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프랑스사 - 골 지방의 선사 시대부터 20세기 프랑스까지 이야기 역사 8
윤선자 지음 / 청아출판사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요즘 우리가 즐겨 듣고, 너희들이 흥얼거리는 노래 중에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삽입곡 <one day more>가 있잖아. 영어 가사로 제대로는 못 부르지만 흥얼거리는 그 노래. 우리 식구들 모두 좋아해서 자주 듣곤 하지. 그래서 너희들은 동화로 각색된 <레 미제라블>도 읽었지. 영화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 보지는 못하고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고하지만, 아빠도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단다. <레 미제라블> 소설도 읽고 영화도 봤지만 말이야. 그리고 사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에서 이어진 져 수십 년 후 일어난 민중항쟁이 배경이란다. 어찌했든 크게 보면 프랑스 대혁명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고 아빠는 생각해.

그렇게 너희들의 질문을 받다 보니, 오래 전에 사둔 책이 생각이 났단다. <이야기 프랑스사> 그리고 작년인가 재작년에 사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책도 생각이 났어. 그래서 이번에 연이어 읽었단다. 먼저 <이야기 프랑스사> 먼저 이야기 해 줄게. 한 나라의 오랜 역사를 최대한 줄여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줄여서 이야기해볼게.


1.

프랑스의 역사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구석기 시대 때 만들어진 라스코 동굴 벽화란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작년에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1>에서도 나왔었잖아. 그러니 오늘은 생략. 짧게 이야기하기로 했으니까.

기원전 500년 경 철기 문화를 가진 켈트 족이 오늘날 프랑스 땅으로 이주를 해서 골(Gaule) 지방에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 당시 켈트 족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고 하는구나. 후에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지방에서 전쟁하면서 쓴 <갈리아 전쟁기>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는 <갈리아 전쟁기>를 읽었지만, 전혀 기억이 없구나.. 슬픈 기억력이로구나.

오늘날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어원은 오래 전에 그 지역이 거주하던 파구스 부족에서 유래했다고 하는구나. 로마에 의해 점령당한 시기에는 프랑스 땅은 갈리아로 불렀는데, 로마의 속주였지. 그 당시에 로마식 건물들이 많이 지어져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도 있대. 로마의 속주로 있을 때, 가끔 켈트 족이 항전을 했지만 로마의 대군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지. 당시 프랑스 땅은 로마에서 파견된 속주의 총독에 의해 관리가 되었고, 로마의 유화 통치에 의해 골 지방의 문화와 로마 문화가 융합된 성격을 띠었다고 했어.

종교도 골 지방의 토속 종교인 드루이드교와 로마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가 1세기경에 기독교가 유입되기 시작했다고 했어. 3세기 이후에는 게르만 족 중에 프랑크족과 알라만 족이 자주 침략해 왔다고 했어. 골 출신의 장군이 그들을 무찔렀는데, 그렇게 게르만 족과 전투를 통해 힘을 얻은 포스툄이라는 사람이 골 제국을 선포하기도 했으나, 이내 로마에 다시 병합되었다고 했어.

4세기에는 훈족이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다시 프랑스 땅 쪽으로 이동해 왔단다. 이때를 게르만족 대이동이라고 불렀어. 이 때 로마의 국력은 많이 쇠퇴해서 게르만족을 제대로 막을 수 없었어그래서 게르만족의 왕국들이 프랑스 땅에 나라를 세웠어. 이때 프랑스 북부 지역에 클로비스라는 사람이 프랑크 왕국을 세웠단다. 프랑크 왕국은 여러 왕조들이 바뀌면서 이어졌는데 그런 왕조 들 중에 유명한 왕조는 카롤링거 왕조가 있단다. 이 때는 이미 로마가 서로마와 동로마가 나뉘어져 있던 시기였는데, 카롤링거 왕조는 동로마의 성상 금지 조치에 반대하면서 교황과 결탁하여 동로마와 적대관계를 갖기도 했어. 이 부분에 대한 내용도 얼마 전에 너희들에게 이야기해 준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3>에서 나왔던 내용인 것 같구나.

