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그 동기들 중에 으뜸은 엄청나게 커다란 고래라는 압도적인 존재 자체였다. 경이롭고 신비한 그 괴물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런가 하면 고래가 섬만 한 덩치로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사납고 먼 바다, 형용할 수 없는 고래의 위협, 거기에 파타고니아 인근에서 들려오는 무수한 목격담의 경이로움이 더해지면서 소망을 부추겼다.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이 유혹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머나먼 것들을 향한 끝없는 갈망에 시달린다.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고 야만의 해안에 오르고 싶다. 나는 좋은 걸 외면하지 않으면서 공포에 민감하고, 그러면서도 상대가 허락만 해준다면 그들과 정겹게 어우러질 수 있는데, 자신이 사는 세상의 모든 거주민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85-86)

그래, 고래잡이는 죽음을 불사하는 일이야. 입술 한 번 달싹할 틈 없는 순간적인 혼란 속에서 사람들을 영원에 던져 넣지. 하지만 그다음엔? 내가 보기에 우리가 생사의 문제를 대단히 잘못 생각해 온 듯하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승에서 그림자라고 부르는 게 실은 나의 실체인 듯하다. 또 영적인 것을 보는 우리는 물속에서 태양을 보며 탁한 물을 더없이 맑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굴조개와 흡사하다. 내 생각엔 몸뚱이는 더 나은 실체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몸뚱이 따윈 누구라도 가져가라지. 가져가라니까. 이건 내가 아니라고. 그러니 낸터컷을 위해 만세삼창을 부르자. 그리고 배나 몸뚱이에는 언제 구멍이 뚫리더라도 상관없어. 내 영혼은 제우스가 온다 해도 뚫을 수 없을 테니까.


(110)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친구끼리 흉금을 털어놓기에 침대만 한 곳은 없다. 부부는 침대에서 서로에게 영혼의 밑바닥까지 보여 주고, 나이 든 부부는 동이 트도록 침대에 누워 옛날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나와 퀴퀘그도 그렇게 편하고 사랑스러운 한 쌍이 되어 마음의 밀월을 즐겼다.


(191-192)

폭풍우에 뒤집혀 바람이 불어 가는 해안을 따라 하릴없이 떠밀리는 배처럼 그에겐 그게 어울린다고만 해두자. 항구는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항구는 자비롭다. 항구에는 안전과 안락, 난로, 저녁 식사, 따뜻한 담요, 친구, 우리 인간에게 다정한 모든 것이 있다. 하지만 그런 돌풍 속에서는 항구가, 육지가, 배에서 가장 긴박한 위험이 된다. 배는 모든 환대를 피해 달아나야 한다. 조금이라도 뭍에 닿았다간, 용골을 살짝 스치기만 해도 충격에 몸서리칠 것이다. 그리하여 배는 돛을 모두 펼치고 온힘을 다해 해안에서 멀어지려 한다. 그러면서 배는 고향으로 불어가려는 바람에 맞서 싸우고, 파도가 휘몰아치는 망망대해로 나갈 방법을 모색한다. 피난처를 찾겠다며 필사적으로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유일한 친구가 가장 가혹한 원수라니!


(197)

남반구의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레일리아가 문명사회에 알려지게 된 계기도 고래잡이들이었다. 처음에 네덜란드 사람이 우연히 발견한 뒤에도 다른 배들은 그곳을 미개한 질병의 온상으로 여겨 오래도록 멀리했지만, 포경선만은 그곳에 다가갔다. 지금의 막강한 식민지를 낳은 진정한 어머니는 포경선인 것이다. 게다가 식민 정책을 추진하던 초창기에, 기아에 시달리는 정착민들이 천우신조로 인근에 닻을 내린 포경선에서 호의로 나눠 준 건빵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폴리네시아의 무수한 섬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선교사와 상인들에게 길을 터주고 더 나아가 초창기 선교사들을 첫 목적지까지 태워다 준 포경선에 경의를 표한다. 이중으로 문을 걸어 잠근 일본이 이방인을 환대하는 날이 온다면, 그 공로는 전적으로 포경선에 돌아가야 할 것이다. 포경선이 바야흐로 그 문지방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


