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 차별, 처벌 - 혐오와 불평등에 맞서는 법
이민규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년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기 전까지 자신이 차별주의자라는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살았다오히려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적지 않다고 자신하는 편이었달까그리고 본문을 읽기 전에 들어가는 글에서 무릎이 털썩 꺾이는 충격적인 자각을 했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자신은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물론 대다수의 사람은 그저 복잡하게 애매한 사람이다.”

 

김지혜 저자의 일화이기도한 결정장애라는 표현을 나도 종종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외에도 고쳐야할 언어표현들은 계속 등장했다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나는 변명의 여지없는 차별주의자였다.

 

모국어라고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듯세상에는 의지를 갖고 배우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밀려나는 일들이 많다. 2년간 적어도 한 발이라도 지향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은 헛되지 않았을까.

 

인간은 긴 역사 동안 수많은 분류 기준을 만들어왔고분류 기준을 근거로 한 차이를 이유로 폭력과 억압을 멈추지 않았다이 같은 흐름이 완전히 역전된다는 것이 과연 현실성이 있을까시대에 따라 폭력과 억압의 대상만 변화할 뿐내면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는 외집단을 범주화하고 일반화하고 더 나아가 비인간화하는 본성이 단기간에 교화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근본적으로 인간은 차이를 발견하고그 작은 차이로 차별하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차이가 차별로 변질되는 지적과 논쟁은 20세기 학회에서도 논의가 적지 않았다그 시기에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하면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한데 쓰레기 치우는 얘기한다는 반응을 받은 것처럼내가 속한 작은 세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과 세상의 반응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달랐다.

 

그래서 2021년 판데믹과 비대면의 엄중한 시절에 더욱 도드라지고 가시화되는 현실의 차별에 대해 섬세하고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짚어주는 이 책을 만나 반갑고 감사하다더구나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이후 좀처럼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던 차별금지법이 얼마 전 정식으로 발의되었단 소식을 들어 시대적으로 시의적절하고 사적으로 간절한 심정에 의지가 된다.

 

이민규 저자가 담은 내용은 이전의 논의와 현재의 현실 모두를 포괄하는 총괄적 내용이기도 해서 나의 조각난 지식 정보를 쉽고 자세하고 더욱 면밀하게 복기복원보충시켜 주는 친절한 텍스트이다학문과 당위로 접근한 나와 달리 차별과 차별금지법에 대한 저자의 깊고 진지한 고민에 부끄럽고 뭉클했다.

 

오랜 세월의 고민이 시야를 좁고 깊게 하기보다는 인간다움과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전체적인 사회 구상으로 향하는 내용이 감동적이고 존경스럽다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설득하게 위해 실제 사례들을 역사적인 중요성에 기반을 두고 짚어준 것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인류 역사에 만연한 폭력을 읽는 일은 쉽지 않지만 알고 기억해야할 것들이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문제의식과 연계하여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미국의 민권 변호사로서 한국의 독자들은 전혀 알 수 없었던 인종 차별 피해자인 에밋 틸 피살사건과 성차별의 피해자 찰리 하워드 사건을 알려 주어 제한적 가치가 아닌 보편적인 장치로서 법의 의미를 고민해보았다.

 

“노숙인이나 장애인이주 노동자성전환자가 극단적인 고통을 받는 사회에서국민의 대다수가 피해 의식과 좌절감으로 가득한 세상에서어느 계층에서나 불평등이 만연한 환경에서 혼자만 초연하게걱정 없이 살 수 있을 리 없다온 세상이 울고 있는데 그 비극이 나만 피해 갈 리도 없다.”

 

아무리 저자가 쉽고 구체적이고 면밀히 분석하고 설득력 있는 제안을 해주어도 현실의 어려움과 차별 발생의 다양한 원인들 등 관련된 복잡성은 간명해지지 않는다그러니 복잡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출발이기도 하다단순하게 동조하고 심정적으로 반대하는 대신 더 진지하게 차근차근 접근하는 계기가 될 수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기보다 한 가지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화법에 열광한다속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탓도 있지만무엇보다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일 것이다얼마나 편해지는지실제로 전문가의 조언을 접했을 때 뇌는 독립적인 의사 결정을 담당하는 기능을 아예 멈추기도 한다.”