카롤링거 왕조의 가장 유명한 왕은 샤를마뉴 대제였단다. 왕인데, 대제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나중에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의 이름을 라틴어로는 카롤루스이기 때문에 카롤루스 대제로 부르기도 해. 그가 왕위에 올랐던 것은 768년부터 814년까지였단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였고, 경제적으로 도량형을 통일을 하고 화폐도 체계를 갖추었다고 했어. 또한 문예도 부흥시켜 이 때는 카롤루스 르네상스하고 부르기도 한단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부흥은 그가 죽고 나서 내분으로 분열이 되었다는 거야.


2.

그렇게 내분된 프랑크 제국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어. 이슬람 민족인 사라센 족, 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의 노르만 족들이 침입했어. 그로 인해 나라는 더욱 분열이 되었고 지방 분권화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공국이라고 부르는 여러 봉건주의 국가들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우리가 영화 같은 것을 보면 백작이니, 공작이니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데, 그것 직함들이 바로 봉건 국가들의 지배자 직함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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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그들은 백작이라고 불렸고, 그들이 소유한 영지는 백작령이라고 불렸다. 몇 개의 백작령을 합한 대영주들도 나타났는데, 그들은 후작 혹은 공작이라고 불렸다.

이 시기 프랑스는 여러 개의 백작령과 공작령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프랑스 동부에는 강력한 부르고뉴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루아르 강 북부에는 프랑드르 공국이, 서부에는 로베르 르 포르 공국이 있었고, 이 두 개의 공국 사이에는 카롤링거 왕조가 노르만족에게 양도한 노르망디 공국이 있었다. 이런 지역을 다스리는 백작과 공작들은 상위 군주로서 왕을 섬기긴 했지만, 각자 가지의 영역을 다스리는 독립된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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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는 왕도 봉건 영주들이 번갈아 가면서 했다고 했어. 그러다가 위그 카페 왕조가 세습을 했다고 하더구나. 이 당시 왕의 권력은 무척 작아서 왕이라는 것이 상징적인 자리에 불과했대. 봉건 사회는 세 개의 신분이 뚜렷했어. 성직자, 기사, 농노. 보통 기사들은 말 타고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텐데, 엘리트 지배 집단을 기사로 보면 된단다. 국왕부터 평기사까지 모두 기사 계급이라고 보면 된단다. 농노는 영주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 주로 농사 지내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데 이들은 영주의 보호 아래 신체의 자유가 없었어. 영주가 다스리는 경제 생활의 기본 단위인 장원 안에서 생활했단다. 성직자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종교뿐만 아니라 재판권도 가지고 있었고, 땅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십일조로 인해 재력도 컸다고 하는구나. 성직자들에 의해 당시 사회가 통제가 되었고, 학문, 문화 등이 이루어졌다고 했어. 성직자 중의 최고는 교황이었고, 그 밑에 대주교, 주교, 교구사제, 신부, 수도사 등이 있었어. 신부는 농민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해. 그래서 신부는 농노 출신도 많았다고 하는구나. 이렇게 성직자의 권한이 크고 재력도 크다 보니, 영주와 비슷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탁하는 경우도 많아졌대.

11세기에는 농업 기술이 진보하여 생산량이 늘었고, 그런 생산량이 늘어보니 남아 도는 생산물들이 생겼고, 그걸 팔아야 하니 상업도 발달했다고 했어. 그러면서 성채 밖에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살게 되었어. 나중에 그들은 중세 도시 시민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단다. 그들은 길드를 만들어 자신들의 조직을 보호하기 했지만 봉건 사회에서 그들도 영주의 소속이어야 했어. 상인들은 영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코뮌 운동을 벌이기도 했단다.

상징뿐이던 왕이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카페 왕족이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단다. 뚱뚱보로 불리던 루이 6세부터 왕권 강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존엄왕이라 불리게 되는 필립 2(필립 오퀴스트)에 와서 왕권이 많이 강해졌단다. 영국 존 1세가 소영주의 약혼녀를 빼앗는 횡포를 저질렀는데, 이를 이유로 필립 2세는 존 1세가 차지하고 있던 로르망 지역을 몰수했고, 1세는 프랑스를 공격했지만,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었단다. 예로부터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권력이 세졌는데, 필립 2세도 존 1세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왕권이 세졌단다. 그리고 국민들도 전쟁의 승리에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국민 감정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대. 그런 힘을 바탕으로 필립 2세는 남프랑스 쪽까지 영토를 확장했대. 필립 2세의 아들 루이 8세는 금방 죽고 루이 9세도 십자군 원정에서 죽고 말았어.

