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는 2000년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 지권-생물권 프로그램(IGBP)’ 회의에서 처음 인류세 개념을 제안했다. 당시 회의에서 자꾸 홀로세가 언급되는 것에 굉장히 언짢아하던 파울 크뤼천이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홀로세를 살고 있지 않아요.” 놀란 동료들이 그럼 무슨 시대냐고 물어보자 크뤼천은 알맞은 단어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의 입에서 ‘Anthropocene’, 인류세가 튀어나왔다. 인류세가 공식 석상에서 처음 쓰이는 순간이었다.


(30)

인류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공식 지질시대인 홀로세(Holocene)를 우선 알아야 한다. 홀로세는 빙하기 이후 지금까지의 비교적 따뜻한 시기를 말하며, 1만 년 가량의 시간에 해당한다. 홀로세는 전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Holos’에서 유래했다.


(51)

1. 인류세가 지질학, 층서학적으로 실재하는가?

2. 1950년대를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는가?

두 안건 모두 위원 34명 중 29명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인류세가 정식 지질시대에 한발 더 가까워졌다는 소식이었다.

인류세실무그룹은 인류세를 정식 지질시대로 인정하자는 내용의 제안서를 2021년까지 국제층서위원회에 전달하기로 결의했다. 이 제안서가 국제층서위원회와 국제지질학연합에서 통과되면 인류세가 공식화된다. 우리의 이름 인류가 지질연대표에 새겨지는 것이다.


(74)

고생대의 대표적 화석은 삼엽충, 중생대는 암모나이트다. 멀지 않은 미래에 우주의 외계인이 지구에 온다면 지금 시대의 어떤 화석을 발견할까?

현재로서는 닭 뼈가 유력한 후보다. 동 시간대에 77억 인구가 약 230억 마리의 닭과 함께 살아간다. 사람 한 명당 닭 세 마리꼴이다. 2008년에는 한국에서 조류독감으로 인해 약 1000만 마리의 식용 닭이 살처분돼 매립되기도 했다. 그럼 그 뼈들은 어떻게 될까? 썩거나 화석이 된다. 닭 뼈는 산소를 많이 함유하고 있어 보통은 잘 썩지만, 매립지 환경은 산소가 별로 없기 때문에 화석이 될 가능성이 크다.


(116-117)

인간과 가장 가까운 존재는 유인원이다. 유인원은 인간을 제외하면 다섯 종이 있는데,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기번(긴팔원숭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오랑우탄이다.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유인원인 오랑우탄은 100년 전 23만여 마리에서 현재는 11만여 마리로 줄였다. 그중 보르네오 오랑우탄은 심각한 멸종위기 종으로 사바주의 키나바탕안강에는 2002년에 1100여 마리가 살다가 지금은 700마리 정도로 줄었다. 팜유 농장이 늘고 벌목 등의 이류로 숲이 황폐화되면서 오랑우탄들은 인간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거나, 조각난 숲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146-147)

인류의 운명을 바꾼 돌, 청동, 철처럼 플라스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 생산되며 현대 문명을 접수했다. 현 시대는 지질학의 관점으로 보면 인류세, 문명사적으로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이은 플라스틱기() 시대다.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쓰며 누르는 자판, 노트북 본체, 마우스, 전원선, 스탠드 조명, 의자 바퀴까지 모두 플라스틱 소재가 포함돼 있다. 현대인이라면 하루 최소 한 번 이상은 플라스틱을 쓰게 되고, 둘러보면 어디에나 하나쯤은 보일 정도로 생활 반경 안에 널려 있다. 플라스틱은 공기 같은 존재가 됐다.


(167)

가장 섬뜩한 점은 미세플라스틱이 어류, 야생동물, 그리고 인체에 머물면서 해당 종에 미치는 유해성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리처드 톰슨 교수가 미세플라스틱의 존재를 밝혀낸 지 겨우 15년 정도. 플라스틱을 먹으면 건강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알아내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따져보면 플라스틱이 발명된 지 대략 150, 본격적으로 사용된 지는 60~70년 남짓이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아직 잘 모른다.


(230)

인류세는 생물권, 수권, 암석권, 대기권 등 지구를 구성하는 여러 권역에서 인간의 활동이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다. 그중 대기오염처럼 도시인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는 경우는 드물다. 대도시에 살면 생물다양성이 감소해도 잘 모르고, 정수된 물을 사용하며, 여름 휴가 기간에나 산성화된 바다로 놀러 간다. 변하고 있는 지구 현장을 외면하기 쉬운 생활 방식 속에서 어떻게 해도 차단되지 않는 것이 공기다. 지금의 국가 정책과 생활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가 미세먼지 재앙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마스크를 쓰거나, 창문을 닫고 공기청정기를 틀어놓는 정도다. 금성에 간 우주인도 비슷할 것이다. 선체 안에서만 편하게 숨 쉴 뿐 밖으로 나갈 때는 기능성 헬멧을 착용해야만 한다. 더 나아질 길이 있음에도 우리는 점점 금성 같아지고 있다.


(287)

이 질문은 2020년의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77억 지구촌 사회에도 적용된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기후 변화를 일으키거나 해수면 상승을 초래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우리는 어떤 일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와요.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지구를 더 바꾸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강력하고 우리의 행동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결과들을 낳는 것이죠. 인간은 오늘날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종이에요.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종보다 강력한 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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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1-04-26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74~75쪽 밑줄긋기하신 부분이 저랑 같네요! 핑크닭뼈 아이디어가 신선했었어요
287쪽 인용하신 부분... 우리가 의도치 않은 결과라도 책임을 피할 순 없는것 같아요 인류가 강력한 종이라는게 참 씁쓸하기도 합니다

bookholic 2021-04-26 23:59   좋아요 1 | URL
점점 불편한 진실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인간이 가장 강력한 종일지 모르지만, 어리석은 종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과연 인간은 여섯번째 대멸종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나른해도 되는
일요일 오후...
피 한 잔과 책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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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4-25 16: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피 한잔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몸에 활력이 솟아 책이 술술 잘 읽힐것 같은 마법의 쥬스 같아요^^

bookholic 2021-04-25 19:39   좋아요 3 | URL
혈액형을 확인 안하고 먹어서 그런지, 활력은 솟지 않고 잠이 쏟아져서 낮잠을 달게 잤어요...^^

새파랑 2021-04-25 17: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묽은 피네요^^ 집이 멋있어 보여요 ㅎㅎ

bookholic 2021-04-25 19:40   좋아요 3 | URL
집이 멋있는 것이라 카메라 어플이 좋아서 ㅎㅎ
다음에는 피 원액을...^^

deadpaper 2021-04-25 17: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4월은 잔인한 달. ㅎㅎ

bookholic 2021-04-25 19:40   좋아요 2 | URL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 음료는 4월에 어울리는 음료~~^^