 

오래 전 영국 유학을 시작할 때 학교에서 처음 받은 오리엔테이션은 차별적 대우를 받았을 때의 대처법이었다차별적 언어와 행동폭력을 구분해서 필요하면 반드시 신고하고 처벌에 이르는 강력한 절차가 존재했다한국에서 경험해 본 적 없는 교육이라 사회문화적 차이를 느꼈는데이후에 생각하니 차이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 부재한 교육이었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차별과 불평등의 시대에서 차별금지와 평등의 시대로 나아가는 모습이다본 회의 심의를 기다리는 두 법안 <평등에 관한 법률안>과 <차별금지법>이 포괄적이고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하여 미래의 모습을 바꾸는 그런 변화이길 바란다사적인 선의나 운에 맡기지 않고 현실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사회안전망의 그물의 촘촘히 하는 그런 입법의 역사로 기록되길 간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제목부터 분류내용까지 여러 장점이 있다혼자 읽는 것보다 같이 읽고 얘기 나누는 것이 좋은 나는 이 책을 다양한 내용으로 지인들에게 권해 보았다제목만 보고 인문학 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이란 짐작하는 이도 있고과학책이라 더 반갑게 읽고 싶다는 이들도 있었다.

 

일독 후에 김초엽 작가가 완전히 다른 존재와의 접촉이나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누군가를 이해하게 되거나혹은 타인이 나를 이해하게 될 때 느끼는 인식의 전환인식의 확장이 있잖아요거기에 관심이 있어요.” 라고 한 문장이 생각나 반갑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SF팬이었던 친구는 이 책에서 말하는 다정함이 경쟁과 싸움보단 협력과 연대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끈질기게 해온 SF의 메시지라고도 했다부디 그 협력과 연대가 인간 한정이 아니기를 바라는 요즘이다환경을 망가뜨리는 속도가 줄지 않는데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을까.

 

"이 공격성에 관한 비용대비 이익비중을 조금만 비틀어 생각해보아도 친화력이 호전성보다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도덕 원칙을 고심해서 세우고 다양성을 잘 배워 익히지 않고도 운이 좋아 우연히 환경이 마련된 시절이 있었다덕분에 다양성과 관용에 익숙해진 경험을 했다영국에 유학을 가보니 동기가 25명인데 국적이 17개였다세상엔 거의 유엔 가입국만큼 다양한 영어가 존재했고우리는 인간이라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다 달랐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한국에서 사회화되면서 정답과 최선이라 여기던 많은 것들이 의미가 없어졌다살아가는 일은 온통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반복되는 일이었고덕분에 한편으로는 포기하는 것들이 많아지고다른 한편으로는 필요하기 때문에 남은 관념이 구체적 현실의 모습으로 완성되며 퍼즐이 채워지는 효과도 있었다.

 

우리는 큰 규모의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종이다.”

 

범죄를 저지르지만 않으면 괜찮은 것 아닌가늘 도덕과 윤리의 하한선을 분명히 하는 것이 옳다고 믿던 태도가 함께 잘 살기 위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고무척 부담스러웠던 배려와 돌봄의 가치를 그제야 깨달았다. ‘비용편익계산처럼 정성적인 모든 것을 정량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주류 사회와 대비되는 정성 평가법 수업도 들었다동일한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눈으로 보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고 무례하지 않게 반대의견을 낼 수 있으며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다양성은 논쟁이 불필요한 팩트이고 관용친절상냥함다정함은 생존의 필수 양식이었다타인과 맺을 수 있는 느슨하지만 견고한 최고의 연대는 우정이며이는 동종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종과의 관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도 경험했다.

  

동물에 관한 글을 두 편 썼다시선The sense of being stared과 의식Animal consciousness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이란 외부에 노출된 중요한 감각 기관이자 에 다름 아니라는 것따라서 타인과의 관계맺음의 가장 기초적인 행위가 보다viso’라는 것자신조차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담았다다 잊고 살다 이 책을 만나 복기해보았다.

 

"우리의 눈은 협력적 의사소통에 이바지하도록 설계되었다."

 

태어나보니 이미 존재했던 개 오빠사랑했음이 분명한 함께 꼭 붙어 찍은 사진들함께 잠들고 혼자 깨어난 아침의 이별꼬리가 잘리는 학대를 겪고도 씩씩하게 자라 평생 고양이 좋다는 말씀 없으셨던 부모님께 막내 자식으로 효도하는 냥이 동생이들의 다정함을 떠올려본다.