필립 3세를 거쳐 필립 4필립 4세는 교황과 대립을 세우기도 했대.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나라들의 역사를 알아 보다 보면 기독교의 역사도 같이 봐야 하는 것 같더구나. 프랑스의 역사도 마찬가지당시 기독교 개혁이 있었다고 했어. 왜냐하면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고 했잖아. 그렇다 보니 부정부패가 많아졌다고 했어. 그래서 내부로부터 개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이 유명하다고 하는구나. 클뤼니 수도원은 영주로부터 독립을 하고 토지 소유를 금지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너무 근본 원칙을 따져서 종교 의식을 지나치게 강조를 했다고 하는구나. 이 당시에 이단 척결의 목적으로 시작한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고 했어. 하지만 8차에 이어진 십자군 원정이 결국 실패로 끝이 나자, 교황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에 반해 왕권이 강화되었단다.

12세기 들어서면서 교회는 이단을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마녀 사냥도 이때 생긴 것이란다. 유대인도 이단으로 취급되어 이때부터 유럽사회에서 유대인을 멸시하는 풍토가 생겨난 것 같아. 이때 유대인을 이단을 취급한 이유는 예수를 죽인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이유와 고리대금업을 하는 이유였다고 하는구나.


3.

긴 역사 이야기를 흐름을 쭉 이어서 이야기하면 좋겠지만, 아빠가 그럴 능력은 없고,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 이해해줘. 중세 말이라고 할 수 있는 14세기…. 이 시기는 흉작이 이어지면서 경제도 위축이 되었대. 그리고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어 프랑스도 많은 피해를 입었대..

그리고 1337년부터 1452년까지 백년전쟁이 있었어. 이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인데, 프랑스의 일부 제후들이 영국 편을 들기도 했대. 프랑스의 왕조인 카페 왕조의 왕 샤를 4세가 왕위 계승할 아들을 남기지 않고 죽게 되자, 필립 4세의 외손자가 다음 왕위 계승자 1순위가 되었는데, 그 사람은 에드워드 3세라는 영국인이었어. 프랑스 왕을 영국인에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필립 4세의 사촌인 필립 드 발루아를 왕으로 세웠어. 그러자 에드워드 3세는 왕위를 요구하게 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했어. 그 외에도 영국의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대.

백년전쟁 와중에 프랑스 내의 왕들끼리의 전쟁, 그러니까 내전도 함께 벌어졌대. 헨리 5세가 이끄는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는 등 프랑스는 밀리는 형상이었는데 그때 나타난 영웅이 그 유명한 잔다르크였단다. 백년전쟁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는 완전히 분리가 되었고, 국경선을 명확히 그었대. 이것은 유럽의 다른 나에도 영향을 주어 국경선이 확실해졌고, 그로 인해 민족성이 강해졌다고 했어.

오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한 동안 국가 재건에 힘썼어. 그리고 국력의 중요성을 알게 되어 군사력 증강에 노력을 하였어. 15세기 중반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서서히 다시 경제를 회복되었다고 했어. 경제가 회복된다고 했지만, 일부 계층, 즉 상인(부르주아)들의 이익만 많이 커졌어. 돈이 많아지면 권력도 생기는 법.. 상인들이 관직에 진출하기도 했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프랑스는 해외 정벌에 나서서 이탈리아와 전쟁을 했고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탐내기도 했어.


4.