청아 2021-04-25 17: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악ㅋㅋㅋㅋ저도 한잔 마시고 싶네요ㅋㅋ🙄

bookholic 2021-04-25 19:41   좋아요 2 | URL
드실 때 혈액형 잘 확인하고 드시길...^^

mini74 2021-04-25 19: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영양소 파괴되기 전에 얼릉 드세요 *^^*

bookholic 2021-04-25 19:43   좋아요 3 | URL
완샷했어요....^^

붕붕툐툐 2021-04-25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에 피가 빠질 수는 없죠! ㅎㅎ나른해도 되서 나른한 휴일입니다!ㅎㅎ

bookholic 2021-04-26 00:2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붉은 피가 없다면 커피라도....^^
 
프랑스 대혁명 1
막스 갈로 지음, 박상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지난 독서 편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번에는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책을 이야기해줄게. 막스 갈로가 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두 권짜리 책인데, 오늘은 1권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이야기해줄게. 처음 이 책을 알았을 때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역사 교양서인 줄 알았단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소설 책이었어. 프랑스 대혁명을 소설로 이야기해주는 것이야. 그래서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읽기는 쉽지 않았단다.

막스 갈로라는 사람은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로 유명한 사람인데, <나폴레옹>이라는 소설로 유명하단다. , 그럼 프랑스 대혁명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아빠의 잘못된 기억으로 몇몇 오류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건 감안하고


1.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하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빼놓을 수 없잖아. 원래 루이 16세는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었어. 그래서 왕이 되는 수업도 하지 않았지. 루이 16세 이전의 왕이 루이 15세였는데, 루이 15세는 루이 16세의 할아버지였어. 루이 15세는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의 장남도 따로 있었어. 그러니까 루이 15세의 장남과 장손이 왕의 수업을 받았던 것이지. 그런데 장남과 장손이 모두 죽고, 뒤늦게 세손이 된 루이 16. 그리고 루이 15세마저 죽고 말았단다. 그래서 준비도 없던 루이 16세가 왕이 된 것이야. 때는 1774년이었어.

그런 걸 국민들이 알았을 리 없었어. 그러니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감으로 국민들이 환호를 했어.

하지만, 루이 16세는 국정 운영에 대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 그래서 늙은 신하인 모르파에게 멘토 역할을 부탁했어. 재무 총감으로는 튀고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개혁을 하려고 했어. 당시 프랑스는 루이 14세부터 이어진 외국과 전쟁으로 나라 빚이 많았거든. 그리고 계속되는 흉작으로 밀가루 값이 폭등을 했고이런 흉작이 이어져서 루이 16세에 대한 국민들의 환호는 오래 가지 못했어. 예상치 못했던 자연 재해에 대해서 루이 16세가 잘 대처하면 모르겠지만, 루이 16세는 예상 가능한 일에도 잘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한 왕이었어. 생각하기 귀찮고 그냥 사냥이나 놀거리를 찾곤 했지.

오스트리아 공주 출신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왕비로서 자격 미달이었단다. 사교와 유흥을 좋아하는 젊은 아가씨였어. 신하들과 귀족들이 사교를 좋아하는 마리 주변에 권력의 꼬리라도 잡아보겠다고 모여 들었어. 그나마 제대로 정신이 박혀 있던 이가 앞서 이야기한 재무총감 튀고르였는데, 그의 개혁의 칼날이 왕과 왕비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를 사임시켰지. 그리고 튀고르의 뒤를 이어 클뤼니라는 이가 재무 총감이 되었는데, 튀고르의 개혁 정책을 모두 뒤집어 엎어 놓았단다.

….

이 시절 아메리카에서는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이었단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겠다는 전쟁인데, 프랑스는 영국과 관계가 안 좋았단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고 있었어. 그렇다 보니 이 또한 나라 빚을 늘어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이었단다.

루이 16세와 마리는 어렸을 때 정략적으로 결혼을 했단다. 그러나 그들이 나이를 먹고 나서도 아이를 갖지 못했다고 했어. 루이 16세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구나. 병원에서 시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리의 오빠로부터 조언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무튼 7년만에 제대로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고 하는구나. 모두 2 2녀를 낳았는데, 두 아이는 어렸을 때 병으로 죽고 성인이 된 아이는 아들 하나, 딸 하나였다고 했어.


2.

앞서 재무 총감 올라 개혁 정책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나 클뤼니라는 바람이 있다고 했잖아. 다행히 그는 일찍 죽고 말았어. 그리고 그의 후임으로 네케르라는 사람이 재무 총감이 되었는데, 그는 다시 개혁을 시도했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것이 아니라, 속도 조절을 하는 개혁이었어. 이것으로 민심을 얻게 되었어.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하고 잘렸단다. 이렇게 국민들의 민심을 얻고 있는 재무 총감을 자르고, 루이 16세는 나라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어.

국민들은 이 모든 것을 왕비 탓으로 돌렸어. 오스트리아에서 온 여자가 프랑스를 망쳐 놓는다고심지어 루이 16세와 낳은 왕자가 다른 남자의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퍼트렸어. 네케르가 추진하려고 했던 개혁은 심플하단다. 특권층에서 면제되었던 세금을 부과하는 거야. 네케르의 후임이었던 칼로라는 사람도 네케르의 개혁 정책을 그대로 따랐어. 그렇게 되자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특권층들의 반발이 셌겠지. 하지만 굶주리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당연한 조치인 것이야. 백성들도 계속 폭동을 일으켰단다. 1789년 역사적인 해에도 크고 작은 폭동은 계속 되었고, 나라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단다. 네케르가 다시 투입되었지만, 나라가 너무 많이 망가져서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했어.

지난번 <이야기 프랑스사>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프랑스의 세 계급의 대표인 성직자(1신분), 귀족(2신분), 시민(3신분)의 대표들이 모여서 정책을 결정하는 삼부회가 열렸어. 하지만, 결과는 늘 2(성직자, 귀족) : 1(시민). 시민들의 말이 제대로 전달이 안되었지. 3신분들은 테니스 코트로 장소를 옮겨서 독자적으로 의회 기구를 만들었으니 국민 의회였단다. 이 때 국민 의회의 대표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라는 사람으로, 프랑스 대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란다. 아마 한 손가락을 뽑으라고 해도 뽑을 수 있는 그런 사람.

