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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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는 능력은 책임을 다하는 태도이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외면하고 덮고 묻어 버리는 대신 응답하는 일은 상상보다 어렵고 용기가 필요하다. 응답을 하면 자신의 응답에 대해서도 책임을 보여야한다. 대게 이 단계에서 나는 슬그머니 용기가 빠지고 계산이 빨라져서 결국엔 손해도 희생도 크지 않은 수준으로 타협하고 만다.

 

* response + ability = responsibility

 

그러니 이런 용기는 가능하면 어릴 적부터, 짧지 않는 시간을 경험하고 훈련할 시간이 필요하다. 어릴 적 나는공부란 열심히 배워서 사회에 유익한 무엇을 환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저자는 그런 초심을 잊거나 포기하지 않고 지향을 잃지도 않고 계속 걸어 나가 그 용기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김승섭 교수의 책들을 꾸준히 읽는 건, 저자가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이 응답하는 결과물이 뜨거운 분노와 욕설과 비난에서 가장 먼, 데이터와 팩트에 기반을 둔 철저한 연구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은유를 사용한 문장들로도 전달하지만, 감정적 낙관으로 귀결되지 않는 글에서 독자인 나는 단단한 힘을 얻고 든든한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냉정하게 살핀 데이터와 팩트를 읽으며 더 선명하게 보이는 현실에 울기도 한다.

 

임상의사를 하지 않음으로서 개개인의 고통으로부터는 멀어지지만, 고통 일반에 대해서는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에 마음을 내는 것. 그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요.”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오래된 헛소리 같은 막(내뱉는)말들이 시끄러운 사회에 살면서 나는 자주 바랐다, 질리도록 합리적인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고.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회적으로 표준화된 합리성의 방식으로 계약과 합의를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조사하고 연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합리성이란 어떤 의미이고 수단일 수 있을까.

 

합리성을 빌미로 약자의 투쟁을 폄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 합리성은 지식의 양으로 얼마만큼 내 입장을 뒷받침하느냐의 여부인데, 지식 생산엔 자원자본이 들어갑니다. 그런 자원이 없는 이들은 기본적인 생존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

 

정책과 법을 만들고 싶은 이들에게는 데이터와 통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데이터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거나 부재한 상태다. 현대사회에서 숫자로 기록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정책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그래서 김승섭 교수의 연구 데이터는 귀하다. 개인에게만 모든 문제의 책임을 묻는 대신 사회적 상처로 가시화된 기록은 실제로 소송에서 법정 증언으로 쓰인다. 건강과 질병은 그의 연구를 거쳐서 공정과 정의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가 찍은 사진들은 분석 보고가 남긴 현실을 드러내고 채운다.



 

모두가 어수선한 몇 주간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책모임을 시작한 것은 참가한 우리 모두에게 참 필요하고 결과적으로 좋은 결정이었다. 지금도 누가 툭 건들면 눈물이 푹 떨어질 지도 모르는 심리 상태지만, 몸도 마음도 한껏 움츠려든 상황이지만, 그래도 읽고 쓰고 얘기를 나눴다. 연구자가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눈앞이 뿌옇다고 세상을 버릴 수는 없다.

 

앞뒤 맥락을 잘라낸 채 몇 마디 말을 인용하며 사람과 사건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시대에, 이 두꺼운 책들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사람들 (...)”

 

휠체어가 갈 수 있는 모든 길과 장소에는 휠체어가 없어도 걸을 수 있는 모두가 갈 수 있다. 기댈 곳 없는 이들의 손에 쥐어지는 작은 무기들, 저항하고 지키기 위한 무기들은 다른 이들도 보호한다. 타인의 고통을 측정할 방법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고민한 질문을 계속하는 이들이 있다.

 

전선戰線은 하나가 아니고, 특정 맥락과 상황에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질문하고 의심하고 고민하는 태도이다. 표준은 무엇이고 정상은 무엇이냐고 따져 묻고 편견을 구분해내자는 애씀이다.

 

차별하는 줄 모르고 하는 차별 행동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저는 차별금지법이 그 인식과 경계와 행동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공적 마인드가 없는 권력과 저널리즘이 없는 언론은 인지도 부끄러움도 없이 자극적이고 저질스러운 표적 생산과 공격을 일삼고,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일상에서 약해서 저항하지 못하는 존재를 희생양으로 삼기에 주저함이 없다. 연령, 성별, 직업군도 모르는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에 참여하는 불특정한 구성원들은 각자의 삶에서 발화된 분노를 그 희생양에 쏟아 붓는다,

 

노인은 많고 어른은 적은 사회라서, 나이만 먹은 중년 성인인 나는 부끄럽다. 이토록 불완전한 우리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인 차별주의자가 되고 가해자가 되어 살지 않으려면, 공동체의 시스템을 늘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엉뚱한 범임을 지목해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다.

