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임진왜란은 1592 4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700여 척의 배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면서 시작되어 1598 11월 종결되기까지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다. 그 영향도 지대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전란이 끝난 뒤 명과 일본 모두 왕조나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그전부터 침체했던 명은 참전 뒤 더욱 허약해졌고 결국 멸망했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수립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무너질 때까지 250여 년간 존속하면서 일본의 중세를 이끌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전쟁터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쓰러지지 않았다. 전쟁 이후 조선은 체제를 수습했고, 그동안 지내온 것보다 더 오랜 기간을 존속했다.

 

(20)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낙관에는 일본 군사력에 대한 낮은 평가도에 꽤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 같아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얼마 전에 선조가 신하들을 불러서 의논을 했대요. ‘일본이 진짜 침략할 것 같나?’ 그랬더니 한 신하가 웃으면서, ‘일본은 배 한 척에 100명밖에 못 싣고, 배는 많아봐야 100척 밖에 동원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대요. 그런데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에 동원하도록 지시한 배는 2000척 가까이 됐던 거죠. 조선은 이렇게 일본의 군사력을 한참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즈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서를 보내왔어요. 그런데 조선 입장에서는 그 국서의 내용이 굉장히 오만방자하게 느껴졌던 거죠. 여기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가 태몽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한 부분도 있고, 또 자기가 전쟁을 하면 지는 일이 없다면서 자신감을 넘어 오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거든요.

 

(26)

일본인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격을 이야기할 때 항상 하는 얘기가 있죠. 어떤 사람이 두견새를 선물로 줬는데 이 새가 울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 새를 어떻게 할까에 대해 일본에서 유명한 장군 세 명,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답이 다 달라요. 1번 울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2번 어떻게든 울게 만든다. 3번 울 때까지 기다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디에 해당할까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면 2번 아닐까요? 어떻게든 울게 만든다.

맞습니다. 정답은 2번이에요. 어떻게든 울게 만든다는 말이 그의 성향을 굉장히 잘 보여 주죠. 새 앞에서 재롱을 부리든 새를 놀라게 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새를 울게 만드는 거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목표가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이루고 마는 집념의 소유자였다고 해요.

재미있는 문제네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인물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러면 나머지 두 명은 어떻게 대답했어요?

오다 노부나가는 1울지 않으면 죽여버린다에 해당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49)

송상현이 동래부사로 부임한 게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입니다. 동래부사는 지금으로 치면 부산시장 정도 되는 자리죠. 송상현은 부임과 동시에 성 주변에 나무를 심습니다. 나무가 성책(城柵) 역할을 하도록 한 거죠. 송상현은 또 군사 훈련을 철저하게 시켰다고 합니다. 이때가 꽤 평화로운 시대였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조치죠. 그러므로 송상현은 일본군의 침략을 예견했거나 적어도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유능한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91)

어떤 면에서 이순신 장군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쟁을 준비해요. 조금이라도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있으면 곤장을 때리기도 했고요. 당시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은 불만을 가졌을지도 몰라요.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한테 맨날 전쟁 준비시키고 함부로 곤장 때리고 그러냐?’ 이런 불만이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그런 걸 보면 이순신 장군은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아요.

 

(92)

두 사람은 사실 처음부터 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허균의 책을 보면 두 사람이 같은 동네 출신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원균은 부친이 수군절도사까지 지낸 무반 가문 자손이고, 이순신은 할아버지 때까지 굉장히 잘 나가던 문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두 사람의 무과 합격 시기도 10년 이상 차이가 납니다. 이순신이 한참 늦게 합격했죠. 그런데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이 종6품인 정읍 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까지 일곱 품계가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하고, 계속 승승장구하잖아요. 본래 이순신보다 훨씬 높은 직급에 있었던 원균으로서는 그런 이순신이 탐탁지 않았겠죠.

 

(106)

의병은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죠. 우선 경상도 3대 의병장으로 곽재우, 정인홍, 김면이 있습니다. 호남 의병장으로는 고경명, 김천일 등이 있고, 지금의 충청도 지역인 호서 의병장에는 조헌, 영규가 있죠. 금강산에서 활약한 사명대사 유정과 함경도의 정문부 장군도 빼놓을 수 없고요. 이렇듯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했어요. 그러므로 의병의 봉기는 수군의 승리와 더불어 전쟁의 흐름을 바꾼 핵심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4)

그 재조지은이라는 말을 들으면 너무 화가 나요. 대체 누가 나라를 구했습니까? 나라를 구한 건 조선의 백성들이에요. 그러면 백성을 섬겨야지 이게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런 걸 보면 선조는 그토록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도 배운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전쟁 후에도 제대로 된 국가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어요.

 

(166)

류성룡과 이순신은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가요?

어린 시절부터 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흔히 두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류성룡이 세 살 많아요. 사실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의 형님과 친구였어요. 이순신 장군은 사형제 중 셋째인데, 제일 윗형님 이름이 복희씨의 신하, 희신입니다. 그다음에 중국 제일의 성인으로 치는 분이 요 임금, 순 임금이죠. 그래서 바로 윗형님 이름이 요신이에요. 이 형님하고 류성룡이 친구 관계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순 임금의 신하라는 뜻으로 순신이죠. 그러나 이순신 장군 동생 이름은 뭘까요?

이순신 장군의 동생도 있어요?

, 요순 다음으로 하나라의 우임금이 유명하죠. 치수(治水)를 잘했던 분이요. 이 우임금의 신하라는 뜻에서 동생 이름은 우신이에요.

 

(168-169)

손바닥도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잖아요. 이순신이 그토록 큰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는 경상도 지역의 의병이죠. 곽재우를 비롯해서 김면, 정인홍 등이 낙동강 지역을 굳게 지킴으로써 왜적들이 진주를 거쳐 전라도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했고, 덕분에 후방 기지를 든든하게 확보할 수 있었죠. 두 번째는 류성룡이 조정에서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해 줬기 때문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9-01 17: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에 언급된 인물들중에 저의 집안 선조가 ㅋ ㅋㅋ 나라를 지켰냈다는 뿌듯함 북홀릭님 페어퍼에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되네요 ^^

bookholic 2021-09-01 19:52   좋아요 3 | URL
ㅎㅎ 누굴까요? 궁금~~^^
scott 조상님~~ 나라를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