루이 13세는 아버지 앙리 4세가 살해당하면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어. 모후라는 사람이 섭정을 했는데, 그는 이탈리아 사람이라 프랑스 국민들이 싫어했어. 성인이 된 루이 13세는 모후 일가를 몰아냈어. 그리고 리슐리외 추기경에서 국가 업무를 일임했단다. (1624) 리슐리외는 무엇보다 왕권 강화에 힘을 썼단다. 리슐리외가 죽고 마자랭이 후임이 되어 나랏일을 했단다. 루이 13세도 오래 못살고 루이 14세도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단다. 마자랭이 계속 섭정을 하게 되었는데, 국민, 고등법원 할 것 없이 마자랭을 싫어했대.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서 루이 14세는 한때 피난한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태양왕이라고 부를 정도로 최고권력자가 되었단다.

루이 14세는 어른이 되고 재상 없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어. 그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 말은 절대 왕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단다. 강력한 왕권과 절대 왕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이웃 국가들과 전쟁을 통해 국토를 확장해 나갔지만, 그런 전쟁으로 나라 빚은 늘어만 갔지.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을 종교 개혁과 종교 전쟁이 많았는데, 프랑스도 그 영향권에 있었어. 칼뱅주의에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자들이 늘었는데, 그들을 위그노라고 불렀어. 그들은 절대 권력을 부정하고 공화주의를 주장하다 보니 절대 왕정을 주장하던 루이 14세에게 밉보이게 되어서 탄압을 받았단다. 이 시기 문화적인 측면을 보면, 15세기 후반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르네상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문화 부흥이 일어났고 건축이 발달하였다고 했어. 베르사유 궁전도 이때 지어졌다고 하는구나.

인쇄술이 발달하게 되어 책의 보급이 늘어났고, 상인들도 쉽게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되면서 그들의 지적 수준이 올라갔어.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가난한 민중들은 살기가 어려웠단다. 경제라는 것이 오늘날도 그렇지만 호황과 불황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제 무역이 활발해지면 다시 회복이 되었단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계층이 많이 성장하였고, 그들은 정치적 권력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적 지적 활동에도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부르주아는 전통적인 귀족들과 대립하기 시작했어.

태양왕 루이 14세가 77세에 사망을 했는데, 왕위를 이어받을 장남, 장손이 다 죽고 증손자뿐이었어. 그래서 2살인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단다.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하였는데, 그는 루이 14세가 진행했던 정책들은 모두 뒤집어 버렸고 귀족들의 권력을 강화시켰어. 아무래도 자신이 귀족이니까 그랬겠지. 성년이 된 루이 15세가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능력이 없었고 부인에게 휘둘리던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그런데 루이 15세가 죽고 난 다음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도 무능하긴 마찬가지였단다.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공주였는데, 마리 또한 왕비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어.

루이 14세부터 전쟁으로 인한 나라 빚은 점점 커져만 갔고, 대흉작까지 발생하여 민심을 악화될대로 악화되었단다. 한편, 시민 의식들은 많이 올라가 있었지. 루이 14세 이후 계몽사상가들 중심으로 자유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어. 이때 유명한 계몽사상가들로는 몽케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이 있었단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자유주의 사상의 성장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


5.

프랑스의 신분제도는 성직자인 1신분, 귀족인 2신분, 나머지 사람들은 3신분이었어. 국민 대다수는 3신분이었고, 새로 급부상한 부르주아도 3신분이었어. 그런데 나라 정책을 결정할 때는 항상 각 신분별 동일한 권한이 주어지니, 기득권 세력인 1신분과 2신분이 같은 결정을 하면 늘 결과는 2:1이란다. 그래서 3신분은 그들 만의 의회인 국민의회를 정식으로 출범했단다. 당연히 루이 16세는 반대를 했지. 하지만, 민병대까지 조직한 국민회의는 절대 다수의 지지를 많으며 무시 못할 힘을 갖게 되었어. 그리고 그들은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게 되었단다.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어.

프랑스 대혁명. 너희들도 학교 다니면서 많이 보게 될 1789년이었단다.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국민의 권리 선언을 했단다. 프랑스 대혁명은 아빠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읽은 <프랑스 대혁명>의 독서 편지 때 자세히 이야기할게. 오늘은 이미 엄청난 분량의 편지를 썼으니 프랑스 대혁명 부분은 더욱 짧게 이야기하마. 프랑스 대혁명의 소식을 들은 유럽 국가들이 연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하려고 하여 프랑스는 먼저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을 했어. 한편 루이 16세는 식구들과 함께 몰래 도망 가려가다가 잡혀 오기도 했단다. 그리고 끝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어. 대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국민의회 내부에서는 갈등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단다. 이 공포정치는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이 단두대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이 났단다.

