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리 - 2024 공쿠르상 수상작
카멜 다우드 지음, 류재화 옮김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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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는 유명한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책을 추천받는다는 느낌도 들고,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하면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그래서 인터넷 서점에서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하면 일단 살펴보게 돼. 그 중에 프랑스 콩쿠르 수상작은 더 눈에 들어온단다. 왜냐하면 그 동안 읽은 프랑스 콩쿠르 수상작들은 문학상 수상작 치고 재미도 함께 보장되었거든.. <오르부아르>, <그녀를 지키다>, <아노말리>, <타니오스의 바위> 등 그 동안 아빠가 읽은 프랑스 콩쿠르 수상작들은 작품이 이야기하려는 묵직한 주제와 함께 재미도 있었기 때문에 늘 기대가 되었단다. 그래서 몇 달 전 신간 코너에서 본 2024년 콩쿠르 수상작 카멜 다우드의 <후리>라는 작품을 책소개도 자세히 보지 않고 샀단다.

책을 받고 천천히 책소개를 읽어보니 이 책은 실제 있었던 알제리 내전을 배경으로 알제리 작가 카멜 다우드라는 사람이 쓴 소설이란다. 알제리 작가로는 처음으로 콩쿠르를 수상한 작가라는구나. 프랑스 콩쿠르는 프랑어로 작품 중에서 선정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프랑스 사람들이 많이 수상을 하겠구나. 그런데 알제리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있기 때문에 아직 프랑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구나.

이 책은 알제리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했잖아. 그래서 사전 지식을 조금이나마 습득하고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알아보았단다. 알제리 내전은 엄청 가까운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더구나.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약 10년간 일어났대. 1991년 알제리 역사상 처음으로 다당제로 총선을 치렀는데, 당시 정부에 불만을 갖고 있던 국민들이 이슬람주의 정당인 이슬람구원전선(FIS)의 손을 들어주었어. 그렇게 되자 정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선거를 무효화하고 FIS를 강제 해산시켰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FIS에서도 가만 있지 않고 무장 조직을 구성하였는데 극단적인 무장 이슬람 세력까지 합류하면서 정부군과 이슬람 세력 간의 내전이 벌어진 거야. 내전이 길어지면서 이슬람 반군은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하면서 지지율을 급락하였고, 그로 인해 기존 정부가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내전은 끝이 났단다.

이 내전이 시작되기 전과 끝난 후 권력 구조는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구나. 죄 없는 국민들을 포함하여 수십만 명의 희생자만 있었을 뿐. 그리고 그 아픔을 짊어지고 가야 할 가족들. 알제리에게 이 내전은 치욕의 역사이고 숨기고 싶은 역사일 것 같구나. 아빠가 간략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유튜브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될 것 같아.

 

1.

소설의 시작은 2018 6 16일 오랑이라는 지역의 미라마르라는 지역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26살의 오브라는 여자였어. 오브는 아랍어로 새벽이라는 뜻이고, 프랑스로 새벽을 파즈르라고 부르기 때문에 파즈르라고 부르기도 한대. 오브는 아픈 과거가 있었단다. 1999 12 31일 오브가 다섯 살 때 반군에 의한 민간인 대학살이 있었어. 하드 셰칼라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대학살이라서 하드 셰칼라 대학살이라고도 불렀어. 하룻밤에 천 명 가량의 민간인들을 참수시켜 죽인 잔인한 사건이었단다. 특별한 이유도 없는 처단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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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87)

1999 12 31일 밤, 이슬람 무장 단체의 카티바들은 우릴 처벌하기로 결정했어. ‘낮의 국가의 사람들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렇게 했지. 한 달 전, 우리 마을의 전기가 끊겼어. 테러리스트들이 폭탄을 만들고 부품을 용접하는데 쓸 전기를 그들에게 제공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어. 우린 어둠과 차가운 태양 사이에 내버려졌어. 한겨울은 고통스러웠고, 우리는 돌처럼 굳어 각자의 침묵 속에 몸을 감싸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자매들, 아버지들, 어머니들, 불빛에 비쳐 붉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 이건 우리에게 겨누어진 무기가 뭐냐에 따라 이쪽저쪽을 오가는 놀이였어. 우린 긴 전쟁의 끝에 도달해 있었고, 나라 안에서는 시간도 감각도 뒤엉켜 널브러져 그들끼리 서로 죽였어. 어떤 이들은 신에, 신의 약속에 절망해서, 또 어떤 이들은 전우에 대한 배신과 의심으로 피폐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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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때 오브의 엄마와 언니가 죽고 말았어. 그런데 학살자가 실수로 오브의 목을 제대로 베지 않아서 오브는 살아남을 수 있었어. 하지만 목부터 얼굴까지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남았고, 성대를 다쳐서 말을 할 수 없었고, 음식물도 목에 구멍을 내서 관으로 음식을 넣어야 했어. 목숨만 간신히 구했다고 할 수 있겠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고작 다섯 살이었는데당시 자원 봉사를 하고 있던 변호사 하디자가 오브를 알게 되고, 입양해서 보살피고 키웠단다. 하디자는 오브의 목을 고치고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단다. 조금이라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의사가 있다면 어디든 갔단다. 지금도 벨기에 브뤼셀에 의사를 만나러 갔단다.

내전이 끝나고 국가에서 보상을 해주어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것이 삶의 의미를 줄 수 있을까?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야. 2018년 현재 오브는 임신을 한 상태란다. 어쩌다 임신을 했는지 나오지는 않지만, 엄마 하디자에게도 알리지 않았어. 아마 실수로 임신이 된 것 같구나. 오브는 낙태를 하기 위해 알약 3개를 구해 놓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이름을 후리라고 했단다. ‘후리’는 이슬람 전통에서 천국에 간 의인에게 보상으로 주어진다고 믿어지는 아름다운 처녀정화된 아내를 뜻한다고 하는데, 아기에게 그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가 소설 속에 나왔었다면 아빠가 놓친 것 같구나.

어느날 미용실이 강도들에게 도둑 맞는 일이 일어났어. 강조로 위장한 이슬람 세력인 것 같았으나 경찰은 미온적으로 대응했단다. 내전이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이슬람 반군의 불씨가 남아 있는 것 같았어.

...

벨기에 브뤼셀에 간 하디자는 날마다 오브에게 전화를 했단다. 오브가 말을 하지 못해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안부를 전했어. 브뤼셀에 갔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는구나.

….

앞서 알제리 내전은 알제리 입장에서 봤을 때는 숨기고 싶은 역사라고 했잖아. 그래서 알제리에서는 알제리 내전에 대한 연구와 반성을 하지 않고 숨기려고 한다는구나. 알제리 내전보다 훨씬 오래된 1950년대 알제리 독립 전쟁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명확한 사료들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오래 되지 않은 알제리 내전에 대한 자료는 명확하지 않았어. 희생자 수도 여기저기 수치가 다 달랐다고 했어. 자신의 숨기고 싶은 역사일수록 정확히 기록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더욱이 화합의 이유로 2005년에는 전쟁관련자들을 사면을 해주었다고 하는구나. 학살을 주도했던 이들도 산 속에 숨어 지내다가 다 내려올 수 있었어. 아니, 희생자들은 그들을 용서도 하지 않았는데, 국가가 알아서 그들에게 사면을 해주다니 희생자들은 이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는지

 

2.

오브는 낙태를 하기로 마음 먹기는 했지만, 그 다짐은 흔들렸단다. 그래서 죽은 언니에게 물어보려고 언니가 묻혀 있는 묘지를 찾아가려고 했단다. 가는 길에 아이사라는 중년의 남자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어. 아이사라는 사람도 내전의 아픔을 갖고 사는 사람인 것 같았어. 그는 독특한 방식으로 내전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했어. 운전하는 동안 쉬지 않고 말을 하는데, 오브에게 숫자를 이야기하라고 하고 숫자를 이야기하면(오브는 말을 못하지 않나? 필담을 나누었나?) 그 숫자와 연관된 내전의 사건을 이야기했어. 그 사건이 언제 발생했고 그 사건으로 몇 명이 죽었다는 것을 일의 자리까지 정확히 알고 이야기를 했어. 아이사는 중년의 남자다 보니 내전이 시작했을 때부터 끝날 때까지 겪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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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2)