하지만, 루이 16세와 정부는 독단적으로 보이는 국민 의회를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지. 갈수록 대립하였고, 백성들은 어차피 굶어 줄을 바에야 싸우고는 죽자는 심정으로 다시 봉기를 하였단다. 이번에는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였단다. 프랑스 대혁명 초반부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바스티유 감옥 점령이었단다. 대혁명을 이끌었던 이들 중에 몇몇 중요한 사람들을 들자면, 앞서 이야기했던 국민 의회 대표였던 로베스피에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에 앞장섰던 국민방위대의 총사령관 라파예트,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을 통해 혁명의 바람잡이를 했던 마라 등이 있었단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왕은 우왕좌왕했고, 왕비는 자신이 모국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단다. 그들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고 오스트리아로 도망을 선택했단다. 하지만 국경을 넘기 얼마 전에 잡혀와 다시 파리 튈르리 궁으로 돌아왔단다. 분노한 일부 백성들은 왕을 죽이라고 했지만, 아직 프랑스 헌법상 루이 16세는 왕이었고, 단지 직무정지 상태였던 거야.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루이 16. 뭐라도 해야겠지. 그는 왕비의 조언을 듣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단다. 전쟁이 일어나면 혼란해질 테니 이때 다시 권력을 되찾겠다는 생각이었어.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소식이 전해진 주변국들이 그 여파가 자신들의 나라에도 끼칠까 봐 프랑스를 상대하기 위해 서로 동맹을 맺었단다. 그 중에 오스트리아 군대, 프로이센 군대, 그리고 루이 16세를 지지했던 자들이 망명해서 만든 군대가 연합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되었단다.


3.

혁명이 성공했지만, 갑작스러운 변화가 안정까지 찾아주지는 못했단다. 시민들의 삶은 여전히 어렵고 국내 정세로 불안했어. 혁명을 성공한 국민의회 내부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간의 알력 다툼이 이어졌어. 급진파는 로베스피에르 등이 이끈 자코뱅파가 있고, 온건파는 브리소 등이 이끈 지롱드파가 있었단다. 둘이 대립을 하면서도 공화정에 대한 열망을 같았기 때문에,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고 나서 3년 뒤인 1792 9월 프랑스는 공화정을 선포하게 되었단다. 이제 루이 16세는 왕이 아니라 일반 국민이 되었단다. 그리고 루이 16세 가족은 모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단다.

이제 국민 의회는 왕에 대한 처벌을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해야 하는데, 왕은 이미 재판을 받은 것이라면서 그냥 두자고 하는 이들이 있고, 다시 재판을 통해 제대로 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이들이 있었단다. 아참, 국민 의회는 국민 공회로 탈바꿈했는데, 언제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더구나. 책을 읽다 보니 언젠가부터 국민 공회로 바뀌어있었어. 아빠가 책을 집중해서 읽지 않은 탓인가 보구나. 국민 공회는 결국 루이 16세의 재판을 열었단다. 1972 11 13일이었어.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인 생쥐스트가 재판에서 루이 16세의 죄목에 대한 연설을 했어. 이 연설로 생쥐스트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단다. 루이 16세는 반역 행위로 결국 사형을 판결 받았단다. 그 판결의 찬반수가 거의 비슷했다고 하니, 한때 왕이었던 이를 죽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루이 16세가 유죄라는 것에는 일말 의심이 없이 707:0 으로 판결이 났어. 하지만, 사형에 대한 찬반 투표는 1 387:334, 2 361:360… 간발의 차로 그의 사형이 결정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그는 서른 여덟 살 파란만장한 삶을 단두대에서 마감했단다. 때는 1793 1 21일이었어.

첫 부분에서 이야기했지만, 왕이 안되었다면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아버지와 형이 죽는 바람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왕 위에 올랐던 루이 16. 준비도 없었고, 타고난 리더십도 없는 무능했던 왕 루이 16.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왕 위에 있었어도 혁명은 일어났을까?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면 안 일어났을까? 왕이 누가 되었든 혁명은 시대의 흐름이라 피할 수 없었을까? 아빠는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여기까지 프랑스 대혁명 1권에 대한 이야기란다. 2권에서는 루이 프랑스 대혁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이야기될 것 같구나.


PS:

책의 첫 문장 : 그는 프랑스의 왕이었다.

책의 끝 문장 : 그 추수는 유혈이 낭자할 것이다.


"무엇을 원하시오? 나는 업무에 짓눌려 있고, 겨우 스무 살일 뿐이오. 모든 것이 나를 어지럽히고 있소." 모르파에게 루이가 말했다.
"오직 결정을 내리는 것만이 그 혼란을 멈출 것입니다. 지연하는 것은 일들을 쌓이게 하고 심지어 망치기까지 합니다. 미룬다고 해서 일들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하나에 대해 결정하는 그날에 또 다른 하나가 생겨날 것입니다.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전하의 운명이 될 영원한 풍차입니다." 모르파의 대답이었다.
- P49

‘국민의회’
루이는 이 단어를 되뇌고, 앞에 높인 팸플릿과 그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그는 마치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서둘러 그 속으로 내던져질 준비가 된 듯이, 현기증에 사로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의 육체가 망설임과 그 위로 덮쳐 오는 두려움을 동시에 표현하듯이 앞뒤로 비틀거리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 P159

바스티유가 함락되었다. 카니발의 외침을 질러 대며, 창끝에 머리들을 달아 내돌리고 있었다.
"반란이야." 루이 16게가 둔탁한 목소리로 우물우물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혁명입니다."
- P190

로베스피에르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평민 출신입니다. 정의와 인류와 자유에 대한 사랑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열정의 하나입니다. 열정이 지배적일 때는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황금이나 명예에 대한 갈증과 같은 다른 종류의 열정들에 자기 영혼을 열었을 때는 그것에 영광과 정의와 인류와 백성과 조국, 모든 것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것이 인간 마음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범죄와 정직함 사이에, 폭군과 인류의 은인 사이에 존대하는 차이점의 전부입니다. - P338

생쥐스트가 외쳤다. "행복하지 않은 인민에게는 조국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만약 공화국을 세우기 원한다면, 인민들을 부패시키는 불확실과 빈곤 상태에서 그들을 끄집어내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빈곤이 대혁명을 탄생시켰고, 빈곤이 이것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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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4-25 09: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행복하겠어요.♡

bookholic 2021-04-25 09:18   좋아요 3 | URL
고맙습니다~~ 이 독서편지는 아이들에겐 아직 비공개^^
즐겁고 화창한 일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새파랑 2021-04-25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나중에 공개되면 아이들이 깜짝 놀라면서 엄청 좋아할 것 같아요^^

bookholic 2021-04-25 19:45   좋아요 1 | URL
언제쯤 공개해야 할까 고민중입니다 ㅎㅎ
 














(59)

맨 처음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마리 앙투아네트 내부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인간성은 결혼으로 인해서 접하게 된 주위 세계의 부자연스러움에 항거했다. 무거운 스커트 버팀쇠와 답답한 코르셋으로 대표되는 부자연스러운 장중함에 항거하여 싸웠다. 마음이 가볍고 매인 곳 없는 빈 여인은 수천 개의 창문이 달린 장엄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끼고 있었다.