공포정치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회는 혼란스럽고, 서로 반대파를 못 죽여 안달이었단다. 이런 혼란이 계속 될 때는 군사력을 가진 이가 막강한 힘을 갖게 되는데, 이 때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어. 유럽 전쟁에서 연승을 거둔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게 되었단다. 나폴레옹 전쟁 영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잡았지만, 프랑스 대혁명으로 사라진 황제라는 호칭을 다시 자신에게 붙였단다. 다시 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민족주의가 성장한 프랑스의 국민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단다. 하지만 러시아 원정을 떠났다가 프러시아에 대패하였고, 이후 모든 유럽국가들이 프랑스를 공격하여 나폴레옹은 퇴위하여 엘바섬에 귀양을 가게 되었단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파리에 진격하여 점령하였지만, 백일도 넘기지 못하고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모든 권력을 잃게 된단다. 이를 가리켜 백일천하라고들 한단다.  나톨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 끌려가서 18215얼 사망하게 된다. 그렇게 나폴레옹의 시대도 끝이 났단다.


6.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이후 루이 18세가 왕정복고를 외치면서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프랑스 시민들은 나라의 주인은 국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후 민중봉기와 혁명이 반복해서 일어나다가 1848년 드디어 공화제 헌법이 제정이 되었고,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대통령이 루이 보나파르트라고 나폴레옹의 조카였단다. 나폴레옹의 후광을 받아 대통령이 된 것인데, 루이 보나파르트는 반동정치를 일삼았어.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보통 선거를 폐지하는 등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고 있었어. 그러더니 다시 자신을 황제라고 선포하면서 나폴레옹 3세라고 불렀단다. 러시아와 벌인 크림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막강한 군사력도 가지게 되었어.

파리 도시 계획을 세워 파리를 정비하기도 했단다. 그의 집권 후반기에 경제가 불안해지고 외교정책의 실패로 인기가 하락되었어. 그리고 프러시아와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단다. 이때 의회는 다시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이 되었단다. 격변의 시기인 것 같구나. 시간은 흘러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건축물이 세워졌는데, 구스타프 에펠이라는 사람이 세운 그 유명한 에펠탑이란다.

프랑스 사회는 제국주의라는 세계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식민지 건설에 힘을 썼어. 제국주의 시대에는 각 국가간 이해관계에 따라 내 편, 네 편이 되었는데 프랑스는 영국, 러시아와 함께 동맹을 맺고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였단다. 그렇게 적대적인 관계는 1차세계대전으로 폭발했어. 연합국이 승리를 했지만 승전국들도 피해는 엄청났단다.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면서 유럽은 공산당의 활동이 활발했어. 사회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시기였어. 연이어 일어난 2차세계대전으로 전세계는 혼란 속에 빠져들었어. 1940년 독일이 파리에 입성하였고 친히틀러 세력인 페탱이 프랑스 대통령이 되었어. 독일과 친독일 정부를 상대로 레지스탕스 활동이 한 이들이 있었고 레지스탕스들의 지도자는 드골이라는 사람이었단다. 드골은 임시 정부를 만들었고, 그는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 대통령이 되기도 했단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안정적인 공화정 체제와 함께 나라를 안정을 찾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아빠가 이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하면서 읽었고 그 메모를 바탕으로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다시 읽어보면 역사의 흐름이 물 흐르듯이 이어져야 하는데, 마치 양자가 점프하는 것처럼 띄엄띄엄인 것 같구나. 늘 그렇듯 이해해주길 바란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나서 막스 갈로의 <프랑스 대혁명>을 읽었는데,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프랑스 대혁명을 또 이야기해보자꾸나. 그럼, 안녕


PS:

책의 첫 문장 : 프랑스 지역에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180만 년에서 기원전 1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였다.

책의 끝 문장 : 그리고 5월 혁명을 겪은 이후의 프랑스 문화계는 또 다른 변화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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