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니는 어~~ 가자고 졸라댔다. 새로 사준 우산을 들고는 비가 와도 나갈 수 있다는 자기 입장을 완강히 표명하며 현관에 굳세게 버티고 섰다. 영화를 보려면 3시 3,40분엔 집을 나서야 하는데.. 시간을 보니 세 시가 아직 좀 덜 된 시각..
비니에게 샌들을 신기고 나도 커다란 우산으로 골라 들고, 디카 챙겨서 집을 나섰다. 단지나 한바퀴 돌고 들어오자는 생각이었다. 집에만 있기가 답답할 비니가 가여워 보이는 데다가 좀 있으면 엄마 아빠가 자기는 놔두고 놀러나갈 상황이니 이 정도 외출의 즐거움이라도 비니에게 나눠줘야할 것 같았다.
우산을 쓴 비니 사진도 찍고, 단지 화단에 핀 초롱꽃이랑 대나무 화단에 올라오는 죽순들도 찍었다. 죽순들 올라오는 모습이 너무 멋지다. 우후죽순이란 말이 있듯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쑥쑥 키가 크는데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도 하고 가슴 속이 후련해지기도 하고 그렇다
비니는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재미있는지 날 바라보며 웃는다. 날 바라볼 때마다 우산이 뒤로 기울어 자꾸 비를 맞았다. 그러면 빗방울이 비니 얼굴로 떨어지고 비니는 흠칫 놀라고.. ㅋㅋ 비에 젖은 길도 비니는 신기한가보다. 발을 질질 끌며 젖은 길의 감촉을 느끼는 것 같다.
단지 안을 한 바퀴 돌고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자 했는데 싫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갈 시간이 다 됐는데, 큰일이네.. 하고 난감해하는 순간 지니가 구원병처럼 등장했다. 아빠가 갈 시간 다 됐다고 엄마 불러오라고 시켰단다. 지니에게 비니를 맡기고, 비니에겐 "엄마가 까까 사올게~"라는 말로 외출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집을 나섰다.
오랫만에, 정말 너무 오랫만에 차 앞자리 조수석에 앉아본다. 비가 와서 더 좋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것보다 이렇게 비가 오는 도시 풍경이 더 운치있다. 극장에 도착해서 매점에 들러 녹차음료를 두 병 사고, 긴 상영시간(거의 세시간이다) 동안 편안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영화를 보기 위해 미리 화장실도 들르고 나서 조니 뎁을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 제 8관으로 들어섰다.
챙길 아이들 없이 영화를 보기는 결혼하고 처음인 것 같다. 좋으면서도 어쩐지 옆이 허전하다. 영화 보는데 옆에서 "엄마, 저게 어떻게 된거야?"하고 말 시킬 아이가 없다는 거, "엄마, 화장실 가고 싶어."하며 영화의 맥을 끊을 누군가가 없다는 것, "엄마, 콜라 흘렸어."하는 비상경보가 작동하지 않을 거라는, 이 한가하고 평화로운 상황이 낯설었다. 전업주부로서의 직업병이지 싶어 멋쩍게 웃었다. 내가 웃는 걸 보고는 옆지기가 "남편이랑 둘이 영화보러 오니까 좋아?"하면서 헛소리를 한다. "아니, 조니 뎁 만날 생각을 하니까 좋아."하고 옆지기와 착각을 박살내주고..ㅋㅋ
영화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조니뎁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1편이나 2편에 비해서 잭 스패로우의 활약이 좀 무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장난끼와 엉뚱함, 특유의 걸음걸이와 낙천적 기질이 전편들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대신 엘리자베스라는 캐릭터가 차지하는 자리가 넓어졌고 그만큼 두드러지는 느낌.. 여성의 입장에서 기뻐해야 할 일이겠지? 그리고 <캐리비언의 해적>의 못말리는 덤앤더머들 '펜텔'과 '라게티'의 비중도 전편들 보다는 높아졌다. 덤앤더머의 역할이 전편들을 통해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모양이다.
주윤발의 연기를 보고 난 감상은.. 뭐랄까. 악당으로서의 카리스마가 부족했다고나 할까? 주윤발이 갖고 있는 선한 이미지,, 때문인지, 악당일 때조차도 정의와 의리, 선을 향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고뇌하는 캐릭터를 보여줬던 주윤발에게 단순,무식,과격의 해적 악당으로서의 이미지가 잘 부합되지 않는 둣했다. 주윤발의 연기도 어쩐지 조니뎁의 분위기를 흉내내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고.. 죽는 장면에서나 그의 본연의 이미지가 되살아나면서 연기가 자연스러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캐스팅 실패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문어악당 데비의 러브스토리와 눈물연기가 오히려 가슴 짠하게 다가왔다. 여신 칼립소는 너무 허망했지만. 뭐야, 그게? 잔뜩 긴장시켜놓고 겨우 그 정도의 파워만 보이고 흐지부지 사라져버리다니.. 너무 많은 인물과 이야기가 얼키고 설키고 꼬여들면서 제대로 잘 풀어내기가 벅찼나 보다.
영화 곳곳에서 디즈니의 냄새가 나는 것도 좀 그랬다. 특히 작은 잭스패로우들이 등장해서 잭스패로우 귀에 대고 쫑알거리는 모습이나 별이 총총히 뜬 밤하늘이 그대로 바다에 비쳐서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된듯한 공간을 배가 지나가는 장면 같은 거..
재밌었던 장면.. 조니 뎁과 그를 구하러간 바르보사와 엘리자베스, 윌 터너와 그 부하들이 무풍지대의 바다를 빠져나가는 장면. 물이 반쯤 담긴 병을 뒤집듯이 바다를 뒤집어 (정확히 말하자면 배를 뒤집어) 이승과 저승의 차원을 바꾸는 바로 그 장면이다. 헤~~~ 발상 자체가 참 재밌다는 생각에 넋을 놓고 보았다.
영화관을 나서니 저녁 일곱시다. 옆지기가 차를 갖고 오는 동안 (차를 옆지기 사무실 주차장에 주차시켜놓았었다) 극장 앞에 서서 색색의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사람들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비가 오는데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를 위해 밝은 노란 색의 원피스를 산뜻하게 입고 나온 젊은 아가씨 - 발뒤꿈치에 반창고를 붙인 걸로 봐서 아가씨가 신은 샌들이 애를 먹이고 있는 중인 것 같다 - 후줄근한 바지에 빨간 등산 조끼를 걸치고 극장으로 뛰어들어오는 아저씨와 아줌마, 마주 서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들..
극장에서 틀어놓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유재하의 노래들.. 참 오랜만에 듣는 노래다. 비 내리는 도시, 극장 앞에서 듣기에 딱 좋은 노래다. 옆지기가 차를 좀 천천히 갖고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여기서 이 풍경들을 바라보며 그냥 서 있고 싶은데.. 옆지기의 차가 보인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지.
어디가서 커피 한 잔이라도 하고 들어갈까 하는 옆지기에게 애들 저녁밥 걱정을 늘어놓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아줌마다. 나와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밥값보다 비싸다는 것도 잘 아는, 난 아줌마다. ㅎㅎㅎ 집근처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집에 들어가니 집안이 난장판이다. 이 지엄한 현실~~ 순두부찌개를 하려고 장을 봐왔건만 아이들은 비니 봐준 걸 핑계삼아 맛있는 걸 시켜먹자고 난리다. 결국 빨리 되는 중국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집안을 대충 치워놓고 녹차 한 잔을 마시며 궁리해본다. 다음엔 뭘 보러 갈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