(203)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가 지금껏 침착하게 맞섰던 수많은 위기의 잔상이 아직도 어른거리는 것 같다. 인생 대부분을, 말로 채운 무기력한 책이 아니라 몸으로 이야기하는 팬터마임으로 살아온, 착실하고 충실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렇게 옹골진 냉철함과 불굴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다른 특징들에 영향을 미치고, 몇몇 경우에는 그 특징들을 전부 뒤엎어 버리는 것 같은 어떤 자질을 지녔다. 그는 뱃사람치고는 드물게 양심적이고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가진 탓에, 거친 바다 위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다가 미신에 심하게 경도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미신은, 어떤 사회의 경우 어찌된 까닭인지 무지가 아니라 오히려 지성에서 샘솟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외부의 징후와 내면의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쩌다 그런 것들로 인해 강철 같은 그의 영혼이 무릎을 꿇는 일이 있더라도,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멀리 곶에 두고 온 젊은 아내와 아이의 단란한 추억이었는데, 무뚝뚝한 천성을 떨치고 정직한 사람에게 잠재된 영향력을 발휘하며, 포경업을 하다 보면 처하게 되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모하게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걸 자제할 수 있는 것도 그 추억 때문이었다.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태우지 않는다.> 스타벅의 이 말은 가장 분명하고 유용한 용기란 직면한 위험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서 나오며,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동료라는 뜻인 것 같았다.


(237)

1(2절판), 1(향유고래) – 옛날 영국에서 트럼파고래, 피제터고래, 모루머리고래 등의 이름으로 막연히 알려졌던 이 고래를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카샬로, 독일에서는 포트피슈라고 부르며, 거창한 학명으로는 마크로케팔루스다. 향유고래가 지구상에 거주하는 가장 큰 생명체이며, 우리가 마추치는 고래들 중에 가장 위압적이고 위풍당당한 풍채를 자랑하고, 상품 가치도 가장 뛰어나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귀한 경뇌유를 얻을 수 있는 동물은 오직 향유고래뿐이다. 향유고래의 여러 특징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른 곳에서 다룰 테니 여기서는 주로 이름만 언급하기로 하자. 언어학적으로 따지면 어처구니없는 이름이다. 몇 세기 전만 하더라도 향유고래는 실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경뇌유도 어쩌다 해변으로 밀려온 고래에게서 우연히 얻곤 했는데, 당시에는 경뇌유가 영국에서 그린란드고래, 또는 참고래로 알려진 고래에게서 나온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경뇌유를 뜻하는 영어 단어 spermaceti의 첫 음절 – sperm – 탓에 그린란드고래가 흥분했을 때 분비하는 체액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그 시절에는 경뇌유가 대단히 귀했기 때문에, 불을 밝히는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고 연고나 의약품으로만 썼다.


(279)

다시 말할 테니 잘 듣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고. 눈에 보이는 건 전부 종이로 만든 가면에 불과해. 하지만 어떤 행동이든, 살아가는 행위라는 의심할 나위 없는 그런 행동일 경우에도, 알 순 없지만 그래도 이성적인 뭔가가 허무맹랑한 가면 뒤에서 이목구비를 내미는 법이거든. 일격을 가하려면 가면 뒤에서 뚫어야 해! 죄수가 벽을 뚫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나? 나한테는 이 흰 고래가 나를 바싹 에워싸는 벽이라네. 가끔은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해. 놈은 나를 제 손아귀에 넣고 못살게 굴어. 나는 놈에게서 포악한 힘을, 그 속에 불끈거리는 불가사의한 악의를 느낀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무엇보다 불가사의한 그것이야. 흰 고래가 앞잡이든 주범이든, 나는 놈을 상대로 내 원한을 풀 거야.


(289)

, 인생이여! 이럴 때면 영혼은 지쳐 쓰러지고 지식에 매달린다. 교양 없고 못 배운 자들이 먹을 것을 탐하듯이 매달리게 된다. , 인생이여! 이럴 때면 그대 안에 도사린 공포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건 내가 아니다! 이제 공포는 털어 냈다! 나는 내면에 숨 쉬는 부드럽고 인간적인 감정으로 너, 냉혹하고 실체 없는 미래와 싸울 것이다. 오 은혜로운 기운들이여, 부디 저를 저버리지 마시고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308-309)

그리고 지금은 현실로 확인됐지만 위력이 전설로만 전해지던 시절에는 실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는데, 올라센과 포벨손 같은 몇몇 박물학자는 향유고래가 바다의 모든 생물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이 사나워서 인간의 피에 늘 굶주려 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퀴비에 시절에도 이런 생각이다 이와 비슷한 인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박물지>에서 향유고래가 나타나면 모든 물고기가 (심지어 상어까지도) <더없이 생생한 공포에 사로잡히고>, <급하게 도망치다가 바위에 세게 부딪혀 그 자리에서 죽는 경우도 많다>고 주장했다. 포경업계의 일반적인 경험이 이런 기록을 바로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에 담긴 극명한 공포, 심지어 피에 굶주렸다는 포벨슨의 주장과 미신적인 믿음은 포경업이 부침을 거듭하는 동안 고래잡이들의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330-331)