 

동물과의 유대 그것은 우리종이 특별하고 동물들과 다르다는 믿음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그런 까닭에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이 그토록 효과적인 비인간화 전술이 된 것이다.”

 

숫자로 평가되는 물질화되는 것들이 중요한 인간들이 서로를 비인간화하고 은밀하게 무시하는 동안이들은 다정함의 위력을 더 잘 알고 활용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함께 사는 인간을 인간 세상의 기준들로 판단하지 않고 한결같이 전면적인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감동과 자발적 돌봄을 끌어내는 이들이 진화적으로 앞섰다는 실증인지도 모른다.

 

"다정함이 승리의 전략임을

자연의 세계에는 우월이 없다."

 

주의참고문헌 재미있습니다포기 말고 읽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5
이소호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생을 함께 해도 이해할 수 없어 근원적인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나 자신인 경우가 있다타인은 다른 존재라서 그러려니 하는 관대함이 가능하고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향한 오해와 무지도 당연한 귀결이라 여기면 그뿐이다하지만 최초의 이유가 무엇이건 자신과 불화하기 시작한 이는 해법도 중단도 탈출도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불화의 시간이 오래되고 내용이 구체적일수록 생존을 위해 일정 정도의 자아 분리는 필수불가결하게 된다자신을 타인처럼 뜯어낼 수 있다고 믿어야 바라볼 대상으로 대상화할 수 있고그 얼마간의 거리만큼 불화의 속도는 느려진다이것이 가능하려면 자신만의 요령과 비법으로 거듭 시도와 실패를 거듭해야하는 실험의 주체자로 상당한 시간을 살아야 한다.

 

나처럼 대체로 평범한 불화를 겪으며 적당히 자신을 타자화하는 것으로 견딜만한 경우와 달리존재의 구성물들을 철저히 분석하려는 이소호 시인이 불화를 대하는 방식은 신랄하게 해체적이고 지독스럽게 구성적이다전작에서 가족과의 불화에 결별을 고하고 난 뒤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듯 자아와의 불화를 총체화한다.

 

작품으로 남기로 한 이상원래 소호가 무엇이었는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다이 시는 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나는 쉽게 불행해졌고 소비했고 앙상하게 껍데기만 남은 진짜 나를 남기고 싶었다읽고 싶은 소호를 배제하고 배열된 이 는 어떻게 읽히는가다행히 이 시를 쓰는 동안 나는 열렬히 사랑했고 처절하게 버림받았다조금 더 죽고 싶고 조금 덜 살고 싶었다이 작은 차이하나이면서 다수인영원히 반복되는 나는어쩔 수 없는 이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언급했듯이 시인은 분리와 해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기록과 작품과 전시와 설명의 방식을 동원해서 스스로의 불화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정리함으로써 재구성한다분명히 활자화된 기록이자 시의 형태를 유지하는 텍스트이지만일부의 구절을 떼어내어 유의미하게 보고 듣고 감상하기란 힘들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곳에 있는 무언가 있어야 하는 곳에 없는 것을 작업하던 이소호 시인은 데페이즈망 시는 이미 존재하지만 진정한 본질로 돌아가 오로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작업물을 만들어보겠다고 밝혔다. (...) 매일 꿈을 꾸고 꿈에 나오는 모든 인물과 오브제를 현실로 가져와 창작자 말고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글을 쓰는 것이다시인의 만족감 외에는 전부 배제된 초현실의 평행세계를 만들어고립시키고혼합시키고수정하고우연히 만나고크기를 변화하고개념에 개념을 붙이고이중 이미지를 덧대면서 비논리를 논리적으로 쓰는 것이다.

 

시집처럼 보이는 이 책은 참전 기록이자 전시도록이자 오직 독자와 관객의 참여가 더해졌을 때 감각적 감상이 작동하는 예술 공간이기도 하다우리가 알던 방식으로 명명할 수 있는 기법과 소재들 사진그림텍스트 로 구성된 점이 평범한 독자로서의 나의 접근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느꼈다.

 

최초의 일독 후에는 할 말이라곤 떠오르지 않았다가까이 쳐다본다고 작품 이면의 메시지가 패턴처럼 떠오르지는 않았다옅은 감각처럼 남은 감상을 차라리 그림이든 몸부림이든 고함이든 여타의 매체로 표현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표현 가능한 방식인가 생각해 해보았다.

 

글쎄시가 뭘까이미지를 포착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글씨로.”