1990년의 전쟁에 대해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 여기선 나 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날짜 하나하나, 이름 하나하나, 나는 떠올려, , 전부는 아니지, 수만 명 전부는, 그래도 내 머릿속에는 불쌍한 실종자들이 정말 많이 들어 있어. 그게 진짜 이야기야. (그의 목소리가 판결처럼 진중해져.) 20만 명의 사망자가 있는데 그걸 다룬 책도, 영화도 없어. 목격자도 없대. 침묵뿐! 너도 아무 말 안 하는 거냐! 학교에서 내전에 대해 안 가르쳤지? 이걸 보는 사람들한테 넌 뭐라고 말해? (그는 내 튜브를 또 가리킨다.) , 그 전쟁이 시작됐을 때 스물다섯 살이었어. 그 전쟁은 바트나에 있는 우리 서점에서 시작됐어. 정말이야, 1992 3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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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사도 내전으로 많은 가족들을 잃었고, 아이사도 다리를 다쳐서 평생을 절룩거리며 살아가야 했어. 그에게 내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던 거야. 국가가 그 사건을 덮으려고만 하니 그라도 알리기 위해서 내전 당시 일어났던 만행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 그 또한 2005년에 있었던 사면 조치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단다. 희생자들의 의견을 전혀 반영되지 않은 사면이었거든국가의 희생자들이 아직도 가슴 찢어지게 살아가는데 용서하라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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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이제 그 화해랑 사면 투표 이후로, 개들은 대낮에도 버젓이 돌아다니고, 기도도 하고, 심지어 사람들을 깔보듯 훑어본다니까. , 그들이 전쟁에서 이긴 거야. 물론 군인들도 이겼어. 오직 죽은 사람들만 진 거야.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은 20만 명만 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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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는 함라라는 여자도 만났단다. 함라도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더구나. 18살 때 함라는 반군들에 의해 산으로 끌려가 강제로 결혼을 하고 강제로 임신을 했대. 전쟁은 여자들에게 더욱 잔인한 것 같구나. 그렇게 함라는 원치 않은 결혼을 하고, 남편이 테러리스트이다 보니 자신도 테러리스트의 일원이 된 거야. 남편이 내전 중에 죽자, 또 다른 남자와 강제 결혼을 하게 되었어. 그리고 내전이 끝난 뒤 함라에게는 여성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고, 테러리스트라는 이유로 3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고 하는구나. 더 웃긴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2005년에 있었던 사면 조치에서 여자들은 배제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함라는 평생 테러리스트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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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

내 이름은 함라예요. 가끔은 솔직히 내 이름이 정말 그런가 의심스럽기도 해요. 여러 번의 삶과 죽음을 겪은 사람에게 얼굴 하나는 부족해요. 동생, 내가 바라는 건 이거예요. 우리를 위한 권리를 얻어 주는 거. 폭행당한 여자들, 아버지 없는 아이를 가진 여자들, 고발당한 여자들,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여자들, 납치당한 여자들, 실종된 처녀들의 권리를…… 이제 내게 남은 명예는 단 하나, 바로 내 딸뿐이에요. 난 딸아이가 결혼 준비하는 걸 돕고, 그 아이가 행복하기를, 자식도 많이 낳길 바래요. 그 아이 결혼 결혼식에 참석해 눈물을 쏟지 않고 춤추고 싶어요. 가서 내 이야기를 해요. 올리브 나무에게, 돌에게, 길에게도 물어봐요. 날 와서 다시 찍어 줘요. 내 딸이 결혼할 때까지는 살고 싶어요. 내가 그 애 혼수품을 만들어 온 게 몇 년째예요. 그 아인 긴 핼렬과 수많은 여가수들의 노래 속에서 행복할 거예요. 가끔은 잘생긴 청년들이 우리 창문 밑을 지나가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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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오브, 아이사, 함라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정말 읽는 내내 답답하고 억울하더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도 광주민주화 운동 등 국가폭력에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생각났단다. 더욱이 5월이기도 하고우리나라는 늦게나마 국가에서 그들의 명예를 되살려주려고 노력을 해주었지만,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니 안타깝구나.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민주주의 시스템을 견고히 해야겠구나. 알제리도 그런 내전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이 책은 알제리가 숨기고 싶어하는 역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구나. 그 대신 알제리에서는 출판 금지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런 것을 보면 알제리가 민주주의 시스템이 잘 정비하고 있는지 의심이 드는구나.

아참, 소설의 결말은 오브가 결국은 딸을 낳기로 했단다. 그 딸이 오브에게 미래가 되고 희망이 되고 삶의 의미가 되길 바란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이거 보여?

책의 끝 문장: 그때 함께 별을 다시 세어 보자.



이 전쟁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난 이렇게 대답했어.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다." 아마도 역사가 우리에게 주지 않은 천국에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굶주린 신에게 먹을 걸 바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우리 어머니들의 자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식민 통치자들이 떠난 이후 땅과 농장과 살림살이를 나누기 위해서였을까. 이십 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우리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지 않았어. "이 전쟁은 얼마나 지속되었는가?" 시험지가 물었어. 십 년, 아니면 거의 그만큼.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불행은 날짜를 지워버리고, 절대로 못 박지 못하게 하지. - P149

사람은 생애 첫날을 기억할까? 그 피를? 그 비명을? 배가 힘을 주고 밀어내는 수축 감각을? 그래, 난 기억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시간까지 기억하는 행운을 가졌지. 그래, 내 얼어붙은 가슴 속에 품은 내 신비로운 비취야. 나는 알라의 두 가지 비밀, 오직 그분만이 답하실 수 있는 두 가지 비밀에 손이 닿는다. 나는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야. 거꾸로 뒤집힌 존재, 신비한 물고기야. 난 2000년 1월 1일, 딱 떨어지는 그날에 태어났어. 그리고 바로 전날인 12월 31일에 죽었다. 딸아, 맹세하건대, 쿠란에 기록된 어떤 예언자도 이렇게 두 날짜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할 순 없을 거다. - P309

네가 굳이 와서 숨 쉬고, 살고, 하루하루 날을 헤아리고 싶어 하는 이 나라에서, 여자는 큰 소리로 기도할 권리조차 없다. 애도하며 흐느끼는 소리도, 발꿈치로 인도 밟는 소리도 들려선 안 된다. 여자는 노래를 하거나 모스크에서 설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소리는, 나의 오래된 달님아, 쾌락의 억눌린 비명과 금세 바로 잊히는 출산의 신음으로만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우리 안에서, 또 우리 위에서 벌거벗은 그 두 순간, 우리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언제나 남자들의 수치심 속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 P461

아무 손도 대지 않은 진실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마침내 몸을 던질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이번에는 내 속으로 잠수하듯 뛰어들어, 내 상처를 다시 열고, 꿰맨 자국을 뜯어야 했다. 그리고 내 ‘미소’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래, 네가 내게 목소리를 되돌려줄 거야. 난 속으로 속삭였다. 나는 한 권의 책이야, 행복한 결말을, 아니 적어도 진실한 결말을 찾고 있는. 안 그러니? 이번에 나는 천 개의 인격이 되어 내 균열 속으로 뛰어들어, 내 안 깊은 곳으로 내려갈 거야. - P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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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69)

오마니……

부르며, 나는 외할머니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오세희를 연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진정 어려운 건 또다시 외할머니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 혼자 남은 외할머니의 외로움을 상상해야 한다는 것, 그런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내게 그랬듯 딸이 겪을 외로움을 걱정했지만 우리 셋 중 가장 외로운 사람은 사실 외할머니였다.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동족 하나 남지 않은 세상에서 밭을 매듯 하늘의 어둠을 깁는, 맹목적으로 날갯짓만 할 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새, 내게 외할머니는 그런 존재에 가까웠다.


(100-101)

자이니치뿐 아니라 일본 기업인이나 예술단체도 잠시 열렸던 북한의 국경은,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된 1980년대 이후부터 다시 극도로 제한되었다. 북한 정부는 심지어 북송 사업에 가족을 보낸 자이니치에게조차 좀처럼 초청장을 발급하지 않았고 입국 신청서도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북한을 드나들며 남편을 잃은 며느리와 아버지 없이 자란 손주들을 보살피면서 살 수 있으리란 기대로 버텨왔던 외조부모는 절망에 휩싸였다. 엄마와 내가 처음으로 함께 오사카행 비행기를 탔던 그해-1996년이었다-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북한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는데, 그건 나라에 빚이 늘고 물자가 부족한 수준이 아니었다. 경제난을 넘어 대기근이 시작된 것이다. 자이니치 공동체에는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소와 돼지뿐 아니라 개와 고양이, 들판에서 서식하는 쥐와 뱀까지 잡아먹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산의 나무들은 그 껍질이 다 벗겨졌고 먹을 만한 풀 역시 자라는 족족 뽑혀 나가는 중이라고도 했다. 어느 병원에서든 항생제 하나 구할 수 없고 학교와 관공서는 전기를 사용하지 못해 문을 닫고 있으며 평양의 최상급 호텔들도 난방이 되지 않는다는 소문 역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북한이 대외적인 시선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아는 자이니치 공동체는 주로 외국인을 상대하는 평양 시내의 호텔들마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현실은 소문마다 참혹하리란 그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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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집 에디션)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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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재작년(2024)과 작년(2025) 연속 동료 소설가들이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된 작가가 바론 김애란 작가님이란다. 특히 2024년에 선정된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작품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선정되고 인터뷰에서 지금 읽고 있는 책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던 책이란다. 그런데 아빠는 김애란 님의 단독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구나. 아빠의 독서록을 검색해보니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작가들이 공동 집필한 <눈먼 자들의 국가>만 읽어보았단다. 동료 소설가들이 2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는 이야기는 작가에게는 큰 영광이고, 독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강력한 추천책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아빠도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2025년 동료 소설가들이 뽑은 올해의 책 <안녕이라 그랬어>라는 소설집을 먼저 읽었단다.