 

역사 속에서 그 싸움이 있었기에 우리는 누군가를 격리하고 배제하지 않는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었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공부도, 인간이 살아가는 법도 잘 모르겠다고, 질병의 근본적 원인이 부조리한 사회라는 걸 밝히니 대답이 더 멀고 무겁다고 하지만, 계속 공부만 하시라고 응원하고 싶은 학자다. 기록 이상의 의미를 품은 책으로 자주 만나 뵙자고 마음을 조아려 부탁드리고 싶은 연구하는 학자다.

 

공부가 직업인 사람은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특히나 연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기에 좌절의 연속이에요. 그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그 좌절에 익숙한 몸이 돼야 하지요.”

 

마지막으로 고통과 분노의 에너지로 존재하는 경험들을 데이터로 수집하고 분석해 논문과 책의 형태로 정리하는 사회역학**이라는 학문분야가 널리 알려지고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늘었으면 하고 바란다.

 

종교도 기복의 성격이 강하고, 의학 역시 출세와 자산 증식을 위한 기술직업으로 여겨진지 오래지만, 그래서 더욱 만들어갈 미래와 공동체에 관한 다양한 고민이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 Social Epidemiology,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구조, 제도, 관계 등을 추적하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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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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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세계, 직업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에세이 읽는 것을 좋아한다. 모든 경험이 고유하고 특별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경비원의 경험과 시선과 그 이상이 담긴 이 책에 몹시 설레고 두근거렸다.

 

나는 경비원이 서 있기에 좋은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서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는다.”

 

부제에서 한 남자는 숨어버렸다고 한다. 사랑하는 책들이지만, 현실이 버거워서 책 속으로 숨어버리는 날들이 많아지는 나는, 그의 사연이 미술관과 예술 작품보다 더 마음이 쓰였다.

 

상실감과 슬픔은 가벼이 다룰 수 없는 비통과 애도이고, 육체는 무력감에 빠진다. 아니 그는 그래도 시간을 보내는 일을 찾았으니 완전한 무력감은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거대한 장소가 마련해주는 숨을 수 있는 장소와 여지가 내게도 안도가 되었다.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한 이의 행보가 다른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 닿는 과정이 잔잔하게 아름다웠다.

 

미국 이민을 가서 뉴욕에서 살고 있는 어릴 적부터의 오랜 친구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반짝이고 화려한 것들보다 이제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진, 레코드 가게, 싸구려 식당, 그리고 워싱턴 스퀘어의 분수대로 이루어진 도시가 궁금해졌다. 업타운의 소란함보다 숨기 좋은 공간들이.

 

졸업 후 뉴욕 중심가의 고층 빌딩에서 화려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작 나에게 아름다움, 우아함, 상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의 의미를 가르쳐 준 것은 그런 조용한 공간들이었다.”

 

2008년 미술관 일을 시작하며, 그가 향하는 곳들을 함께 따라가 보았다. 2백만 개가 넘는 유물을 소장했다니 평생 보아도 못 볼 예술 작품들의 산적함에 짧은 인생이 더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는 근무지, 문을 열기 30분 전, 램브란트, 보티첼리, 디에고, 고야…….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이집트관이었다. 시간은 일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직선으로 흐른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죽음이 삶이고 과거가 현재이고 미래라는 걸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나이가 되니 영화 <컨텍트>의 시간처럼 내가 보는 시간도 모두 순환한다.

 

이집트인들은 시간에 대해 우리와는 다른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네해’, 즉 수백만년 간 이라 불렀고, 그것의 본질은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과 같은 순환이었다.”

 

그가 입은 미술관 경비복, 푸른 제복 아래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수많은 사연들은 사람이 각자 어떤 고군분투를 하며, 세상에 자신만의 색으로 반짝임을 남기며 고유한 무늬를 새기며 사는 지를 상기하게 한다.

 

관람객으로 미술관을 방문해서 보고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해가 생긴다. 타인의 것은 타인의 것들이다. 우리는 대개 무지와 기우에 근거하며 남을 판단한다. 제복을 입고 있어도 각자가 가진 꿈과 취향은 가려지지 않고, 모두의 경험은 여전히 고유하다.