(109)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가 아니라 오로지 입만 가지고 지껄였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건성으로 듣고, 매력적인 애교나 반짝이는 경쾌함에만 빠져, 떠오르기 시작하는 생각은 얼른 내팽개쳐버렸다. 뭐든지 끝까지 말하거나 끝까지 생각하거나 끝까지 읽는 법이 없었다. 참된 경험의 의미와 맛을 캐보려고 진득하게 매달리는 적이 없었다. 책이나 공문서와 같은 인내와 집중을 요하는 진지한 것을 종아할 턱이 없었고, 꼭 필요한 편지 같은 것만 마지못해 성급하게 끄적이는 글씨로 처리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조차도 종종 얼른 끝내고 싶어한 흔적이 뚜렷했다. 인생이 이렇게 번거롭지 않았으면, 머리를 탁하고 음울하며 고독하게 만드는 일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이런 게으른 기질을 끝까지 잘 받아들여주는 사람만이 그녀에게서 훌륭한 남자라는 인정을 받았고, 긴장을 요구하는 사람은 귀찮은 현학자 취급을 받았다. 궁정의 기사들이나 친지들 가운데 좋은 충고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단박에 멀리했다. 오르지 즐기자. 그리고 생각이나 계산, 절약 따위에 방해받지 말자. 이런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고, 그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의 주장이었다. 다만 감각에 따라 생활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거 그것이 그 세대 전체의 모럴이었다. 그녀는 분명 그러한 시대의 모럴과 더불어 살았고, 또 그 모럴과 더불어 영원히 사라졌다.


(110)

극단적일 정도로 서로 다른 이 부부보다 성격학적으로 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부부를 만들기란 어떤 소설가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신경의 맨 끝, 피의 리듬, 기질의 말초적 진동에 이르기까지 함스부르크가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부르봉가의 루이 16세는 성격과 특징 모두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안티테제를 보여준다. 한쪽은 무거운데 다른 한쪽은 가볍고, 한쪽은 비둔한데 다른 한쪽은 나긋나긋하고, 한쪽은 곰팡내가 나는데 다른 한쪽은 거품처럼 끓어오르고, 한쪽은 무신경한데 다른 한쪽은 파르르 떨도록 신경이 예민했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우유부단한데 아내는 너무 성급하게 결단을 내리고, 남편은 신앙심이 투철하고 독신자인 체했으나 아내는 쾌활하고 세속적이고, 남편은 겸손하고 겸허하되 아내는 애교 만점에 오만하고, 남편은 현학적이나 아내는 경박하고, 남편은 검약하나 아내는 낭비벽이 심하고, 남편은 지나치게 근엄한 반면 아내는 절도 없이 놀기를 좋아하고, 남편은 묵직한 바도 속에 깊은 흐름이라면 아내는 물거품이요 춤추는 파도였다. 남편은 혼자 있을 때가 제일 편한데 아내는 언제나 시끌벅적한 무리들의 한가운데 있었다. 남편은 동물적으로 둔감함으로써 안락하게 많이 먹고 독한 술을 마시기를 좋아했으나 아내는 술에는 손도 대지 않고 음식은 아주 조금, 얼른 먹어치웠다. 남편의 본령은 잠에 있었고, 아내의 본령은 춤에 있었다. 남편의 세계는 낮이고, 아내의 세계는 밤이었다. 따라서 이 부부의 생활 시계 바늘은 해와 달처럼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루이 16세가 잠자리에 드는 밤 11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제대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오락실로 내일은 무도회로 모레는 또 다른 곳으로,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 몇 시간이고 사냥을 하며 돌아다닐 때 그녀는 겨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습관, 취향, 하루 일과 어느 한 가지도 공통되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그들 생의 대부분을 따로 살았다. 거의 언제가 잠자리를 따로 했던 것처럼.


(244-245)

민중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는  사물을 의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사물을 단지 인간으로 환원해서 생각하는 사고력만을 가진 것이다. 민중의 이해력으로서는 결코 개념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인간의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을 뿐이다. 프랑스 백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디에선가 자기들에게 부정을 저지르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들은 오랫동안 복종하고 굴종하면서 보다 좋은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믿으며 기다렸다. 새로운 루이가 왕위에 오를 때마다 깃발을 흔들었고, 영주와 교회에 공손히 세금을 바치며 부역을 해왔다. 그러나 허리를 낮게 구부리면 구부릴수록 압박은 가혹해졌고, 세금은 더욱 더 탐욕스럽게 그들의 피를 빨았다. 프랑스는 넉넉한 땅이었으나 곡물창고는 텅텅 비었고 소작인은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였다. 유럽에서 가장 비옥한 땅과 아름다운 하늘을 누리면서도 끼니를 거르는 판이었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빵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진탕 먹는 자가 있기 때문이며, 의무에 목이 졸리는 사람이 있는 것은 권리를 독차지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명철한 사고와 탐구에 앞서 나타나기 마련인 어렴풋한 불안이 점차 온 나라를 휩쓸기 시작했다. 볼테르, 루소와 같은 인물에 의해서 잠을 깬 시민계급은 스스로의 힘으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독서하고, 저작하고, 의지와 소통을 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서운 폭풍에 앞서 번갯불이 번쩍였다. 부농의 집은 약탈을 당했고, 영주는 압력을 받았다. 거대한 불만이 오래 전부터 먹구름처럼 온 나라를 뒤덮고 있었다.


(246)

이제 먹구름이 갈라졌다. 팸플릿이나 논쟁서가 비처럼, 우박처럼 쏟아지고 문서와 청원이 홍수처럼 넘쳐흘렀다. 프랑스에서 이처럼 시끄럽게 거론되고, 쓰이고, 입에 오른 사건은 일찍이 그 예가 없었다. 인민은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돌아온 지원병들은 궁정도, 국왕도, 귀족도 없고 시민만이 있는 나라, 완전한 평등과 자유가 지배하는 민주주의적인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무지몽매한 마을에까지 돌아다니며 퍼뜨렸다. 그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 속에는 이미 뚜렷이, 볼테르나 디드로의 저작 속에는 보다 미묘하고 은밀한 필치로, 왕정이 결코 신의 뜻에 의한 한 한의 정치 체제도 아니며, 현존하는 최상의 것도 아니라고 쓰여 있었다.


