 그달에 맞는 행사를 하고 편지를 쓰라고 한다. 직장일로 실의에 빠진 코후지는 그렇게 새로운 곳에서 살게 된다.

집세를 내기 위해 마지못해 시작했던 그달의 행사들은 처음에는 귀찮았으나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즐기게 되면서 더불어 친구들이 생기는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온다. 고양이, 쥐, 곰, 다람쥐, 뱀, 여우 할 것없이 모두 친구가 되는 토네리코 마을. 열두 달이 지나는 동안 이렇다 할 일을 찾지 못했던 코후지는 고양이 문양 직물을 짜보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그곳에서 우체국 일을 돕기로 했으며, 세계로 돌아다니며 고양이 문양 견본을 찾던 후지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온 후 뜻밖에도 아주 가까운 곳에 그것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매달 코후지의 편지쓰기가 끝나고 나면 이렇게 그달의 행사에 관한 짧은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좋다. 병기해놓은 '한국의 열두 달 세시풍속 이야기'는 편집팀에서 한 거겠지만 비슷하거나 전혀 다름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이참에 한국판 코후지 이야기를 쓰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솟구치기도 했음.)

세시풍속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면 정말 지루한 책이 되었을 테지만 코후지가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주변인들의 따뜻함과 서로 도와주는 마음, 주고받는 위로, 다시 찾은 꿈 등이 얽혀있어 이야기는 힘을 얻는다. 물론, 여기에 소개된 것만으로는 그런 풍속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다 알 수 없다는 아쉬움은 있으나 궁금하면 가지를 뻗어 다른 책으로 이어지면 될 터이니 확장독서를 할 수 있는 또다른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발판 역할은 충실히 하고 있으나 약간 어수선한 부분들이 있어 별점을 높게 주지는 않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점차 우리 생활에서 밀려나고 있는 세시풍속들을 떠올려본다. 우리나라 세시풍속 대부분이 농사와 관련이 있어 모르는 게 많다고 해도, 곧 다가올 부처님오신날의 탑돌이나 수리취떡을 해먹고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단오 같은 날은 도시에 사는 우리도 아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아쉬운가. 낡아서 부서지기 전에 바람도 쐬고 기름도 먹이고 뿌리도 단단히 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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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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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제 5 도살장

◎ 지은이 : 커트 보니것

◎ 옮긴이 : 정영목

◎ 펴낸곳 : 문학동네

◎ 2021년 8월 10일 1판 14쇄, 280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작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뒤 드레스덴에서 폭격을 목격하고 그 이야기를 오랫동안 품고 있다가 23년이 흐른 뒤에야 쓸 수 있었노라고 전한다.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들 한다. 나도 물론 앞으로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전쟁 책을 끝냈다. 다음에 쓰는 책은 재미있을 것이다.

이번 것은 실패작이고, 실패작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소금 기둥이 쓴 것이니까.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들어보라: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그 책은 이렇게 끝난다.

지지배배뱃?

37~38쪽

작가는 책을 쓰기 전에 자신의 기억이 올바른지 알기 위해 전우였던 오헤어를 찾아가고, 거기에서 책이나 영화가 전쟁을 부추기는 데 한몫한다고 생각한 그의 부인에게 '소년 십자군'이라는 제목을 붙이겠노라고 맹세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아직 스물한 살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190센터미터 키에, 가슴과 어깨는 부엌 성냥갑같았다. 철모도 없고, 외투도 없고, 무기도 없고, 군화도 없었다. 아버지 장례식에 가려고 산, 목이 짧은 싸구려 민간인 구두를 신고 있었다. 굽 한쪽이 떨어져나간 탓에 몸이 위아래로, 위아래로 까닥였다 .'(50쪽)빌리로부터 시작된다.

처음에 이 책이 '드레스덴 폭격'과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같은 종류의 책일 거라는 내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공상과학영화같은 느낌을 풍기며,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때문에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북』 생각도 났다.

빌리는 '트랄파마도어'라는 행성에서 자신을 붙잡아가서 동물원에서 자신을 알몸으로 전시를 했고 몬태나 와일드핵이라는 전직 영화배우와 짝을 지어주었노라고 했다. 트라팔마도어인들이 그에게 모든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며 그 때문에 시간왜곡을 통해 여러 시간대, 여러 장소로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빌리는 미래와 과거를 끊임없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 사이의 모든 사건과 무작위로 만난다. 그렇게 말한다.'(39쪽)

작가는 어디 가고 빌리의 이야기만 나오는 걸까, 고민할 때쯤이면 어김없이 작가가 등장해서 그가 탄 열차 옆 칸에 타고 있었다거나, 극장에 함께 있었다는 등의 카메오 출연을 하고 사라진다. 오랜만에 영국인들이 준 음식으로 배탈난 미국인 포로들을 그리면서 '빌리 옆의 한 미국인은 뇌만 빼고 전부 배설해버렸다고 울부짖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그것도 나가네, 그것마저 나가." 뇌 이야기였다. 그렇게 울부짖은 게 나였다. 바로 나. 이 책의 저자.'(160쪽) 바로 이렇게.

빌리가 태어나고 교육받고 검안사가 되고 결혼하여 부를 이루고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가 그린베레원이 되는 동안 그는 전쟁 속에 있다. 몸을 누일 공간 하나 없는 기차에 타고 있기도 하고, 발을 질질 끌며 총탄 속을 걷기도 하며, 전우인 위어리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광대옷을 입고 행진을 하기도 하며, 제5도살장에 갇히기도 하고, 드레스덴 공습 후 전우인 더비가 죽은 뒤 묻으려고 삽을 들고 있기도 하다.

빌리가 진짜로 트랄파마도어인들에게 붙잡혀 가서 시간여행을 하게 된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시간여행은 그가 전쟁에서 겪은 고통을 견디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보여진다. 심각한 트라우마를 표현한 것으로도.그래서 이 재미있는 책을 보면서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 이 책에서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등장하는 "뭐 그런 거지"라는 표현-총 106번 나온다고 한다'(272쪽) -해설 중에서- 이 부분을 해설에서는 체념적 수동성을 드러내는 말로 보인다고 했지만 내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죽음을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므로 전쟁따위는 이 죽음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거라는 말로 들렸다.

실제로 겪지 않는 우리는 그저 피상적으로만 어렴풋이 전쟁을 이해할 뿐이다. 1·4 후퇴 때 홀로 남쪽으로 내려오신 우리 아버지나 충청도에서 피난을 가지 않고 전쟁을 겪어낸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도 그저 지나간 옛 이야기로 취급되고 냉정하게 말해서 뉴스에서 들리는 우크라이나 소식도 한 겹 너머 이야기다. 만약, 그것들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가정만으로도 숨을 쉬기 어려우면서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이 너무도 다행이라 그런 반응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전쟁이라는 낱말을 사어(死語)로 취급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반응을 얻을 게 뻔하면서도 여전히 들려오는 전쟁 소식에 한숨을 쉬며 던져보는 질문이다. 거리에 뒹구는 시체와 울부짖는 난민들, 폭격당해 폐허로 변한 도시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빠져나온 긴 터널을 떠올리고 그 전쟁 속에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끼는 게 또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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