이 책은 <안녕이라 그랬어>를 비롯하여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단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빠가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이 책에 실린 김애란 님의 작품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재미있게 읽었단다. 왜 많은 사람들이 김애란 작가님의 작품들을 좋아하는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단다. 그리고 김애란 작품들을 하나하나 검색해보고 리스트에 하나씩 계속 추가했단다. 그리고 이 책이 읽고 나서 밥 먹으면서 너희들과 엄마한테 이 책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도 해주었잖아. 그런데 요즘에는 낮말이든 밤말이든 스마트폰이 듣고 있는 것 같더구나. 김애란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 그날 밤 유튜브를 틀었는데 몇 달 전 <손석희의 질문들>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애란 작가님의 인터뷰가 추천 동영상에 올라와 있더구나. 스마트폰과 AI에 감시 당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난 직후 그 추천동영상을 클릭하지 않을 수 없겠더구나. 그리고 김애란 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말씀 하나하나가 공감되면서 위로도 되는 말씀을 조곤조곤 해주셨어. 소설가는 글을 잘 쓰는 것뿐 아니라 말씀들도 다 잘하시는 것 같더구나. 소설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럼 이 책에 실린 작품들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를 해줄게. 각 작품들에 자본주의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자세한 작품 분석은 아빠의 몫이 아니니, 오늘도 기억력의 보조 역할을 하는 수준으로 이야기를 해줄게.

 

1.

<홈파티>.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야. 주인공 이이연은 40대 초반 여성으로, 조연급 배우인데, 최근에는 캐스팅이 쉽지 않았어. 그러다가 최근에 괜찮은 연극 캐스팅되어 이것을 바탕으로 다시 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했어. 가족 행사까지 빠져가면서 그야말로 올인을 했단다. 그런데 공연 얼마 안 남기고 상대역이 코로나에 확진 되면서 연극 전체가 취소되고 말았어. 그래서 재기의 기회는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단다. 성민은 이이연의 대학 후배로 지금은 배우의 꿈을 접고 이벤트 행사 대표로 일하고 있어. 얼마 전에 MBA과정을 밟았는데 그 때 만난 사람들과 연락을 한다고 했어. 요즘에는 코로나 때문에 주로 집에서 만남을 갖는데, 그들끼리만 만나기 지루했는지 얼마 전부터 지인 한 명씩 데리고 오기로 했어.

이번 모임이 성민 차례였는데, 성민은 이연에게 부탁을 부탁했단다. 그래서 이연과 성민은 함께 홈파티에 갔단다. 모인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 의사, 법조계, 교수 등 나이는 대부분 50대였어. 성민만 젊은 사람이었어. 이연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상황극이라고 생각하고 연기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단다. 하지만 점점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어. 공감 가지 않는 이야기들. 아닌 척 하지만 젠체하는 이야기들. 마치 신귀족층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결국 먼저 자리를 피하다가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그들은 재미있는 작은 이벤트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 우리는 사회는 평등한 사회라고 살고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빈부 차이에 의한 계급 사회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구나. 계급 간 이동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고 말이지

<숲 속 작은 집>.

주인공 은주와 지호는 부부 사이란다. 은주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힘들게 은주를 키웠어이제는 은주가 엄마 생활비를 보내드리고 있었어. 그에 반해 지호는 부유한 집 출신으로 부모님 지원으로 카페 운영하고 있었어. 둘 사이에 돈에 대한 개념부터가 달랐어.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만나 결혼한 케이스라고 할까. 그들은 한국에서 비행 시간으로 7시간 가량 되는 산악 관광지에 와서 한 달 살기를 했단다. 그들의 숙소를 매일 청소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은주와 지호와는 또다른 계급을 가진 사람이었어.

어느 날, 쓰레기통 위치가 바뀌어 있고, 수건이 한 장 부족하고, 화장실 용품이 흐트러지는 일이 있었어. 은주와 지호는 왜 그런지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팁을 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면서 다음날 팁을 올려놓았는데 저녁 때 돌아왔을 때 돈은 안 가져가고 청소 상태도 마찬가지로 불량했어. 너무 적은가? 팁인 줄 몰랐나? 다음날 종이에 “thank you”라고 메모까지 했지만 마찬가지였어. 은주와 지호는 이 일이 점점 신경쓰였어. 그래서 이번에는 고맙다는 말을 그 나라 말로 적어보기로 했어. 그렇게 했더니 팁 가져가고 집 상태가 깨끗해졌단다. 그제서야 그들은 마음이 좀 놓였는데, 은주는 그 청소부를 보면서 힘들게 사신 어머니를 떠올렸단다. 그 청소부도 누군가의 가족일 테니 말이야. 그런데 지호는 돈으로 다 해결된다고 생각했어. 이 또한 자본주의 계급의 차이인가. 어느 날은 지폐가 없어 동전으로 팁을 놓았는데, 집 상태가 다시 별로였단다. 팁에 따라 청소 상태가 바뀌다 보니 은주와 지호도 기분이 좋지 않았어. 그들은 서비스 비용을 포함한 숙소 비용을 지불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마지막날에는 기념품 하나까지 사라졌어. 전날 지폐가 없어서 동전으로 팁을 놓았던 것이 생각났어. 팁이 적다고 물건까지 가지고 갔다고? 속상한데 마지막 말이고 그것으로 주인한테 이야기하기도 뭣해서 그냥 돌아가기로 했지만 그 일 때문에 기분이 꽤 상했단다.

공항 가는 차를 기다리는데 청소해주는 아주머니의 딸이 와서 종이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단다. 서툰 한국글씨로 기념품을 청소하다가 깨트렸다면서 가장 비슷한 걸로 샀다는 메모가 적혀 있었단다. 그걸 받으면서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단다. 잠깐이나마 그 청소부를 도둑으로 생각했었다는 마음 때문에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들 돈돈 하지만 사람들의 본마음은 다 똑 같은 것 같구나.

<좋은 이웃>

주인공 부부는 몇 년 전 지금 사는 집에 전세로 이사를 왔단다. 그때 집을 사서 들어올 생각도 고민했으나, 빚까지 내서 집을 사는 것에 부담이 되어 전세로 들어왔는데 최근에 집값이 점점 더 올라서 후회를 하고 있었단다. 앞으로 집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없어진 것 같아 마음도 무거웠단다. ‘는 돈을 더 벌기 위해서 학습지 강사도 그만 두고 집에서 하는 독서교실을 열었는데, 하필 그때 코로나가 창궐해서 한 동안 원생이 없어서 고생했단다. 이제 입소문이 나면서 애들이 늘고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 그런데 어느날 젊은 신혼부부가 초인종을 눌렀어. 바로 윗층으로 이사를 오는데 인테리어 공사를 한다면서 동의서 싸인을 받으려고 온 거야. ‘는 집에서 독서교실을 하기 때문에 좀 난감해했어. 그래서 독서교실을 하는 화요일, 목요일 오후에는 소음이 안 나도록 약속을 받고 싸인을 해주었단다. 그러나 그 약속이 무색하게 독서교실을 할 때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어. 그래서 윗층에 올라갔더니 주인은 없고 공사하는 이들만 있었고,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고 했어. 주인에게 연락하니 의 부탁을 전달하겠다고 했으나 그 이후에도 소음은 그치지 않았어.

그리고 의 집주인으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와서 집이 팔렸다면서 다음 계약 때는 연장이 어렵고 집을 빼주어야 한다고 했어. 이제야 이 동네에서 독서교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사를 가야 하다니이런 저런 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더구나. 집을 산 사람들이 집구경을 한다고 찾아왔는데, 자기 또래의 사람이라서 또 한번 놀랐단다. ‘와 남편은 열심히 살았다고 살았는데 집을 사는 것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집을 샀다고 하니 놀랜 것이란다. 그들을 보면서 몇 년 전에 이 집을 사지 못한 것에 또 한번 후회가 되었단다.

