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9)

오마니……

부르며, 나는 외할머니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오세희를 연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진정 어려운 건 또다시 외할머니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 혼자 남은 외할머니의 외로움을 상상해야 한다는 것, 그런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내게 그랬듯 딸이 겪을 외로움을 걱정했지만 우리 셋 중 가장 외로운 사람은 사실 외할머니였다.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동족 하나 남지 않은 세상에서 밭을 매듯 하늘의 어둠을 깁는, 맹목적으로 날갯짓만 할 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새, 내게 외할머니는 그런 존재에 가까웠다.


(100-101)

자이니치뿐 아니라 일본 기업인이나 예술단체도 잠시 열렸던 북한의 국경은,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된 1980년대 이후부터 다시 극도로 제한되었다. 북한 정부는 심지어 북송 사업에 가족을 보낸 자이니치에게조차 좀처럼 초청장을 발급하지 않았고 입국 신청서도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북한을 드나들며 남편을 잃은 며느리와 아버지 없이 자란 손주들을 보살피면서 살 수 있으리란 기대로 버텨왔던 외조부모는 절망에 휩싸였다. 엄마와 내가 처음으로 함께 오사카행 비행기를 탔던 그해-1996년이었다-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북한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는데, 그건 나라에 빚이 늘고 물자가 부족한 수준이 아니었다. 경제난을 넘어 대기근이 시작된 것이다. 자이니치 공동체에는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소와 돼지뿐 아니라 개와 고양이, 들판에서 서식하는 쥐와 뱀까지 잡아먹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산의 나무들은 그 껍질이 다 벗겨졌고 먹을 만한 풀 역시 자라는 족족 뽑혀 나가는 중이라고도 했다. 어느 병원에서든 항생제 하나 구할 수 없고 학교와 관공서는 전기를 사용하지 못해 문을 닫고 있으며 평양의 최상급 호텔들도 난방이 되지 않는다는 소문 역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북한이 대외적인 시선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아는 자이니치 공동체는 주로 외국인을 상대하는 평양 시내의 호텔들마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현실은 소문마다 참혹하리란 그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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