 

한동안 책과 시간을 함께 보내다보니 시인이 불온하게 직시하는 것을 나도 볼 수 있게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뭐라도 써보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뜨거운 불화들은 주체의 별스러움 탓이 아니다.

개별적 욕망이 끌어낸 사적 해프닝이 아니다.

오직 지난하고 집요하고 악의적으로 여성들을 조련하고 학대하는

폭력적 사회의 시선과 강고한 시스템을 고발한다.

 

우리끼리 통하는 언어로 쓰인 편지를 주고받은 기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홍범도 - 송은일 장편소설
송은일 지음 / 바틀비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는 무진년(1868)에 평양서 태어났습니다제 고조부는 80년 전에 큰 역란을 일으킨 홍경래입니다멸족되다시피 했으나 증조부가 그 난리통에서 도망쳐 살아남았죠그 덕에 제가 태어난 거고요.”

 

어린 날 전해 듣기로 초승달처럼 가녀렸던 어머니는 범도를 낳던 즈음에 하루 한 끼니나 간신히 먹었다. (...) 아버지가 부역 나갔다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몇 달째 운신을 못하던 즈음이었다어머니는 자신에게 남은 피와 살과 뼈를 그러모아 범도를 낳았다. (...) 어머니는 핏덩이한테 빈 젖을 물려놓은 채 기진했고 아기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 젖동냥을 해서 아들을 키웠던 아버지는 범도 아홉 살에 버섯을 따러 나섰던 벼랑에서 추락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내용을 읽고 잠시 책을 내려놓았다신분제 사회에서의 차별이 얼마나 극심하고 한이 되었는지조선 시대 후기와 식민지를 살던 이들은 돈이 생기고 기회가 오면 너나없이 족보를 사들이고 성씨부터 마련했다반상의 차이가 성씨 구분에 있다고들 하는데조선 시대에는 양반을 제외하면 성 자체가 없거나 쓸 일이 없는 이들이 인구의 대부분이었다.

 

양반 인구가 5~6%만 넘어도 부양하기에 힘든 생산력이었으니 오늘날 가정마다 보유한 족보란 것은 역사적 진위가 불명한 것이 대부분이다왕조가 사라지고 공화국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양반되기가 소원이었고 그렇게 되었으니심정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역방향을 향해 달린 아이러니가 어둡고 깊고 처절하다.

 

왕족은 공공연히 살해당하고관료들은 친일로 구명하고양반들은 기득권을 지키자고 의병을 모집했으나 갓 쓰고 말 타고 호령하던 시절이었다전투와 전쟁을 실질적으로 치르며 독립운동을 하고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은 평민이었다.

 

나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라는 구절을 은밀히 의심한다일제에 빼앗긴 그 나라는 차별과 모멸과 박해와 죽음이 덜하던 나라였을까.

 

무례하든무엄하든 하겠지요상놈이 양반들 앞에서 떠들고 있으니 말입니다하극상이요? (...) 양민이 양반한테 덤볐다고 하극상입니까이 호좌의진이 뭘 하려 모인 집단인데요어찌됐든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나라에서 양반이니 양민이니 하는 신분을 철폐했지 않습니까그런데 동지한테 하극상이라는 죄를 씌워 목을 칩니까?”

 

삼일 운동으로 건립하고자 했던 것은 왕조의 복귀가 아니었다대한민국 공화국 건립의 기초가 삼일 운동의 정신이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고아가 되어 아홉 살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해나팔수제지공장 노동자승려산포수를 하며 신분제의 가장 낮은 곳을 살아온 홍범도는 사격술로 외세를 겨눈다아내와 아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도 끝까지 총을 내리지 않았다.

 

숨어서 한두 명 저격하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전과 기동전이라는 전략을 펼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압록강을 건너 다시 국내로 진공하는 작전을 수십 회 펼쳤다.

 

원폭에 항복한 일본이 떠난 땅에는 미군이 주둔했고 친일파는 숙청되지 않았으며 한반도는 절단되었다홍범도 장군은 고려인으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다 먼 땅에서 생을 마쳤다.

 

그리고 2021년 8월 15일 온기를 잃은 가벼운 유해로 돌아오셨다보고 싶었던 모습이 얼마간이라도 이 땅에 있었을까귀향을 비추는 한국 언론이 드물어 그 모습을 따로 찾아봐야했던 광복절이었다.

 

하느님도 임금 영웅도 우리를 구하지 못하리.