는 장애를 가진 시우라는 아이의 과외도 하고 있었어. 시우는 학습지를 할 때부터 가르치던 아이인데 학습지를 그만둘 때 시우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으로 과외를 계속 하고 있었어. 시우의 어머니도 시우의 장애 때문에 일을 계속 하셨어. 그런데 어느날 시우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아파트를 분양 받아 이사를 가는데 좀 멀어지지만 계속 과외를 해달라고 부탁했단다. ‘는 다시 한번 놀랬단다. 시우의 집의 재력이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새 아파트를 분양 받아 이사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다는 것에 놀랬던 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들과 비교하면서 나만 점점 뒤쳐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주인공 의 입장이 된다면 정말 답답하고 속상할 것 같구나. 되는 일은 없고, 더욱이 그들에게는 예전에 아이를 잃은 아픔도 있었거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구나. 분명 자본주의 사회는 모순 넘치는 사회인데 바뀌기 쉽지 않구나.

<이물감>

기태는 은행의 과장으로 돌씽남이란다. 최근 역류성 식도염으로 음식이 자주 목에 걸려서 불편하고 되새김질도 하게 되어 남들이 알아볼까 신경 쓰였어. 회사에서도 자신이 점점 꼰대가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혼하기는 했지만 기태는 여전히 전 아내 희주를 그리워 하는 것 같았어. 희주와 있었던 과거를 회상하고 희주의 SNS에 자주 접속해서 살펴보았어. SNS를 통해서 희주가 최근 요가강습소를 오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고민하다가 개업축하화환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 없었어. 희주 SNS를 보다가 같이 사진 찍은 사람 중에 차대표라는 사람이 눈에 거슬렸어. 차대표가 희주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 차대표의 SNS에는 희주와 함께 한 사진도 여럿 있었어. 전 아내의 연애에 대해 간섭할 자격도 없지만 신경이 쓰였어. 차대표는 이탈리아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날 희주는 SNS을 비공개로 바꾸었어. 기태는 자신이 화환을 보내서 그런 것인가 생각했어. SNS을 통해서 희주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기태는 차대표의 식당에서 방문해서 식사하면서 차대표를 살폈어. 자신감 넘치고 건강으로 다져진 몸매의 소유자였어. 식당에서 다른 젊은 여자 손님과 이야기하면서 최근 요가 지겨워졌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 희주와 관계가 소원해졌나, 싶었어. 기태는 여전히 과거에 살고 있었어. 기태만 그렇겠니. 우리도 지난 일을 후회하며 과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어디 한두 개이겠니. 지나간 것은 다 지난 것이고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빠도 자꾸 과거에 점령당한단다. 심호흡 한번 하고 현재를 살아야겠다고 다짐해야겠구나.

….

<레몬케이크>

주인공 기진은 1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전문 동네책방을 냈단다. 하지만 잘 안됐어. 그냥 동네책방도 잘 되기 쉽지 않은데 여행전문 동네책방은 더 어려울 것 같구나. 기진은 우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서인주 작가의 지인이 손님으로 와서 연락처를 알게 되고 조심스럽게 북토크를 제안했고 좋다고 답변을 받았어. 이런 작가의 북토크는 동네책방을 알리는데 좋은 방법이었어. 기진은 북토크 예매를 받았고 좌석은 바로 매진되었어. 그 북토크가 오늘 저녁에 진행될 예정이야. 그런데 어제 엄마로 연락이 왔어. 오늘 서울 병원에 검사하러 오는 날이라고 했어. 아버지는 파킨슨 병으로 요양병원에 계셨어. 기진은 나이 드신 엄마가 혼자 서울 병원으로 검사올 때마다 마중을 나갔단다. 그날도 엄마를 마중 나가서 함께 병원에 가고 점심을 함께 먹었어. 그런데 그날은 저녁에 있을 북토크가 신경 쓰였어. 준비할 것도 많았거든.

어쩔 수 없이 다른 때보다 엄마를 서둘러 보내드리고 서점으로 가고 있는데, 서인주 작가로부터 문자가 왔단다. 서인주 작가의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셨다는 문자였어. 어쩔 수 없이 몇 시간을 앞두고 북토크를 취소해야 했어. 기진은 예매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연락해서 양해를 바라며 취소 소식을 알렸단다. 일이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리냐기진은 괜히 엄마를 일찍 내려 보냈다고 생각하면서, 늙으신 엄마와 아버지를 생각했어. 이것은 비단 소설 속 기단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구나. 이제 혼자서 못하시는 일들이 많으신 부모님들기진은 혼자 오늘 북토크에서 먹으려고 준비한 레몬케이크와 샴페인을 보면서 엄마와 아버지가 레몬케이크를 좋아했던 기억이 떠올랐단다. 시간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을 너무 빨리 빼앗아 가는 것 같구나.

….

<안녕이라 그랬어>

표제작인 작품이구나. 주인공 김은미는 에코스라는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통해서 영화회화 공부를 했는데, 로버트라는 60대 캐나다 사람이 선생님과 새로 수업을 받게 되었어. 교재에 맞춰 수업을 했어. 로버트는 어느날 안녕이라는 말을 한글로 어떻게 하냐고 물어봐서, 7년 전 헤어진 애인 현수와 있었던 일이 떠올랐단다. 그것은 왜 소설 제목이 <안녕이라 그랬어>인지 알려주는 일화였어. 아빠도 익히 알고 있는 팝송 중에 <Love hurts>라는 노래가 있단다. 아빠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어서 너희들도 차에서 한번쯤 들어봤을 거야. 그 노래는 여러 사람들이 불렀는데, 킴딜과 로버트 폴러드가 함께 부픈 <Love hurts>를 듣다가 가사 중에 안녕이라고 정확히 들렸다고 그들은 신기해했단다. 부른 사람 중 한 명이 킴 딜인데, 킴이 혹시 우리 성씨 은 아닐까 하는 우스개 이야기를 나눈 것도 기억났어. 그건 “I’m young”이라는 부분인데 실제로 들어보면 안녕이라고 들린단다. 아빠도 이 소설을 읽고 유튜브로 이 노래를 검색해서 들어보니 확실히 안녕이라고 들리더구나. 이 노래를 들은 작가 김애란 님은 그것을 소설로 쓰시다니 대단하시구나. 그런데 이 노래의 유튜브의 댓글을 보면 대부분이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온 한국 사람들의 댓글이더구나. 그 댓글들도 재미있더구나.

다시 소설 이야기를 하면, 은미는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향으로 내려가 간병을 하는데 그것이 7년이나 이어졌어. 그러면서 남자친구 현수와도 헤어졌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은미는 경력 단절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어. 외국어 공부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화상 영어회화 공부를 했던 거란다. 로버트와 서툰 영어로 이야기를 했지만 위로를 받기도 했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녕하기도 쉽지 않구나.

….

<빗방울처럼>

주인공 지수 부부는 빌라 302호에 살고 있는데, 몇 전 년에 전세사기를 당해서 이사도 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경매에 참여하게 되었어. 빚까지 내가면서 원래 집값의 두 배를 들여 원치 않던 빌라의 집주인이 되었단다. 자기들의 집이 생겼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어. 지수의 남편 수호는 빚을 갚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했어. 그러다가 수호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그 이후 지수는 혼자 살았어. 생계는 독서교실에서 하면서 버는 돈이 전부였단다. 이미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는 오래였어.

지수는 결국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어. 그 전에 집이라도 깨끗이 정리하려고 했어. 오래 전부터 물이 새던 천장도 윗집에 이야기를 해서 수리를 하고 도배도 새로 하기로 했단다. 그런데 도배하러 온 도배사는 이주 여성이었어.. 서툴기는 하지만 한국말은 제법 해서 대화를 하는데 어렵지 않았어.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의 독서교실 수강생의 엄마였더구나. 그 사실을 아는 척하지 않고 그 이주 여성은 도배를 깔끔하게 해주었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 도배사와 몇 마디 나눈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상하게도 삶의 의지가 다시 살아남을 느꼈어. 다행히 지수는 다시 희망을 가지면서 소설은 끝을 맺었단다

독서편지를 짧으면서 필요한 내용만 적으면 좋겠다고 다짐을 하는데 글솜씨도 없다 보니 길어지기만 하고 시간만 많이 잡아먹는 것 같구나. 가뜩이나 독서편지도 많이 밀렸고, 책 읽은 시간도 점점 부족해지는데 말이야. 오늘은 그럼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며칠 전 이연은 성민으로부터 다음 주말에 혹 시간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책의 끝 문장: 지수의 두 뺨 위로 빗방울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지수는 ‘죽어도 좋은 칼에 죽고 싶었는데, 것도 환상이고 허영임을 알았다’고 토로했다. ‘권력 투쟁의 장에서 좋은 죽음이 어디 있느냐’며, "그냥 죽음만 있는 거지"하고 비장한 얼굴로 와인을 들이켰다. - P163