(261)

그뒤의 나날은 불멸의 문자로 세계사에 새겨져 있었다. 단 한 권의 책만은 그렇지 않은데, 그것은 불행하게도 둔감하기 짝이 없는 루이 16, 그가 썼던 일기장이다. 그 일기장의 7 11일의 대목에는 아무 일도 없음. 네케르 씨 출발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며, 국왕의 권력을 결정적으로 때려부순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이 일어났던 7 14일 역시 똑 같은 비극적인 언어, “아무 일도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다.


(298)

그러나 혁명은 자꾸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혁명이란 밀려오는 흐름과도 같은 것이므로 정체는 재앙이며, 후퇴는 종말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자기 주장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더 많이 자꾸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공격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휴식 없는 행군의 북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 신문이었다. 혁명의 아이들, 혁명의 골목대장들은 주저 없이 대열의 앞에 섰다. 펜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자유라는 말을 휘둘렀고 난폭하고 무절제했다.


(320-321)

불행과 함께 이 특별한 여자의 내부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이 성격을 바꾸어놓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불행 때문에 새로운 성격이 생기지는 않는다. 오래 전부터 있어온 싹을 불행이 꽃피우게 한 것일 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현명해지고, 활동이 왕성해지고, 활발해진 것은 마지막 고통스런 해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모든 것이 이미 싹으로 영혼의 은밀한 한구석에 숨어 있었고, 감각의 유치한 도박성 한구석에는 전혀 다른 반쪽이 그 대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지금껏 인생을 가지고 장난 전혀 애쓸 필요가 없었다 만 해왔다. 인생과 맞서서 싸울 필요도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강한 자극을 받자 모든 에너지가 총동원된 것이다. 생각해야 할 때가 오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음으로 생각하고 숙고하게 되었다. 또 일을 해야만 할 때는 일을 했다. 우월한 위치에서 비참해 보이지 않으려면 운명적으로 커지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녀는 점점 더 성숙해졌다. 내적, 외적 생활에서의 완전한 변모가 튈르리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324)

우리는 지금 고통을 당하고 괴로워하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아이들과 관련된 생각만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행복이라는 단어와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다리였다.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두 아이들을 통해서일 뿐입니다.”라고 그녀는 한탄했다. 그러고 또다른 편지에는 너무나 슬플 때면 나는 작은 아이를 불러옵니다.”라고 썼다. “하루 종일 혼자였습니다. 아이들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입니다. 아이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내 곁에 두고 싶습니다.”


(326-327)

어머니로서의 이 기록을 전에 쓴 다른 편지들과 비교해보면 똑 같은 손으로 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마리 앙투아네트와 과거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너무나도 달랐다. 행복은 불행과 너무나도 다르며, 절망은 자만과 그렇게도 차이가 났다. 그녀의 부드러운 영혼 속에, 미완성의 순종적인 영혼 속에 불행은 그 각인을 똑똑히 찍고 말았다. 지금까지 흐르는 물처럼 용해되어 흘러가던 어떤 성격이 그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넌 언제 너 자신이 될 거냐!”라고 그녀의 어머니는 절망적으로 탄식했다. 관자놀이에 최초의 백발이 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드디어 그 자신이 된 것이다.


(433)

모든 혁명이 다 그렇지만 프랑스 혁명에서도 두 종류의 혁명가가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이상주의적인 혁명가와 복수심에 불타는 혁명가가 그것이다. 대중보다도 더 나은 생활을 누리는 이상주의적 혁명가는 증오심에 불타는 혁명가들을 그들에게로 끌어올려 그들의 교육, 문화, 자유, 생활방식을 향상시키려고 했고, 오랫동안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온 증오심에 불타는 혁명가들은 풍족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 그들은 전에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난폭하게 행동함으로써 분노를 해소시키려고 했다.


(442)

일생 동안 왕을 뒤따라다녔던 완전한 무감각이 이 절박한 최후의 순간에는 시련을 겪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견디기 어려운 무신경이 결정적인 순간에 루이 16세에게 어떤 도덕적인 위대함을 부여했다. 그는 공포감도 흥분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옆 방에 있던 4명의 시 위원은 단 한번도 그가 소리 높여 흐느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듣지 못했다. 가엾고 연약한 남자에 불과한 위엄 없는 왕은 가족들과의 이별 장면에서는 그의 온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지 못했던 힘과 위엄을 보여주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10시에 여느 날처럼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가족에게 이젠 올라가라는 손짓을 했다. 꺾을 수 없는 그의 의사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히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그녀에게 가겠노라고 그가 거짓말까지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517)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극히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심지가 곧고 마음씨가 좋은 시누, 당신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지내려는 다정한 마음씨로 모든 것을 희생해온 당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나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 불쌍한 어린 것! 그 아이한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나의 이 편지에 의한 축복을 전해주세요. 아이들이 자란 뒤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착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기 주장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 곧은 심지를 가지고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딸은 연상이므로 누나로서 풍부한 경험과 아름다움 마음씨로 동생에게 충고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와 봉사의 태도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두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도우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괴로움 가운데에서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 가질 때 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 말고 어디에서 아름답고 내적인 친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훗날을 경계하기 위해서 되풀이하면, 우리들이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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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24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슈테판 츠바이크 믿고 담아갑니다!^^

bookholic 2021-04-24 12:04   좋아요 2 | URL
저는 좋았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잘못한 것도 많았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부모로써 짠하더군요...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서니데이 2021-04-24 13: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품절도서였는데 다시 주문가능해졌네요.
전에 읽었지만 인용된 부분 읽으니 새로 읽는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bookholic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bookholic 2021-04-25 00:03   좋아요 1 | URL
저도 예전에 헌책방에서 사두고 이제서야 읽었어요..^^
좋은 책은 계속 품절되지 않고 계속 나왔으면 좋겠네요...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일요일 되십시오~~^^
 
이야기 프랑스사 - 골 지방의 선사 시대부터 20세기 프랑스까지 이야기 역사 8
윤선자 지음 / 청아출판사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요즘 우리가 즐겨 듣고, 너희들이 흥얼거리는 노래 중에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삽입곡 <one day more>가 있잖아. 영어 가사로 제대로는 못 부르지만 흥얼거리는 그 노래. 우리 식구들 모두 좋아해서 자주 듣곤 하지. 그래서 너희들은 동화로 각색된 <레 미제라블>도 읽었지. 영화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 보지는 못하고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고하지만, 아빠도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단다. <레 미제라블> 소설도 읽고 영화도 봤지만 말이야. 그리고 사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에서 이어진 져 수십 년 후 일어난 민중항쟁이 배경이란다. 어찌했든 크게 보면 프랑스 대혁명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고 아빠는 생각해.

