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가,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귀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32)

이 모든 것들이 당혹스럽고 언짢았다. 왜냐하면 그 무렵 나는 제국주의가 사악한 것이니 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그로부터 멀어질수록 좋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론적으로는(물론 남몰래 그랬다) 전적으로 버마인들 편이었고, 그들의 압제자인 영국인들을 전적으로 적대시했다. 내가 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정도보다 지독하게 혐오했다. 그런 일을 하다보면 제국의 추악한 짓거리들을 지근거리에서 보게 된다. 악취 지독한 철창에 처박혀 있는 불쌍한 죄수들, 장기 재소자들의 겁먹은 얼굴, 대나무로 매질을 당한 사람들의 터진 엉덩이. 이 모든 게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난 그럴싸한 내 나름의 관점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나는 아직 어린데다 부실한 교육을 받았고, 동양에 가 있는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랬듯 내 문제를 철저히 함구한 채 혼자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나는 대영제국이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것을 대체해가는 신생 제국들보다는 영국이 훨씬 낫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내가 알았던 것이라곤 섬기던 제국에 대한 나의 증오와, 도무지 일을 할 수 없게 만들려던 악독하고 자그만 인간들에 대한 나의 분노 사이에 내가 끼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64-65)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나 지금 우리 사회와 같은 곳에 살면서 변화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성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버마에서 영국 제국주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목격했고, 영국에 와서는 빈곤과 실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나로서는 그런 시스템에 맞서 싸운다는 게, 주로 독서 대중에서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 책들을 쓰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하겠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책을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태의 진전이 점점 빨라지고 있으며, 한때는 한 세대 뒤의 위험 같아 보이던 것들이 우리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적극적인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데 그쳐서도 안 되고, 언제나 활발한 적들의 술수에 놀아나서도 한 된다.


(88)

애국주의, 즉 국민적 충심이 갖는 압도적 힘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오늘의 세계를 제대로 볼 수는 없다. 애국주의는 상황에 따라 무력해질 수도 있고, 문명의 어느 단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힘으로서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기독교와 국제 사회주의는 애국주의에 비하면 지푸라기처럼 연약하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들의 나라에서 권좌에 오른 가장 큰 비결은, 그들은 이 사실을 파악했고 그들의 적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데 있다.


(107)

영국은, 자주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구절처럼 보배 같은 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괴벨스 박사의 묘사처럼 지옥인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집안을, 상당히 고루한 빅토리아 시대의 집안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골칫덩이가 많진 않아도 찬장마다 해골이 넘쳐나는 집안 말이다. 이 집안에는 비굴하게 아첨을 떨어야 하는 부자 친척도, 끔찍이 들러붙는 가난뱅이 친척도 있으며, 집안의 수입원에 대해 함구한다는 단단한 공모가 있다. 또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좌절을 겪고, 실권은 대부분 무책임한 삼촌들이나 몸져누운 숙모들 손에 있다. 그래도, 집안은 집안이다. 나름의 언어가 있고, 공통의 기억이 있으며, 적이 다가오면 단결한다. 엉뚱한 식구들이 살림을 주무르는 집안-영국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게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134-135)

군대 생활의 본질적인 공포는(군인이 되어본 사람이라면 군대 생활의 본질적 공포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이다) 어떤 성격의 전쟁에서 싸우게 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군기 같은 것은 어떤 군대든 궁극적으로는 마찬가지다. 명령은 복종해야 하고 필요하면 처벌로써 강요되며, 장교와 사병의 관계는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책들에 나오는 전쟁 묘사는 대체로 정확하다. 총탄은 맞으면 아프고, 시체는 썩어 악취를 풍기고, 총격전이 벌어지면 너무 무서워 바지를 적시기도 한다. 어떤 군대가 만들어지게 된 사회적 배경이 그 군대의 훈련과 전술과 전반적인 능력에 영향을 끼치며, 정의 편이라는 의식이 사기를 북돋우는 것도 사실이다.


(137)

오늘날 일반 대중의 견해가 왔다갔다하는 묘한 현상은, 말하자면 수도꼭지 열리고 닫히듯 정서가 돌변하는 것은 신문과 라디오의 최면 탓이다. 한편 지식인들의 경우는 상당 부분 돈과 한낱 신체적 안전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주전(主戰)’ 쪽이 되기도 하고 반전쪽이 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그들의 머릿속에는 전쟁에 대한 실제적인 그림이 없다. 물론 그들은 스페인내전에 대해 열광하면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죽는다는 게 불쾌한 일이란 건 알았다. 하지만 스페인 공화국 장병의 전쟁 체험은 아무튼 품위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웬일진지 이 전쟁의 변소는 악취가 덜 나고, 군기는 덜 짜증스럽다고 본 것이다. 그들이 정말 그렇게 믿었는지는 <뉴 스테이츠먼>을 슬쩍 들여다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과 쏙 빼닮은 허튼소리가 작금의 붉은 군대에 대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문명화되어 명백한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종종 싸워야만 하고, 싸우자면 자신을 더럽혀야 한다. 전쟁은 악이며, 차악(遮惡)인 경우도 흔히 있다. 칼을 드는 자는 칼로 망하며, 칼을 들지 않는 자는 악취 진동하는 병으로 망하는 것이다. 이런 케케묵은 소리를 굳이 쓸 필요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간 임대소득이나 이자로 먹고사는 자본주의가 우릴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148)