나는 뭐라 더 말을 못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마나 한 말’을 최대한 진심어리게 하는 것도 어른의 화법일 텐데, 누군가의 부고와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가 가진 표현의 한계와 상투성에 어쩔 줄 몰라했다. 상투성이 뭐 어때서, 세상에 삶만큼 죽음만큼 상투적인 게 또 어디 있다고. 그 ‘반복’의 무게에 머리 숙이는 게 결국 예의 아닌던가.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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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디스 걸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지음, 김나연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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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부터인가 뉴스에서 자주 엡스타인 사건이 등장하였고, 유명 인사들이 엮여 있는 엄청난 스캔들이라고만 대충 알고 있다가 몇 달 전에 유튜브 방송에서 자세하게 알게 되었단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빌 클린턴 등 전현직 대통령과 빌 게이츠, 영구 앤드루 왕자 등이 연루되어 있는 십대소녀들을 상대로 한 불법 성매매 사건이었어. 한창 트럼프 대통령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 즈음, 이란과 전쟁을 일으켜서 자신의 엡스타인 사건의 연루설을 덮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문도 있었단다. 그리고 빌 게이츠의 아내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가 이혼한 이유도 빌 게이츠가 엡스타인 사건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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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

얼마 지나지 않아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는 CBS 게일 킹과의 인터뷰에서, 27년간 함께한 남편 빌 게이츠와 이혼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엡스타인과 남편의 관계였다고 밝혔다. 멜린다는 킹에게 빌이 제프리 엡스타인과 만나는 것이 싫었고, 그 점을 분명히 말했습니다라고 전하며, 본인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싶어서엡스타인을 딱 한 번만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느낀 소감은 이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후회했습니다. 그는 혐오스러운 자였어요. 악의 화신 그 자체였죠. 피해 여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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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주범인 엡스타인은 감옥에서 자살을 했는데 그 자살 또한 여러 가지 일어날 수 없는 우연들이 겹쳐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소문도 있었어. 무엇보다 그들에게 희생당한 피해자 중에는 십대 소녀들도 있었어. 그 중에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라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엮은 <노바디스 걸>이라는 책을 앞서 이야기했던 유튜브 방송에서 소개해주어 알게 되었단다.  그 책을 구입하면 그 피해자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고, 이 무지막지한 사건에 대해서 더 궁금하기도 해서 읽어보기로 했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책의 지은이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는 이 책이 출간되기 얼마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더구나. 이것도 음모론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맞는 것 같더구나. 그건 차차 이야기해줄게.

사실 이 책을 읽는 것은 피해자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어 감정적으로 힘들었단다. 이렇게 글로 읽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직접 경험을 한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구나. 그럼 버지니아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1.

버지니아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단다. 버지니아의 아빠는 스카이라는 사람이고, 버지니아의 엄마 린에게 스카이가 두 번째 남편이란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했는데 첫 번째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 대니가 있었고. 린과 스카이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버지니아이고, 둘째가 스카이디라는 아들이란다. 버지니아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 주신 말도 탔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단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어. 특히 아버지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어. 아버지가 은밀히 버지니아를 애무하고 성추행을 하기 시작하다가 성폭행까지 한 거야. 아버지가 완전 변태였구나. 그뿐 아니라 아버지는 자신의 친구에게 버지니아를 맡겠는데 그 놈도 변태였어. 둘은 자신의 딸을 바꾸어 성폭행을 한 거야. 이제 고작 11살인 딸을 말이야. 짐승만도 못한 놈들. 엄마라도 딸을 보호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버지니아의 엄마는 버지니아를 멀리하고 딸이 성폭행 당하는 것을 외면했어. 완전 콩가루 집안이구나.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성폭행을 당해서 요도가 감염이 되어 병원에 갔더니 처녀막이 손상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엄마는 그때도 진실을 숨기고 승마 때문에 그랬다고 거짓말을 했단다. 집이 아니라 지옥이었을 것 같구나. 얼마 뒤에 버지니아는 초경을 겪었는데, 버지니아의 엄마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는구나. 엄마의 무책임도 버지니아를 지옥으로 몰아넣어 원인 중 하나였단다. 아무도 버지니아의 편이 없었어. 친척들과 함께 캠핑장을 갔는데, 아버지가 버지니아를 때리는 일이 있었는데, 버지니아는 친척들 모두 들으라고 큰 소리로 아버지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대.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쉽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버지니아는 집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불운한 경험을 겪었단다. 엄마는 버지니아를 그로잉 투게더라는 시설에 보내서 그곳에서 지냈는데, 그곳은 탄압과 강압과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었어. 버지니아는 그곳에서 도망가다가 낯선 사람의 차를 얻어 탔는데 하필 그 사람이 또 다른 악마이었어. 모텔로 데리고 가서 성폭행하려고 했어. 그가 방심한 틈에 무작정 도망가다가 어떤 할아버지가 리무진에 태워줬는데 그의 집으로 끌고 갔어. 그곳에 자신과 비슷한 어린 소녀들이 있었어. 그 또한 착한 얼굴을 한 악마였단다. 그때 버지니아의 나이가 고작 15살이었단다. 행복하게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나야 할 시절에 버지니아는 악마들 사이에 휩싸여서 자라났던 거야.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는데, 당시 아버지가 일하던 마러라고 리조트의 헬스 클럽 라커룸 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단다. 마러라고 리조트는 트럼프가 주인으로 있는 리조트인데, 아버지의 소개로 트럼프를 만나게 되었고, 트럼프의 소개로 부잣집 베이비 시터로 일하기도 했대. 지금까지의 삶도 지옥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 헬스 클럽에서 그보다 더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하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데, 그가 바로 제프리 엡스타인의 단짝인 길레인 맥스웰이란다. 길레인 맥스웰은 마러라고 클럽에 손님으로 왔다가 버지니아에게 마사지를 제안했단다. 버지니아도 생각하기를 마사지 기술을 배우면 생계 유지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좋다고 했어. 그렇게 길레인이 버지니아를 어떤 저택에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서 마사지를 가르친다면서 어떤 남자를 마사지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제프리 엡스타인이었단다. 마사지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제프리에게 성폭행을 당했단다. 그때 버지니아 나이는 고작 17살이었단다. 어린 시절 성폭행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돌고 돌아 다시 이런 곳에 오게 되었구나. 그 이후 2년 동안 제프리 엡스타인와 길레인 맥스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단다.

 

2.

이후 엡스타인의 저택에서 성적 학대를 당하면서 성접대, 마사지에 대한 기술을 배웠어. 누군가는 그곳에서 왜 도망가지 못하냐고 물어보지만, 어린 버지니아에게 그렇게 학대를 당하면서도 가끔씩 안정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버지니아는 늘 성폭행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나마 부잣집에서 지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들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구나. 제프리 엡스타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엡스타인은 대학에서 과학 관련된 학과를 전공하고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대. 이런 전공과 경력으로 나중에 과학계 저명 인사들과도 교류를 하게 되었대. 버지니아는 엡스타인의 저택에 머물면서 마사지를 배우고 어느 정도 마사지 실력이 늘어나자 엡스타인은 버지니아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기 시작했대. 그들은 대부분 재벌 또는 유력인사로 뉴스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어.

엡스타인과 길레인이 타겟으로 하는 소녀들은 생리를 막 시작한 앳되고, 약점이 있는 소녀들이었어. 버지니아는 그들의 강요에 의해서 자신도 다른 소녀들을 저택으로 데리고 온 적이 있는데 이 일로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아야 했다는구나. 엡스타인은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개인 소유의 리틀 세인트 제임스라는 섬을 가지고 있었어. 그곳에도 엡스타인 소유의 저택이 있는데 그곳에서 주로 성접대를 했단다. 버지니아도 그곳에서 성학대를 당했는데 이 때쯤에는 버지니아는 포기 반 순종 반 상태였던 것 같아.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그들이 가라는 대로 갔어. 그러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길레인 맥스웰은 버지니아를 믿기 시작하는 것 같았어. 버지니아에게 고급 사교 교육을 시키기도 했어. 외국에 다닐 때 버지니아를 데리고 가서는 그곳의 유력 인사에게 버지니아를 떠넘기기도 했어. 그렇게 그들과 함께 다니다가 영국의 앤드루 왕자를 만나게 된 거야. 그리고 그에게 성적 착취를 여러 번 당하게 된단다. 이 일이 나중에 드러난 이후 앤드루 왕자는 영국 왕족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단다.

엡스타인이 버지니아를 점점 믿는 것 같아서 버지니아는 서서히 탈출 계획을 세웠단다. 태국에서 마사지 전문 교육을 받고 싶다고 했어. 그러자 아무 의심 없이 엡스타인은 태국의 8주 교육 코스를 신청하고 숙박도 예약해 주었단다. 그래서 처음으로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태국에 왔단다. 그때가 2002 19살 때였어. 태국에서 무에타이를 배우러 온 호주 사람 로비를 만나게 되어 둘은 첫눈에 반했단다.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버지니아는 자신이 살아왔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해주었어. 로비는 그런 버지니아를 이해해주었고, 둘은 만난 지 10일만에 결혼했단다. 엡스타인이 사람을 보낼까 봐 걱정했는데 버지니아는 정면돌파를 선택했어. 버지니아는 엡스타인에게 전화해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엡스타인은 잘 살아라하며 전화를 끊었다고 했어. 그것으로 이후 5년 동안 엡스타인과 연락하지 않고 살았다고 하는구나. 이제는 로비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어.