은하수의 하얀 심연을 볼 때 우주의 무심한 공허와 광막함을 어렴풋이 보여 주면서 절멸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등을 찌르는 건 그 색의 무한함일까? 아니면,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이라기보다 가시적인 색의 부재인 동시에 모든 색이 응집된 상태는 아닐까? 광활한 설경이 무심하게 텅 비었으면서도 의미로 가득 찬 건 이런 이유 때문일까? 색이 없으면서 모든 색이 함축된 무신론처럼 우리를 위축되게 하는 걸까? 그리고 자연 철학자들의 여타 이론들을 살펴보면 지상의 다른 모든 색, 장엄하거나 사랑스러운 광채를 발하는 모든 책, 이를테면 하늘과 숲을 달콤하게 물들이는 저녁놀이나 금박을 입힌 벨벳 같은 나비의 날개, 젊은 처녀들의 나비 같은 뺨, 이 모든 것이 전부 교묘한 속임수이며 실제로 물질이 내재된 게 아니라 외부에서 겉에 드리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344-345)

흰 고래 이야기의 전말, 그중에서도 특히 비참한 최후가 어느 모로 보나 합리적이라는 것을 인쇄의 형태로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한두 가지 이야기를 더 언급하기에 지금보다 적당한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진실이면서도 허구만큼이나 충분한 증거를 요구받는 건 맥 빠지는 일인데, 이것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육지 사람들 대부분은 더없이 명백하고도 뚜렷한 세상의 경이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기 때문에, 포경업의 역사적인 사실과 그 밖의 명백한 사실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으면 모비 딕을 한낱 괴물의 우화로 웃어넘기거나 심지어 징그럽고 소름 끼치는 비유담 정도로 생각할지 모른다.


(377)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이 야릇하고 복잡한 현상에는 우주 전체를 엄청난 장남으로 여기게 되는 묘한 순간이나 상황이 있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만 당하는 거라고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한다. 그렇지만 의기소침할 것도 없고 반박할 만한 가치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모든 사건, 모든 신조, 모든 믿음, 그리고 신념,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단단한 것을, 표면이 얼마나 껄끄럽든 개의치 않고 꿀꺽 삼켜 버린다. 마치 강력한 소화력을 지닌 타조가 총알이건 부싯돌이건 가리지 않고 집어삼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450)

바다의 교활함을 생각해 보라. 바다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들은 물밑으로 잠행하며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더없이 아름다운 푸른빛 아래 음흉하게 숨어 있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수많은 종류의 상어들이 날렵하고 멋스러운 자태를 지닌 것처럼, 가장 무자비한 종족이 악마 같은 광채와 아름다움을 지닌 걸 생각해 보라. 서로 먹고 먹히는 바다의 보편적인 습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 라. 모든 생명체가 서로를 먹이로 삼으며 태초에 시작된 이 영원한 전쟁을 지금도 계속한다.


(460)

인간이란 누구나 포경 밧줄에 싸인 채 살아가는 것을. 모든 인간은 목에 올가미를 건 채 태어나는 것을. 그러나 조용하고 교묘하게 상존하는 삶의 위험을 깨닫는 건 느닷없이 갑작스레 죽음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뿐이다. 당신이 철학자라면, 포경 보트에 앉아 있더라도 작살이 아닌 부지깽이를 옆에 놓고 저녁의 난롯가에서 앉아 있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큰 공포를 느끼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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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3-04-20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모비딕 시작하셨군요!

bookholic 2023-04-21 08:15   좋아요 1 | URL
사실은 얼마 전에 끝났는데요.^^
제가 게을러서 이제서야 ㅎㅎ
파이버 님,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TGIF~~

페크pek0501 2023-04-21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너무 길어서 읽기를 망설이고 있는데 강추인가요?

bookholic 2023-04-21 22:32   좋아요 1 | URL
소문대로 쉽게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온갖 고래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와서 이게 소설인지 자연과학 책인지... ㅎㅎ
(우영우가 계속 떠오르기도 하고요^^)
어려울 거라고 겁먹고 시작했는데, 그래도 나름 괜찮았습니다.
강추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