그렇게 너희들의 질문을 받다 보니, 오래 전에 사둔 책이 생각이 났단다. <이야기 프랑스사> 그리고 작년인가 재작년에 사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책도 생각이 났어. 그래서 이번에 연이어 읽었단다. 먼저 <이야기 프랑스사> 먼저 이야기 해 줄게. 한 나라의 오랜 역사를 최대한 줄여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줄여서 이야기해볼게.


1.

프랑스의 역사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구석기 시대 때 만들어진 라스코 동굴 벽화란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작년에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1>에서도 나왔었잖아. 그러니 오늘은 생략. 짧게 이야기하기로 했으니까.

기원전 500년 경 철기 문화를 가진 켈트 족이 오늘날 프랑스 땅으로 이주를 해서 골(Gaule) 지방에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 당시 켈트 족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고 하는구나. 후에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지방에서 전쟁하면서 쓴 <갈리아 전쟁기>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는 <갈리아 전쟁기>를 읽었지만, 전혀 기억이 없구나.. 슬픈 기억력이로구나.

오늘날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어원은 오래 전에 그 지역이 거주하던 파구스 부족에서 유래했다고 하는구나. 로마에 의해 점령당한 시기에는 프랑스 땅은 갈리아로 불렀는데, 로마의 속주였지. 그 당시에 로마식 건물들이 많이 지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도 있대. 로마의 속주로 있을 때, 가끔 켈트 족이 항전을 했지만 로마의 대군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지. 당시 프랑스 땅은 로마에서 파견된 속주의 총독에 의해 관리가 되었고, 로마의 유화 통치에 의해 골 지방의 문화와 로마 문화가 융합된 성격을 띠었다고 했어.

종교도 골 지방의 토속 종교인 드루이드교와 로마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가 1세기경에 기독교가 유입되기 시작했다고 했어. 3세기 이후에는 게르만 족 중에 프랑크족과 알라만 족이 자주 침략해 왔다고 했어. 골 출신의 장군이 그들을 무찔렀는데, 그렇게 게르만 족과 전투를 통해 힘을 얻은 포스툄이라는 사람이 골 제국을 선포하기도 했으나, 이내 로마에 다시 병합되었다고 했어.

4세기에는 훈족이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다시 프랑스 땅 쪽으로 이동해 왔단다. 이때를 게르만족 대이동이라고 불렀어. 이 때 로마의 국력은 많이 쇠퇴해서 게르만족을 제대로 막을 수 없었어그래서 게르만족의 왕국들이 프랑스 땅에 나라를 세웠어. 이때 프랑스 북부 지역에 클로비스라는 사람이 프랑크 왕국을 세웠단다. 프랑크 왕국은 여러 왕조들이 바뀌면서 이어졌는데 그런 왕조 들 중에 유명한 왕조는 카롤링거 왕조가 있단다. 이 때는 이미 로마가 서로마와 동로마가 나뉘어져 있던 시기였는데, 카롤링거 왕조는 동로마의 성상 금지 조치에 반대하면서 교황과 결탁하여 동로마와 적대관계를 갖기도 했어. 이 부분에 대한 내용도 얼마 전에 너희들에게 이야기해 준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3>에서 나왔던 내용인 것 같구나.

카롤링거 왕조의 가장 유명한 왕은 샤를마뉴 대제였단다. 왕인데, 대제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나중에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의 이름을 라틴어로는 카롤루스이기 때문에 카롤루스 대제로 부르기도 해. 그가 왕위에 올랐던 것은 768년부터 814년까지였단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였고, 경제적으로 도량형을 통일을 하고 화폐도 체계를 갖추었다고 했어. 또한 문예도 부흥시켜 이 때는 카롤루스 르네상스하고 부르기도 한단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부흥은 그가 죽고 나서 내분으로 분열이 되었다는 거야.


2.

그렇게 내분된 프랑크 제국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어. 이슬람 민족인 사라센 족, 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의 노르만 족들이 침입했어. 그로 인해 나라는 더욱 분열이 되었고 지방 분권화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공국이라고 부르는 여러 봉건주의 국가들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우리가 영화 같은 것을 보면 백작이니, 공작이니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데, 그것 직함들이 바로 봉건 국가들의 지배자 직함이었단다.

===================

(79)

그 과정에서 그들은 백작이라고 불렸고, 그들이 소유한 영지는 백작령이라고 불렸다. 몇 개의 백작령을 합한 대영주들도 나타났는데, 그들은 후작 혹은 공작이라고 불렸다.

이 시기 프랑스는 여러 개의 백작령과 공작령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프랑스 동부에는 강력한 부르고뉴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루아르 강 북부에는 프랑드르 공국이, 서부에는 로베르 르 포르 공국이 있었고, 이 두 개의 공국 사이에는 카롤링거 왕조가 노르만족에게 양도한 노르망디 공국이 있었다. 이런 지역을 다스리는 백작과 공작들은 상위 군주로서 왕을 섬기긴 했지만, 각자 가지의 영역을 다스리는 독립된 세력이었다.

===================

이 때는 왕도 봉건 영주들이 번갈아 가면서 했다고 했어. 그러다가 위그 카페 왕조가 세습을 했다고 하더구나. 이 당시 왕의 권력은 무척 작아서 왕이라는 것이 상징적인 자리에 불과했대. 봉건 사회는 세 개의 신분이 뚜렷했어. 성직자, 기사, 농노. 보통 기사들은 말 타고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텐데, 엘리트 지배 집단을 기사로 보면 된단다. 국왕부터 평기사까지 모두 기사 계급이라고 보면 된단다. 농노는 영주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 주로 농사 지내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데 이들은 영주의 보호 아래 신체의 자유가 없었어. 영주가 다스리는 경제 생활의 기본 단위인 장원 안에서 생활했단다. 성직자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종교뿐만 아니라 재판권도 가지고 있었고, 땅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십일조로 인해 재력도 컸다고 하는구나. 성직자들에 의해 당시 사회가 통제가 되었고, 학문, 문화 등이 이루어졌다고 했어. 성직자 중의 최고는 교황이었고, 그 밑에 대주교, 주교, 교구사제, 신부, 수도사 등이 있었어. 신부는 농민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해. 그래서 신부는 농노 출신도 많았다고 하는구나. 이렇게 성직자의 권한이 크고 재력도 크다 보니, 영주와 비슷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탁하는 경우도 많아졌대.