 

3.

버지니아와 로비는 태국 주변 나라로 신혼 여행을 다녀온 후, 호주로 가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단다. 로비의 부모님은 이탈리아 계였는데, 아들이 갑작스러운 결혼에 당황하셨을 법한데, 그래도 잘 대해주셨단다. 로비의 부모님 댁에서 잠시 지내다가 그들은 독립을 했단다. 여느 젊은 부부처럼 둘이 티격태격 할 때도 있었지만,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 2006년 첫 아들 알렉스가 태어났고, 2007년에는 둘째 타일러를 낳았단다. 그런데 둘째 타일러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5년만에 엡스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소름이 돋았다고 하는구나. 엡스타인과 길레인이 고발당한 상태라면서 검찰에서 연락이 갈 거라고 했어. 버지니아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고발당했던 엡스타인은 가벼운 형량에 보석금으로 금방 풀려났단다. 그를 조사했던 경찰은 엡스타인이 그렇게 보석으로 풀려나자 화가 나서 그가 십대 소녀들을 성착취하고 성매매했다는 증거를 확보해서 연방수사관을 찾아가 재고발을 했지만, 이번에도 엡스타인은 13개월이라는 가벼운 형을 받았어. 그것마저도 대부분 외부에서 출퇴근하는 혜택을 받았다는구나.

2010년 버지니아는 셋째 엘리를 출산했어. 얼마 후 영국 데일리 메일의 처처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어. 에드워즈 변호사가 도와준다면서 엡스타인의 저택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달라고 했어. 영국 기자답게 앤드루 왕자의 성접대 이야기도 해달라고 했단다. 망설이던 버지니아는 텔레비전과 신문 등에서 앤드루와 엡스타인이 여전히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고 버지니아는 실명으로 그들의 만행을 밝히기로 결심했단다. 데일리메일과 인터뷰가 세상에 다시 내딛는 첫 번째 인터뷰였단다. 버지니아는 인터뷰 및 증거 등 자료를 제공하면서 기사 제보에 대한 일정 금액 보수를 받았단다. 언론사가 다 그렇게 진행되는 것인 줄 알았어. 이 일로 인해 돈 받고 인터뷰를 했다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어. 사람들 참 못났구나. 자신의 딸이 그런 피해를 보았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할까. 이후 버니지아는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면 돈은 따로 받지 않았어.

다시 세상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미국에 살고 있는 식구들이 생각났어. 특히 아버지와 화해하려고 노력했단다. 하지만 아빠는 그 점에 있어 버지니아를 이해할 수 없더구나. 자신을 낳아주긴 했지만, 어린 시절 자신을 성폭행하고 자신의 친구에게도 성폭행하게 하는 아버지가 무슨 아버지란 말인가. 그냥 짐승새끼지.. 하지만 버지니아는 가족이 필요했나 봐.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호주로 두 차례 초대를 했단다. 하지만 그 짐승새끼는 여전히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버지니아에게 고의로 음란 사진을 보여주곤 했어. 그 일을 남편 로비가 알게 되어 로비는 버지니아의 아버지가 크게 싸우고 아버지는 일찍 미국으로 돌아갔단다.

아버지 말고도 오빠 대니와 동생 스카이디도 보고 싶고 고향이 무척 그리웠어. 결국 버지니아와 로비는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했단다. 아빠는 버지니아의 이 선택도 이해가 가질 않았단다. 악몽 같은 기억만 있는 고향으로 가면 아픈 옛기억만 다시 떠오를 텐데 말이야. 미국에 도착해서도 에드워즈 변호사, 시그리드 변호사와 함께 제프로 엡스타인과 길레인 맥스웰의 만행을 계속 폭로했단다. 오빠 대니와 남동생 스카이디는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도 있었어.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와 만나면서 지냈는데, 아버지가 그들의 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대니와 스카이디는 버지니아가 어린 시절 아빠한테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몰랐어. 그제서야 버지니아는 아버지의 손주들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니와 스카이디에게 아버지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한 짓을 이야기했단다. 대니와 스카이디가 놀란 것은 당연했어. 대니는 그 이후 아버지와 의절을 하고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더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어. 버지니아가 엡스타인으로부터 성착취를 당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엡스타인으로부터 모른 척 해달라는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거야. 아빠가 버지니아의 아버지를 짐승새끼라고 했는데, 짐승도 그런 짓은 안 할 것 같구나.

버지니아는 더 이상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플로리다를 떠나 콜로라도로 이사갔단다. 콜로라도에는 엄마가 새아버지와 살고 있었어. 버지니아의 어린 시절 엄마도 잘 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버지니아에게는 살가운 가족의 품이 그리웠나 봐. 콜로라도에서 버지니아는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단다.

 

4.

에드워즈 변호사와 시그리드 변호사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ABC 방송국과 인터뷰를 하기로 했고 인터뷰는 성공적으로 했으나 끝내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단다. 엡스타인의 로비로 ABC 방송국 같은 거대한 방송국의 방송까지 막은 거야.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구나. 한편 로비의 아버지 프랭크가 암 투병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그리고 미국 생활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 그래서 다시 호주로 돌아가기로 했단다. 호주로 돌아오긴 했지만 버지니아는 소송으로 미국에 자주 갈 수밖에 없었단다. 엡스타인은 여러 차례 재판에 섰지만, 파트너인 길레인 맥스웰은 지난 6년 동안 교묘히 빠져나가 재판을 안 받다가 2015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단다. 길레인은 재판에서도 요리조리 피해 다녀서 민사 소송을 진행해야 했어. 버지니아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고발을 하게 되자 다른 피해자들도 용기를 내고 세상에 모습을 보이고 재판에 참석했단다.

….

어느 날 마이애미 해럴드 소속 탐사저널리스트 줄리 K. 브라운으로부터 연락이 왔어. 엡스타인 탐사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인터뷰 요청을 받았어. 이 탐사 보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엡스타인의 만행을 알게 되었어. 그런 여론에 힘입어 엡스타인은 2019 7월 다시 성매매와 인신매매 등으로 체포되었어. 이 때 즈음 버지니아는 미국연방수사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 버지니아의 생명을 노리는 징후를 포착했다면서 조심하라고 했어. 그래서 버지니아는 자신은 절대 자살하지 않겠다는 글을 게시했단다. 혹시 자살로 의문사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글을 쓴 것이야. 그런데 2019 8월 엡스타인이 감옥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간수들이 감사하는 교도소에서 어찌 자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전히 타살 논란이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그의 죽음은 자살로 일단락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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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543)

실제로 엡스타인은 자해를 시도한 적이 있었음에도 자살 감시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한때는 수감실 동료가 있었지만, 사망 당일 밤에는 혼자 수감실을 쓰고 있었다. 엡스타인의 수감실에서 불과 15피트( 5미터) 떨어진 책상에 앉아 있던 간수 두 명은 밤 10 30분부터 아침 6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순찰하며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간수들은 잠을 자거나 인터넷 서핑을 했고, 나중에 순찰을 마친 것처럼 기록지를 조작했다. 엡스타인의 자해 행위나, 음모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엡스타인을 살해한 누군가의 움직임을 포착했을 보안 카메라는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작동 중이었던 다른 카메라들을 확인해보니 엡스타인이 사망한 밤에 해당 구역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로써 자객이 몰래 침입했을 가능성은 배제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엡스타인의 동생이 고용한 법의학 전문의의 공식 부검 보고서로 상황은 반전됐다. 그는 엡스타인의 목 부위에서 발견된 골절과 연골 파손 흔적이 타살을 가리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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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었지만 길레인을 비롯한 공범들은 아직 있었어. 그리고 더 많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 언론 매체들에서도 더 많은 취재를 하기 했단다. 글로벌 OTT 넷플릭스에서 엡스타인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시작했어. 버지니아도 더 많은 매체에 나가서 제프리 엡스타인과 길레인 맥스웰의 만행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단다. 아픈 과거를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버지니아에게도 힘든 일이었어. 결국 숨어 지내던 길레인 맥스웰도 체포되었어. 버지니아는 미국과 호주를 오가는 강행군 때문인지 수막염에 심하게 걸렸고 그 상태에서 발을 헛디뎌 목뼈가 골절되는 큰 부상을 입고 말았어. 수술을 했지만 목에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일반적인 생활도 쉽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재판 등 공적인 일도 계속 했단다. 그런 와중에 2020년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 때문에 활동도 쉽지 않았어.