기록된 역사 대부분은 어떤 식이든 거짓이라는 말이 유행인 건 나도 안다. 나는 역사가 대체로 부정확하고 편향된 것이라는 말을 기꺼이 믿는 쪽이다. 한데 우리 시대에 와서 특이한 점은, 역사가 진실하게 기록될 수도있다는 개념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글을 무의식적으로 윤색하거나,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진실을 애써 추구했다. 단 어느 쪽이든 사실은 존재하며,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 만한 사실이 늘 상당 부분 있었다.


(194)

진실은 밝혀질 수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신문이 사실을 워낙 거짓으로 알리기 때문에, 거짓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어거나 나름을 견해를 갖추지 못한다 해서 일반 독자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정보가 전반적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에 황당한 믿음을 고수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무엇 하나 입증되지도 반증되지도 않기에, 더없이 엄연한 사실도 뻔뻔히 부인해버리는 게 가능해진다. 더구나 민족주의자는 세력, 승리, 패배, 복수에 대해 끊임없이 골몰하면서도 실제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선 다소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그가 바라는 바는 자기편이 상대편보다 앞서고 있다고 느끼는것이며, 사실이 뒷받침되는지 확인하기보다는 상대편을 묵살해버림으로써 더 쉽게 그럴 수 있다. 모든 민족주의 논쟁은 토론반 학생들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어떤 논쟁 참가자든 자신이 이겼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에 수준을 넘지 못한다. 어떤 논쟁 참가자든 자신이 이겼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에 결판이 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어떤 민족주의자는 정신분열증 환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실제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세력과 정복을 꿈꾸며 제법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210)

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무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이제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특히 화약의 발명과 부르주아에 의한 봉건제 전복의 연관성은 누차 지적된 바 있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일반적인 사실로 판명될 것이라 생각한다. , 가장 강력한 무기가 싸고 단순한 시대에는 서민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컨대 탱크나 전함이나 폭격기는 본질적으로 압제적인 무기인 반면에, 소총이나 머스킷총이나 긴 활이나 수류탄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무기인 셈이다. 복잡한 무기는 강자를 더 강하게 만들고, 단순한 무기는(보복이 따르지 않는 한) 약자에게 갈고리발톱이 된다.


(218-219)

확실히 과학교육은 합리적이고 회의적이며 실험적인 사고의 습성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방식’, 즉 부닥치는 어떤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을 습득하는 것이어야지, 사실을 잔뜩 축적하는 것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을 과학교육 옹호론자에게 하면 대게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하면, 언제나 과학교육이란 정밀과학에, 달리 말해 더 많은 사실에 주목하는 일이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과학은 한 덩어리의 지식에 불과한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생각은 현실에서 강한 반발에 부닥친다. 그렇게 된 데에는 순전히 직업적인 시기심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이 단순히 하나의 방식이나 태도라면, 그래서 사고방식이 충분히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의미에서 과학자라 할 수 있다면, 지금 화학자나 물리학자 등등이 누리고 있는 엄청난 위세는 어찌 되며 아무튼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현명하다는 주장은 또 어찌 되겠는가?


(240)

하지만 자연과학이나 음식이나 미술이나 건축이 어떻게 되든 간에 사상의 자유가 말살된다면 문학의 운명은 (내가 지금까지 밝히려고 한 바와 같이) 암울할 게 확실하다.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전체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작가, 박해와 현실 조작에 대해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작가, 그럼으로써 작가로서의 자신을 죽이는 작가도 같은 운명인 것이다. 그 길로 접어들면 헤어날 방법이 없다. ‘개인주의상아탑을 비난하는 어떤 장광설도, ‘참된 개성은 공동체와 합일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식의 경건하고 상투적인 어떤 주장도, 매수된 정신은 망가진 정신이라는 사실을 넘어설 수 없다. 어느 순간에 자발성을 갖게 되지 않는 한, 문학 창작은 불가능하며 언어 자체가 굳어져버린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인간의 정신이 지금의 것과 완전히 다른 무엇이 된다면, 우리는 문학 창작과 지적 정직성을 분리하는 법을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가 아는 것은, 상상력이란 야생동물과 비슷한 것이어서 가둬두면 번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런 사실을 부인하는(지금 소련에 대한 거의 모든 찬사에는 그런 부인이 내제되어 있다) 작가나 언론인은 실은 자신의 파멸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246-248)