 

인내하기 위해 노력하고, 친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특이한 점들을 즐기고 나의 특이한 점을 잘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관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상황이 좋지 않더라고 적어도 인간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스산한 기분이 들고 여러 복잡한 생각에 불안해지는 겨울에는 아름답고 경이로운 이야기가 더 좋아서, 읽는 동안에는 마음이 놓이고 기분이 편안해졌다. 더 아름다운 건 예술인지 삶인지 잠시 생각하다, 애초에 그런 구분과 비교는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단 하나의 이데아도 정답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경험하며 나는 여러 종류의 아름다움을 만났을 것이다. 표현한 언어가 없거나 부족해서 뭉쳐진 감정들로 기억하지만, 종류가 다름은 알 수 있다.

 

이 책은 참 아름다운 책이다. 짐작을 많이 벗어나는 책을 좋아하는데 에세이라서, 미술관이라서 이렇겠다고 생각한 것들이 모두 낯설고 새로운 내용들로 대체되었다. 무엇보다 가만히 사유하게 되는 순간이 늘어나는 깊은 글이다.

 

삶이란 단순함과 정적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도 있지만, 군말 없이 살아가며 고군분투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냉소가 차오르기도 하는 시절, 우리의 삶도 우연도 사연도 예술도 이렇게 신비롭고 경이롭고 아름다울 수 있지, 하는 오랜 감동을 소환해준다. 앞으로 내가 조금 더 친절하거나 다정한 표정과 말과 행동을 하는데 이 책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만들어지는 운율을 깨닫는 것은 내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를 깨닫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야기, , 아름다운 모든 존재들을 만나러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멀리 보내는 눈길이 시큰해지는 밤이었다. 세상은 서로 섞이기를 거부하는 세밀한 부분들로 가득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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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를 읽고, 습지를 걷다 - 선생님이 전해주는 인천대공원과 소래습지의 생태이야기
남기철 외 지음 / 좋은땅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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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wetland의 중요성에 대한 글을 읽고 공부를 한 적도 있는데, 기억을 떠올려보려니 텅텅 비었다. 환기되고 업데이트 되지 않는 공부란 흔적 기관처럼 남게 된다. 인천지역 습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에 새롭고 반갑게 읽고 배웠다

 

부지런한 친구가 김장 새우젓 사러 가는 연례행사로만 알고 있던 소래포구가 습지이자 생태공원이라는 것을 읽으며 내가 가진 정보와 이미지가 극도로 협소했단 자각을 한다. 푸른빛이 가득한 풍경이 멋지다.



 

식생과 동식물 모두에 관한 정보가 다양하다. 인류가 야생으로 남겨둔 것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인간 이외의 생명을 만나니 쓸쓸하고 불안한 기분이 많이 가벼워진다. 비에 가까운 습설이 내리는 창밖을 자꾸 보게 된다.

 

한 분도 아닌 다섯 명의 선생님들이 쓴 책이라서, 학습에 잘 활용 가능한 친절한 안내서 같은 구성도 있고, 성실하고 단정해서 기분 좋은 보고서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사진이지만 충분히 아름다워서 천천히 오래 보기에 참 좋다.



 

이전에 도시에서 인간과 함께 사는 동식물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인간이 조성했지만 식생이 더 좋은 공원과 습지에는 더 많은 생명들이 있어서 무척 감격스럽다. 작은 생명들이 살아 있으니 인간도 살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



 

인천대공원과 소래습지생태공원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독자들은 훨씬 더 즐겁고 재밌게 읽고, 많은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 듯하다. 충실하게 공부하려면 진지하게 기억하고픈 내용들이 무척 많다.

 

수업 시간에 이루어져도 좋겠지만, 가족들과 함께 해볼 번거롭지 않은 활동 가이드가 있어서 매력적이다. 나무를 좋아하지만 나무 수피 탁본 뜨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떤 무늬를 만날지, 그 무늬만으로 나무 종류를 알 수 있는 지식에 이를지가 무척 궁금하다.



 

그곳에 살지도 않는 산천어들을 데려와서 풀어놓고, 괴롭히다가 죽이는 것을 우리는 축제라고 부른다. 다른 생명을 학대하는 연습을 사회가 공공연하게 시키는 셈이다. 그런 활동보다는, 알지 못했던 동식물에 대해 배우고, 관찰하는 느긋한 산책 같은 가족 활동이 여러모로 더 평화로울 것이다.

 

* 나는 책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관련된 내용을 가장 재밌게 읽었다. 나무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활동도 멋지다.