엡스타인 사건의 핵심 가해자였던 앤드루 왕자로부터 결국 사과를 받아내고 합의금을 받아냈단다. 앤드루는 왕족 자격 박탈을 당하는 수모도 당했어. 그리고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만 하던 길레인 맥스웰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20년형을 받았단다. 그간 노력이 어느 정도 보상이 된 기분이었지만, 버지니아는 일상으로 돌아오기 쉽지 않았어. 재판을 진행하면서 잊혀졌던 일들이 다시 또렷이 기억되면서 트라우마가 생겨났고, 목뼈 골절 후유증으로 고통은 날로 심해졌단다. 그러다 보니 자살을 생각하게 되었고 진통제를 한꺼번에 240개를 먹기도 했어. 다행히 가족들이 발견하여 살아났어. 버지니아는 가족들을 보면서 다시 삶의 의지를 찾기도 했단다. 그런데 하늘은 버지니아를 그냥 두지 않는구나. 이번에는 섬유조직염이라는 병에 걸려 전신에 극심한 통증과 압통을 겪어야 했단다.

비록 너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실명으로 밝히지 못하는 가해자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버지니아는 희망을 이야기했단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기지 않도록 범죄예방을 집중하는 단체를 지원하고 하고, 피해자들의 회복을 돕는 기금을 마련하는 계획도 세웠단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행복을 찾는 일상을 살아가겠다면서 책은 끝이 났단다.

그래서 행복하게 오랫동안 살았다고 하면 좋았겠지만 결말은 그렇지가 않았단다. 책의 앞부분에 이 책의 편집자 에이미 월러스의 말에서 그 이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단다. 남편 로비 덕분에 버지니아가 일상을 찾긴 했지만, 그들의 사이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었단다. 나중에는 남편 로비가 버지니아에게 폭행을 했었던 것 같아. 버지니아는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던 것 같고결국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대. 거기에 2025 3월 버지니아는 교통사고로 더 다쳐 몸은 더 안 좋아졌대. 이 책을 준비하면서 출판사 편집자와 메일을 주고 받는 일이 받았는데, 죽음을 암시하는 글들이 있었고 자신이 죽어도 책은 꼭 출간해 달라는 메일을 남긴 채 2025 4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구나.

그 어려운 시절을 다 견뎌냈는데, 하늘은 계속해서 버지니아를 시험대에 올려 놓았고, 결국 계속되는 심적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 것 같아 너무나 마음이 아프더구나. 하지만 몇 년 전 버지니아가 자신은 절대로 자살을 하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어서 버지니아의 자살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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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그러던 중 트위터에서 누군가 미국 연방수사국이 초부유층과 권력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라는 추측성 글을 올렸고, 나는 이에 응답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만약 내가 갑작스럽게 죽는다면, 누구도 사고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의사가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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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버지니아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져서 읽기 쉽지 않았지만, 한 개인이 거대 세력을 맞서 싸운 기록이고, 책 띠지에 적혀 있는 것처럼 세상을 바꾸려고 한 인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피해가 없길 바란다.

오늘은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삶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책의 끝 문장: 고로 이 책이 우리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현실로 단 한 걸음이나마 더 다가서게 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단 하나의 삶이라도 지켜낼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소명을 다한 셈이다.

 


나는 괴물을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친족 성폭력, 부모의 방임, 심각한 폭행과 추행, 강간까지 온갖 종류의 폭력으로 고통받았다. 10대가 되어 제프리 엡스타인과 길레인 맥스웰을 만나기 전부터 나는 다른 소아성애자들에게 성착취를 당했고, 두 사람은 내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들은 부유하고 권력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빌려주었다. 나는 반복적으로 이용당하고 모욕당했으며, 목이 졸리거나 구타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성노예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열아홉 번째 생일을 막 넘긴 무렵,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2002년에 탈출했다. - P29

알레시는 지시대로 차를 세웠고 차에서 내린 맥스웰이 내 뒤를 따라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또다시 포식자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만 이번 포식자는 이전에 만났던 누구와도 달랐다. 아버지와 포리스트, 론 에핑거, 혹은 에핑거가 떠넘긴 남자와도 달랐다. 맥스웰은 ‘최상위 포식자’였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침착하며 자신감이 넘쳐 보였지만, 속은 그만큼 탐욕스럽고 욕심도 많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맥스웰의 매혹스러운 외면을 꿰뚫어 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말처럼 본능적으로, 내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인지 알아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맥스웰에 대한 첫인상은 마러라고에서 만났던 다른 부유한 손님들을 처음 맞이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나도 나중에 그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138

마음속에는 또 다른 복잡한 감정들이 엉켜 있었다. 일곱 살 때와 마찬가지로, 열일곱 살이 된 나도 윗사람들한테 칭찬받고 싶어 했고 실제로 칭찬도 자주 들었다. 다른 남자들을 상대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면 돈만 건네받는 게 아니었다. 당시 내게 돈보다 간절했던 말도 함께 들었다. 엡스타인은 "우리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했고, 수치심과 창피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는데도 나는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만족이라고 여겼다. 이처럼 서로 어긋나는 감정이 한곳에 엉켜 새긴 매듭을 풀어내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 P224

평범한 여자 한 명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하지만 요세프버그 부녀와 이야기했던 것처럼, 남편과도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 앞에 나서는 일을 진지하게 상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딸들이 어떤 일을 견뎌야만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딸을 키우는 부모로서 우리가 그 비극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멘토였던 루스 메노어가 말 한 마리로 비영리 단체 빈세례모 센터를 일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나 같은 이들을 위해 그런 터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잠든 뒤, 로비와 나는 잠들 때까지 서로의 두려움과 희망을 속삭이듯 주고받았다. 나를 짓밟은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이제는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확신이 뚜렷해졌다. - P400

삶은 언제나처럼 흘러갔다. 이따금 뉴스나 텔레비전에서 낯익은 이름이나 얼굴을 마주칠 때가 있었다. 엡스타인과 맥스웰이 성적인 행위를 하라고 강요했던 수많은 유명 남성이 그곳에 불쑥 나타났다. 나를 직접 학대하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만났던 저명인사의 사진을 신문에서 볼 때도 그에 못지않게 혼란스러웠다. 가령 빌 클린턴이 조지 W. 부시와 함께 지진 피해를 입은 아이티의 복구 작업을 지원하러 갔다는 뉴스가 나오면, 아득히 전생 같은 과거에 미국의 국군통수권자였던 이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아 아찔해졌다. - P403

나는 정말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불과 13년 전만 해도, 나는 엡스타인과 맥스웰의 마수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도 모른 채 낯선 타국으로 끌려다니던 처지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스스로 자유를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때보다 단단한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그저 세상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랐던 겁 많은 소녀는, 아제 가해자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신념의 상징으로 대중 앞에 선 강인한 여성이 되었다. 비방 세력이 부모의 자질을 운운하며 내 아이들까지 공격의 과녁으로 삼았을 때, 내 안의 분노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맹렬함으로 타올랐다. - P469

가슴 아픈 고백이지만,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세상이 변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훨씬 더 많은 행동이 필요하다. 여전히 사람들은 엡스타인 사건을 그저 운 나쁘게 불거진 유례없는 일로 치부하려 든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가 사냥한 피해자의 수가 워낙 막대해 독보적인 괴물처럼 보일 뿐, 그는 결코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여성을 소모품처럼 여기고 함부로 다루는 그 오만한 시각은, 법망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권력자들 사이에서 너무나 흔하게 발견되는 현실이다. 그들 중 다수는 지금도 아무런 제약 없이 일상을 영위하며, 견고한 권력의 울타리 안에서 평온을 누리고 있다. - P635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앤드루 왕자의 합의금이 지급됨에 따라, 나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 나의 재단 ‘소어’를 전문적인 조직으로 키워나가기 위한 길고 신중한 과정을 시작했다. ‘소어’의 목표는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호, 그리고 범죄 예방에 집중하는 단체들을 지원함으로써 인신매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나아가 대중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의 징후를 더 쉽게 포착할 수 있도록 돕고, 피해자들의 회복을 뒷받침하는 기금을 마련할 계획이다. 왕실에서 나온 그 돈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데 쓰일 날을 간절히 고대한다. - P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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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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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정보라 님의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라는 책인데, 이 책 표지가 독특해서 그런지 아빠 눈에 많이 띠었던 책이란다.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긴 한데, 아빠 취향이 아닐 것 같아서 계속 읽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단다. 정보라 님은 부커상 후보까지 오른 <저주 토끼>라는 작품으로 유명하신 작가인데, 아빠는 이번에 읽은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가 처음이란다.

책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이 책은 SF 소설이란다. 그런데 좀 독특한 SF 소설이란다. 노동 문제 등 사회 문제를 접목한 독특한 소재의 SF 소설이란다. 그리고 소설의 대부분의 내용이 실화란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지은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단다. 그래서 책소개를 보면 자전적 SF 소설이라고도 소개를 했단다. 이 책은 연작소설로 각 작품의 제목이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등 해양 동물들로 되어 있단다. 이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지은이가 서울을 떠나 포항에 정착해서 생활했기 때문이래. 제목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라는 내용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외계 생물체가 지구에 와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하는가 보구나.

