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철학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소통 능력을 키워 주기도 합니다. 철학이 정립된 사람은 말과 글에 모호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쉽고 명확하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에서도 그 뜻과 의도를 재빨리 파악합니다. 그런 면에서 철학이야말로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실용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20)
그러나 이성적 존재인 사람은 모든 가격을 뛰어넘기 때문에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닌다. 따라서 인간은 그 무엇과도 교환할 수 없으며, 그 존재만으로 존엄성을
지닌다는 게 칸트의 생각이다. 자신의 자녀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남의 자식과 교환하고 싶어 하는 부모는
없지 않은가. 다만 칸트는 존엄성을 지닌 인간에 대해 한가지 조건을 달았다. 도덕적 자율성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만이 존엄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맹목적인 욕망에 따르지 않고 자율적 판단에 따라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성을 지녀야만 존엄성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24-25)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칸트가 말한 자율성을 추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즉 본인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인간을 수단으로만 삼아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의 존엄성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자본주의도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기술 발달과 자본 축적을 도모해야 한다. 인간을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사례가 여전히 남아 있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철학의 쓸모도 여전할 것이다.
(39)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화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술에 취하고 욕정으로 가득 차고 고마운 줄 모르고
욕심 많은 야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나는 매일 만나야 한다.”
세네카가 약 2,000년 전에 지목한 사람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이기도 한다. 지하철을 타면 가끔 술 취한 사람들이 악취를 풍기고 주정을
한다. 일터에는 배려심 없는 언행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 친절과 배려를 베풀어도 고마움을 모르고, 오히려 제 욕심을 채우느라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학교에 가면 팀 활동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채 얌체처럼 무임승차하는
친구가 있다. 앞에서는 친한 척하면서 뒤에서는 흉을 보는 친구도 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세네카가 살았던 시대에 비교하면 안락하고 풍요롭지만, 복잡한 사회 속에서 날마다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살아야 한다. 스트레스와
화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43)
세네카는 인간이 화를 내는 주된 이유는 ‘나는 잘못한
게 없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화를 내는 이유가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오만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를 내는 이유가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오만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를 내서 상대를 제압한다고 해도 결국 화를 낸 사람은 지는 것이다. 세네카는 화가 났을 때 거울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거울
속 화난 모습과 평소의 모습을 비교해 본다면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끔찍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65)
쇼펜하우어는 독서를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을 다른
사람이 대신 깨우쳐 주는 것”으로 단언했다. 독서에 대한
지독한 악평이다. 그러니까 독서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과정을 무턱대고 뒤따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미리 그려 놓은 점선을 따라 펜으로 덧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을 깊이 하다가 책을 읽으면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쇼펜하우어는
단언한다. 결국 독서를 하는 동안의 머릿속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노니는 놀이터라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독서에 대해 이보다 더 가혹하고 비관적인 생각이 또 있을까?
(109)
노자의 <도덕경>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는 무위자연설(無爲自然設)에 관한 것이다. 세상만사가 모두 허무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방관하라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이란 모든 억압과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자연의 흐름과 함께하면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110)
<도덕경>
40장에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는 말이
나온다. 반대로 가는 것이 도(道)의 운동성이라는 뜻이다. 노자는 모든 사람이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기 마련이며, 남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은 결국 위험할 길일 수 있다고 설파한다. 많은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역발상이야말로 노자의 전체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남들이 모두 가려고 하는 길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그 길은 외로운 길이며, 특히
나이가 어린 사람은 더더욱 선택하기가 어렵다.
(125-12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유로운 풍요 속에서 느끼는 행복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행복이라 여기는 물질적인 풍요,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 온갖 종류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일 뿐이지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理想)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현실적이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는 육체적 쾌락의 욕구, 명예욕, 물질욕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다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그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97)
최첨단 과학의 시대에 종교는 왜 이토록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까? 그것은 여전히 과학 지식으로 풀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한 시대라고 해서,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죽음의
공포가 완전히 우리 곁을 떠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도로 과학이 발달한 초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더더욱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그 상징적인 예로,
첨단과학이 집결해 있는 자동차를 세워 두고 안전 운전을 기원하며 고사를 지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