* 공룡 같은 곤충이라 자세히 보는 건 무서워하는 잠자리 중에서 나비 같은 물잠자리도 신기하다.

* 80억 가량이 사라져서 무서웠던 야생벌들에 관한 경고도 중요하다.

* 나문재가 먹을 수 있는 나물이라는 것, 고려가요에 등장한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 기후의 급속한 변화로 인한 철새의 텃새화 현상으로 인한 여러 문제도 배웠다.

* 도요새의 종류가 이렇게 많다니!



 

선생님들이 만든 책이지만, 교과서보다는 재밌는 동식물 이야기들 - 잉어가 100년이나 산다고? - 이 다양하다. 대공원이라서 참여할 활동도 적지 않다. 특히 염전이 있다는 점과 염생식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실험이 흥미롭다. 여러모로 반갑고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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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에디터스 컬렉션 16
조지 오웰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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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다른 번역과 판본으로 만나도 여전히 서늘하고 뜨겁게 놀라는 작품들을 쓴 존경하는 작가. 기분 좋은 우연처럼 아주 오랜만에 그의 작품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거듭 생긴다.

 

문예출판사의 에디터스컬렉션 <카탈로니아찬가>는 사진들이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기억 속 조각들로 남은 문학을 새롭게 읽고 채우고 숙고해보는 의미 깊은 기회가 감사하다.

 



 

1936년 발발한 스페인 내전을 다루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2024년 지구에도 전쟁 상황과 확전 소식이 들려왔다. 현실로 인한 불안감이 문학이 전하는 비극보다 커서, 문학이 전달한 경고가 현실을 직시하게 해서 기분이 무거웠다.

 

영국 유학 중에 나는 한 명의 카탈로니아 출신 친구를 만났고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함께 보며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제국주의적이고 세계대전이라는 참상에 대한 숙고가 없는 듯한 축구팀에 붙는 수식어들 - 스페인의 무적함대나 독일의 전차군단 등 - 이 무척 불편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기 들고 죽이는 전쟁 대신 공을 뺏는 경기를 하는 것이 더 나은 문명이고 평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0세기에 나는 그렇게 전쟁의 지난 과거의 방식이었다고, 다시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게으른 낙관을 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근래에 나는 인류 문명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만났다. 그래서 지난 역사의 기록으로 읽은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만난 것이 다행이다. 이제야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절감하며 읽어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점에서 문명은 퇴행한 듯도 하다. 전쟁의 이유와 분위기, 참전하는 이들의 태도는 현대의 전쟁과 다르고, 그 점이 우리가 도착한 문명의 현실을 더 잘 보여준다. 실패하고 패배했지만, 이상과 대의와 기강이 있고, 그것을 지키려는 저항이 부럽고 빛난다.

 

문명 생활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일반적인 동기 중 대부분, 즉 속물근성, 재물 욕심, 윗사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평범함 계급 구분도 돈으로 더렵혀진 영국의 분위기에서는 거의 생각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사라졌다. (...) 누구도 타인을 소유하지 않았다.”

 

자신이 뭔가 낯설고 귀한 것과 점했음을 깨달았다. 냉담이나 냉소주의보다 희망이 더 일반적인 곳이었다. (...)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사기극의 상징이 아니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를 호흡했다.”

 

계급 없는 사회를 꿈꾸고, 자본주의의 인적 자원이 아닌 사람다운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장면들이 그렇다. 그런 제언과 고민도 사라진 21세기에 우리에게 허용된 추구는 돈이 없으면 적게라도 쓰라고 속삭이는 소확행이 전부인가 싶어서.

 

물론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건 다른 선택지 없이 전쟁만 남은 상황은 최악이다. 희생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어떤 방식이든 죽고 죽이는 인류 문명의 방식이 멈추지 않은 것이라면, 2024년의 인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지켜낼 전선을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 자문해본다.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인간답게 산다는 건 무엇인가, 인간답게 행동하고 품위를 지킨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의심, 두려움, 불안, 감춰진 증오가 섞인 분위기는 왜, 어떻게 생겨나고 퍼지는가, - 조직, 자원, 자본 - 을 가진 세력들은 어째서 논쟁과 토론 대신 공작과 선전선동으로 상대를 죽이려드는가, 파시스트 세력은 어째서 손쉽게 기세등등해지는가.