 

1.

첫 번째 작품은 <문어>. 소설 속 화자 는 대학 강사 처우 개선을 위한 천막 농성을 하고 있었어. 천막은 보통 노조위원장이 천막에서 밤새워 지켰어. 술을 먹고 취해서 자는 게 대부분이었지만그런데 어느 날, 그 노조위원장이 술을 먹고 취해서 잠을 청하는데 문어 두 마리가 다가오길래 잡아서 먹은 일이 있었어. 대학 강단에 문어들이 나타났다는 것이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노조위원장은 술에 취한 상태라서 그저 안주로 보였을 거야. 그 일이 있고 나서 검정색 양복을 입은 이들이 와서 노조위원장을 데리고 가서 취조했어. 왜 먹었냐? 문어라서 먹었다. 이 질문과 답변이 반복되는 취조였어. 문어 몸 속에 단단한 것이 있었냐고 물어보자, 있었다고 했고, 어디에 두었냐고 하자, 천막 안 냄비 안에 두었다고 했어.

요원들 일부가 그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출동했어. ‘도 참조인으로 참석을 했지만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왔단다. 노조위원장도 주인 없는 문어를 잡아 먹은 것으로 계속 잡아둘 수 없어서 풀려나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왔단다. 그런데 며칠 뒤 의 앞에 문어가 또 나타났어. 이번에는 말도 했어. 문어가 말하기를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라는 말을 반복했어. 너희들도 예상했겠지만 그 문어는 외계생명체였던 거야. 그런데 노조위원장이 문어 뒤에서 공격해서 잡았어. 다시 문어를 삶아 먹으려고 해체를 했는데 문어 먹물 속에서 빛나는 물체를 발견했단다. 그것 때문에 또 검은색 요원들이 와서 노조위원장은 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어. 이후 노조위원장은 한참 동안 여러 정부 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단다. 그런데 핵심은 이거였어. 노조위원장이 문어 몇 마리를 잡은 것이 외계생명체 불법 거래를 막는데 도움을 준 것이라고 했어. 그로 인해 지구를 지켜낼 수 있다고 했지. 그저 문어를 잡아 먹은 것뿐인데

1년이 지나고 는 노조위원장과 우연히 다시 만나고 그 이후 둘이 사귀게 되었다는구나. 첫 번째 작품을 읽고 나서 머릿속에 떠오른 두 단어는 블랙 코미디란다. 지은이 정보라식 블랙 코미디가 소설 내내 깔려 있으면서 대학 강사 처우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하면서, 문어 같이 생긴 외계생명체의 등장까지스케일이 어마어마하구나.

두 번째 작품은 <대게>. 문득 대게 라면이 생각나면서 출출해지는구나. 이제는 와 노조위원장은 결혼해서 포항에 살고 있었어. 남편은 여전히 사회 운동을 하고 있어. ‘는 대게를 사러 시장에 갔다가 러시아 말로 살려달라는 대게를 보았어. ‘는 러시아어를 전공해서 다행히 그 말을 알아들었어. 그 말을 듣고 그냥 둘 수 없어 그 대게를 사서 집으로 데리고 왔단다. 그리고 대게에게 먹을 것도 주고 이야기도 들어주었어. 그 대게는 예브게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외계생명체였어. 그는 동해가스관 공사에 투입되어 노동력 착취를 당했다고 했어. 공사가 끝나고 나서 동료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이 이상해서 동료들을 찾아 나섰다가 그만 잡히고 말았다는 거야.

남편과 예브게니는 술을 대작하면서 취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어. 남편은 예브게니에게 노동 운동에 대한 진지한 조언해 해주었단다. 물론 술 취한 상태이긴 했지만알고 보니 예브게니의 다리에 위치 추적용 칩이 박혀 있었어. 그로 인해 예브게니는 위치 추적을 당했는데, 노조위원장은 그에게 한쪽 다리를 잃는 대신 자유롭게 살라고 설득했어. 예브게니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칩이 달린 한쪽 다리를 떼어내고, 자유를 되찾고 바다로 떠났단다.

세 번째 작품은 <상어>. 집에 안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났어. ‘의 시어머니가 다리를 다쳐서 수술을 하신다고 입원을 하셨는데, 남편이 젊었을 때 완치되었던 암이 재발하여 수술한다고 입원을 했어. ‘는 시어머니의 병원과 남편의 병원을 오가며 간병해야 했어.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의 입원실에 어떤 사람이 와서 명함을 주면서 신약이 필요하면 오라고 했단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와 환자 가족은 지푸라기라고 잡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그런 걸 노리고 이런 신약을 팔려는 사람들이 있단다.

남편은 수술을 마치고 집에 왔어.

는 입원실에서 받은 그 명함이 생각나서 자세히 보니, 주소가 시장 안에 2층짜리 건물이었어. 주소부터가 사기꾼 냄새가 풀풀 나는구나. ‘는 그곳에 가보니 많은 수조 안에 온갖 해양동물들이 갇혀 있었어. 상어, 문어, 대게 등등문어는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라고 중얼거리고 대게는 러시아 말로 살려주시오라고 중얼거렸어. 살펴보니 그 대게는 예브게니는 아니었어. 그 곳의 주인은 상어에서 추출한 신약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이번에도 검은색 양복을 입은 요원들이 들이닥쳤고 사기꾼들은 도망갔어. 그런데 가 그곳에 간 것을 알게 된 시어머니께서 친구들과 함께 스쿠터를 타고 그곳에 나타나셨어. 그곳은 이미 그 전부터 사기꾼들이 약을 파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었어. 시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친구들과 스쿠터를 타고 오신 거야. 시어머니와 친구분들의 도움으로 검은색 요원들이 사기꾼을 잡을 수 있었단다. 소설마다 예상을 깨는 코믹한 장면으로 다음 소설을 기대하게 만드는구나.

네 번째 작품은 <개복치>. 개복치가 어떤 동물인지 잘 몰라서 찾아봤는데 마주치고 싶지 않은 모양의 큰 물고기로구나. 선우는 11살로 아빠와 잠수함으로 해저 탐험을 하기로 했어. 검정색 요원들이 나타나 선우는 실제로 바닷속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구린 내 나는 개복치도 만났어. 그 개복치는 외계 생명체로 낯선 지구라는 환경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어. 그리고 말 많은 대게도 만났는데, 그 대게가 러시아말로만 말해서 선우는 알아듣지 못했어. 알고 보니 그 예브게니였고 그가 한 말은 작은 엄마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내용이었단다. 선우는 의 조카였나 보구나. 선우는 개복치와 대게를 통해 동질감과 위로를 받은 것으로 이해했단다.

다섯 번째 작품은 <해파리>. ‘와 남편은 구리에 노동자 시위에 참석했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는데 는 왼쪽 발목이 부어 있는 것이 마치 해파리에 물린 상처 같았어. 그런데 바다에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해파리에 물릴 수 있단 말인가. 발목이 계속 부어서 응급실에 갔는데 그곳에 검정색 요원들이 있었어. 그리고 여기서 치료를 못한다면서 따라오라고 해서 또 검정색 요원을 따라 정부 기관을 따라 갔어. 그들이 조사하니 언제 IC443이라는 해파리와 접촉했냐고 물어보았어. 하지만 그런 적 없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단다. 그들이 말하길 그 발목의 상처는 우주해파리에게 쏘인 것이라고 했어. 이건 또 무슨 소리…. 그들과 헤어져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와 남편은 밤하늘에서 해파리 성운을 보았단다.

마지막 여섯 번째 작품은 <고래>.  ‘와 남편은 포항 영일만 근처의 리조트에서 열리는 간담회에 참석했어. 그 간담회는 일본 방사능 폐수를 바다에 버린 것을 비판하기 위한 간담회였어. 그런데 그곳에 검정 덩어리들이 나타났어.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밝혔어. 90%가 바다인 외계 행성에서 지구에 잠입하려 자신의 행성과 비슷한 환경인 바닷속에서 활동을 주로 했다고 했어. 그런데 바다가 오염되어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했어. 그러면서 지구에서 임무를 마치고 자신의 별로 돌아간다며 바다로 들어가 고래로 변하고는 다시 우주로 날아가 버렸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

소설집의 제목으로 뽑은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와 해양 동물들의 각 작품의 제목들로 인해 소설이 가벼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펼쳤다가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순점과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구나.

지은이 정보라 님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더니 앞서 이야기했던 <저주토끼> 이외에도 낯익은 제목들이 많이 보이더구나. 그 중에 최근에 출간된 <붉은 칼>이라는 한 권을 주문했는데, 이 책도 조만간 읽고 이야기해줄게.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걸 대체 왜 먹었습니까?”

책의 끝 문장: 남편과 나는 손을 잡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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