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일곱이 된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 박물관에서 그림을 보며 '생각해보니 정말 무미건조한 삶이었다'(396쪽)고 회상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던 올렌스카 부인을 그대로 떠나보낸 것을 아쉬워하지만 그는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실제로 한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손에 가득 쥔 것을 놓지 않고는 다른 것을 가질 수 없는 법인데도.
메이는 청순한 외모 뒤에 숨어 모든 일을 계획했고, 아처는 세간의 이목이 두려워 엘런을 외면했다. 엘런은 비록 남들이 볼 때는 이상한 인물이었으나 자신의 자유를 위해 재산이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렸고 아처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아처의 바람대로 행동했다. 우리가 곧잘 '그때는 다들 참 순수했는데.'라고 과거를 회상하듯 아처의 회상이 바로 '순수의 시대'가 된 건 아닐까. 그속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인물은 엘렌이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인생의 꽃'을 놓쳤음을 깨닫지만 엘런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음에도 '현실의 마지막 그림자가 스러질까 두려워 그 벤치에 그대로 앉아.'(401쪽) 있다가 돌아오는 아처는 끝까지 겁쟁이며, 자신이 가진 것을 놓을 줄 모르는 욕심쟁이다. 그녀를 잊고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그에게 엘런은 환상 속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높이 띄워놓고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그런 인물. 작품이 무슨 죄가 있을까마는 주인공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 책을 좋아할 수가 없다. 아처가 엘런을 만나러 올라갔다면, 거기 올라가서 사죄의말이라도 했다면 달라졌으려나?
나는 '인생의 꽃'을 아직 놓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한 송이가 아니라 꽃 한 다발이 내 인생의 꽃이었며 그 중 몇 송이를 놓쳤다고 해도 아직 또 몇 송이쯤 남아 있다고 믿고 싶다. 기왕이면 향기 좋은 놈으로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