이런 질문을 하루 수밖에 없는 건,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때문이다.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등 아래서 녹음된 음악만 듣고 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특히 영화, 라디오, 비행기)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77)

제비보다 먼저, 수선화보다 먼저, 아네모네보다 조금 늦게, 두꺼비는 봄이 다시 찾아온 것에 대해 나름의 경의를 표한다. 지난 가을부터 들어가 누워 있던 땅속 구멍에서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적당한 물웅덩이 쪽으로 최대한 빨리 기어가는 것이다. 무언가가(땅속의 어떤 떨림인지 아니면 그냥 온도가 몇 도 올라서인지 잘은 모르지만) 두꺼비에게 깨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몇 마리는 내내 잠만 자다 한 해를 아예 빼먹기도 하는 것 같다. 한여름에 땅을 파다가 멀쩡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두꺼비를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으니 말이다.


(300)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으로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 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이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다.


(329)

작가의 관점은 정신건강 차원의 온전함, 그리고 가지 생각을 밀어붙이는 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이상으로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재능일 것이며, 그것은 확신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위프트는 정상적인 의미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비전은 확실히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숨겨진 진실 하나를 골라내어 확대하고 비틀어서 볼 줄 아는 능력이기도 했다. <걸리버 어행기>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세계관이 온전함이라는 기준을 겨우 만족시키는 수준일지라도, 작가의 확신이 뒷받침해준다면 위대한 예술 작품을 충분히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419)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미덕은 이기는 데 있었다. , 미덕이란 남들보다 더 크고, 강하고, 잘생기고, 부유하고, 인기 좋고, 세련되고, 거리낌 없는 데 있었다. 달리 말해 남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고, 바보 같아 보이게 하며, 모든 면에서 남보다 앞서는 데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본래 위아래가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자체가 옳은 일이었다. 강자가 있어 그들은 이겨 마땅하고 언제나 이겼으며, 약자가 있어 그들은 져 마땅하고 언제나, 끝없이 지기만 했다.


(431)

아이는 일종의 이질적인 수중(水中) 세계에 살며,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하자면 기억이나 점술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단서는 우리도 한때 어린아이였다는 점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어린 시절의 분위기를 거의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자기 어린 시절의 분위기를 거의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 같다. 이를테면 신학기가 되어 학교로 아이를 돌려보낼 때 무늬가 영 이상한 옷을 입혀 보내면서 그게 문제가 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아이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안겨주는 부모를 생각해보라! 그런 유의 문제에 대해 아이는 때때로 항의 표시를 하겠지만, 많은 경우 아이의 태도는 그저 감정을 숨기는 데 그치고 만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어른에게 노출하지 않는 것은 일고여덟 살 때부터 시작되는 본능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어른이 아이한테 느끼는 애정이나 아이를 보호하고 아끼고자 하는 욕구도 몰이해의 원인이 된다. 어른이 다른 성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이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보답으로 그 어른에게 사랑을 느낀다고 생각한다면 경솔한 판단이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건대, 유아기가 끝난 뒤로는 어머니 말고는 어떤 어른에게도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어머니에 대해서도 신뢰가 없었는데, 쑥스러워서 진짜 감정은 대부분 숨겼다는 의미에서 그랬다. 내 경우에 자발적이고 전폭적인 사랑의 감정은 어린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무엇이었다.


(434)

아이들의 약점은 백지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의문시하지도 않는다. 아이는 그렇게 잘 믿기 때문에 어른한테 영향받기 쉬우며, 그만큼 열등감에 물들거나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법을 어기는 데 대한 공포감에 휘둘리기 쉽다.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가장 계몽된 학교에서도(보다 미묘한 방식일진 몰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하는 기숙학교가 일반 통학학교보다 더 나쁘다는 것만은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집이 가까이 있으면 아이가 인식을 얻기가 더 쉬운 것이다. 내가 보기에 영국 상류층과 중산층 특유의 결함은 여덟아홉, 심지어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들을 최근까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로 보내온 일반적인 관행에서 어느 정도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446)

정치에선 둘 중 어느 쪽이 덜 악한지를 판단하는 것 이상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악마나 미치광이처럼 행동해야만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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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8-28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책입니다.
뽑아주신 인용문장을 보니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bookholic 2022-08-28 23:21   좋아요 1 | URL
저는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좋은 글들이 많았어요...
소설을 통해 조지 오웰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의 에세이도 깊이 있고, 좋았습니다~~
즐거운 한 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