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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중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책꽂이에 꽂혀있던 세계문학전집의 갈색 책등을 훑어 보고 있었다. 아마 무지 따분하고 지루한 날이었나보다. <죄와 벌>, <적과 흑>, <전쟁과 평화>, <보봐리 부인>, <이방인>... 여기저기서 들어본 제목들이 가지런하게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 중에 내 눈을 붙잡는 제목이 있었다. <달과 6펜스>. 단발머리 중학생 여자아이가 보기에 그 책은, 묵직하고 심각한 다른 제목들 사이에서 무척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제목으로 돋보이고 있었다. 한 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뽑아 들었고, 방학 때였는지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이 책을 붙들고, 제목에서 느꼈던 낭만과 감성의 문맥을 만나려고 애쓰며 씨름했던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지루하고 힘든 씨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긴 시간이 흐르고 이 책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읽었다'는, '읽어냈다'는 사실 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만났을 문장 한 줄은 커녕 낱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누가 그 책이 어떤 내용이었냐고 묻는다면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과연 읽었다는 건 사실일까? 그 날 나는 도대체 책을 붙잡고 뭘 했던 걸까? 말 그대로 읽은 게 아니라 씨름을 했었나 보다.
쉰이 멀지 않은 나이에 다시 이 책을 펼쳤다. '읽었다'는 사실만 있을 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책. 그런데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범상한 삶에 대한 낭만적 정신의 저항'(p.11)이라는 글 위에서 잠시 멈췄다. 하하, 웃음이 났다. 이런 류의 글이 이어진다면 여중생이었던 내가 이 책과 어떻게 공감을 나눌 수 있었겠는가. 오래 전 그 여중생도 틀림없이 범상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범상한 삶이 주는 무기력과 공허감 따위는 없었다. 심심하고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조차도 다가올 미래에 대한 반짝임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대책없는 낭만의 꿈은 꾸었을지언정 '낭만적 정신의 저항'의 처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나는 저 문장 하나로 이 책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처럼 책을 읽는다기 보다 씨름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섬세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행간의 깊은 의미를 짚어내려고 눈을 부릅뜨고 읽지 않더라도, 이 책이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쓴 소설이라는 건 알게 된다. 산업혁명 이후 변화를 겪으며 문명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타히티로 떠난 고갱에 대한 이야기는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고갱과 겹쳐지는 인물은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인데, 고갱의 비참했던 삶에 소설의 극적인 픽션이 더해지면서 비상식적이고 기괴한 성품을 얻게 된 스트릭랜드는 독자를 책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얼마쯤 책을 읽어가다 보니까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에서 자꾸 니코스 키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다. 아마도 허위와 가식으로 뒤덮힌 세상을 조롱하듯 거침없이 신념대로 밀고 나아가는 성격 때문인 것 같은데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내 어렴풋한 기억을 더둠어 보자면 조르바가 건강하고 유쾌하고 자유롭게 삶을 통째로 끌어안고 살아간다면, 스트릭랜드는 비극적 운명의 그림자를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리스인 조르바>도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겠구나..)
예를 들면 이런 글들. 증권브로커였던 스트릭랜드가 그 안락하고 편안한 삶과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떠나고 난 후, 글 속의 화자인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의 부탁을 받고 파리로 가서 스트릭랜드를 만나는 장면이다.
한 번은 이렇게 비꼬아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칸트가 한 말인데요."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요."
이런 인간을 상대로 양심에 호소해 보았자 효과가 있겠는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었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중략)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중략)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p. 77
한편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에서는 이런 글이 나온다.
재수없는 사람은 자기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스스로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만사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험한 길, 신성한 길을 따르다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을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공격이 차단된 하찮은 확신의 테두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지락거리다 보면 아무 도전도 받을 수 없다.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강력한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뿐이다. 확신은 내 경험의 벽을 허물고 내 영혼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p.507
스트릭랜드와 조르바가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뒤적이다 발견한 문장들이다. 양심이니 질서와 안녕이니, 정해진 순서를 따라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러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이 스트릭랜드와 조르바 앞에서는 여지없이 갈가리 찢겨져서 편안하고 안락하고 폼나게 사는 게 꿈이었던 내 자신이 지네만도 못한 보잘 것없고 좀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자기만의 확신을 가진 두 인물 앞에서 나는 놀라고 당황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통쾌한 해방감과 막연한 동경과 경외심을 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찬찬히 두 책을 읽다 보면 서로 비슷한 듯 어울리지 않는, 어딘가 통하지만 사뭇 다른 두 인물을 드러내줄만한 더 적당한 문장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스트릭랜드 주변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을 책을 통해 관찰하는 것도 씁쓸한 재미를 주었다. 가난하고 날 것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지만 진솔한 사람들과 우아하고 지적인 영국 중상류층 삶의 가식과 허례가 대비를 이루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면면의 틈바구니에는 내 모습이 슬쩍슬쩍 보이기도 한다.
스트릭랜드는 문둥병에 걸려 자기가 살던 낡은 오두막 벽에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함께 살던 원주민 여자 아티에게 자기가 죽으면 작대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오두막을 완전히 태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실제 고갱은 타히티에서 심장마비로 죽었고, 유언같은 작품으로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작품을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불에 타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현재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묘사한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작품이 작가가 이 작품을 염두에 두고 묘사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달과 6펜스>를 읽고 나서 고갱의 마지막 작품을 보는 내 마음은 그 전과 같지 않다.
여전히 달을 향해 날아오를 수 없는 나. 앞으로도 달을 향해서 날아오를 일이 없을 것 같은 나.
달을 잊지 않고 매일매일 바라보기라도 한다면 좋을 텐데, 난 자주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달마저도 잊고 산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56쪽
삶의 전환은 여러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그 전환이 광신자에게처럼 단숨에, 사도들에게처럼 광포하게 왔다고나 할까. -75쪽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90쪽
그야 인간이라는 예측불능의 존재를 두고 얘기할 때는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어쨌든 블란치 스트로브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생각했던 인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도무지 납득이 안 되었다. 친구의 신뢰를 비정하게 저버린 행위는 이상할 것이 없다. 남의 불행이야 어찌 됐든 제 기분만 만족된다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것, 그것은 그라는 인간에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었다. 고마움이라고는 전혀 몰랐고 동정심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면 으례 갖기 마련인 감정들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에게 왜 그런 감정이 없느냐고 탓한다면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야수더러 왜 그렇게 사납고 잔혹하냐고 탓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58쪽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실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211쪽
인생은 우스꽝스럽고 지저분한 일들의 뒤범벅이고 웃기에 적절한 소재였다. 하지만 웃으려니 슬펐다. -223쪽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이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사 작위를 가진 사람에게 내가 어찌 감히 말대꾸를 하겠는가. -260쪽
세상은 이상한 짓을 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는 것, 사람은 자기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생겨먹은 대로 된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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