11세기에는 농업 기술이 진보하여 생산량이 늘었고, 그런 생산량이 늘어보니 남아 도는 생산물들이 생겼고, 그걸 팔아야 하니 상업도 발달했다고 했어. 그러면서 성채 밖에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살게 되었어. 나중에 그들은 중세 도시 시민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단다. 그들은 길드를 만들어 자신들의 조직을 보호하기 했지만 봉건 사회에서 그들도 영주의 소속이어야 했어. 상인들은 영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코뮌 운동을 벌이기도 했단다.

상징뿐이던 왕이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카페 왕족이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단다. 뚱뚱보로 불리던 루이 6세부터 왕권 강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존엄왕이라 불리게 되는 필립 2(필립 오퀴스트)에 와서 왕권이 많이 강해졌단다. 영국 존 1세가 소영주의 약혼녀를 빼앗는 횡포를 저질렀는데, 이를 이유로 필립 2세는 존 1세가 차지하고 있던 로르망 지역을 몰수했고, 1세는 프랑스를 공격했지만,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었단다. 예로부터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권력이 세졌는데, 필립 2세도 존 1세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왕권이 세졌단다. 그리고 국민들도 전쟁의 승리에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국민 감정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대. 그런 힘을 바탕으로 필립 2세는 남프랑스 쪽까지 영토를 확장했대. 필립 2세의 아들 루이 8세는 금방 죽고 루이 9세도 십자군 원정에서 죽고 말았어.

필립 3세를 거쳐 필립 4필립 4세는 교황과 대립을 세우기도 했대.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나라들의 역사를 알아 보다 보면 기독교의 역사도 같이 봐야 하는 것 같더구나. 프랑스의 역사도 마찬가지당시 기독교 개혁이 있었다고 했어. 왜냐하면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고 했잖아. 그렇다 보니 부정부패가 많아졌다고 했어. 그래서 내부로부터 개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이 유명하다고 하는구나. 클뤼니 수도원은 영주로부터 독립을 하고 토지 소유를 금지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너무 근본 원칙을 따져서 종교 의식을 지나치게 강조를 했다고 하는구나. 이 당시에 이단 척결의 목적으로 시작한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고 했어. 하지만 8차에 이어진 십자군 원정이 결국 실패로 끝이 나자, 교황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에 반해 왕권이 강화되었단다.

12세기 들어서면서 교회는 이단을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마녀 사냥도 이때 생긴 것이란다. 유대인도 이단으로 취급되어 이때부터 유럽사회에서 유대인을 멸시하는 풍토가 생겨난 것 같아. 이때 유대인을 이단을 취급한 이유는 예수를 죽인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이유와 고리대금업을 하는 이유였다고 하는구나.


3.

긴 역사 이야기를 흐름을 쭉 이어서 이야기하면 좋겠지만, 아빠가 그럴 능력은 없고,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 이해해줘. 중세 말이라고 할 수 있는 14세기…. 이 시기는 흉작이 이어지면서 경제도 위축이 되었대. 그리고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어 프랑스도 많은 피해를 입었대..

그리고 1337년부터 1452년까지 백년전쟁이 있었어. 이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인데, 프랑스의 일부 제후들이 영국 편을 들기도 했대. 프랑스의 왕조인 카페 왕조의 왕 샤를 4세가 왕위 계승할 아들을 남기지 않고 죽게 되자, 필립 4세의 외손자가 다음 왕위 계승자 1순위가 되었는데, 그 사람은 에드워드 3세라는 영국인이었어. 프랑스 왕을 영국인에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필립 4세의 사촌인 필립 드 발루아를 왕으로 세웠어. 그러자 에드워드 3세는 왕위를 요구하게 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했어. 그 외에도 영국의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대.

백년전쟁 와중에 프랑스 내의 왕들끼리의 전쟁, 그러니까 내전도 함께 벌어졌대. 헨리 5세가 이끄는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는 등 프랑스는 밀리는 형상이었는데 그때 나타난 영웅이 그 유명한 잔다르크였단다. 백년전쟁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는 완전히 분리가 되었고, 국경선을 명확히 그었대. 이것은 유럽의 다른 나에도 영향을 주어 국경선이 확실해졌고, 그로 인해 민족성이 강해졌다고 했어.

오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한 동안 국가 재건에 힘썼어. 그리고 국력의 중요성을 알게 되어 군사력 증강에 노력을 하였어. 15세기 중반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서히 다시 경제를 회복되었다고 했어. 경제가 회복된다고 했지만, 일부 계층, 즉 상인(부르주아)들의 이익만 많이 커졌어. 돈이 많아지면 권력도 생기는 법.. 상인들이 관직에 진출하기도 했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프랑스는 해외 정벌에 나서서 이탈리아와 전쟁을 했고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탐내기도 했어.


4.

루이 13세는 아버지 앙리 4세가 살해당하면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어. 모후라는 사람이 섭정을 했는데, 그는 이탈리아 사람이라 프랑스 국민들이 싫어했어. 성인이 된 루이 13세는 모후 일가를 몰아냈어. 그리고 리슐리외 추기경에서 국가 업무를 일임했단다. (1624) 리슐리외는 무엇보다 왕권 강화에 힘을 썼단다. 리슐리외가 죽고 마자랭이 후임이 되어 나랏일을 했단다. 루이 13세도 오래 못살고 루이 14세도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단다. 마자랭이 계속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국민, 고등법원 할 것 없이 마자랭을 싫어했대.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서 루이 14세는 한때 피난한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태양왕이라고 부를 정도로 최고권력자가 되었단다.

루이 14세는 어른이 되고 재상 없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어. 그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 말은 절대 왕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단다. 강력한 왕권과 절대 왕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이웃 국가들과 전쟁을 통해 국토를 확장해 나갔지만, 그런 전쟁으로 나라 빚은 늘어만 갔지.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을 종교 개혁과 종교 전쟁이 많았는데, 프랑스도 그 영향권에 있었어. 칼뱅주의에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자들이 늘었는데, 그들을 위그노라고 불렀어. 그들은 절대 권력을 부정하고 공화주의를 주장하다 보니 절대 왕정을 주장하던 루이 14세에게 밉보이게 되어서 탄압을 받았단다. 이 시기 문화적인 측면을 보면, 15세기 후반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르네상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문화 부흥이 일어났고 건축이 발달하였다고 했어. 베르사유 궁전도 이때 지어졌다고 하는구나.

인쇄술이 발달하게 되어 책의 보급이 늘어났고, 상인들도 쉽게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되면서 그들의 지적 수준이 올라갔어.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가난한 민중들은 살기가 어려웠단다. 경제라는 것이 오늘날도 그렇지만 호황과 불황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제 무역이 활발해지면 다시 회복이 되었단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계층이 많이 성장하였고, 그들은 정치적 권력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적 지적 활동에도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부르주아는 전통적인 귀족들과 대립하기 시작했어.