우리는 다만 우리 손으로 해방을 이루리자유를 누리리.

춥고 덥고 배고프고 헐벗고 고될지라도

일제 강도 무찌르고 우리나라 되찾으리꼭 찾으리.

간절한 의지 불굴의 용기로 싸우리빛나리.

끝내 끝끝내 이기리끝내 끝끝내 이기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F장르에 대한 애정 고백을 하며 살았다한국 SF작가와 작품들이 귀하다는 것이 늘 아쉬웠는데 어느 순간 주목 받는 작가도 작품도 등장하기 시작했다김초엽 작가의 전작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게 생경한 단편 분량이었음에도 무척 설레며 읽었고새롭고 재밌는 상상을 시작한 작가를 장편으로 다시 만나 그 세계를 제대로 방문할 수 있길 내내 고대했다.

 

그러한 애정과 기대와는 별도로 최근 SF작품세계에 대한 관심이 많이 저하되었다즐겁고 반갑게 만날 수가 없었다근래 작품들은 배경을 근미래나 초근미래로 잡는 설정이 많았고이는 기술과학의 빠른 개발에 기인할 수도 있지만다른 한편 기시감과 현실 밀착도가 아주 높아 불안했다특히 여름 내내 세계 곳곳이 불타고 물에 잠기는 현실은 디스토피아와 판데믹을 이야기 소재로 즐기는 시절의 종말을 고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보는 것이 현실인지 혼란스러운 엄중한 시절그동안 갖가지 주장으로 환경위기는 없다고 했던 이들은 드디어 침묵하는 것인지그조차도 위기의 실증처럼 느껴져서 불길했다대형 산불들폭우폭염으로 캐릭터들이 아니라 현실의 사람들이 죽었다기후란 단지 불편한 기상현상만이 아니다식량을 건 전쟁이란 최악의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세상은 망해 가는데어른들은 항상 쓸데없는 걸 우리한테 가르치려고 해."

 

과학은 분명한 답을 내놓았고 상황은 심각한데 사람들은 여전히 빙하가 갈라져서 북극곰이 물에 빠져 죽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뭐가 대수냐고 생각하는 듯하다화석연료도 펑펑 쓰고 쓰레기도 대량생산하고 우주로 놀러갈 계획에 즐겁다물론 그럴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구 끝의 온실>에서 살아남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물들처럼.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우린 정해진 멸종의 길을 걷고 있어설령 돔 안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더라도그런 인류가 만들 세계라곤 보지 않아도 뻔하지오래가진 못할 거야.”

 

인간이 만들어서 심은 덩굴줄기식물 모스바나는 독성이 있고 전파력이 빨라 지구를 뒤덮을 지도 모를 위험한 존재이다더스트 역시 연구소에서 나노 연구를 하던 인간의 실수로 탄생한 인공 물질이다어떤 인간들은 더스트에 내성이 있는 다른 인간들을 내성종 실험연구 대상으로 삼아 가두었다.

 

인류 종말을 초래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활동이다제 죽을 길을 이토록 부지런히 마련하는 이상한 생물종으로서 우리는 어쩌다 이런 진화의 여정을 걷게 된 것일까어떤 의미인지 무척이나 궁금한 20% 이하의 생물 구성을 가진 80% 이상의 기계 혹은 여전히 인간인 레이첼의 존재와 행위와 연구 동기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 메시지일까.

 

저자 자신도 과학을 전공했고 이번 작품에 다룰 식물 분야에 관해서는 원예학을 전공한 부친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그래서 이 책은 과학 연구처럼 조사하고 분석하고 재구성하고 논리적 결론을 내리고 실험에 영향을 준 모든 요소들을 고려하고 언급하는 방식의 치밀한 아름다움과 완결성을 갖췄길 기대했다.

 

정교한 SF는 개연성과 논리로 가득한 스토리 퍼즐과 같아서구멍이 보이거나논리가 실종되거나감정이 폭발하거나뜬금없는 사랑이야기가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기대한대로 섬세하게 창조된 멋진 작품이었지만 도저히 분리할 수 없었던 현실의 상황이 문장을 뒤덮고 감상을 흐리게 했다존재했던 모든 SF 작품들이 예언서가 되지 않길 바란다.

 

지수는 자신이 조금씩 사람들이 가진 어떤 활력에 물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수년 뒤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일의 삶만을 생각하는그러나 그 내일이 반드시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데에서 오는 매일의 활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