 

역사와 문학의 경고가 적지 않음에도 우리는 왜 참담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반복하는가. 파괴와 살상에 더해 탄소를 펑펑 배출하는 팔레스타인과 가자 지구에 퍼부어지는 전쟁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학살을 2024년의 인류는 언제 멈출 수 있을까. 멈추지 못하면 지금도 매일 3천만 톤씩 녹아내리는 빙하로 인해 우리가 마주할 재앙은 무엇일까.

 

전쟁의 가장 끔찍한 면 중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 모든 구호와 거짓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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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내 마음 - 마음의 고통을 안고, 회복의 길을 간다
황정우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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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탈을 묻는 안부는 물리적 평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일 년 중 며칠을 정말 무탈하게 보내고 있는 걸까. 새해가 어김없이 시작되고, 새해를 핑계로 밝고 즐겁게 지내보려 했지만, 노력과 결심만으로 그런 상황이 마련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뇌는 상상 이상의 가능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기분에 장기적으로 노출될 때 유독 취약해져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멈춰 서거나 혹은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으로 더 고통스러운 삶을 만들기도 한다.”

 

제목이 에고‘ego’이자 영리한 감탄사 역할도 한다고 생각해서, 쉽고 직관적인 웃음을 주는 책이 궁금했다. 저자는 심리치료학과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회복지사이자 겸임교수다.

 

셀프나 에고 같은 심리학에서 구분하는 이론적인 설명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했는데, 사례와 사유로 이어지는 글이라 안심이 되고 무척 반가웠다. 이론 공부가 소용이 별로 없거나 관심이 없는 나이라서 더 그렇다.

 

살아 있는 한 헤어질 수 없는 불안’*에 대해서도, ‘두려움’**에 대해서도 가볍게 언급하고, 우리 사회가 겪은 공통의 경험 속에서 저자가 경험한 구체적 사실로 옮겨가는 방식이 구체적이고 실감이 나서 좋다.

 

* 미래에 대한 막연한 가정. 지속적인 막연함 자체가 고통이므로 불안은 곧 고통의 한 종류라 할 수 있다.

** 안 좋은 것에 대한 무기력한 감정. 누적되고 스스로를 더 옥죄며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단지 불안과 두려움의 반대가 무엇인지를 찾아서 그쪽을 바라본다고 심리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경험에서 무엇을 배워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할까. 저자가 개인과 사회의 영역에서 모두 마련되어야할 점을 짚어주어서 공부가 되었다.

 

최근 물질주의, 경쟁주의, 성과주의로 아이들을 압박하는 것은 누구인가? 거기다 아이들에게 폭력적, 반사회적 문화 콘텐츠를 무분별하게 노출시키는 미디어의 파급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 아이들에게만 사회적 통제를 강화한다면 그것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다들 전혀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역시 맞춰가며 사느라고 아픈 것일 텐데, 란 막막함도 들지만, 같은 상황이라도 내가 반응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고 기억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성장 중인 아이들에 대한 처벌과 통제를 선택해야 한다면, 성장만하고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에 대한 통제 방법도 함께 강구해야 할 것이다.”

 

생존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희망과 기대가 적을수록 더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그럼에도 생존은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어디로든 내보낸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르도록.

 

물론 예전처럼 모든 정신질환이 격리와 치료를 요하는 것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저자도 예를 들었지만, 양극성 장애를 가진 헤밍웨이가 조증 상태에서 남긴 많은 작품들이 인류의 문학사를 채우고 있다.

 

각자의 에고가 다르듯이,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이후의 변화도 모두 다를 것이다. 다만 개인은 혼자가 아니라는 이해가 중요하다. 개인이 속한 사회가 많은 것들을 결정한다. 인간은 환경 속의 인간으로 볼 때 총체적 이해가 가능하다. 인간과 환경은 상호 작용하고 변화한다.

 

정상 혹은 비정상이라는 극단의 이분법을 적용하였고, 더구나 (...) 비정상은 치료의 대상이라는 무모한 해법의 맹점에 빠져 버렸던 지난날의 전문가주의 (...) 고통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전인적 회복보다 의료적 치료에만 몰두하면서 환자들을 의료적 이유도 없이 오래 병원에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 (...) 스스로 생존하는 능력마저 아예 퇴화시켜 버리는 시설화라는 또 다른 장애를 양산해왔다.”

 

변화는 지치도록 느리고 기쁘지 않은 소식이 새해에도 한동안 이어질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의 회복탄력성***이 충분하기를 바란다.

 

*** 자신의 안녕을 지키고 손상이 있으면 다시 회복하려는 본능.

 

약자를 먼저 통제하는 사회는 미성숙한 사회이다. 성숙한 사회는 약자를 먼저 보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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