태양왕 루이 14세가 77세에 사망을 했는데, 왕위를 이어받을 장남, 장손이 다 죽고 증손자뿐이었어. 그래서 2살인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단다.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하였는데, 그는 루이 14세가 진행했던 정책들은 모두 뒤집어 버렸고 귀족들의 권력을 강화시켰어. 아무래도 자신이 귀족이니까 그랬겠지. 성년이 된 루이 15세가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능력이 없었고 부인에게 휘둘리던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그런데 루이 15세가 죽고 난 다음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도 무능하긴 마찬가지였단다.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공주였는데, 마리 또한 왕비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어.

루이 14세부터 전쟁으로 인한 나라 빚은 점점 커져만 갔고, 대흉작까지 발생하여 민심을 악화될대로 악화되었단다. 한편, 시민 의식들은 많이 올라가 있었지. 루이 14세 이후 계몽사상가들 중심으로 자유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어. 이때 유명한 계몽사상가들로는 몽케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이 있었단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자유주의 사상의 성장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


5.

프랑스의 신분제도는 성직자인 1신분, 귀족인 2신분, 나머지 사람들은 3신분이었어. 국민 대다수는 3신분이었고, 새로 급부상한 부르주아도 3신분이었어. 그런데 나라 정책을 결정할 때는 항상 각 신분별 동일한 권한이 주어지니, 기득권 세력인 1신분과 2신분이 같은 결정을 하면 늘 결과는 2:1이란다. 그래서 3신분은 그들 만의 의회인 국민의회를 정식으로 출범했단다. 당연히 루이 16세는 반대를 했지. 하지만, 민병대까지 조직한 국민회의는 절대 다수의 지지를 많으며 무시 못할 힘을 갖게 되었어. 그리고 그들은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게 되었단다.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어.

프랑스 대혁명. 너희들도 학교 다니면서 많이 보게 될 1789년이었단다.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국민의 권리 선언을 했단다. 프랑스 대혁명은 아빠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읽은 <프랑스 대혁명>의 독서 편지 때 자세히 이야기할게. 오늘은 이미 엄청난 분량의 편지를 썼으니 프랑스 대혁명 부분은 더욱 짧게 이야기하마. 프랑스 대혁명의 소식을 들은 유럽 국가들이 연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하려고 하여 프랑스는 먼저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을 했어. 한편 루이 16세는 식구들과 함께 몰래 도망 가려가다가 잡혀 오기도 했단다. 그리고 끝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어. 대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국민의회 내부에서는 갈등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단다. 이 공포정치는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이 단두대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이 났단다.

공포정치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회는 혼란스럽고, 서로 반대파를 못 죽여 안달이었단다. 이런 혼란이 계속 될 때는 군사력을 가진 이가 막강한 힘을 갖게 되는데, 이 때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어. 유럽 전쟁에서 연승을 거둔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게 되었단다. 나폴레옹 전쟁 영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잡았지만, 프랑스 대혁명으로 사라진 황제라는 호칭을 다시 자신에게 붙였단다. 다시 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민족주의가 성장한 프랑스의 국민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단다. 하지만 러시아 원정을 떠났다가 프러시아에 대패하였고, 이후 모든 유럽국가들이 프랑스를 공격하여 나폴레옹은 퇴위하여 엘바섬에 귀양을 가게 되었단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파리에 진격하여 점령하였지만, 백일도 넘기지 못하고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모든 권력을 잃게 된단다. 이를 가리켜 백일천하라고들 한단다.  나톨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 끌려가서 18215얼 사망하게 된다. 그렇게 나폴레옹의 시대도 끝이 났단다.


6.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이후 루이 18세가 왕정복고를 외치면서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프랑스 시민들은 나라의 주인은 국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후 민중봉기와 혁명이 반복해서 일어나다가 1848년 드디어 공화제 헌법이 제정이 되었고,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대통령이 루이 보나파르트라고 나폴레옹의 조카였단다. 나폴레옹의 후광을 받아 대통령이 된 것인데, 루이 보나파르트는 반동정치를 일삼았어.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보통 선거를 폐지하는 등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고 있었어. 그러더니 다시 자신을 황제라고 선포하면서 나폴레옹 3세라고 불렀단다. 러시아와 벌인 크림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막강한 군사력도 가지게 되었어.

파리 도시 계획을 세워 파리를 정비하기도 했단다. 그의 집권 후반기에 경제가 불안해지고 외교정책의 실패로 인기가 하락되었어. 그리고 프러시아와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단다. 이때 의회는 다시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이 되었단다. 격변의 시기인 것 같구나. 시간은 흘러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건축물이 세워졌는데, 구스타프 에펠이라는 사람이 세운 그 유명한 에펠탑이란다.

프랑스 사회는 제국주의라는 세계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식민지 건설에 힘을 썼어. 제국주의 시대에는 각 국가간 이해관계에 따라 내 편, 네 편이 되었는데 프랑스는 영국, 러시아와 함께 동맹을 맺고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였단다. 그렇게 적대적인 관계는 1차세계대전으로 폭발했어. 연합국이 승리를 했지만 승전국들도 피해는 엄청났단다.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면서 유럽은 공산당의 활동이 활발했어. 사회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시기였어. 연이어 일어난 2차세계대전으로 전세계는 혼란 속에 빠져들었어. 1940년 독일이 파리에 입성하였고 친히틀러 세력인 페탱이 프랑스 대통령이 되었어. 독일과 친독일 정부를 상대로 레지스탕스 활동이 한 이들이 있었고 레지스탕스들의 지도자는 드골이라는 사람이었단다. 드골은 임시 정부를 만들었고, 그는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 대통령이 되기도 했단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안정적인 공화정 체제와 함께 나라를 안정을 찾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아빠가 이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하면서 읽었고 그 메모를 바탕으로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다시 읽어보면 역사의 흐름이 물 흐르듯이 이어져야 하는데, 마치 양자가 점프하는 것처럼 띄엄띄엄인 것 같구나. 늘 그렇듯 이해해주길 바란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나서 막스 갈로의 <프랑스 대혁명>을 읽었는데,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프랑스 대혁명을 또 이야기해보자꾸나. 그럼, 안녕


PS:

책의 첫 문장 : 프랑스 지역에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180만 년에서 기원전 1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였다.

책의 끝 문장 : 그리고 5월 혁명을 겪은 이후의 프랑스 문화계는 또 다른 변화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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